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지는 겁을 먹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 아니에요. 고모랑 상관없어요. 저예요... 제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거예요.”“왜?”“... 궁금해서 그랬어요. 고모는 부승민 씨가 사건에 간섭할까 봐 계속 부승민 씨를 지켜보라고 했어요. 어제 우연히 온하랑도 경주에 왔고 청림 별장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오빠, 믿어줘요. 저는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랬어요...”임연지는 횡설수설 해명했다.그녀가 사람을 시켜 최동철의 사생활을 훔쳐보게 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정말 다른 생각이 없었다.임연지는 지금 기소당한 사건이 있지만, 모유 수유 기간이어서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문제가 생기면 형량이 더 길어질 것이다.최동철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테이블에 놓인 자료를 임연지의 얼굴에 확 던졌고 종이가 사방으로 날렸다.“그저 궁금해서 그랬다고? 너 스스로 봐봐.”임연지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고 심장은 더 세차게 뛰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종이들을 줍던 그녀는 위에 적힌 제목을 보았다.“삼각관계? 최동철과 온하랑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쪽 머리 부분에는 XX 신문사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이건 기사의 제목이었는데 아직 게재되지 않았고 보아하니 최동철이 막은 모양이었다.임연지는 황급히 부인했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오빠, 이건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정말 저랑 상관없어요.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최동철은 믿지 않았다.“너는 예전부터 하랑이를 질투했고 심지어 납치까지 했어. 이번에 너는 우연히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되고 질투가 나서 이 열기가 완전히 식어버리기 전에 소식을 신문사에 보낸 거야. 온하랑을 망쳐버리려고!”만약 이 기사가 실렸더라면 여론은 어떻게 되었을까?“저 정말 억울해요. 오빠, 저는 방금 알게 되었는데 신문사에 보낼 시간이 어디 있어요?”임연지는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그녀가 온하랑을 질투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 일을 폭로해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사합원에서 나온 임연지의 마음은 무거웠다. 자신을 제외하고 누가 또 이 일을 알게 된 것인가? 제보한 시간도 무척 공교로웠고 마치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 같았다.‘도대체 누구야?’그녀는 짜증 난 눈빛으로 탐정을 째려보았다.“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이 들켰어?”그가 잡히지 않았다면 기사가 나더라도 최동철은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탐정은 억울하다는 듯 머리를 끄적였다.“경호가 너무 삼엄했습니다. 사진을 찍고 떠나려고 하는데 경호원한테 발각되었어요...”“상관 안 해. 네가 저지른 일이니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가만 안 둘 줄 알아!”임연지는 으름장을 놓았다.“잠시만요.”탐정은 임연지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물었다.“뭘 해결해요? 정말 그쪽이 폭로한 거 아니에요?”그는 최동철이 더 화를 낼까 봐 임연지가 다른 사람한테 미룬 것으로 생각했다.임연지는 화가 나서 헛웃음이 터졌다.“당연히 아니지. 내가 시간이 어디 있어? 얼른 방법을 생각해봐. 이제 어떡할 거야?”“제가 뭘 어떡하겠어요? 제가 각 매체와 공식 계정들에 연락해서 제보를 막겠어요? 아니면 인터넷을 감시해 개인 계정에서 폭로하는 것을 막겠어요?”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임연지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럼 너는 아프리카에 가서 생활해야겠네? 방심하지 마. 오빠가 나를 아프리카에 보내기 전에 내가 너를 먼저 보내버릴 거야!”“그러지 말아요... 일단 진정해요.”탐정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폭로한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입을 막으면 되잖아요?”“그걸 말이라고 해? 어떻게 찾는지 알아?”아쉽게도 오빠는 고모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면 고모를 찾아서 도와달라고 할 수 있었고 고모의 인맥을 이용해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탐정이 말했다.“잡지사부터 찾아가서 제보한 사람의 이메일 찾아보는 거죠.”“말이야 쉽지. 오빠도 찾지 못했는데, 아니면 나를 의심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네가
이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반응이 달랐다.고은을 보살펴주는 아줌마는 마흔 살이 넘었고 인간관계도 간단해 핸드폰을 검사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가문의 기사는 젊은이였기에 미간을 찌푸리고 이것은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했다.아부하는 표정을 하고 적극적으로 핸드폰을 제출하는 젊은 도우미도 있었다.청림 별장에 있는 아이의 일에 대해서 오빠가 빈틈없이 지켜 전문적인 탐정도 붙잡히는 마당에 대부분 시간을 별장에서 보내는 도우미들이 직접 가서 알게 될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고 다른 사람을 통해 이 일을 알게 되는 경우밖에 없었다.임연지는 그들의 통화기록, 메시지, SNS, 검색기록을 집중적으로 살폈는데 한 바퀴 다 살펴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기록이 무척 깔끔하고 합리적이었다.다만 기사는 무척 거부하고 있었는데 끝내 핸드폰을 제출하지 않았다. 임연지는 점점 더 그를 의심하게 되었고 협박까지 해서야 기사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내놓았다.임연지는 한번 훑어보았지만 의심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고 기사가 친구한테 그녀가 인생역전을 하고 거들먹거린다고 뒷담화를 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핸드폰을 돌려주고 임연지는 난처해졌다.‘설마 폭로자가 허위 주소를 사용했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거지?’임연지는 머리가 아팠고 마음이 어지러웠다.‘만약 오늘 그 사람을 찾지 못하면 내일 폭로하면 어떡하지?’임연지는 시간을 확인했고 오후 세 시였다.그녀는 톡방을 열어 한바탕 하소연을 했다.“... 짜증 나. 한진아, 너한테 방법이 있어?”10분이 넘어 한진이라는 사람이 답장했다.“방금 일어났어. 허위 주소라고? 최 대표도 찾지 못한 것이라면 나도 방법이 없을 것 같아.”“그래.”“하지만,”한진의 말투가 바뀌었다.“오빠한테 매체와 공식 계정들을 감시해달라고 할 수 있어. 폭로가 뜨기 전에 막는 거지. 폭로가 나오지 않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정말이야? 진짜 정말 고마워!”임연지는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임연지는 한숨 쉬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 [한진아, 내가 전에 얘기했던 오재원 기억나? 그 사람 진짜 적합한 사람이야. 근데 지금 국내에 없어.] 과거 최씨 가문과 오씨 가문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오재원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애썼다. 결국 집행유예를 받아냈지만 오씨 가문은 그가 국내에 머물다 문제가 생길까 봐 관계를 동원해 그를 해외로 보냈다. 최소한 유예 기간이 끝나고 추가적인 형 집행이 없다는 게 확인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한진은 느긋한 말투로 답장을 보냈다. [네가 전에 얘기했던 집행유예 받은 그 사람 맞지?] [맞아.] 사건의 전말은 임연지가 이미 한진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신의 행동은 미화해서 설명했고 모든 문제는 전부 온하랑에게 돌렸다. 자신과 오재원은 단지 사촌 오빠가 온하랑에게 속을까 봐 술에 약을 넣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진은 이런 일에 개의치 않았다. [너 자신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뭐 하러 옳고 그름을 따지고 사냐?] 임연지는 크게 공감하며 한진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점차 그녀는 거의 모든 일을 한진에게 털어놓았고 그에 대한 회답으로 한진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진이 답장했다. [그 사람 해외에 있다고? 그냥 돌아오라고 하면 되잖아. 네가 불법 일을 시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최악의 경우 임신하고 나서 다시 해외로 보내면 되잖아.] 임연지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네 말이 맞아. 그를 돌아오라고 할 거야.] 그녀는 오재원을 불러들이는게 나쁜 짓을 시키려는 것도 아니니 오재원이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확신했다. 한진이 말했다. [별일 없으면 난 이제 아침 먹으러 갈게.] 임연지가 답했다. [참. 만약 또 누가 언론에 폭로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면 네 오빠한테 폭로자가 누구인지 알아봐달라고 좀 부탁해줘.] [그래, 알았어. 내가 오빠한테 말해둘게.
엄마가 그에게 국기 게양식을 하며 국가를 부르라고 말했었다.하지만 그는 부를 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온하랑은 잠깐 틈을 내어 메이슨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태양의 깃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온하랑은 참을 수 없이 가까이 가서 귀 기울여 들어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온하랑은 미소를 참지 못했다.의식이 끝나고 온하랑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메이슨의 얼굴을 보며 마스크를 씌워주었다. “추워? 돌아갈까?”메이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추워요. 안 돌아갈래요.” “의식 재미있었어?” “재밌었어요.”메이슨이 대답했다.비록 그는 의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국기 게양식의 의미도 잘 알지 못했지만 그저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좋았고 신나고 떨리는 마음이 들었다.“이제 가자. 먼저 아침 먹고 다시 구경하러 하자.”“네.”세 사람은 광장을 지나 앞문 거리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가게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온하랑은 경호원에게 자리를 맡기고 자신은 메이슨을 데리고 계산대에 가서 주문을 하기로 했다.메이슨은 화면에 나온 음식 사진을 보며 먹고 싶은 음식을 온하랑에게 말했다. 온하랑은 그를 안고 말했다. “여기 있는 누나들은 영어 할 수 있어. 네가 직접 말해볼래?” 메이슨은 계산대 뒤에서 바쁘게 일하는 누나들을 보며 잠시 긴장한 듯했다.경주에 온 후 그는 아직 낯선 사람과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온하랑은 그를 격려하며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누나, 아침 샌드위치 하나랑 우유 한 잔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돼. 누나들은 모두 친절해.” QR 코드로 주문하거나 음식을 예약할 수 있었고 현장에서 줄을 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금방 차례가 왔다.카운터 직원은 컴퓨터를 조작하며 물었다. “뭐 드릴까요?” 온하랑은 메이슨에게 말했다.“자, 누나한테 뭐 먹을지 말해봐.” 온하랑이 영어로 아이에게 말하는 걸 듣고 직원은 메이슨을 보며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메이슨은 긴장한 채로 작은 목
메이슨 같은 나이의 아이가 집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았다. 유치원에 가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이중 언어 유치원은 메이슨에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비록 한국어를 잘 못해도 영어로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온하랑은 결심을 굳히고 돌아가서 최동철과 상의한 후 메이슨을 이중 언어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무영이는 메이슨과 매우 친근하게 대화했다. 메이슨은 처음으로 같은 또래와 소통할 수 있었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워 보였다.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이어갔으며 그 장면은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온하랑은 두 아이가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뿌듯해졌다.무영이 엄마는 성이 매라고 했다. 그녀는 온하랑에게 아침 식사 후 계획을 물었고 온하랑이 대답하자 함께 관광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온하랑은 메이슨에게 물어본 후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꺼이 함께 가기로 했다.아침을 마친 후 온하랑과 메이슨 그리고 무영이와 무영이 엄마인 매 여사는 함께 물레방아 광장을 둘러보았다.무영이는 이곳을 여러 번 와본 적이 있어 매우 익숙했고 메이슨에게 작은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두 작은 꼬마는 나란히 걸으며 가끔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이야기했다.무영이는 매우 똑똑했다. 단어가 부족할 땐 간단한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했다.온하랑은 매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 메이슨을 신경 썼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는 아무 방해도 없었다. 그들은 영웅의 석상과 혁명 지도자 기념관을 보고 그 후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중앙공원은 무영이가 오고 싶다고 해서 찾은 곳이었다.공원 안에는 놀이공원이 있었다.무영이는 새로 만난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과 함께 미끄럼틀과 트램펄린 그리고고 그네랑 회전목마까지 타고 싶어 했다. 미니 자동차면 더 좋다고 했다.놀이공원에 도착했을 때 많은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고 그 소리가 공원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저녁은 이미 준비됐어. 우리 먼저 먹고 메이슨이 일어나면 따로 챙겨주면 돼.” 최동철이 말했다. “좋아요.” “오늘 어디서 놀았어? 메이슨이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지쳐서 잠들진 않았을 터였다. 온하랑은 오늘 하루 메이슨과 함께 보낸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며 이중언어 유치원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이중언어 유치원?” 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더니 피식 웃었다. “역시 네가 생각이 깊어.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동철 오빠, 칭찬해 주지 마세요. 사실 저도 매 여사가 얘기하는 걸 듣고 생각난 거예요.” “내일 바로 사람을 시켜 경주의 모든 이중언어 유치원을 조사하라고 할게. 조건이 괜찮은 곳 몇 군데 골라서 직접 가보고 다음에 결정하자.” “무영이도 동언 국제유치원에 다닌다고 하니까 가능하면 그곳부터 먼저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는 친구가 있으면 메이슨도 훨씬 빨리 적응할 테니까요.” 온하랑은 이중언어 유치원이라면 대체로 조건이 좋은 편이라 굳이 지나치게 고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동철의 조건이라면 메이슨을 당연히 가장 좋은 이중언어 유치원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알겠어. 내가 신경 쓸게.”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최동철은 바 테이블 쪽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메이슨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날 생각이었다. 온하랑은 방으로 돌아가 노트북을 꺼내 스튜디오와 재단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저녁 8시 반쯤 메이슨이 잠에서 깨어났다. 온하랑은 옆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서 메이슨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저녁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최동철도 일을 멈추고 내려와 메이슨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나가서 놀았는데 재밌었어?” “재밌었어요.” 메이슨은 물컵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놀았는지 아빠한테 말해줄래
호텔. 방금 이 팀장과 다른 팀원들과 만나 부승민은 술을 조금 마셨고 그로 인해 다시 위가 뒤틀리는 고통이 찾아왔다.코트는 옷걸이에 걸려 있고 그는 몸에 딱 맞는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셔츠의 목깃은 약간 열려 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으며 선명한 팔 라인이 드러나 있었다.그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자연스럽게 꼬고 가죽 구두는 나무 바닥 위에 놓은 채 손에 든 서류 내용을 집중해서 검토하고 있었다.연 비서는 부승민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대표님, 몸 상태 괜찮으세요?” 부승민은 손으로 위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늘 그랬던 거야.” 연비서는 뜨거운 물 한 잔을 따라 부승민 앞에 놓으며 말했다. “약이라도 사다 드릴까요?” “그래.” 연비서는 부승민이 자주 먹는 약의 이름을 비서에게 메시지로 보낸 뒤 근처 약국에서 사 오라고 지시했다. 서류를 대충 검토한 부승민은 서류 파일을 덮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복사본을 계성진에게 보내. 그쪽에서 이상 없다면 협상에 응해.” “알겠습니다.” 그때 연비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알았어. 계속 지켜보고 있어.” 말이 끝나고 전화를 끊은 뒤 그는 부승민의 좋지 않은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현이 전화왔는데...” “뭔데?” “오후에 최동철 씨가 청림별장에 갔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승민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지며 고개를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9시 10분쯤 최동철 씨가 노트북 가방을 들고 별장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다시 별장에 돌아갔고 이후 2층 하랑 아가씨 방 옆 방에 불이 켜졌다고 합니다.” 온하랑이 청림별장에서 지내기 시작한 이후 부승민은 연 비서한테 사람을 시켜 최동철의 움직임을 감시하라고 했다. 특히 최동철이 청림별장에 갈 때는 더 신경을 쓰라고 지시했다. ‘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
부승민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속이 너무 아파서 네가 보고 싶었어.” “그럼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왜 연 비서를 시켜서 괜히 날 놀라게 하는 건데?” 온하랑은 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부승민은 허리에서 찌릿한 전율을 느끼며 전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온하랑은 손을 빼냈다. 그녀는 손끝에 묻은 뭔가를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부승민은 천장을 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왜 따라와?” 온하랑은 그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샤워하려고.” 부승민은 문틀에 기대어 배시시 웃더니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할래?” “혼자 해.” 온하랑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너무 피곤해. 먼저 잘게.” “그럼 먼저 자.” “응.” 부승민이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간병용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샤워 소리에도 전혀 깨지 않은 걸 보니 오늘 하루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이 부승민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는 눈은 가늘게 좁혀졌다. ‘별장에 있지 않고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 경주 국제공항. 임연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입구에 서서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연지야!” 한 키 큰 남성이 캐리어를 들고 마스크를 낀 채 서둘러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나 돌아왔어!” 임연지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그럼!” 오재원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불렀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가자.” “호텔부터 가자.”
따스한 숨결이 천천히 귓불을 감싸더니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귀에 입김을 불어 넣고 있었다. 부승민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전류가 흐르듯 온몸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졌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목소리가 잠기고 몸은 저릿저릿하게 뜨거워졌다. 어느 한 곳은 이미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손이 너무 차가워. 부승민, 따뜻하게 해줘.”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그녀의 차가운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셔츠 밑단은 벌써 벨트에서 빠져나왔고 차디찬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허리에 닿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지만 예상했던 순간에도 그의 몸은 차가운 손길에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오히려 점점 대담해졌다. 차가운 손가락은 그의 복부를 따라 유회하듯 움직이며 탄탄하게 뻗은 근육의 선을 따라 내려갔다. 부승민은 숨을 꾹 참으며 손으로 침대 시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행동을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의 허리띠 바로 위에 닿았다. 부승민은 몸이 굳어지며 팽팽하게 긴장됐다. ‘만약 더 아래로 손을 내리면 내 변화를 눈치채고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텐데.’ 그녀의 손이 허리띠에 막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부승민은 속으로 안도했지만 마음속에는 이유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바로 그의 심장은 다시 요동쳤다. 그녀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자는 거지?’ 부승민의 마음 한구석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리띠를 찬 채로 자는 건 불편할 거야.” 그녀는 조곤조곤 말하며 허리띠를 빼냈다. 그러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민감한 부위에 스쳤다. 부승민은 잠시 숨이 멎을 듯했고 그 순간 그는 목을 꽉 누르며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바지는 벗겨주고 싶지만 네가 너무 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