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에게 국기 게양식을 하며 국가를 부르라고 말했었다.하지만 그는 부를 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온하랑은 잠깐 틈을 내어 메이슨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태양의 깃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온하랑은 참을 수 없이 가까이 가서 귀 기울여 들어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온하랑은 미소를 참지 못했다.의식이 끝나고 온하랑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메이슨의 얼굴을 보며 마스크를 씌워주었다. “추워? 돌아갈까?”메이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추워요. 안 돌아갈래요.” “의식 재미있었어?” “재밌었어요.”메이슨이 대답했다.비록 그는 의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국기 게양식의 의미도 잘 알지 못했지만 그저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좋았고 신나고 떨리는 마음이 들었다.“이제 가자. 먼저 아침 먹고 다시 구경하러 하자.”“네.”세 사람은 광장을 지나 앞문 거리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가게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온하랑은 경호원에게 자리를 맡기고 자신은 메이슨을 데리고 계산대에 가서 주문을 하기로 했다.메이슨은 화면에 나온 음식 사진을 보며 먹고 싶은 음식을 온하랑에게 말했다. 온하랑은 그를 안고 말했다. “여기 있는 누나들은 영어 할 수 있어. 네가 직접 말해볼래?” 메이슨은 계산대 뒤에서 바쁘게 일하는 누나들을 보며 잠시 긴장한 듯했다.경주에 온 후 그는 아직 낯선 사람과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온하랑은 그를 격려하며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누나, 아침 샌드위치 하나랑 우유 한 잔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돼. 누나들은 모두 친절해.” QR 코드로 주문하거나 음식을 예약할 수 있었고 현장에서 줄을 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금방 차례가 왔다.카운터 직원은 컴퓨터를 조작하며 물었다. “뭐 드릴까요?” 온하랑은 메이슨에게 말했다.“자, 누나한테 뭐 먹을지 말해봐.” 온하랑이 영어로 아이에게 말하는 걸 듣고 직원은 메이슨을 보며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메이슨은 긴장한 채로 작은 목
메이슨 같은 나이의 아이가 집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았다. 유치원에 가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이중 언어 유치원은 메이슨에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비록 한국어를 잘 못해도 영어로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온하랑은 결심을 굳히고 돌아가서 최동철과 상의한 후 메이슨을 이중 언어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무영이는 메이슨과 매우 친근하게 대화했다. 메이슨은 처음으로 같은 또래와 소통할 수 있었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워 보였다.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이어갔으며 그 장면은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온하랑은 두 아이가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뿌듯해졌다.무영이 엄마는 성이 매라고 했다. 그녀는 온하랑에게 아침 식사 후 계획을 물었고 온하랑이 대답하자 함께 관광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온하랑은 메이슨에게 물어본 후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꺼이 함께 가기로 했다.아침을 마친 후 온하랑과 메이슨 그리고 무영이와 무영이 엄마인 매 여사는 함께 물레방아 광장을 둘러보았다.무영이는 이곳을 여러 번 와본 적이 있어 매우 익숙했고 메이슨에게 작은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두 작은 꼬마는 나란히 걸으며 가끔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이야기했다.무영이는 매우 똑똑했다. 단어가 부족할 땐 간단한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했다.온하랑은 매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 메이슨을 신경 썼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는 아무 방해도 없었다. 그들은 영웅의 석상과 혁명 지도자 기념관을 보고 그 후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중앙공원은 무영이가 오고 싶다고 해서 찾은 곳이었다.공원 안에는 놀이공원이 있었다.무영이는 새로 만난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과 함께 미끄럼틀과 트램펄린 그리고고 그네랑 회전목마까지 타고 싶어 했다. 미니 자동차면 더 좋다고 했다.놀이공원에 도착했을 때 많은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고 그 소리가 공원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저녁은 이미 준비됐어. 우리 먼저 먹고 메이슨이 일어나면 따로 챙겨주면 돼.” 최동철이 말했다. “좋아요.” “오늘 어디서 놀았어? 메이슨이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지쳐서 잠들진 않았을 터였다. 온하랑은 오늘 하루 메이슨과 함께 보낸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며 이중언어 유치원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이중언어 유치원?” 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었다. “역시 네가 생각이 깊어.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동철 오빠, 칭찬해 주지 마세요. 사실 저도 매 여사가 얘기하는 걸 듣고 생각난 거예요.” “내일 바로 사람을 시켜 경주의 모든 이중언어 유치원을 조사하라고 할게. 조건이 괜찮은 곳 몇 군데 골라서 직접 가보고 다음에 결정하자.” “무영이도 동언 국제유치원에 다닌다고 하니까 가능하면 그곳부터 먼저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는 친구가 있으면 메이슨도 훨씬 빨리 적응할 테니까요.” 온하랑은 이중언어 유치원이라면 대체로 조건이 좋은 편이라 굳이 지나치게 고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동철의 조건이라면 메이슨을 당연히 가장 좋은 이중언어 유치원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알겠어. 내가 신경 쓸게.”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최동철은 바 테이블 쪽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메이슨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날 생각이었다. 온하랑은 방으로 돌아가 노트북을 꺼내 스튜디오와 재단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저녁 8시 반쯤 메이슨이 잠에서 깨어났다. 온하랑은 옆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서 메이슨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저녁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최동철도 일을 멈추고 내려와 메이슨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나가서 놀았는데 재밌었어?” “재밌었어요.” 메이슨은 물컵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놀았는지 아빠한테 말해줄래
호텔. 방금 이 팀장과 다른 팀원들과 만나 부승민은 술을 조금 마셨고 그로 인해 다시 위가 뒤틀리는 고통이 찾아왔다.코트는 옷걸이에 걸려 있고 그는 몸에 딱 맞는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셔츠의 목깃은 약간 열려 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으며 선명한 팔 라인이 드러나 있었다.그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자연스럽게 꼬고 가죽 구두는 나무 바닥 위에 놓은 채 손에 든 서류 내용을 집중해서 검토하고 있었다.연 비서는 부승민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대표님, 몸 상태 괜찮으세요?” 부승민은 손으로 위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늘 그랬던 거야.” 연비서는 뜨거운 물 한 잔을 따라 부승민 앞에 놓으며 말했다. “약이라도 사다 드릴까요?” “그래.” 연비서는 부승민이 자주 먹는 약의 이름을 비서에게 메시지로 보낸 뒤 근처 약국에서 사 오라고 지시했다. 서류를 대충 검토한 부승민은 서류 파일을 덮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복사본을 계성진에게 보내. 그쪽에서 이상 없다면 협상에 응해.” “알겠습니다.” 그때 연비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알았어. 계속 지켜보고 있어.” 말이 끝나고 전화를 끊은 뒤 그는 부승민의 좋지 않은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현이 전화왔는데...” “뭔데?” “오후에 최동철 씨가 청림별장에 갔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승민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지며 고개를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9시 10분쯤 최동철 씨가 노트북 가방을 들고 별장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다시 별장에 돌아갔고 이후 2층 하랑 아가씨 방 옆 방에 불이 켜졌다고 합니다.” 온하랑이 청림별장에서 지내기 시작한 이후 부승민은 연 비서한테 사람을 시켜 최동철의 움직임을 감시하라고 했다. 특히 최동철이 청림별장에 갈 때는 더 신경을 쓰라고 지시했다. ‘
“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연비서는 억울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 대표님, 이제 갈까요?”이건 정말 그를 탓할 수 없었다. 하랑 아가씨가 빨리 오게 하려고 살짝 엄중하게 말한 것뿐인데 이렇게 된다니... “위장도 안 좋으시니 이참에 의사에게 검진받는 게 나쁠 건 없잖아요.” 부승민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온하랑은 이미 쉬려고 했지만 전화를 받고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빠르게 택시를 호출했다. “하랑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야?”계단을 내려가며 온하랑은 최동철의 목소리를 들었다.“동철 오빠, 이제 가는 거예요?”방금 아줌마가 그에게 남아 있으라고 제안했지만 최동철은 거절하고 비서에게 전화해 데리러 오라고 했다.“응. 비서가 이미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어.”“부승민이 위장병이 재발해서 민안 종합병원에 있어요. 가서 한번 보려고요.”“그래? 그럼 내 비서한테 너 데려다주게 할까? 이쪽은 차도 안 잡히고 길이 좀 험하잖아.”“너무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요?” 온하랑은 망설이며 말했다.그녀의 예약은 아직 누구도 받지 않았고 설령 받았다 하더라도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뭘 귀찮게 해. 민안 종합병원 들렀다 가면 되는 거지. 나도 마침 너랑 같이 가서 그를 좀 보려고 해.” “그럼 동철 오빠 고마워.”“괜찮아.”온하랑은 차량 예약을 취소했다. 차에 오르고 나서 최동철은 비서에게 먼저 민안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는 옆에 앉은 온하랑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문자를 기다리는 듯 핸드폰을 계속 쳐다보는 모습을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경주의 의료 시스템은 최고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온하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부승민도 진짜! 위장이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술은 왜 마셔요. 자기 몸을 왜 그리 소중히 하지 않는 건지.”최동철은 살짝 웃었고 그의 눈동자에 잠시 깊은 생각이 스쳐 갔다. 그녀는 부승만을 불평하고
연비서는 이를 듣고 잠시 당황했지만 얼굴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게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최 대표님, 농담도 참. 부 대표님 아프신데 당연히 제가 좀 더 도와야죠.”말하는 사이 온하랑은 병상으로 다가가 부승민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열은 없었다.“동철 오빠,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들어가 푹 쉬세요.” “그래. 그럼 난 먼저 갈게.” 최동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최 대표님, 벌써 가시나요? 따뜻한 물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연 비서가 물었다.“괜찮아요.” 최동철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온하랑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랑아, 내일 내가 데리러 올게. 메이슨이랑 같이 유치원 보러 가자.” “알겠어요.” 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럼 먼저 갈게.”최동철이 떠나자 연 비서가 말했다. “하랑 아가씨, 많이 늦었으니 저도 먼저 가겠습니다.”“네. 조심히 가세요.”연 비서가 나가고 병실에는 온하랑과 침대에 누워 있는 부승민만 남았다.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부승민이 눈을 살짝 뜨자 온하랑이 소파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연 비서가 따라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컵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약통을 들어 살펴보며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부승민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아마 지금 온하랑이 자기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온하랑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이마를 세게 두 번 찔렀다.“술 마시지 말라고 했지! 술 마시지 말라고!”“...” 부승민은 어쩔 수 없으면서도 마음속으로 기분이 좋아졌다.‘사랑할수록 더 책망하게 된다더니 하랑이가 나를 좋아하니까 이렇게 걱정하는 거겠지.’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화장실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물소리가 멈췄다.부승민은 눈을 비스듬히 뜨고 화장실 문 쪽을 몰래 바라봤다. 온하랑이 따뜻한 수건을 들고나오고 있었다.그녀가 얼굴을 닦아주
따스한 숨결이 천천히 귓불을 감싸더니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귀에 입김을 불어 넣고 있었다. 부승민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전류가 흐르듯 온몸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졌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목소리가 잠기고 몸은 저릿저릿하게 뜨거워졌다. 어느 한 곳은 이미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손이 너무 차가워. 부승민, 따뜻하게 해줘.”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그녀의 차가운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셔츠 밑단은 벌써 벨트에서 빠져나왔고 차디찬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허리에 닿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지만 예상했던 순간에도 그의 몸은 차가운 손길에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오히려 점점 대담해졌다. 차가운 손가락은 그의 복부를 따라 유회하듯 움직이며 탄탄하게 뻗은 근육의 선을 따라 내려갔다. 부승민은 숨을 꾹 참으며 손으로 침대 시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행동을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의 허리띠 바로 위에 닿았다. 부승민은 몸이 굳어지며 팽팽하게 긴장됐다. ‘만약 더 아래로 손을 내리면 내 변화를 눈치채고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텐데.’ 그녀의 손이 허리띠에 막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부승민은 속으로 안도했지만 마음속에는 이유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바로 그의 심장은 다시 요동쳤다. 그녀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자는 거지?’ 부승민의 마음 한구석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리띠를 찬 채로 자는 건 불편할 거야.” 그녀는 조곤조곤 말하며 허리띠를 빼냈다. 그러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민감한 부위에 스쳤다. 부승민은 잠시 숨이 멎을 듯했고 그 순간 그는 목을 꽉 누르며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바지는 벗겨주고 싶지만 네가 너무 무거
부승민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속이 너무 아파서 네가 보고 싶었어.” “그럼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왜 연 비서를 시켜서 괜히 날 놀라게 하는 건데?” 온하랑은 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부승민은 허리에서 찌릿한 전율을 느끼며 전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온하랑은 손을 빼냈다. 그녀는 손끝에 묻은 뭔가를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부승민은 천장을 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왜 따라와?” 온하랑은 그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샤워하려고.” 부승민은 문틀에 기대어 배시시 웃더니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할래?” “혼자 해.” 온하랑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너무 피곤해. 먼저 잘게.” “그럼 먼저 자.” “응.” 부승민이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간병용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샤워 소리에도 전혀 깨지 않은 걸 보니 오늘 하루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이 부승민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는 눈은 가늘게 좁혀졌다. ‘별장에 있지 않고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 경주 국제공항. 임연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입구에 서서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연지야!” 한 키 큰 남성이 캐리어를 들고 마스크를 낀 채 서둘러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나 돌아왔어!” 임연지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그럼!” 오재원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불렀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가자.” “호텔부터 가자.”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