부승민은 온하랑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 보았다.지금 부승민의 모습은 어딘가 불쌍해 보였다. 마치 억울하게 주인에게 버림받은 대형견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부승민의 그런 모습에 홀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온하랑의 심장이 어딘가 모르게 간질간질해왔다.분명히,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낸 사람은 부승민인데.그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온하랑은 잘 알고 있었다.부승민이 사랑하는 사람은 추서윤이다.온하랑도 고작 아이 때문에 부승민을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다.온하랑은 두 눈을 떨구고 부승민의 질문에 답했다.“네가 BX 그룹 대표이사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지금 나한테 남은 거라곤 너랑 아이뿐이야.”부승민이 온하랑을 꼭 껴안으며 자신의 머리를 그녀의 아이가 있는 배 위로 갖다 댔다. 여태껏 부승민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이었다.이런 장면은 온하랑이 예전부터 수천수만 번이고 꿈에 그려왔던 순간이었다. 과거의 온하랑은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무슨 대가든 지불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현실이 된 지금, 온하랑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부승민은 자신을 좋아해 줄 리가 없었다. 그걸 잘 알기에 다시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나중에 애기 나오면 자주 보러 와도 돼.”순간적으로 멈칫한 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 애 낳으면, 바로 나랑 이혼하겠다는 소리야?”온하랑의 답변이 들려오기도 전에 부승민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내 아이가 이주혁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봐야 한다는 거야?”“이게 주혁이랑은 또 무슨 상관인데? 아이는 나 혼자 돌볼 거야.”“왜? 이 아이도 너처럼 편모가정에서 자라게 만들려고? 태어날 때부터 아빠도 없는 자식으로 키울 생각이야?”머리가 지끈해진 온하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새 아빠 하나 찾아주게? 세상에 어느 누가 친자식도 아닌 애를 진짜 사랑으로 돌봐줄 수 있을
”넌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온하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BX 그룹 새 대표는 누군데? 네 형?”“응,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역시 부민재였다니.“오미연한테서 전화 왔었어.”온하랑의 말에 부승민의 표정이 흔들렸다.“너한테 뭐 심한 말 같은 건 안 했지?”온하랑은 굳이 부승민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오늘 일에 대해 진작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얘기하더라고.”부승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회사에서 나올 때, 형이랑 오미연이 같이 있는 걸 봤거든.”“... 이미 다 짜여있던 판 같더라. 이 판에서 형이 어떤 역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온하랑 역시 부민재가 오미연 전무와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단순히 연락만 하고 지낸 게 아니라 부승민까지 대표 자리에서 밀어내고 BX 그룹의 새로운 주인으로 대표의 자리에 오를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한때 세 사람이 한집에서 같이 살던 때, 온하랑이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은 사뭇 달랐다. 부승민은 냉정하고도 매정할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고 부민재는 그와 반대로 다정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온하랑도 잘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온하랑 역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부승민에게는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부민재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자꾸 성가시게 따라붙는 남자를 수십 번 거절해도 계속 달라붙을 때, 그런 온하랑을 도와주던 건 항상 부민재였다. 사실 부민재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온하랑을 성가시게 하는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큰아들이 아닌 둘째 부승민이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것도 모두 할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온하랑 역시 할아버지의 결정이 틀렸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하던 시절,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버려 그때까지만 해도 부승민은 성격만 빼면 부민재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학업이든 일 처리 능력이든.하지만 방관자가 된 지금
“지금 바로 갈게요!”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낀 부승민이 바로 대답했다.“우선 하랑이한테는 알리지 마.”“알겠어요, 할머니.”집을 나서기 전, 부승민은 안방으로 들러 선의의 거짓말을 남겼다.“하랑아, 인수인계 때문에 회사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금방 다녀올게.”“가봐, 집에는 아주머니 계시니까.”온하랑도 별생각 없이 부승민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급하게 병원에 도착한 부승민은 아직 응급실의 응급상황을 알리는 빨간 신호등이 꺼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할머니와 가정부가 밖에 있는 간이의자에서 할아버지가 무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할머니!”부승민은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에게 달려가 다급하고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에요?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왜...”어두운 낯빛의 할머니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옆에 함께 있던 가정부가 부승민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오전에 추서윤 씨가 왔다 가셨는데, 대체 할아버님께 무슨 말을 한 건지... 그리고 회사 일까지 전해 들으시더니, 갑자기 저렇게…”부승민은 착잡한 마음에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부승민의 눈빛에는 순간적으로 차가운 기운이 감돌더니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겨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오늘 오전에, 추서윤이 할아버님 집을 찾아왔어. 당장 찾아내!”“네.”통화를 끝마친 부승민은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할머니의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게 물들어있었다.“할머니, 차라리 제 탓을 하세요.”만약 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리고 귀국하지만 않았어도 온하랑이 이혼 서류를 내미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할아버지가 저런 곳에 누워 있을 일도 없었다.만약 부승민이 진작에 추서윤을 외국으로 떠나보내기만 했어도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이 모든
전화를 끊고 돌아선 부민재는 풀이 죽어 혼자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있는 부승민을 보았다. 마치 하나의 동상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멍하니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부민재는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승민아.”정신을 차린 부승민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민재를 향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형.”그저 갑자기 힘이 빠져버렸을 뿐이다.부승민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온하랑이 온강호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았다.그는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쭉 할아버지의 곁에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수 그를 키웠다. 한 대를 건너뛰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분들은 부모님과 다름없었다.“하랑이한테 알리지 않을 거야?”“일단 비밀로 해요. 지금 가뜩이나 태동도 불안정한데, 견뎌내지 못할까 봐 겁나요.”부승민은 아득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도 이렇게 큰일을 얼마 감추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그래, 그게 좋겠다.”“형, 기자들이 왔어요.”부현승이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경비더러 일단 막고 있으라고 해. 내가 경호원 부를게.”부민재가 말했다.BX 그룹 회장이 오늘 급히 입원하며 그룹 내에 불러 올 인사 변동에 대한 소식은 일부 언론 매체에 놓고 말하면 핫이슈 그 자체였다.요즘에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언론 매체가 적지 않았다. 전에 한 여배우가 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만 해도 한 무리의 기자들이 그녀의 병실 앞에 진을 치고 있으며 사망선고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뉴스를 내보냈다.한편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온 탓에 경호원들도 섣불리 막을 수 없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한 기자가 응급실 앞으로 뛰쳐나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부승민 앞에 불쑥 카메라를 들이밀었다.“안녕하세요, 부승민 씨. 지금 어떤...”우당탕!발아래 떨어진 망가져 버린 카메라와 자리에서 일어선 부승민
온하랑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하더니, 곧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아마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일 거야.하지만 그때 여러 대중 매체에서 연이어 보도하는 아무 뉴스에 들어가 보아도 모두 똑같은 내용이었다.뉴스에 나온 부승민이 입고 있는 옷은 오늘 나갈 때 입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그래서 그는 정말 병원으로 갔단 말인가.아니, 할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셨고?그렇다. 그녀를 아껴주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불현듯 들이닥친 이 슬픈 소식에 온하랑은 큰 충격에 휩싸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코끝이 시큰거리며 금세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며칠 전에 뵀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의 신체에 분명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그때 할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무사히 기다렸다가 증손자를 안아줄 거라고 다짐도 하셨다.그런데 왜 갑자기...‘아니야, 절대 아닐 거야.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이렇게 가실리가 없어!’코를 훌쩍이던 온하랑은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외쳤다.“아주머니, 기사 불러주세요. 저 병원에 갈래요!”그녀는 반드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모시러 가야만 했다.이미 뉴스를 본 아주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온하랑을 만류했다.“대표님이 사모님더러 어디에도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시라고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무엇보다 사모님 몸을 잘 챙기셔야죠...”“아뇨, 전 꼭 가야 해요!”온하랑은 아주머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바로 부승민에게 전화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부승민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온하랑은 흐느끼며 말했다.“기사한테 날 데리러 오라고 말해!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 거야!”“하랑아, 너...”“말리지 마! 기사가 안 오면 나 혼자 걸어서라도 갈 거니까!”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녀를 제일 아껴 주신 분들이자 그녀의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손녀로서, 손자며느리로서 어떻게 가지 않을 수 있단
이때 부민재의 지시로 할아버지의 시신은 염습을 위해 장례식장으로 옮겨졌고, 그곳에 빈소를 마련하고 있었다.장례식장에 거의 도착할 때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으며 당부했다.“도착하면 넌 그냥 할아버지의 곁만 지켜 드리고 있어. 다른 건 하지 말고. 알았지?”“알았어.”소청하는 이미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 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승민과 온하랑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검정 상복 두 벌을 건넸다.이윽고 두 사람이 상복을 갈아 입자, 소청하가 자발적으로 휠체어를 밀고 와서 말했다.“도련님은 가서 일 보세요. 동서는 제가 돌보면 돼요.”“그럼 부탁드려요, 형수님.”부승민은 허리를 숙이고 온하랑을 바라보며 거듭 당부했다.“몸이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꼭 나한테 알려줘, 알았지? 그럼 난 먼저 가서 일손을 도울게.”“그래.”부승민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소청하는 온하랑을 밀고 휴게실로 가서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보며 위로했다.“동서,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순간을 겪게 돼 있어요. 할아버님께서도 동서의 이런 모습은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네, 형님. 저도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요...”온하랑은 말하며 또다시 목이 메어와 눈물을 흘렸다.“휴, 도련님이 사실 동서한테 잠시 비밀로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파렴치한 언론사들 때문에... 도련님이 화나서 카메라도 한 대 부쉈지, 뭐예요.”정말 부승민의 성격다웠다.할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온하랑 뿐만이 아니다. 부승민 또한 온하랑 못지않게 슬퍼할 것이다. 그 언론들이 이때 찾아온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비밀로 해요. 차라리 사실대로 말해주지...” “도련님도 동서를 생각해서 그랬을 거예요. 지금 할아버님 시신을 수습 중이라 할머님이랑 둘째 작은어머님이 휴게실에 계세요. 저희도 그쪽으로 가서 기다려요.” “네.”김정숙은 넋을 잃고 혼자 덩그러니 휴게실에 앉아
온하랑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전 한 번도 할아버지를 탓한 적이 없어요...”부승호도 자신만의 고충이 있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부승민이 금방 그룹 대표 자리에 올랐을 때 그가 너무 젊은 탓에 이사진의 대부분이 그를 따르지 않아 갖은 마찰을 겪었었다.일부 이사들은 걸핏하면 부승호를 찾아가 고자질하기 일쑤였다.부승호의 첫 개입 이후 부승민은 그룹 내 업무 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여러 번 타격을 입었다.이사진은 고자질이 효과가 있는 것을 보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승호를 찾아갔다.그 뒤로 부승호는 다시는 개입하지 않았다.부승호도 그제야 깨달았다. 부승민은 이미 어린 손자가 아닌 어엿한 그룹 대표였고, 함부로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부승민이 회사에서 우뚝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한 위엄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승호도 부승민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흔들림 없이 지지해 줘야 한다. 이사들의 말만 듣고 그를 반대한다면 이사진, 경영진은 물론 직원들마저도 부승민 대표를 우습게 볼 것이다.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부승호가 직접 나서서 온하랑의 신분을 밝힌다면 그저 부승민을 구설수에 오르게 만들어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평판만 떨어뜨릴 뿐이었다. 이 때문에 부승호는 스타엔터를 통해 반박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다.부승민 스스로 깨닫고 직접 밝히는 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부승민은 부승호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어쩌면 부승민과 온하랑 사이에서 부승호는 부승민을 조금 더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온하랑은 단 한번도 따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부승호는 그녀의 친할아버지가 아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해줬다는 것을. 그저 그것으로 충분했다. 염습을 끝내고 부승호의 시신은 빈소로 옮겨졌다.온하랑은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잠든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그 생각을 하니 온하랑은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부승호의 장례식은 품위 있게 치러졌다
두어 번 쳐다보던 온하랑은 마지못해 입을 벌리고 삼겹살을 먹었다. 고소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요리사의 솜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맛이었다. 온하랑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픔에 잠겨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기를 위해 한입 두입 먹다 보니 아주머니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절반이나 먹었다.분명 조금 전 배불리 먹었는데도 부승민이 짚어주는 음식을 저도 모르게 계속 받아먹고 있었다. 임신 초기 입덧할 때가 지나니 요즘 들어 식욕이 부쩍 늘어났다.부승민은 온하랑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두 점 더 집어 주었다.세 점을 먹은 온하랑은 부승민이 더 집어주려고 하자 다급히 말했다.“나 진짜 배불러. 오빠가 먹어.”“진짜 안 먹을래?”“응, 안 먹어.”젓가락을 내려놓은 부승민은 휠체어에서 온하랑을 안아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그럼 좀 자.”온하랑은 할 수 없이 몸을 가누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이틀 동안 눈도 못 붙였잖아. 오빠도 좀 자.”자신을 걱정해 주는 온하랑의 말에, 부승민은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도시락을 다 먹은 부승민은 쓰레기를 버리고 온하랑의 옆에 가서 누웠다.온하랑은 살며시 한쪽 눈을 뜨고 부승민을 흘긋 쳐다봤다. 그는 소파 가장자리에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은 자세로 간신히 누워 있었다.“잘 곳이 많고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서 자는 거야?”그러자 부승민은 손을 뻗어 온하랑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그만 말하고 빨리 자.”쪽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부승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삼일장 제일 마지막 날이 되어 할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하고 발인식이 치러졌다.검은색 승용차 여러 대가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도심을 가로질러 교외에 있는 부씨 가문의 선산으로 향했다.온하랑은 따라가지 않았다. 묘원은 산 위에 있어 그녀는 산을 오를 수 없었고, 산길이라 휠체어도 밀고 가기 힘들었다.차에 오르기 전, 부승민은 운전기사더러 온하랑을 집에 데려다주라고 말했다.온하랑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