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숙자는 부끄러워하는 채림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역시 신혼부부라 그런지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또 보고 싶나 보네. 사이가 참 좋네.’“점심때 왔다 갔지.”강숙자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러자 채림은 기대에 찬 얼굴로 다음 문장을 기대했다.“그런데 너무 바빠서 점심에 나한테 인사만 잠깐 하고 D국으로 넘어가서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했어.”“그래요?”채림은 살짝 처진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가 너무 예민했나 보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안고 가 치료하던 사람이 문지후 씨일 리가 없잖아.’그때 강숙자가 참지 못하고 채림의 손을 맞잡았다.“네가 귀국하면 지후도 아마 귀국했을 거야. 그때면 다시 만날 수 있어.”“아...”채림은 머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왜 그래, 아가야?”강숙자는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에요...”채림은 가볍게 대답했다.“그냥 윤재 씨와 둘째 삼촌이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하하하.”‘우리 손주며느리가 윤재를 보니 지후가 더 보고 싶나 보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남편을 이렇게 보고 싶어할까? 정말 귀엽다니까.’한편, 그레이스는 절뚝거리며 무대에서 내려오더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문씨 어르신과 문윤재가 어쩜 다 백채림을 도와주는 거지? 분명 일부러 나를 적대시하고 우리 가문을 적대시하는 게 틀림없어!”“아가씨...”라이먼은 서둘러 그레이스를 제지했다.물론 윌리엄 가문과 문씨 가문이 경쟁 관계이긴 하나, 겉보기에는 항상 서로 예를 갖추며 공개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그때 강숙자가 시선을 건네 오자 그레이스와 라이먼은 얼른 강숙자의 체면을 살려주었다.“윤재 도련님과 백채림 씨한테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분이 악한 사람을 통제해준 덕에 우리 아가씨가 억울하게 다치는 일은 면했습니다.”카벨 역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백채림 씨, 그레이스 씨,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일을 꼭 교훈 삼겠습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처벌했으니 앞으로 다시는 이런
“채림아, 나 용서해주면 안 돼? 내가 잘못했어.”원후는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흘렸다. 그는 채림의 치맛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채림은 역겨운 듯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원후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채림아, 너 설마 내가 무서워?”“뭐라고?”채림은 냉소를 짓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버러지 같은 놈이 무서울 거 뭐가 있어? 더럽다면 모를까. 난 그저 더러운 게 몸에 닿는 게 싫을 뿐이야.”원후는 분노를 참으며 채림의 다리를 바라봤다.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채림의 다리가 나았다는 걸 믿지 못했을 거다. 활짝 핀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는 채림의 모습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예전에는 왜 그걸 몰랐을까?“채림아, 너 다리 다 나았네? 내가 다 기쁘다.”원후는 마치 화난 듯 성을 냈다.“백사나 그 악독한 여자만 아니었다면, 네 다리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그 말은 내 다리를 그렇게 만든 게 백사나 혼자만의 계획이었다는 거야? 넌 몰랐어?”채림의 말투는 경멸이 가득했다.“그럼 백사나와 붙어먹었으면서 상대가 임신한 줄도 몰랐어?”“그건...”원후의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그는 눈앞의 백채림이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너를 떠난 뒤로 나 매일 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제대로 못 자. 나 정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못 잔다고? 그건 드림캐슬 이사회가 너를 받아주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 네 이미지가 나락 가서 보는 사람마다 손가락질해대서 아니야?”채림은 모든 걸 꿰뚫어보고 반박했다.무릎 꿇고 있던 이원후는 고개를 들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채림이 먼저 손을 들며 제지했다.“꺼져. 옷이 아깝다.”말을 마친 채림은 뒤에 있던 경비원을 불렀다.“끌어내요.”원후는 얼른 일어나 채림을 뒤쫓아 가더니 그의 손을 낚아챘다. 그 순간 채림은 구역질이 나 있는 힘껏 발버둥쳤다. 두 사람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
채림음 입술을 오므렸다. ‘내가 물론 결혼한 유부녀인 건 맞다만, 윤재 씨도 아직 귀국하지 않은 거 아닌가?’채림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제가 요즘 바빠서 정말 못 들어가요. 그러니까 집에 편히 계세요.”‘내 집인데 당연히 편이 있지. 그런데 이 여자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렇게 야근해요? 본인 건강은 생각도 안 해요?]채림은 순간 흠칫했다. 보아하니 문씨 가문에서 저와 윤재의 결혼을 밀어붙이며 사전에 제 몸상태도 조사한 모양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8년 전 수술 받은 뒤로 줄곧 적극적으로 치료받은 덕에 지금은 건강해요.”[큰 수술을 받았다는 걸 알면 더 조심해야죠. BM 그룹 직원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줘야 알아요? 백채림 씨는 그 사람들을 책임져야 해요.]지후는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하지만 채림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저는 제 아버지가 물려준 회사를 다시 일으켜세우고 싶어요. BM 그룹은 제 아버지의 또 다른 아이나 다름없어요.”채림이 감성팔이를 하자 전화 건너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는 입을 열었다.[부녀 사이가 좋았나 보네요?]“당연하죠!”채림은 고민도 없이 대답하더니 갑자기 호언장담했다.“둘째 삼촌, 걱정하지 마세요. 제 몸이 어떤지는 제가 잘 알아요.”채림의 말이 끝나자 지후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차가운 말 한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알아서 몸 잘 돌봐요.”뚜우뚜우, 들려오는 건너편 기계음에 채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후가 변덕스럽게 구는 게 처음도 아닌지라 채림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장애인이라 매일 받는 스트레스도 많을 테니 마음도 다소 불안정할 수 있다며 이해했다....다음 날, 채림은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며 연거푸 밤을 새워 생긴 다크서클을 가렸다. 이윽고 BM 그룹 향수 사업부 동료 두 명과 임승철을 데리고 업계 협회로 입찰하러 갔다.채림을 포함한 네 명이
30분 뒤, DL 그룹 피티가 끝나자 담당자는 BM 그룹이 입장할 것을 통지했다.채림은 임승철과 두 팀장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가 미리 준비한 기획안을 프로젝터에 띄웠다. 이윽고 PPT 첫 페이지를 켜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하지만 채림이 두 번째 페이지를 펼쳤을 때, 업계 협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죄송합니다만, 잠시 멈춰주세요. 혹시 기획안 마지막 페이지를 볼 수 있을까요?채림은 눈을 깜빡이며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모컨을 눌러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 순간,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이내 굳어버렸다.몇 명이서 한바탕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협회장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정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백채림 씨, 이 기획안이 정말 본인 게 맞나요?”“네.”채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하지만 방금 전, 변 대표님이 보여준 기획안이 이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협회장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채림을 바라봤다.무대 아래에 있던 BM 그룹 팀장 두 명과 임승철은 모두 손에 땀을 쥐었다.“존경하는 심사위원 여러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제 기획안이 확실합니다. 저와 제 동료들이 2달이라는 시간 동안 수십 번도 넘게 수정하면서 최종으로 결정한 기획안이거든요.”심사위원들이 여전히 의심이 눈초리를 보내오자 채림은 말을 이었다.“만약 정말 표절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도, 앞순서인 사람이 피해자라고 단정 지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게다가 이번 입찰 피티 순서는 원래 BM 그룹이 DL 그룹 앞이었어요, 아닌가요?”협회장은 회색빛 눈썹을 찌푸리고 담당자에게 손짓해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이윽고 채림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소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DL 그룹 변 대표님도 불러와서 함께 검증해보죠.”협회장이 명령했다.변형빈은 의기양양한 듯 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채림을 날카
변형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빛을 흐렸다.채림은 변형빈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임승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임승철은 얼른 BM 그룹 다른 직원을 안으로 데려왔다. 그 직원 손에는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위에는 다양한 색상의 유리병이 담겨 있었다.“심사위원 여러분, 제가 여기서 즉흥적인 기획안을 보여드리죠.”채림은 말하면서 익숙한 듯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이건 제가 직접 희석한 향료입니다.”채림은 말하면서 유일한 여성 심사위원에게 다가가 말했다.“이 숙녀분이 쓰는 향수에 가장 많이 들어간 향료는 바질입니다. 바질은 열기를 좋아하고 연한 민트향이 나죠. 제가 볼 때 심사위원분은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 같네요, 향수도 본인과 닮은 열정적인 향수를 좋아하고요. 라벤더, 오레가노, 레몬 버베나를 섞은 향수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이 향료들을 적절한 비례로 배합하면 상큼하고 은은한 향기가 나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을 주거든요.”채림은 방금 말한 향료를 담은 유리병을 하나씩 열더니 빨대로 적절히 섞어 여성 심사위원 손 옆에 가져갔다.여성 심사위원은 살짝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유리병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연거푸 숨을 들이켰다. 곧이어 눈빛이 변하더니 채림을 향해 싱긋 웃었다.“고마워요.”채림은 이번에 다른 두 심사위원 곁으로 다가가 그들이 평소 쓰는 향수 성분을 분석하고 자기가 추천하는 향수를 배합해 건넸다.마지막으로 협회장 앞에 도착했을 때 채림은 약 몇 초간 동작을 멈췄다.협회장은 실제 행동으로 주변 심사위원을 설득한 채림을 진작 다시 봤다. 심지어 흥미가 동했는지 일부러 채림에게 곤란한 질문을 건넸다.“왜요? 저는 분석하지 않을 생각인가요?”협회장은 기대에 찬 얼굴을 한 채 안경알 뒤에 가려진 눈을 반짝였다. 채림은 그런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협회장님을 맨 마지막에 분석한 건, 오늘 협회장님의 향기가 아주 옅기 때문입니다”협회장은 가타부타 말없이 고
심시위원들도 채림의 제의에 동의했다.동종 업계 브랜드를 맞추는 건 향수 사업부 담당자에게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더욱이 채림은 향수 성분까지 분석했으니, 변형빈이 아무리 후각이 뛰어나지 않다 하더라도 성분으로 브랜드를 추측할 수 있었다.하지만 변형빈은 망설였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제안을 거절했지만, 합당한 이유는 내놓지 못했다.그 순간 협회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둘 다 향수 사업부 담당자인데, 한 명은 조향에 조예가 깊고, 한 명은 동종 업계 경쟁사 브랜드조차 알아맞히지 못하니, 누가 누구의 기획안을 표절했는지 답은 뻔했다.협회장은 심시위원들과 잠깐 토론하더니 입을 열었다.“오늘 피티는 여기까지 하죠.”심사위원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자 변형빈은 그들 뒤를 급히 쫓아가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협회장은 그를 무시한 채 경고를 날렸다.“변 대표님, 이번 표절 사건에 관해서는 협회에서 H시에 전담팀을 파견하여 조사할 겁니다. 그때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이윽고 협회장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예의 바르게 서 있는 채림을 향해 말했다.“백채림 씨, 오늘 향수 추천해줘서 고마워요. 저녁에 돌아가서 복수감을 따로 추가해 보고, 정말 효과가 좋으면 다시 감사 인사할게요.”“별말씀을요.”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미소 지었다....협회장과 심사위원들이 떠나자 변형빈은 이를 갈며 채림 앞을 막아섰다.변형빈은 워낙 키가 작아 고개를 한껏 쳐들고 나서야 겨우 채림의 시선과 수평을 이루었다.“백채림, 아까 그 유치한 장난으로 사황을 역전시켰다고 생각하지 마. 누가 끝까지 웃는지는 두고 봐야 아니까!”채림은 침착한 얼굴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뭘 한 게 있어야 두고 볼 거 아니에요. 오늘 비행기 시간을 맞춰야 해서 일부러 순서까지 바꾼 거 아니었어요? 나중에 해외에 나가지 않았다는 거 저한테 들키지나 마세요. 적어도 공항에 가는 성의 정도는 보여줘 봐요.”채림의 빈정거리는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변형빈은 결국 소매를 휙 털며 떠나
룸 안에서 백성호는 DL 그룹 회장, 즉 변형빈의 아버지 변민석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BM 그룹과 DL 그룹은 다년간 경쟁사로 지내, 두 가문 사람들이 사적으로 만나는 상황은 극히 드물었다. 거의 기피하다시피 한다는 게 더 맞을지도. 채림은 눈을 깜빡이며 룸 안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식사가 끝난 뒤, 채림은 회사로 돌아가 기획안 도난 사건의 조사 진행 상황을 물었지만 아직 쓸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그런데 입찰 때 협회장이 분명 두 기획안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변형빈이 손에 넣은 기획안이 최종본이라는 뜻이다.최종 기획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방금 전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에서 본 상황을 떠올린 채림은 눈을 내리깔더니 날카로운 빛을 뿜었다.백성호는 현재 BM 그룹 내에서 거의 밀려나다시피 했고, 손에 들고 있는 BM 그룹 지분도 적어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다. 백성호 부부 성격상 이런 상황에서 분명 퇴로를 만들었을 거다.‘DL 그룹이 그 퇴로인가? DL 그룹이 지금껏 해온 짓을 보면 백성호와 죽이 잘 맞을 것 같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채림은 기획안 도난 사건에 대한 단서에 대충 접근했다.복도를 지나 사무실에 도착한 채림은 임승철 사무실 불이 아직 켜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채림은 얼른 그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아저씨, 왜 아직도 집에 안 가세요?”“아가씨도 아직 안 가셨는데, 제가 어떻게 먼저 가겠습니까? 게다가 회사 기밀까지 누출 된 마당에...”임승철은 자책했다.“아저씨도 이제 나이 드셨는데, 저 같은 젊은이와 어떻게 비교해요?”채림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다가 임승철 책상 위에 놓인 약재 구매 목록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아저씨, 최근 우리가 사용하는 약품과 의료 장비 구매 루트가 모두 CS 바이오예요?”“네.”임승철은 문서를 건넸다.“회장님 지시대로 진행 중입니다. 아직 적당한 제약 공장을 찾지 못하기
“만약 백승호가 DL 그룹과 손을 잡고 BM 그룹을 무너뜨리려고 했다면, 분명 후속 계획이 남아 있을 거예요. 문제 있는 약품이 그쪽에 도착하면 그쪽에서도 아마 다음 계획을 진행할 거예요.”사건의 전말을 일일이 짚어보던 채림은 점점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제가 당장 권경민 씨한테 전화해서 도착하자마자 약품부터 확인하라고 할게요. 만약 모든 게 사실이라면, 문제 있는 약품을 보내달라고 하고요.”임승철이 말했다.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의료팀 버스가 빨리 도착하지는 못할 거예요. 우리를 모함하려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회를 줄지 모르겠네요. 아저씨, 얼른 캡토프릴과 니페디핀을 챙겨요. 제가 직접 가져갈 거예요.”임승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유능한 직원 몇 명 추릴 테니 함께 가세요.”“네.”임승철이 이 업계에서 반평생을 일하면서 사귄 인맥은 결단코 적지 않다. 물론 단기간에 두 가지 약품을 모으는 게 어렵긴 했지만, 그는 빠른 시간 내에 사로운 루트를 찾았다.채림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곧장 회사에 돌아가 준비를 마치고는 이내 서북 산지 마을로 출발했다.임승철은 채림을 떠나보내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신신당부했다.“아가씨, DL 그룹 쪽에서 미리 계획했을지도 모르고, 간다고 해도 소용없을 수도 있고 또 위험할 수도 있는데...”“걱정 마세요.”채림은 재빨리 가방을 메고 말했다.“저한테 다 방법이 있어요. 아버지가 예전에 마침 그 옆 마을 사람들을 도와줬었거든요. 그 마을 이장님이 저를 알고 있으니 가는 길에 도움을 청하려고요.”“그것 참 잘됐네요.”임승철은 채림의 차를 끝까지 배웅했다. 자신만만한 채림의 모습에 그는 감개무량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어려운 일을 겪더니 더 성숙해진 것 같네. 강단 있고 비상한 모습에서 백 회장님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차는 시내를 벗어나 어느새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그날 밤 채림은 몇 번이나 졸다가 잠에서 깨느라 백안에 넣어두었던
“채림 씨, 또 만났네요.”먼저 입을 연 건 건욱이었다.그러자 그레이스가 곧이어 비아냥거렸다.“그러게. 또 만났네. 참 인연이 깊어.”채림은 입꼬리를 움찔거렸다.“인연인지 아닌지는 그쪽이 더 잘 알 텐데.”감독과 PD는 차 안에서 촬영 절차를 설명했고 채림은 스태프들과 세부 사항을 논했다. 건욱도 그 사이에 끼고 싶었으나 끼지 못해 그레이스가 옆에서 눈짓을 하는 것도 무시했다.“채림 씨, 이번에 C시 소개 멘트는 원래 채림 씨가 하기로 했는데 그레이스 씨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인문 경관의 해설은 그레시스 씨가 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그 부분은 그레이스 씨한테 나눠주세요.” PD는 살짝 난감한 듯 말했다.“소개는 저희가 이미 써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중에 경관 선택은 채림 씨가 먼저 할 거예요.”채림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먼저 선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번에 미스 글로벌 파티 주최 측에서 도시 홍보 영상을 찍는 건 순전히 공익성 활동이다. 때문에 채림은 각 지역의 인문경관과 민속 습관을 더 통속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싶은 마음이지 절대 노이즈마케팅 할 생각이 없었다.한참 뒤, 차는 어느새 C시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그레이스는 겨우 기회를 잡아 채림에게 다가갔다.“C시는 정말 좋은 곳이야. 사람들 인심은 후하고 경치는 아름답고. 네티즌들도 C시 홍보 영상에 기대가 커. 그러니 네가 여기에 촬영 온 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뭐?”채림은 헛웃음이 나왔다.“본인이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퀸이 되었다고 후원사가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인터넷에 우리의 불화설이 떠도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일부러 우리를 같은 조에 배정했고, 그 덕에 너도 C시에 오게 된 거야.”“아하.”채림은 두 손을 들어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뒤 차갑게 웃었다.“그 자신감에 박수를 보내. 하지만 한 가지 잘못 말한 게 있어.”“뭔데?”그레이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불화설이 아니라 우리는 진짜 안 맞는 거
채림은 순간 가슴이 멎는 기분이었다. 지후가 사람들 앞에서 저를 희롱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주위 사람들은 지후가 채림을 협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채림은 한마디만 듣고 고개를 푹 숙였으니까.지후의 입가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현장 스태프들을 바라볼 때 눈빛은 다시 싸늘해졌다.“어떻게 된 일이죠?”“문 대표님, 그게 사실은 제가 기획안이 별로인 것 같아... 의견을 조금 냈거든요...”지후 앞에서 미아는 순한 양이 되어 누구보다 예의를 차렸다.“지후는 차가운 눈빛을 보내더니 불만 투로 물었다.“그쪽은 누구죠?”주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삐 눈알을 굴렸다. 지후가 미나를 아예 모른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전에 미나는 분명 자기를 MS 그룹이 띄워주는 연예인이라고 소개했다. 게다가 문지후 여자 친구라는 스캔들도 터졌었고.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니...미나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못 들은 척 무시한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이번이야말로 자기를 소개할 좋은 기회였다.“문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지후는 미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얼굴로 명령했다.“기획안에 어떻게 나왔으면 그대로 촬영해요. MS 그룹 소속 연예인은 많아요. 미나 씨가 정말 독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지후는 성큼성큼 채림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따라와요.”채림은 잠깐 망설이다가 얼른 지후를 따라 나갔다.“기획안은 수정할 거 없으니 나랑 같이 집에 가요.”지후는 문을 나서자마자 말했다.“전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따로 갈게요.”“가면서 데려다줄게요.”지후는 채림에게 바짝 다가가면서 그녀의 맑은 두 눈에 질투가 드리웠는지 자세히 보려고 했다.하지만 채림은 오히려 고개를 더 숙이며 입술을 오므린 채 여전히 거절했다.“문 대표님 회사에 여자 연예인도 많을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미나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자 쪽팔렸는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아니요, 사실을 서술한 것뿐입니다.”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이번 기획안은 계약하기 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촬영 중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면 저희 측 문제는 아닌 거죠.”미나는 여우 같은 눈매를 치켜 올리며 채림을 날카롭게 째려봤다.“지금 계약서로 날 압박하겠다는 거야?”“만약 미나 씨는 계약서도 안중에 없다면, 계속 협력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채림은 상대의 협박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안 찍으면 안 찍었지!”미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내가 촬영 안 하면 당신들 일정에 차질이 생기잖아!”막무가내로 나오는 미나를 보고 유미를 포함한 기타 BM그룹 직원들은 모두 초조해 났다. 하지만 채림은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자기한테 방법이 있다고 눈빛을 보냈다.“미나 씨가 촬영 안 하면 우리 일정에만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니라 윤재 씨 일정에도 차질이 생겨요.”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윤재 선배 들먹이지 마! 나 윤재 선배님 직속 후배야. 우리 사이가 설마 스캔들을 조작해 엮인 두 사람보다 못할까?”미나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우리 회사가 계약한 상대가 윤재 씨인데, 윤재 씨를 들먹이지 않으면 누구를 들먹이겠어요?”채림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 씨와 친하다니 더 잘됐네요. 미나 씨가 대신 말 좀 전해줘요. 이따 윤재 씨 스케줄 뒤로 미뤄졌다고.”“뭐?”미나는 순간 허리를 곧게 폈다.“윤재 씨 촬영은 미나 씨 촬영 마치고 나서 시작할 거거든요. 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했으면서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윤재 씨 곧 도착해요.”채림은 고개를 숙인 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시간 다 됐네요.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미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채림이 이토록 말주변이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물러서지
채림은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H시로 돌아갔다.윤재의 1분기 광고 촬영도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채림은 사전에 윤재의 매니저먼트팀과 소통하고, 암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향수 기획팀 직원 두 명더러 촬영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그러고 본인은 사무실에서 조향 대회를 준비했다.저녁 무렵.강원의 자사도우미, 김선주한테서 전화가 왔다.“사모님, 오늘 저녁 집에 돌아와 식사하실 겁니까?”채림은 약 1초간 반응하고는 물었다.“둘째 삼촌은 집에 있나요?”“네, 돌아오셨습니다. 만약 사모님도 돌아오신다면 문 대표님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김선주는 재빨리 대답했다.채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이런 말을 들어 본지도 참 오래된다. 집에서... 누군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고...채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한테 선물한 진주 왕관이 떠올라, 집에 돌아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하려고 결심했다.“그래요. 이따 바로 갈게요.”채림이 대답했다.한편, 전화를 끊은 김선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인어른의 머리 위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단번에 가시고 강원에 다시 봄바람이 부는 듯한 분위기가 찾아왔으니까.채림의 마음도 가벼웠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고는 문을 닫고 퇴근했다.하지만 그때, 핸드폰이 울리면서 향수팀 직원 소유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백 대표님, 한번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쪽에서 촬영 진행이 안 되고 있어요...”“다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요? 윤지 씨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채림은 의아했다.“윤재 씨가 아니라 같은 소속사 윤미나 씨가 문제예요... 상대는 문지후 대표님 여자 친구라고 소문난 스캔들 상대인데 우리를 계속 괴롭혀요. 저희도 더 이상 시중들기 힘들어요...”소유미가 억울한 듯 말했다.‘하.’채림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면서 흔들림 없는 눈을 깜빡거렸다. ‘스캔들 상대도 있었어?’“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채림은 전
사실 백성호는 J시에 온 지 며칠이 된다. BM 그룹에서의 지위를 잃은 그는 변씨 가문에 빌붙으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다른 살길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찾은 목표가 바로 방민수다. 하지만 여러 번 방문 요청을 드렸지만 한 번도 얼굴을 만나지는 못했다.결국 그는 큰돈을 들여 파티 초대장 한 장을 구했고, 그 파티에서 겨우 방민수를 만나 안부 좀 전하고 명함을 건넸다. 그게 끝이다.“마침 잘됐네. 그럼 우리 아빠 앞에서 그렇게 말해 봐. 아빠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궁금하니까.”은솔은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발버둥치던 백성호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멍한 눈으로 은솔을 바라봤다.이 작고 여린 여자애가 방 회장 따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미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방씨 가문 경호원에게 끌려 나갔다.변형빈은 밖으로 끌려 나가는 백성호를 보자마자 모든 더러운 물을 그에게 뿌렸다.“협회장님, 보세요. 백성호는 궁지에 빠지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입니다. 프롬프트도 분명 백성호가 사람을 시켜 망가뜨린 게 틀림없어요. 그랬으면서 나를 모함하다니...”“변형빈! 이 사람도 아닌 놈! 내가 네놈이 한 파렴치한 짓을 모두 까발릴 거야!”백성호는 이미 나갔으면서도 형빈의 목소리를 듣고 고래고래 소리쳤다.그 순간 형빈은 눈동자가 축소되면서 겁을 먹었다.“하...”고강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변형빈은 역시 싹수가 노래서 약이 없었다. 그래도 공을 세워 잘못을 덮을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이토록 식견이 짧으니 채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고강섭은 몸을 돌려 채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백 대표님, 위급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모습 잘 봤습니다. 제 주변 교수님들이 백 대표님 칭찬뿐이에요.”“과찬이십니다.”채림은 대범하게 말했다.고강섭은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이번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선 증거를 찾고 조사해 봐야 한다.협회에 DL그룹을 지지하는 세력
협회장은 ‘고맙다’는 단어를 강조하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뒤돌아 형빈을 꾸짖었다.“변 대표님, 남을 모함하기 전에 머리를 쓸 수는 없나요?”“협회장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형빈은 뜬금없이 꾸지람을 들어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가 원했던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무슨 말이냐고?”고강섭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세미나 시작 전, 내 비서가 분명 여러 번 강조했을 텐데요? 내 연설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연설문은 그동안 우리 업계에 도움을 준 제조 업체와 해외 업체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하필 중요한 시간에 프롬프트조차 없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게 세미나를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장담한 결과인가요?”“그럴 리가 없어요.”형빈은 조급한 나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프롬프트는 분명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쳐 놨어요.”“그러니까 프롬프트는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 고장 났다는 거네요?”채림은 형빈의 말실수를 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형빈은 멍해졌다. 그제야 본인이 함정에 빠졌다는 게 실감 났다.고강섭은 연신 한숨을 쉬며 뒷짐을 쥔 채 형빈을 비난했다.“변 대표님, 내가 세미나 주최 권한을 변 대표님께 맡기면서 연신 강조했을 텐데요? 동종 업계 사이 경쟁이 필요하긴 하다지만 건전하게 경쟁해야죠. 어쩜 매번 이렇게 남의 등에 칼 꽂는 짓을 할 수 있죠?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이네요.”그때 형빈의 비서 엄태식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귀에 아까 전 발생한 일을 설명했다. 프롬프트는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치지 못했다고.”“아까는 어디 갔었어? 왜 그걸 바로 보고하지 않았어?”형빈은 쪽팔리는 한편 화가 났다.“저도 그동안 잡혀 있어서 올 수 없었어요...”태식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백 대표님이 결단을 내려 협회장님 연설문을 무대 위에 준비해 두어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어요.”고강섭의 비서가 옆에서 말했다.“변 대표님, 이번 일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고강
협회장이 해야 할 멘트는 무척 길기에 프롬프트도 없이 멘트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본인이 아무리 상투적인 말로 억지로 짜 집기 해서 지어낸다고 해도, 오늘 현장에 수많은 파트너가 와 한 분 한 분 감사 인사드리려면 회사 이름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을 모두 외울 리는 만무했다.‘DL그룹!’며칠 전 DL그룹 회장이 직접 고강섭을 찾아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사정했었다. 결국 마음 약해진 그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하지만 DL그룹이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고강섭은 난처하기도 하고 화도 나 얼굴이 자줏빛을 띄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채림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협회장님, 저를 따라 세컨드 스테이지로 갑시다.”고강섭 눈에는 혼란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채림이 계속 웃는 바람에 그는 마지 못해 채림을 따라 나섰다.그러다 세컨드 스테이지 위에 도착했을 때, 고강섭은 무대 바닥에 자신이 해야 할 멘트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고강섭은 카메라 뒤에서 눈을 반짝이더니 자신만만하게 무대를 내려가는 채림을 대견스러운 듯 바라봤다.잠시 당황했던 고강섭은 무사히 연설을 마치며 세미나의 막바지를 알렸다.채림이 백스테이지에 도착하자 변형빈이 부르는 것처럼 다가와 버럭 소리쳤다.“백채림, 뭐 하는 거야? 왜 협회장님을 데리고 빙빙 돌았어? 협회장님이 너 때문에 어지러워하셨잖아!”“내가 왜 협회장님을 모시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채림은 침착하게 반격했다.은솔의 경호원이 일을 깔끔히 처리했는지 형빈은 아직도 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모른 채 어릿광대처럼 채림을 비난했다.“어디서 변명이야!”형빈은 사나운 말투로 윽박지르더니 뭔가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그만!”그때 노기가 담긴 나지막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형빈은 뒤돌아서서 잔뜩 화가 난 고강섭을 바라보더니 얼른 다가가
채림과 같은 줄에 앉은 변형빈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도발하는 듯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따 또 그녀에게 덫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하지만 지금 채림은 밝은 곳에 있고 상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기에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조심을 다하는 수밖에.채림이 경계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림 씨! 뭘 그렇게 걱정해요?”채림은 고개를 돌려 흘긋 바라봤다.“은솔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채림 씨가 연설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죠.”은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보탰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저 오늘 혼자 온 거 아니에요.”은솔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보니 시선 끝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몇 명 서 있었다. 심지어는 모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모양인지 분위기가 남달랐다.채림은 입꼬리를 말아 올랐다.“오늘 정말 은솔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너무 잘됐네요!”은솔은 기대되어 미칠 지경이었다.채림은 어처구니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뭔 일을 당하는 게 그렇게 기대되나?’채림이 은솔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당부하자 은솔은 이내 옆에 앉은 변형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이내 흉악한 얼굴을 한 백성호를 보더니 호언장담했다.“걱정하지 마요. 제가 오늘 이 두 사람 죽어라 감시할게요! 만약 두 사람이 채림 씨한테 뭔 짓을 하려 한다면 오늘 내 손에 죽었어요!”채림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뭐 깡패도 아니고, 적당히 해요.”“그래요. 채림 씨 말대로 할게요.”은솔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채림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대 아래에 조용히 앉아 청중이 되었다.세미나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상 순서가 되자 채림을 포함한 몇몇 기업 대표는 함께 무대에 올라 업계 청년 공로상을 수상했다.수상을 마친 뒤 바로 채림의 연설이 시작되었다.사회자의 짧은 멘트가 끝나자, 은솔은
[우리 참 안 맞아. 어쩜 내가 도착하자마 H시를 떠났어?]건너편 상대는 계속 농담조로 말했다.“왜 돌아왔어?”문지후는 방금 풀었던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산사태 때 본인 목숨도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를 구했다던데? 상대한테 홀리기라도 했어? 오히려 바위 아래로 밀어야 하는 거 아니야?]상대의 목소리는 음흉하고 섬뜩했다.“정말 그 여자가 죽길 바라는 거야?”지후는 차갑게 되물었다.“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예진과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인데?’[예지는 예지고 그 여자는 그 여자야! 그 계집이 예지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내가 왜 그 여자를 살려 둬야 해?]상대는 조급해졌는지 소리 질렀다.하지만 지후는 귓가에 들려오는 으르렁거림을 무시한 채 냉정을 되찾았다.“우리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달랐어. 난 그때의 진실을 알아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게 할 거야!”[하하!]전화 건너편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칼 같은 문 대표가 언제부터 이렇게 꾸물대는 성격이 된 거야?]“내가 칼 같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까지 베어 버리는 건 아니야!”지후는 차가운 말투로 위협했다.[정말 그 여자한테 푹 빠지기라도 했어? 계속 계획을 미룬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어디 그래 봐!”지후의 몸은 순간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더니 협박과 경고를 날렸다.“내가 귀국을 결심한 날부터 그 여자는 내 사람이었어!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가 결정해. 만약 내 계획을 망치면 그게 당신이라도 가만 안 둬!”지후는 말을 마친 뒤 전화를 팍 끊었다. 그러다 한참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 2분 뒤, 강현은 그의 방에 나타났다.“차 대기시켜. H시로 돌아갈 거야.”지후가 대답했다.“하지만, 대표님...”강현은 말을 더듬다가 지후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 입을 열었다.“방금 소식을 접했는데, 사모님께서 내일 향수 업계 세미나에 참석한답니다. 주최 측이 DL그룹이라 사모님께 불리할 것 같습니다.”지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동방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