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CCTV 영상을 보긴 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달랐고 또 영상으로는 동생을 만져볼 수 없었다.부승민이 대답했다.“그래, 너도 동생 데리러 같이 가자.”필라시의 윌슨 저택.전화를 끊은 빈센트 윌슨이 옆에 있는 이엘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카롤이 설날이 지나면 오기로 했어.”“고마워요, 아빠.”이엘리아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은 빈센트 윌슨은 엄숙하게 말했다.“이번에 카롤이 오면 잘 지내. 예전처럼 행동하면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알아!”사실 빈센트 윌슨은 이엘리아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그와 카이사르의 작전이 곧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엘리아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어 떠나보내려 했다. 어쨌든 모녀지간이니 떠나기 전에 카롤을 한 번 더 보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게다가 빈센트 윌슨도 카롤이 보고 싶었다.“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는 내가 미쳤나 봐요. 이제 뉘우쳤으니까 카롤을 꼭 잘 돌봐줄게요.”“됐어, 가서 일이나 해.”...음력 12월 29일, 설 전날. 양력으로는 2월 8일. 매서운 겨울의 추위와 함께 안 좋은 여론이 리우 그룹 본사를 휩쓸었다.최신 경제 신문 헤드라인에 ‘리우 그룹, 강제 철거 및 폭행’이 인기검색어를 뜨겁게 달궜다.창가에 서서 아래층에 모인 기자들을 응시하는 최동철은 소매 단추가 유리에 닿아 맑은 소리를 냈다.이마를 짚고 있는 최동철은 눈가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최 대표님, 여론 확인 결과 ‘리우 그룹 폭력 철거’라는 검색어가 23개 플랫폼에서 실검을 장악하고 있습니다.”김지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핫키워드와 연결된 50만 개의 계정 중 38%가 BX 그룹이 조종하는 마케팅 팀입니다...”게다가 설날이 코앞이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가거나 집에서 쉬고 있었기에 온라인 접속자 수가 유독 더 많아졌다.리우 그룹의 폭력 철거 사건이 갑자기 대중의 시선을 끌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빠르게 받았다.그러면서 한
나가기 전 최 대표의 얼굴을 힐끗 본 김지환은 난생처음 최 대표의 얼굴이 이렇게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의자를 끌어당긴 최동철은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상에 앉아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이때 누군가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열어보니 글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사진 몇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방에 정진석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옷에는 희미한 핏자국이 보였다.이 사진들을 본 최동철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전화는 이내 연결되었지만 최동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는 그의 무거운 숨소리만 들렸고 수화기 너머의 사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30초 동안 정적이 흐른 뒤 전화기 너머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말 안 하면 끊을게.”최동철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부 대표.”“최 대표? 무슨 일이야? 할 말 없으면 끊을게. 회의하러 가야 해서.”최동철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정진석 사진을 보낸 사람이 부 대표인가?”순간 분위기가 한껏 무거워졌다.“그래? 내 직원이 실수로 잘못 보낸 것 같군. 왜 아직 못 받았나 했더니 최 대표에게 보냈나 보네.”‘하...’“부 대표가 정진석의 사진을 가져다 어디에 쓰려고?”전화기 너머로 부승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죽었으면 담요에 싸서 버리려고. 괜히 자리를 차지하잖아.”최동철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똑똑’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컴퓨터 화면 속 사진을 보니 정진석의 옷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하얀 조명 아래에서 미묘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부 대표, 수완이 정말 좋네. 실종되었을 때 배려해 준 것을 고맙다고 해야겠어!”전화기 너머로 부승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최 대표보다는 못하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정진석을 직접 내 손에 넘겼잖아. 정진석이 지금 고통받는 건 모두 최 대표 덕분이
녀석은 문틀에 걸린 작은 장식품을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저것 봐요. 저기 작은 등도 내가 골랐어요. 밤에 켜면 아주 예쁠 거예요!”위층과 아래층 두 집 모두 장식 종이를 다 붙일 때쯤 부엌에 있던 안문희도 밀가루 반죽을 다 준비해놓았다. 도마 위에는 다진 소가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다.손을 씻고 돌아온 부시아는 발꿈치를 들어 안문희가 만두피를 밀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우리 오늘 아침에 만두 먹어요?”그녀가 물었다.“그럼요. 우리 시아가 제일 좋아하는 새우 소 만두도 있어요.”“나도 빚을 거예요!”온하랑이 작은 앞치마를 부시아에게 가져다준 뒤 만두피를 하나 집어 녀석이 가지고 놀 수 있게 했다.“숙모, 내가 빚은 거 봐요!”부시아의 손에는 납작하고 옆구리가 터진 삐뚤삐뚤한 만두가 쥐여 있었다.“작은 금덩이 같지 않아요?”온하랑이 웃으며 녀석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주었다.“그래, 익은 다음에 아빠에게 주자.”부시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부승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빚은 사람이 먹는 거야.”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아빠, 내가 빚은 만두 싫어요?”“작은 금덩이 같은 게 얼마나 귀여워? 내년에 재물이 들어올 거라는 뜻인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온하랑이 농담조로 말했다.“맞아요!”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빠, 이걸 먹으면 내년에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예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요.”몇 사람이 함께 힘을 합치니 금세 만두 몇 접시가 뚝딱 완성되었다. 안문희가 다 빚은 만두를 삶으려고 부엌으로 가져갔고 그들은 남은 만두를 계속 빚었다.이내 잘 익은 만두들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안문희는 다양한 소스까지 준비했다.가만히 살펴보던 부시아는 자신이 빚은 작은 금덩이 만두를 부승민 앞 접시에 정성스럽게 올려놓았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TV에서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리우 그룹의 강제 철거 뉴스와 폭행당한 당사자 업주의 인터뷰가 나오자 온하랑은 한숨을 쉬었다.부승민이 고개
오후가 되자 부승민과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본가로 갔다.대대로 내려오는 풍습대로 그들은 본가에서 설날 저녁을 먹었다.오랜만에 만난 부시아와 부윤민은 만나자마자 바로 붙어 다녔다.부승민과 온하랑은 할머니와 이모부, 이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부현승은 아들 부준서가 너무 어려서 데려오지 않았다.그러자 안미영이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이미 서수현이 부준서의 생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원래부터 서수현을 더 좋아하던 안미영은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서혜민보다 서수현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하지만 서수현은 부현승에게 마음이 없었다.그동안 부준서를 단 한 번밖에 보러 오지 않은 서수현은 안미영의 식사 초대도 거절했다.부현승은 이 일에 대해 전혀 급하지 않았다.안미영은 부현승에게 적합한 상대를 소개해줄 생각이었다.설날 저녁, 테이블에는 다양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부시아가 좋아하는 탕수육과 송어 요리도 있었다.한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어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부시아는 TV를 열심히 보았다.“숙모, 이 프로 전혀 재미없어요.”“응...”“왜 갑자기 다 같이 만두를 빚는 거예요? 이걸로 끝이에요?”“얼른 생선 먹어.”온하랑은 가시를 발라낸 생선 살을 부시아의 앞 접시에 올려주었다.생선을 먹던 부시아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갑자기 말했다.“숙모, 우리 새해 맞이하러 금정에 가요! 거기서 카운트다운 행사도 한다고 들었어요!”“어디서 들었는데?”“내 친구가 어제 거기에 놀러 갔는데 아주 예쁘게 꾸몄대요. 쇼핑몰 천장에 풍선이 엄청 많은데 저녁 12시가 되면 그 풍선들이 다 떨어진대요.”잠시 망설이던 온하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오늘 밤에는 할머니와 있어야 해.”“놀고 나서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요. 내일 어차피 출근도 안 하는데 내일 할머니와 오래 같이 있으면 안 돼요?”꽃사슴 같은 눈망울로 온하랑을 바라보는 순진한 부시아의 모습에 온하랑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새벽 한 시를 훌쩍 넘어 부시아는 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거실에는 작은 조명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부승민은 딸을 조심스럽게 안아 2층으로 올라갔고 온하랑도 그의 뒤를 따랐다.부시아의 방에 도착하자 온하랑이 바로 이불을 들춰놓았다. 부시아의 구두와 외투를 벗긴 후 조심스럽게 녀석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올해는 부선월과 부민재가 집에 없었기에 방이 많았다.온하랑은 그녀를 따라오는 부승민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방이 남아도는데 왜 나를 따라오는 거야?”온하랑의 바로 뒤에 서 있는 부승민은 복도의 따뜻한 조명 때문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고개를 살짝 숙인 부승민은 그녀의 붉어진 귓불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하랑아, 새해 첫날부터 나 혼자 자게 할 거야?”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온하랑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쇼핑몰에서 부승민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새해 복 많이 받아’라고 부드럽게 속삭였던 순간이 떠올랐다.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다시 거꾸로 돌아가 예전처럼 여전히 사랑하는 연인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온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시아가 바로 옆방에 있잖아...”부승민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깊이 잠들었어. 그리고...”여기까지 말한 부승민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우리 이렇게 신나게 논 거 정말 오랜만이잖아.”온하랑은 심장이 점점 더 심하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하랑아.”부승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들어가게 해줘. 응? 오늘 밤만이라도.”온하랑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부승민을 방에 들이는 순간 절대 멈출 수 없다는 걸 온하랑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고개를 돌려 부승민의 깊은 눈을 마주한 순간 모든 이성이 무너져 내렸다.온하랑이 천천히 문을 열자 부승민은 그녀
부승민이 녀석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온하랑이 나왔을 때 부시아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부승민도 없었다.닫힌 문을 바라본 온하랑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문을 잠그지 않은 채 머리를 말리고 불을 끈 후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약 10분 후 샤워를 마친 부승민이 잠옷을 입고 밖의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온하랑이 이미 잠들어 고르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조용히 걸어와 이불을 들추고 그녀 옆에 누웠다.부승민은 침대 옆 조명에 비치는 온하랑의 잠든 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조명 때문에 속눈썹에 작은 그림자가 생긴 그녀는 숨을 고르고 부드럽게 쉬고 있었다.부승민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 앞에 있는 머리를 살짝 넘겼다.온하랑은 무언가를 느낀 듯 움찔했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그녀의 뺨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던 부승민의 손가락은 살짝 벌린 입술 위에 멈췄다.조금 전 끝내지 못한 키스를 떠올린 부승민은 참지 못하고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그러고는 혀로 살짝 그녀의 입술을 건드린 뒤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잠옷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하나, 둘...옷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다.샤워 후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부승민의 숨결이 순간 거칠어졌다. 뜨거운 입맞춤은 그녀의 쇄골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부드러운 소리와 깃털처럼 가벼운 동작에 마음이 간질거려 참을 수 없었던 온하랑은 순간 속눈썹을 떨었다.열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와 온 얼굴이 붉게 물들였다.부승민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점점 거칠게 숨을 쉬던 온하랑은 오늘따라 사전 준비가 너무 길다고 느꼈다.너무 가볍고 느려서 몸이 더욱 간지러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아랫입술을 깨물며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린 온하랑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동작을 잠시 멈췄던 부승민은 그녀가 자세를 잡은 후 다시 손을 움직였다.손가락 주위의 촉촉함을 느낀 그는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해 몸을 숙여 그녀에게 밀착했다.눈을 꼭
설날 아침, 잠에서 깨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켠 온하랑은 옆에 있는 부승민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팔을 이불 속으로 넣고 다시 눈을 감고 눕자 부승민이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왔다.“자기야, 자기 남편은 겁이 많고 나약하니 이혼하고 나를 따라오는 게 어때?”귀가 뜨거워진 온하랑은 참지 못하고 부승민을 발로 걷어찼다.하루 종일 고향 집에서 시간을 보낸 그들은 저녁을 먹은 후에야 클래식 캐슬로 돌아왔다.양력 2월 17일, 음력 정월 8일, 이날은 원녕이 퇴원하는 날이었다.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부시아는 안문희의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났다.아침을 먹은 후 온하랑과 부승민은 부시아와 황은숙과 같이 병원으로 향했다.가족들은 신생아들이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들이 수속을 마치자 간호사가 포대기에 싼 원녕을 안고 나왔다.원녕이 태어난 지도 어느새 두 달이 넘었다. 태어났을 때는 작고 말랐던 몸이 이제는 하얗고 통통해졌다. 작은 얼굴은 동글동글하고 귀여웠으며 속눈썹은 길고 빽빽해 부채처럼 보였다.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기는 꿈을 꾸는지 입술을 계속 달싹였다.“정말 귀여워.”부승민이 옆에서 한마디 하자 눈시울이 붉어진 온하랑은 아기의 볼을 살짝 찔러보았다.“촉감이 너무 좋아.”동생을 보고 싶었던 부시아는 키가 작아서 발꿈치를 힘껏 들어서야 겨우 볼 수 있었다.황은숙의 말에 따라 간호사에게서 아기를 조심스럽게 받아 안은 온하랑은 작고 따뜻한 아이의 무게를 느끼며 처음으로 자신의 딸을 안아보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한번 안아 보자.”부승민이 딸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일단 차에 타고 그다음에 안는 게 좋을 것 같아요.”황은숙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온하랑이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아기의 옷과 포대기, 분유와 젖병 등 아기용품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있던 황은숙은 추운 날씨에 아기가 혹시라도 감가가 걸릴까 봐 포대기를 한 겹 더 덮어줬다.“숙모, 조금만 낮춰 주세요. 나도 동생을 보고 싶어요.”부시아
돌아오는 길, 차 안은 조용했다.뒷좌석에 앉아 있는 부시아는 동생이 혹시라도 다시 울까 봐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밀어 가끔 앞을 바라봤다.친환경 소재를 사용해 인테리어를 마친 10층 집은 한 달 동안 환기를 했지만 부승민과 온하랑은 왠지 불안한 마음에 18층에서 반 달 정도 더 머문 뒤 이사할 계획이었다.이 반 달 동안 황은숙이 편하게 돌볼 수 있도록 원녕과 황은숙은 게스트 룸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온하랑은 원녕을 황은숙과 함께 안방에서 지내게 하려고 했지만 설날 연휴가 금방 끝났기에 그녀는 스튜디오에 출근해야 했다. 게다가 아기가 밤에 우유를 먹기 위해 자주 깨고 울기도 해서 휴식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클래식 캐슬에 돌아온 온하랑은 잠든 원녕을 안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원녕이 퇴원하기 전, 게스트 룸을 깨끗이 청소한 온하랑은 침구류도 모두 세탁하고 소독했다.장난감 외에도 아기용 약품을 준비해 두었고 신생아를 키우는 책도 열심히 봤지만 실제로 신생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몰랐다.온하랑이 조심스럽게 아기를 침대에 눕히자 원녕이 몸을 쭉 폈다. 그 모습에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다행히 아기는 기지개를 켠 뒤 다시 잠이 들었다.온하랑은 아기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고 침대 옆에 앉았다.하얗고 통통하며 귀여운 작은 얼굴을 본 그녀는 당장이라도 뽀뽀하고 싶은 마음에 끝없이 아기만 바라보았다.부시아도 침대 옆에 엎드려 온하랑과 함께 아기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이 문을 살짝 열더니 뜨거운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피곤하지? 우유 좀 마셔.”우유를 받아든 온하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좀 긴장해서 그래.”부승민은 그녀 옆에 앉아 원녕의 작은 손을 살짝 만져보았다.“천천히 해. 아주머니가 있잖아.”침대 주위에 모여 아기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에 황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일을 하러 갔다.잠시 후 부승민이 온하랑에게 조용히 말했다.“원녕의 돌잔치는 2월 25일, 음력 정월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