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멀지 않은 카페에 들어간 두 사람은 각자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무슨 용건이시죠?”연민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이 안수빈 씨께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어서요. 야망이 있는 건 좋지만 그 야망을 받쳐 줄 실력도 있어야죠. 안 그러면 그냥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지 않겠어요?”안수빈의 안색이 순간 굳었다.“그게 무슨, 부 대표님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죠?”“대표님과 전무님이 극장에 함께 있는 모습이 찍힌 것, 안수빈 씨가 시킨 일이죠? 덮어놓고 시치미 떼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 대표님께서 이미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안수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리고 안수빈 씨, 최기준과 장기범과도 연락하셨던데요?”안수빈이 숨을 들이켜며 겨우 말했다.“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안수빈은 부승민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여기까지 조사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연민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느긋하게 말했다.“최기준, 장기범과 다른 4명의 투자자는 이미 경찰에 붙잡혔어요.”안수빈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그래서요?”“확실히 일을 꽤 은밀하게 처리하셨더라고요. 그래도 남들이 절대 모르게 하고 싶었으면 직접 하셨어야죠. 부 대표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짜 밥 먹는 줄 알았어요?”연민우는 부승민 정도의 위치에까지 올라가면 불법적인 수단도 어느 정도는 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부승민의 곁에는 이미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부승민과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일을 처리했고 들어보니 전과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안수빈은 얼굴이 완전히 굳어서 힘없이 의자에 앉아있었다.“다 추서윤이 시켜서 한 일이에요!”자칫하면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와 추서윤 사이에 죄를 대신 뒤집어 써 줄 정도의 의리는 없었다.그리고 안수빈은 그제야 깨달았다. 예전에 부승민이 추서윤에게 잘해줬던 건 추서윤이 자작극을 벌이고 그를 협박해서가 아니라 그저 부승민이 그녀를 편애
하지만 위로 올라가려면 BX 그룹의 사모님이 아니라 대표님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안수빈은 알고 있었다.추서윤이 BX 그룹의 사모님이 된다고 해도 부승민이 그녀를 못마땅해하면 그 사모님 자리는 앉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이번 일을 봐도, 부승민이 수운성의 여주인공 배역을 교체하고 그녀의 광고모델 자격도 박탈하자 아무리 추서윤이 애를 써도 그녀가 다른 회사와 맺었던 모든 계약이 줄줄이 취소되었다.안수빈의 말을 들은 추서윤이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수빈아, 너도 나 떠나려고? 그러지 마, 나 아직 포기 안 했어!”추서윤이 급한 마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수빈을 잡으려 했으나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다시 침대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부승민은 너한테 마음이 전혀 없어, 그러니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을 거야. 사실 다시 외국에 나가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수 있어. 거기 가서 재기할 기회를 만들어 봐. 하지만 난 더 이상 네 곁에 있어 줄 수 없을 것 같아. 몸조리 잘하고.”말을 마친 안수빈이 병실을 떠났다.앞으로 남은 날을 감방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면 그녀는 이제부터 조용히 숨죽여 살아야 할 것이다.“수빈아! 수빈아...”추서윤이 안수빈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나 안수빈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떠났다.떠나는 안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추서윤의 두 눈에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이제 안수빈도 그녀의 곁을 떠났다.정말 외국에 갈 수밖에 없는 걸까?...추서윤의 엄마, 심은혜가 전복죽을 추서윤의 병상 위 테이블에 놓아주며 말했다.“이거 봐, 네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부승민은 코빼기 하나 안 비치잖아.”추서윤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병상에 기대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심은혜는 그런 추서윤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잔소리를 이어나갔다.“너랑 부승민이 어디 보통 사이니? 어떻게 그 온하랑이라는 년 하나를 못 이겨. 나는 네가 왜 그때 굳이 외국에 나갔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그때 국내에 계속 있었으면 지금 B
”그래.”심은혜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비서는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근데 무슨 서류야?”추상훈이 평소에 하는 짓을 보면 회사 일에 손도 안 대는 것 같던데 집에까지 가져와서 봐야 할 서류가 있다고?추상훈의 비서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서류를 몸 뒤로 약간 숨기며 대답했다.“별거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서류예요.”심은혜가 비서를 흘깃 보더니 별말 않고 손을 내저었다.비서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추상훈의 서재에 서류를 두고 집 밖으로 나갔다.심은혜는 그런 비서의 모습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수상쩍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분무기를 들고 서재에 들어와 식물에 물을 주는 척하며 추상훈의 책상 위를 슬쩍 훑어보았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방금 비서가 들고 왔던 서류봉투는 보이지 않았고 그게 심은혜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심은혜는 분무기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추상훈의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그러다가 3번째 서랍의 맨 아래에서 방금 비서가 들고 왔던 서류봉투를 발견할 수 있었다.내용물을 확인한 심은혜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고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서류봉투 안에는 친자확인서가 한 부 들어있었는데 검사 결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샘플 A와 샘플 B는 99% 이상의 확률로 생물학적 부녀 관계임이 확인되었습니다.]친자확인서에는 샘플 A와 샘플 B의 신분이 적혀있지 않았지만 이 서류가 추상훈의 책상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샘플 A가 추상훈임은 자명한 일이었다.추상훈은 밖에 사생아를 숨겨두고 있던 것이었다!심은혜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이제껏 추상훈이 밖에서 여자와 붙어먹는 것을 용인해 주었다. 하지만 밖에서 아이를 만들어 와 그녀와 추서윤의 재산을 뺏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어림도 없지!심은혜는 핸드폰을 꺼낸 뒤 추상훈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인지 따지려 하다가 멈칫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검사지에 있는 검사기관과 의뢰날짜를 따로 적어놓고 서류를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는
”잠깐만요, 저는 그저 제가 본 게 있어서 알려주는 것뿐이에요.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제가 알려준 거라고 오 비서님한테 말하지 말아주세요.”그러자 여자가 대답했다.“알고 있어요. 저한테 말해줘서 고마워요. 추서윤 씨 이름은 절대 입에도 담지 않을게요.”전화를 끊은 후 여자는 바로 오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지호, 똑바로 말해. 너 여자 생겼어?”“자기야, 나 억울해. 내가 무슨 여자가 생겨.”“억울해? 내 친구가 17일에 네가 딴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봤대.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며? 혹시 오해했을까 봐 따라가서 봤는데 네가 산부인과에 가는 걸 봤대. 너희 아기도 생겼니? 똑바로 말해!”“무슨 여자? 아기는 또 무슨 아기? 그런 일 없어!”“확실해? 내 친구는 나한테 거짓말 할 이유가 없어. 지금 당장 화의병원에 가서 조사해보면...”“잠깐, 자기야. 나 생각났어.”화의병원이라는 말을 들은 오지호는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절대 그녀가 병원에 가서 조사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그럼 빨리 말 안 해?”“17일 그날... 사실은 다 오해야! 그날 강인로를 지나면서 잠시 한눈판 사이 앞에 차를 박을 뻔해서 그걸 피하다가 한 여자를 살짝 쳤어. 그래서 그 여자를 부축한 거지 절대 끌어안고 그런 게 아니야. 못 믿겠으면 친구한테 물어봐.”“그럼 산부인과에는 왜 갔는데?”“산부인과 간 적 없어! 네 친구가 잘 못 봤겠지. 그냥 그날 뼈를 좀 다친 거 같아서 그거 검사받으러 간 거야.”“진짜야?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혹시 나중에 들키면...”“자기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오해가 풀린 뒤, 추서윤이 직접 전화까지 해가며 자신에게 상황을 알렸다는 것이 기억 난 여자는 이 기회를 통해 추서윤과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으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추서윤 씨,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강인로에서 저희 지호 씨 보신 거 맞죠?”추서윤이 대답했다.“네.”“아, 그러면 오해였던 것 같아요.
”분명 온하랑이 틀림없어. BX 그룹 건물도 강인로에 있잖아!”심은혜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화면 속의 온하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짙은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그러다가 그녀는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큰소리로 욕을 내뱉었다.“임가희! 임가희 그년이 틀림없어! 어쩐지 온하랑을 처음 봤을 때 어딘가 낯이 익다 했어!”결혼 전 추상훈과 임가희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더러운 관계가 결혼 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줄을 몰랐다.게다가 20년이 지난 지금, 온하랑 그년이 딸아이의 남자를 빼앗아 갔다.어쩜, 누가 한 집안 사람 아니랄까 봐 엄마와 딸이 하는 짓이 이리도 똑같은지!누구에게나 벌리고 다니는 꼴이 남자 없으면 못 산다고 동네방네 알리고 다니는 거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추서윤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어쩜 일이 이리 공교롭게 흘러가지? 온하랑이 마침 그녀 아버지의 사생아라고?그녀는 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차량이 지나간 노선의 다른 CCTV영상도 얻었다.화면 속에서 온하랑은 검은색을 차를 타고 BX 그룹과 멀지 않은 곳에서 내렸다. 차는 고장이 난 듯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온하랑은 강인로를 따라 좀 걷다가 BX 그룹의 건물로 들어갔다.화면을 확대해 차량 번호판을 확인한 추서윤은 눈 밑이 어두워지며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침묵하는가 싶더니 별안간 핸드폰을 벽에 내동댕이쳤다.“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산산조각났다.온하랑이 아버지의 사생아라고?!아버지는 언제부터 알고 계신 거지?그리고 왜 하필 지금 친자확인을 하신 거지?부승민이 온하랑과의 사이를 공개해서, 그래서 아버지는 추서윤을 포기하고 온하랑을 딸로 인정하기로 한 건가?지랄, 추상훈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꼴로 비치는지 모르는 걸까? 온하랑이 정말 그를 아버지로 인정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온강호는 평범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운까지 평범한 건 아니었다.그는 죽기 전에 간을 부씨
하지만 추서윤은 지금 병원에 있는 것 아니었나?얼마 후, 승합차가 멈추더니 두 명의 남자가 온하랑을 끌고 나와 쓰레기를 버리듯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손이 묶여있었던 온하랑은 바닥을 짚을 수 없어 얼굴로 땅을 들이받았고 그 덕에 뺨이 화끈거렸다.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힘겹게 머리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하늘이 이미 어둑해진 가운데 달빛만 어슴푸레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공동묘지였다.“윽!”순간 등으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져 왔다.하이힐의 높은 굽이 그녀의 등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살을 파고들자 온하랑은 고통에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천한 년, 결국 이 꼴이 됐구나.”하이힐의 주인은 온하랑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녀의 턱을 위로 잡아당겨 온하랑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예전에 임가희도 이것과 똑같이 생긴 얼굴로 추상훈을 정신 못차리게 만들었었다.온하랑이 눈앞의 낯선 여인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찰나 여자가 그녀의 뺨을 호되게 한 대 날렸다.“짝-!”하는 소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한 공동묘지에 울려 퍼졌다.뺨을 맞은 온하랑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한쪽 얼굴은 불에 탄 듯 화끈거렸고 입가는 이미 감각을 잃었다.곧이어 얼굴이 붉게 부어오르며 손톱에 할퀸 자국 두 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온하랑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자신의 입가에 묻은 피를 살짝 맛보았다.“천한 년, 일어서! 네가 감히 내 딸의 남자를 뺏어? 내가 오늘 널 제대로 밟아줄게!”심은혜가 온하랑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지만 온하랑은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만 낼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온하랑은 눈앞의 여자가 추서윤의 엄마라는 것을 눈치챘다.심은혜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온하랑의 머리를 잡아 고정하게 해놓고는 양손을 번갈아 날리며 그녀의 뺨을 쉴 새 없이 때렸다.연달아 강한 타격을 받은 온하랑은 머리가 멍해지며 눈앞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고 양 볼은 이젠 감각이 없을 정도로 마비되어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 세게 부어올랐다.그러
”쨍그랑-!”유골함이 산산조각나며 안에 들어있던 유골이 땅바닥에 뿌려져 회백색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안돼!”모든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온하랑은 눈앞이 뿌예지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염분을 담은 눈물은 볼을 타고 흐르며 그녀 얼굴 위의 상처를 더 아프게 헤집다가 핏물과 섞여 땅으로 떨어졌다.‘아빠, 죄송해요!’‘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아빠가 죽어서도 모욕을 당하게 됐어요!’온하랑이 몸을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뒤에 있던 남자가 그녀의 등을 밟자 그녀는 다시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그 절망적인 모습을 본 심은혜는 기분이 좋아져서 큰 소리로 웃더니 냉소를 보이며 말했다.“얘는 알아서 처리해. 맘대로 갖고 놀다가 버려. 천박한 창녀 같으니, 네가 실컷 더럽혀진 뒤에도 부승민이 너를 좋아할지 두고 보자.”그 말을 남기고 심은혜는 자리를 떴다.남겨진 세 명의 남자가 더러운 눈길로 온하랑의 몸을 구석구석 훑어보더니 그녀의 몸을 마구 만지며 옷을 찢어버렸다.“이 년 몸매 좀 봐, 끝내 주는데.”한 남자가 온하랑의 몸을 더듬거리며 야비하게 웃었다.“이 년 부승민의 여자라며? 그럼 한 번 자 볼만하지.”“...”그때, 멀리서부터 밝은 빛줄기가 이곳을 비추더니 이어서 자동차 엔진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이런, 누가 왔나 봐. 빨리 도망가야 해!”두 사람은 재빨리 승합차로 향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그 와중에도 온하랑을 데리고 가려고 꾸물거렸다.“그년까지 데리고 가면 우리는 잡혀!”운전기사가 호통치자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온하랑을 내려놓고 차에 올라탔고 승합차가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온하랑은 땅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한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겨우 몸을 뒤집고는 천천히 유골이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아빠.방금 이 곳으로 온 차 두 대 중, 한 대는 그녀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고 나머지 한 대는 곧장 승합차를 쫓아갔다.부승민이 차에서 내리더니 한달음에
”이 미친년이!”추상훈은 화가 난 나머지 큰 소리를 내지르며 심은혜의 뺨을 날렸다.이 여편네가 진짜!추씨 가문의 미래가 이 여자의 손에 망가지게 생겼다.추상훈이 힘껏 날린 귀뺨에 고개가 돌아간 심은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표독하게 물었다.“당신이 감히 날 때려? 추상훈, 오늘 너 죽고 나 죽자.”심은혜가 두 팔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추상훈의 뺨에 붉은 자국을 몇 줄 남겼다.추상훈도 그에 맞서 심은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한데 뒤엉켜 개싸움을 했다.그러던 중 추상훈이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려 했고, 그 순간 그가 심은혜를 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추상훈을 힘껏 밀어 버렸다.외마디 비명과 함께 추상훈이 계단을 굴러떨어졌고 바닥에 널브러진 그는 꼼짝도 안 했다.심은혜는 계단 위층에서 그런 추상훈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현재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상태로 몇 분인가 지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 추상훈의 옆에 조심스럽게 쭈그려 앉아 그를 툭툭 쳐봤다.“추상훈, 너 왜 그래. 나 놀라게 하지 마.”추상훈이 여전히 미동도 없자 심은혜는 그를 다시 한번 힘껏 흔들려고 했다. 그러던 순간, 그녀의 눈길이 추상훈의 뒤통수 쪽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핏자국에 닿았고 순간 그녀는 아연실색해졌다.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추상훈의 코밑에 대 본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발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그 시각, 병상에 앉아 있던 추서윤은 심은혜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 맞은편, 심은혜의 목소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서윤아, 나 사람 죽였어…”잠시 후 전화를 끊은 추서윤은 얼이 빠져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요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은 전부 그녀의 예상 밖의 일이었다.바로 어제 그녀는 온하랑이 사실 아버지 사생아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