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하랑의 말이 맞아. 여기서 다툴 필요 없어. 결과가 나오면 자연히 그 답을 알게 될 테니까.”자신만만한 최동철의 모습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부승민은 온하랑을 힐끗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럼 결과를 기다리지.”말을 마친 후 세 사람이 다시 침묵에 빠진 바람에 분위기가 또다시 어색해졌다.최동철과 부승민을 본 온하랑은 이마를 짚더니 계성진에게 문자를 보냈다.이내 계성진의 답장이 도착했다. 유전자 검사 결과가 이미 나왔고 문서 작업만 마치면 이메일로 파일을 받을 것이니 그 파일을 받자마자 온하랑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다.몇 분 후, 유전자 검사 결과 파일이 도착하자 휴대폰을 잡은 온하랑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최동철은 여전히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고 부승민은 그녀를 뜨거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결과가 나왔어요.”온하랑의 말에 최동철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그럼 함께 보자.”부승민이 일어나 온하랑 곁으로 다가갔고 최동철도 온하랑의 옆쪽으로 왔다.계성진이 보낸 파일을 연 온하랑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 하여 파일의 마지막 페이지로 이동했다.화면에는 검사 결과가 명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유전자 분석 결과 온하랑과 메이슨은 생물학적 친자 관계가 성립된다고 씌어 있었다.“어떻게...”결과를 본 순간 부승민이 눈살을 찌푸렸다.조금 전부터 최동철이 무언가를 꾸몄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부승민은 이 결과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최동철은 이미 예상한 듯했다.“왜...?”최동철과 부승민을 번갈아 본 온하랑도 믿을 수 없는 듯 많이 당황한 표정이었다.조금 전 부승민이 제시한 증거에 온하랑은 정진석과 최동철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검사 결과는 그 생각을 완전히 뒤엎었다.최동철이 온하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하랑아, 이제 결과가 확실해졌어. 메이슨은 우리의 아이야. 이제 걱정하지
고개를 들어 복잡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본 온하랑은 지금 마음이 매우 혼란스러웠다.걱정스러운 얼굴로 온하랑을 바라본 부승민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하랑아, 날 믿지? 메이슨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최동철이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건 분명히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온하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승민아, 궁금한 게 있어. 만약 내가 이 모든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래서 네가 먼저 메이슨을 찾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메이슨을 내 앞에 데려왔을까, 아니면 영원히 내 눈에 띄지 못하게 했을까?”부승민이 망설이는 모습은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온하랑의 눈빛이 차가워지는 것을 본 부승민은 그녀를 꼭 안았다.“하랑아, 그래, 인정할게. 처음에는 안 좋은 생각을 많이 했어. 하지만 메이슨을 찾은 후로는 절대 메이슨이 싫지 않았어. 메이슨의 양육권이 갖고 오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메이슨을 친자식처럼 대해줄 수 있어. 진심이야.”물론 메이슨을 싫어했던 적도 있었다. 특히 며칠 전 메이슨이 저녁에 온하랑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 그가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 했을 때도 녀석이 싫었다. 하지만 이건 굳이 그녀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정진석의 진술을 듣고 나서 많이 놀랐어. 하지만 이건 메이슨을 겨냥한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최동철에게 속는 게 걱정됐을 뿐이야. 네가 방금 봤듯이 정진석과 김지환은 정말 특별한 사이야.”확실히 조금 전 최동철의 설명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던 온하랑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부승민을 밀어냈다.“이제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까 더 이상 이 얘기는 하지 말자.”검사 기관은 함부로 결과를 조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관의 명성을 망칠 뿐만 아니라 소송까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잠시 멈칫한 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그래, 하랑아. 네 결정을 존중할게. 하지만 이해해주길 바라. 나는 그저 네가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기를 바라
휴대폰을 놓고 기지개를 켠 온하랑은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하러 갔다.그러고는 아침을 먹은 후 여행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제가 도와줄까요?”황은숙이 문 앞에 서서 묻자 거절하려던 온하랑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한마디 했다.“아주머니, 이 옷들 좀 정리해 줄래요?”황은숙이 힐끗 본 후 말했다.“이거 대표님 옷인가요?”“네, 이사를 갈 거예요.”“그래요?”‘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황은숙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숙모! 나 왔어요!”부시아가 급하게 방으로 뛰어 들어와 온하랑에게 안겼다.“숙모, 보고 싶었어요!”한발 물러서며 부시아를 안은 온하랑은 자신의 허리를 잡으며 말했다.“부시아, 넌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히히...”부시아는 약간 미안한 듯 웃었다. 방학을 맞은 녀석은 온하랑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더니 이내 불만을 토로했다.“숙모, 일주일만 있다가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삼촌에게 일이 생겨서 며칠 더 있었어.”부시아는 ‘흥’하며 입을 삐죽였다.“숙모, 집에만 있는 게 너무 심심했어요. 어제 아빠가 갈 때 나도 데려가 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셨어요. 아무리 졸라도 안 데려가더라고요.”“아빠가 돌아오면 숙모가 혼내 줄게.”온하랑은 웃으며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숙모, 메이슨은 어때요?”부시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음... 조금 겁쟁이긴 하지만 말은 잘 들어.”“전에 아빠가 메이슨이 올 거라고 했는데... 언제 와요?”“원녕이 퇴원하고 생일을 쇨 때쯤이면 만날 수 있을 거야.”돌잔치를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 해야 했지만 그때 부선월의 사건이 터지기도 했고 온하랑도 메이슨을 보러 경주로 갔었다. 그래서 부승민과 상의해 원녕이 퇴원한 후에 하기로 했다.“아, 그럼 숙모, 이번에 경주에 가서 내 선물은 사 왔어요?”부시아는 큰 눈을 깜빡이며 기대에 찬 얼굴로 온하랑을
휴대폰을 집어 든 부승민은 그에게 저녁 식사를 집에 와서 먹을 건지 묻는 온하랑의 메시지를 보고 바로 답장했다.[저녁에 약속이 있어. 기다리지 마.]홈 화면으로 넘어가 전화번호부를 클릭한 뒤 육광태의 번호를 눌렀다.저녁 8시 반, 육광태와 만난 후 부승민은 클래식 캐슬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따뜻한 조명으로 가득 차 있는 거실에 왠지 모르게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거실 바닥에 요가 매트 두 장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온하랑은 두 손을 모아 천천히 머리 위로 올렸다.옆 매트 위의 부시아도 그녀를 따라 하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온하랑이 부승민을 흘끔 보았다.“돌아왔어?”부시아도 그를 흘끔 보았다.“돌아왔어요?”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놓은 부승민은 소파 옆에 여행 가방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그중 하나는 바닥에 펼쳐져 있었고 셔츠는 다림질을 잘했는지 각이 져 있었으며 색상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소매 단추 보관함도 그물망 칸에 단정히 꽂혀 있었다.“이건...?”온하랑이 흘끔 보며 말했다.“아, 아주머니가 도와줘서 같이 정리한 거야.”“그건 알겠는데, 이걸 왜 정리한 거야?”부승민이 넥타이를 푼 뒤 보석 소매 단추를 풀자 비단 소재가 스칠 때 미세한 마찰음이 났다.“원녕은 이미 낳았고 산후조리도 끝났어. 그러니 이제 이사 가야지.”옆에 있는 부시아는 통쾌한 듯 눈을 깜빡였다.그녀의 말에 부승민은 순간 동작을 멈췄다.“하랑아, 아직도 내게 화가 난 거야? 나는 메이슨을 싫어하지 않아...”“아니.”온하랑이 부승민을 흘끔 본 뒤 자세를 바꿨다.“내가 임신해서 불편하다고 도와주기 위해 여기로 이사 온 거잖아? 기억 안 나?”부승민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다만... 모른 척하며 계속 머물고 싶었다.어쩌면 그냥 머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최동철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온하랑은 아무 일 없는 척했지만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여기까지 생각한 부승민은 속으로 최동철의
“곧 알게 될 거야.”부시아에게 한마디 한 뒤 전화를 받은 부승민은 빈센트 윌슨에게 인사를 건넸다.잠시 인사를 나눈 후 빈센트 윌슨이 말했다.“이번 설은 카롤을 필라시로 데려가서 쇠고 싶어.”설날은 Z국의 전통 명절이다. 서희수가 있었기에 빈센트 윌슨도 집에서 설날을 쇠곤 했다.“카롤의 생각을 물어볼게요.”부승민은 옆에 있는 부시아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외할아버지가 너를 필라시로 데려가서 설을 쇠고 싶다고 하시는데 갈 거야?”부시아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가고 싶어요.”강남에서 두 번째 설을 보내는 부시아는 이곳의 모든 것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지난 설날에는 할머니가 숙모와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해서 우울했다.부승민이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카롤이 가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전화를 바꿔 줘. 내가 직접 얘기할게.”부승민이 전화기를 부시아에게 건네주자 부시아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하하...”전화기 너머의 빈센트 윌슨은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카롤, 할아버지와 통화하는 게 어색해?”“하하...”부시아는 어색하게 웃었다.자주 보지 않는 친척은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 친해질 수 있겠지만 다시 떨어지게 되면 또 어색해지곤 했다.“네 아빠가 그러는데 필라시에서 설날을 보내기 싫다고?”“네, 할아버지, 강남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여기서 설날을 보내고 싶어요.”“외할아버지가 준비를 많이 했는데? 오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하지만... 저는 아빠랑 있고 싶어요.”부시아의 말에 빈센트 윌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그럼 어쩔 수 없지. 설날이 지난 다음에 우리 집에 며칠 와서 지내는 건 어때?”“네...”잠시 망설이던 부시아는 외할아버지가 양보하는 모습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약속한 거야?”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부시아가 휴대폰을 부승민에게 돌려주자 부승민이 전화기를 받으며 물었다.“
동생의 CCTV 영상을 보긴 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달랐고 또 영상으로는 동생을 만져볼 수 없었다.부승민이 대답했다.“그래, 너도 동생 데리러 같이 가자.”필라시의 윌슨 저택.전화를 끊은 빈센트 윌슨이 옆에 있는 이엘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카롤이 설날이 지나면 오기로 했어.”“고마워요, 아빠.”이엘리아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은 빈센트 윌슨은 엄숙하게 말했다.“이번에 카롤이 오면 잘 지내. 예전처럼 행동하면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알아!”사실 빈센트 윌슨은 이엘리아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그와 카이사르의 작전이 곧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엘리아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어 떠나보내려 했다. 어쨌든 모녀지간이니 떠나기 전에 카롤을 한 번 더 보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게다가 빈센트 윌슨도 카롤이 보고 싶었다.“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는 내가 미쳤나 봐요. 이제 뉘우쳤으니까 카롤을 꼭 잘 돌봐줄게요.”“됐어, 가서 일이나 해.”...음력 12월 29일, 설 전날. 양력으로는 2월 8일. 매서운 겨울의 추위와 함께 안 좋은 여론이 리우 그룹 본사를 휩쓸었다.최신 경제 신문 헤드라인에 ‘리우 그룹, 강제 철거 및 폭행’이 인기검색어를 뜨겁게 달궜다.창가에 서서 아래층에 모인 기자들을 응시하는 최동철은 소매 단추가 유리에 닿아 맑은 소리를 냈다.이마를 짚고 있는 최동철은 눈가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최 대표님, 여론 확인 결과 ‘리우 그룹 폭력 철거’라는 검색어가 23개 플랫폼에서 실검을 장악하고 있습니다.”김지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핫키워드와 연결된 50만 개의 계정 중 38%가 BX 그룹이 조종하는 마케팅 팀입니다...”게다가 설날이 코앞이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가거나 집에서 쉬고 있었기에 온라인 접속자 수가 유독 더 많아졌다.리우 그룹의 폭력 철거 사건이 갑자기 대중의 시선을 끌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빠르게 받았다.그러면서 한
나가기 전 최 대표의 얼굴을 힐끗 본 김지환은 난생처음 최 대표의 얼굴이 이렇게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의자를 끌어당긴 최동철은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상에 앉아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이때 누군가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열어보니 글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사진 몇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방에 정진석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옷에는 희미한 핏자국이 보였다.이 사진들을 본 최동철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전화는 이내 연결되었지만 최동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는 그의 무거운 숨소리만 들렸고 수화기 너머의 사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30초 동안 정적이 흐른 뒤 전화기 너머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말 안 하면 끊을게.”최동철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부 대표.”“최 대표? 무슨 일이야? 할 말 없으면 끊을게. 회의하러 가야 해서.”최동철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정진석 사진을 보낸 사람이 부 대표인가?”순간 분위기가 한껏 무거워졌다.“그래? 내 직원이 실수로 잘못 보낸 것 같군. 왜 아직 못 받았나 했더니 최 대표에게 보냈나 보네.”‘하...’“부 대표가 정진석의 사진을 가져다 어디에 쓰려고?”전화기 너머로 부승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죽었으면 담요에 싸서 버리려고. 괜히 자리를 차지하잖아.”최동철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똑똑’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컴퓨터 화면 속 사진을 보니 정진석의 옷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하얀 조명 아래에서 미묘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부 대표, 수완이 정말 좋네. 실종되었을 때 배려해 준 것을 고맙다고 해야겠어!”전화기 너머로 부승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최 대표보다는 못하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정진석을 직접 내 손에 넘겼잖아. 정진석이 지금 고통받는 건 모두 최 대표 덕분이
녀석은 문틀에 걸린 작은 장식품을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저것 봐요. 저기 작은 등도 내가 골랐어요. 밤에 켜면 아주 예쁠 거예요!”위층과 아래층 두 집 모두 장식 종이를 다 붙일 때쯤 부엌에 있던 안문희도 밀가루 반죽을 다 준비해놓았다. 도마 위에는 다진 소가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다.손을 씻고 돌아온 부시아는 발꿈치를 들어 안문희가 만두피를 밀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우리 오늘 아침에 만두 먹어요?”그녀가 물었다.“그럼요. 우리 시아가 제일 좋아하는 새우 소 만두도 있어요.”“나도 빚을 거예요!”온하랑이 작은 앞치마를 부시아에게 가져다준 뒤 만두피를 하나 집어 녀석이 가지고 놀 수 있게 했다.“숙모, 내가 빚은 거 봐요!”부시아의 손에는 납작하고 옆구리가 터진 삐뚤삐뚤한 만두가 쥐여 있었다.“작은 금덩이 같지 않아요?”온하랑이 웃으며 녀석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주었다.“그래, 익은 다음에 아빠에게 주자.”부시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부승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빚은 사람이 먹는 거야.”부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아빠, 내가 빚은 만두 싫어요?”“작은 금덩이 같은 게 얼마나 귀여워? 내년에 재물이 들어올 거라는 뜻인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온하랑이 농담조로 말했다.“맞아요!”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빠, 이걸 먹으면 내년에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예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요.”몇 사람이 함께 힘을 합치니 금세 만두 몇 접시가 뚝딱 완성되었다. 안문희가 다 빚은 만두를 삶으려고 부엌으로 가져갔고 그들은 남은 만두를 계속 빚었다.이내 잘 익은 만두들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안문희는 다양한 소스까지 준비했다.가만히 살펴보던 부시아는 자신이 빚은 작은 금덩이 만두를 부승민 앞 접시에 정성스럽게 올려놓았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TV에서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리우 그룹의 강제 철거 뉴스와 폭행당한 당사자 업주의 인터뷰가 나오자 온하랑은 한숨을 쉬었다.부승민이 고개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