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윤지훈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가 여기 있을 줄 몰랐던 민설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윤지훈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자마자 책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전에 저녁노을 보러 가자고 했었지? 요즘 날씨가 안 좋아서 오늘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먼저 가자. 날씨가 좋아지면 치월산에 데려갈게.”뜻밖의 제안이었다.민설아는 윤지훈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3년간의 연애 동안 늘 그녀가 윤지훈을 끌어내 데이트를 계획했었다.그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설마, 무언가 눈치챈 걸까?하지만 이미 마음을 내려놓은 그녀에게 그의 제안은 설레지도 기쁘지도 않았다.두 사람은 오후까지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며 놀이기구를 몇 번 탔다.그러나 민설아는 여전히 담담했다.그런 그녀를 본 윤지훈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재미없어?”민설아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 재밌어.”그때 사진사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 물었다.“두 분 사진 찍으실래요?”윤지훈은 잠시 망설였다.3년 동안 함께 있으면서 한 번도 같이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가 대답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윤지훈은 민설아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통화를 마친 그의 표정이 어딘가 달라졌다.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고 민설아도 자연스럽게 따라 돌아섰다.토끼 머리띠를 쓴 서예슬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서예슬을 본 윤지훈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예슬아, 네가 여기 웬일이야?”그의 얼굴 가득한 밝은 미소를 보며 민설아는 고개를 숙였다.나는 카메라맨을 향해 완곡하게 거절하고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떠나기 전에 함께 찍는 마지막 사진도 결국 물거품이구나.’“오늘 선배랑 같이 왔어. 근데 선배가 일이 생겨서 먼저 갔거든. 혼자 심심해서 걷다가 너랑 닮은 뒷모습이 보여서 혹시나 했는데 진짜 너였네! 진짜 우연이네. 지훈아!”서예슬의 웃음은 밝고 경쾌했다.그러나 윤지훈의 표정은 금세 차갑게 변했다
귀신의 집에서 나왔지만 서예슬은 여전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아까 그 미션을 떠올리자 얼굴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고, 그녀는 윤지훈을 향해 귀엽게 째려보며 말했다.“지훈아, 아까 너 너무 당돌했어. 아무리 내가 걱정된다고 해도 네 여자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그녀가 오해하면 어쩌려고.”윤지훈은 민설아가 아까 그 장면을 봤는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없어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바라보는 사이 서예슬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갔다.“근데 저런 미션을 혼자 어떻게 해? 설마 설아도 아무나 붙잡고 그냥 했을까?”윤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럴 리 없어.”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서예슬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렇게 잘라 말할 정도로 확실해?”윤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 설아는 나를 정말 좋아하거든. 설아는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야.”마침 문을 열고 나온 민설아는 그의 말을 듣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지 그래서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네.’그녀는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문을 밀고 나왔다.서예슬은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 손을 잡으며 물었다.“설아 씨, 어떻게 나왔어요?”민설아는 살짝 몸을 옆으로 돌리며 거리를 두고 담담히 대답했다.“간단해요. 게임을 포기하면 NPC가 문을 열어줘요.”그녀의 가벼운 대답에 서예슬은 눈을 크게 뜨고 윤지훈을 돌아보며 말했다.“포기할 수도 있었어? 그럼 우리는 아까 왜 그렇게 고생을 한 거야...”서예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지훈이 말을 끊었다.“예슬아, 내가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 미안.”서예슬은 여전히 얼굴이 붉은 채로 민설아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띠고 말했다.“난 괜찮아. 설아 씨만 괜찮다면 됐어.”“사실 저랑 지훈이는 어릴 때 소
집에 도착한 민설아는 윤지훈의 후배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선배, 지훈 형이 갑자기 며칠째 학교에 안 나오네요. 제가 메시지도 보냈는데 답이 없어요. 무슨 일 있나요?”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민설아는 윤지훈이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후배에게는 그저 대충 둘러댔다.“집에 일이 좀 생겼대.”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녀는 식탁으로 가 달력의 한 장을 뜯어냈다.숫자 ‘21’은 ‘20’으로 바뀌었다.그리고 곧 숫자는 ‘1’로 시작되는 날들로 접어들 것이다.출국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민설아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인지 그날 밤은 유독 깊이 잠들었고 그녀는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집 안은 고요했고 모든 물건은 어제와 똑같이 제자리에 있었다.윤지훈은 또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민설아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 우유를 한 잔 따라 마시며 혼자만의 하루를 시작했다.시간은 흘러 달력의 숫자는 ‘20’에서 어느덧 ‘15’로 바뀌었다.윤지훈은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었다.마치 그녀의 세계에서 사라진 사람 같았다.민설아는 떠날 준비로 짐을 꾸리고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문득 생각이 멈추는 순간에만 윤지훈이 떠오르곤 했다.아마도 그는 서예슬을 돌보느라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주말이 지나 월요일, 윤지훈의 후배에게 또 메시지가 왔다.“지훈 형이 아직도 학교에 안 나왔어요. 무슨 일 있는 거 맞죠?”민설아는 이번엔 직접 윤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훈아, 어디야?”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윤지훈의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여느 때처럼 뻔한 대답을 했다.“요즘 좀 바빠서. 아직 학교에 못 가고 있어.”그의 모호한 답변에 민설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혹시... 예슬 씨한테 무슨 일 생겼어?”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윤지훈은 마침내 사실을 털어놨다.“예슬이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어.”민설아는 서예
파티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집에 돌아온 민설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이미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그녀는 달력에서 또 한 장을 뜯어냈다.출국 2일 전.민설아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집 안 곳곳을 깨끗이 청소한 뒤 그동안 정리했던 물건들을 한꺼번에 내려가 버렸다.그리고 연애 기간 썼던 일기와 몰래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서재로 가져가 한 장 한 장 파쇄기에 넣었다.그렇게 잘게 부순 조각들은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처리했다.이제 이 집에는 그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출국 하루 전.민설아는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커튼을 열었다.맑고 화창한 하늘은 아주 눈부셨다.‘떠나기에 딱 좋은 날이네.’그녀는 부엌으로 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며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을 뜯어냈다.그러자 ‘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전자레인지가 띵 소리를 내며 울릴 때쯤 현관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반달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윤지훈이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왔다.윤지훈은 들어오자마자 집 안의 변화를 눈치챘다.텅 빈 공간들과 깨끗이 치워진 달력이 눈에 거슬렸는지 묻듯 물었다.“왜 이렇게 물건이 많이 없어졌어?”민설아는 차분히 대답했다.“쓸데없는 건 다 버렸어. 네가 필요하면 새로 사면 돼.”윤지훈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사 온 채소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식탁에 놓인 간소한 음식을 보고는 그녀의 접시를 집어 들며 말했다.“오늘 네 생일인데 이렇게 대충 먹으면 어떡해? 내가 밥 해줄게.”그가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민설아는 잠시 놀랐다.소파에 앉은 그녀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몇 가지 요리가 차려질 때쯤 윤지훈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접시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지훈아? 지금 어디야? 예슬이가 또 약을 안 먹겠다고 해서 네가 좀 와서 설득해야겠어. 병원으로 빨리
병원을 나선 윤지훈은 시간이 아직 이른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 민설아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그동안 그녀를 너무 외면했다는 생각에 작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그러나 집에 도착해 보니 평소 불이 켜져 있던 방은 캄캄했다.시계를 보니 밤 9시 30분이었다.‘이 시간에 벌써 자는 건가? 아니면 밖에 나가서 아직 안 돌아온 건가?’윤지훈은 뭔가 찜찜했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그녀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녀 땀이 범벅이 된 그는 일단 욕실로 들어갔다.반 시간 후,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온 그는 여전히 민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늦게까지 밖에 있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가 기억하기론 항상 제시간에 집에 돌아오는 그녀였다.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는 그녀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는 조심스레 문을 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벽에 걸려 있던 사진과 그림들이 모두 사라졌고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믿기지 않는 마음에 그는 눈을 비비며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수건을 내던지고 방 안으로 뛰어든 윤지훈은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는 서랍과 옷장을 열어봤지만 그녀의 물건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설마... 짐을 싸고 떠난 건가?”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그는 급히 다른 방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서재의 책장도 반쯤 비어 있었고 욕실에는 그의 물건만 남아 있었다.거실에 있던 담요와 그녀가 좋아하던 인형도 사라졌고 주방의 컵마저 보이지 않았다.하나씩 비어 있는 공간을 확인할수록 윤지훈의 마음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마침내 그는 이 집 어디에도 민설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순간 그의 머릿속은 공허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그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책상 모서리를 꽉 잡은 그의 손등에는 힘줄이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긴 비행 끝에 민설아는 드디어 파리 공항에 도착했다.도착 게이트 앞에서 부모님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설아야!”반년 만에 다시 만난 부모님을 보자마자 그녀의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민설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가 부모님 품에 안겼다.“아빠! 엄마! 오래 기다렸어요?”아빠는 그녀의 짐을 받아서 들었고 엄마는 딸을 꼭 안으며 볼에 입을 맞췄다.엄마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한 시간 정도? 별로 오래 안 기다렸어. 그런데 네가 비행기 오래 타느라 힘들었지?”엄마의 품 안에 있는 순간만큼은 나이를 떠나 여전히 아이로 돌아간 듯했다.민설아는 엄마에게 살짝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그럼요. 완전 힘들었어요. 엄마, 이번엔 맛있는 거 많이 해줘야 이 피로가 풀릴 거예요!”엄마는 그녀의 코끝을 톡 건드리며 웃었다.“우리 딸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엄마가 다 해줄게!”세 사람은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짐을 내려놓자마자 아빠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고 엄마는 딸을 방으로 데려갔다.햇살이 가득 비치는 방과 정갈하게 정리된 가구를 본 민설아는 가방을 던져두고 침대로 벌렁 누웠다.“아, 이 침대 진짜 푹신하네요. 역시 엄마가 저를 제일 잘 아시네요!”엄마는 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좀 쉬어. 밥이 다 되면 부를게.”민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가 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햇살 냄새가 스며든 이불을 맡으며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곧 그녀의 눈꺼풀은 무거워졌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아빠는 요리가 준비되자 그는 민설아가 자는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는 창문에 커튼을 살짝 쳐주고 나가려 했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리기 시작했다.아빠는 혹시나 딸이 깰까 봐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주방으로 들어간 그는 계속 울리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화면에는 윤지훈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아빠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옆에 있던
부모님의 질문에 민설아는 순간 굳어버렸다.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대학에 입학하던 해, 부모님은 해외로 이민을 떠나며 그녀에게도 함께 나가자고 했다.하지만 윤지훈을 좋아하게 된 그녀는 끝까지 국내에 남겠다고 버텼다.부모님은 딸의 연애를 크게 반대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먼저 고백해 시작한 관계였다는 이유로 감히 그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부모님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했다.특히 부모님은 모든 일을 궁금해하며 꼬치꼬치 묻는 성격이라 이야기를 꺼내면 질문 세례를 피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3년 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그동안 부모님은 계속 유학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는 여러 핑계를 대며 미뤘다.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도 입을 열지 않자 부모님은 딸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다.그녀도 진실을 털어놓을까 고민하던 찰나 윤지훈의 컴퓨터에서 서예슬의 사진들을 발견하게 됐다.그때부터 몇 달 동안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시작됐다.그녀의 부모님은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교복에서 웨딩드레스로 이어지는 사랑을 했다.27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서로를 여전히 애틋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그녀에게 자신의 연애가 혼자만의 착각이자 비참한 실패였다는 사실은 더욱 가혹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진실을 완전히 덮어두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첫날부터 비밀은 들통나고 말았다.엄마는 말없이 고개 숙인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옆에 앉은 아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됐어, 됐어. 밥부터 먹자.”세 사람은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다.민설아는 부모님의 묵직한 시선과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 윤지훈은 전 남자 친구예요. 2년 정도 사귀었는데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거짓말 반, 진심 반으로 털어놓자 부모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던 듯 별로 놀라지 않았다.아빠가 먼저 입을 뗐다.“그 남자는
엄마의 도움으로 민설아는 단 한 시간 만에 새로 이사한 방을 정리했다.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녀는 샤워를 끝내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져 곧장 잠들었다.깨어났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6시였다. 무려 10시간 넘게 잤다는 사실에 그녀는 놀랐다.그리고 그녀는 침대에 기대어 이불을 감싸안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민설아는 완전히 낯선 공간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곳이 파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몇 분이 걸렸다.하지만 옆방에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민설아는 낯선 환경에 대한 불편함도 조금씩 사라졌다. 그때 손안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화면을 열어보니 익숙한 번호가 떴다.비록 저장된 이름은 없었지만 그녀는 이 번호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윤지훈이었다.‘또 전화를 걸다니...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나? 설마 나한테 뭐라고 하려고 그러는 건가?’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잠을 깨우고 체념한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먼저 말을 꺼냈다.“지훈아, 나도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어. 우리가 연인으로서는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헤어지자고 한 거야. 어차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이렇게 깔끔하게 끝내자.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아줘.”한 번에 말을 쏟아낸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전화기 너머를 기다렸다.하지만 돌아온 것은 긴 침묵과 점점 무거워지는 그의 숨소리뿐이었다.2분쯤 지났을까... 윤지훈의 지친 듯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고 그냥 우리가 안 맞다는 말로 끝내려는 거야?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내가 무례한 건가...?’민설아는 잠시 생각했지만 스스로는 잘못한 게 없다고 여겼다.그래도 문제를 끝내기 위해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그의 단호한 말에 민설아는 당황했다.“난 지금 서울에 없어. 만날 수 없어.”그러나 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윤지
윤지훈도 민설아의 엄마가 한 말이 모두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자신도 수없이 다짐하고 설득했지만 눈을 감기만 하면 그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머릿속을 채웠다.그의 인생에서 누군가의 온전한 사랑을 받는 건 늘 간절한 바람이었다.한때 그 사람은 서예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저 친구로 남길 원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민설아가 떠나간 뒤에야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이미 곁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뒤늦은 후회와 죄책감에 이성은 사라졌고 그는 오로지 이 관계를 다시 붙잡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하지만 현실은 그의 행동이 민설아를 더 멀어지게 할 뿐임을 보여주었다.혼란과 괴로움, 집착과 포기가 교차하며 윤지훈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갈등했다.한편으로는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붙잡고 싶다는 본능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민설아의 엄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너희 둘 다 아직 젊잖아. 살아가다 보면 더 많은 일을 겪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거야. 이미 끝난 관계에 계속 매달리다 보면 서로의 앞길만 막을 뿐이야. 이제는 설아 곁에서 물러나서 너도 새로운 미래를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윤지훈이 병원에 머물던 기간 동안 민설아는 개강 직전에 딱 한 번 그를 찾아갔다.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다시 만났을 때는 과거의 냉정한 태도도, 얼마 전까지 보였던 집착도 모두 사라졌다.헤어진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은 차분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대화 주제는 더 이상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고 서로의 미래에 대해 나눌 수 있었다.윤지훈은 몸이 회복되면 한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했다.그의 말을 들은 민설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진심으로 응원했다.“너라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야. 네 앞길에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바랄게.”그녀의 미소를 본 윤지훈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너는
민설아가 믿지 않는 표정을 짓자 윤지훈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사실 내가 이렇게 내성적인 성격이 된 것도 부모님이 늘 바쁘셔서 나를 잘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야. 두 분은 다 각지로 출장을 다니시느라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어. 이번에 다친 것도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서 아마 오시지 않을 거야."그의 얼굴에는 거짓말을 할 때 특유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민설아는 그의 말을 조금은 믿기 시작했다.“그럼 서예슬한테도 연락 안 할 거야?”그녀의 질문에 윤지훈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대답했다.“예슬이는 나한테 별로 관심 없어. 솔직히 내가 예전에 너무 좋아해서 예슬한테 모든 걸 맞춰줬을 뿐이야. 서예슬은 나의 그런 태도를 즐기기만 했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그의 말에 민설아는 조금 놀랐다.윤지후 역시 자신처럼 사랑에서 일방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이었다니.예전에 서예슬이 윤지훈을 무시하면서도 그를 곁에 두던 모습이 떠오르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결국에는 인과응보였네.’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분위기를 고려해 웃음을 참은 민설아는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며 말했다.“네가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은 내가 챙길게. 너는 그냥 치료에만 전념해.”그 말을 듣고 윤지훈은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예상 밖의 대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알았어. 여기서 잘 있을게. 네가 와줄 때까지 기다릴게.”민설아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병실을 빠져나갔다.윤지훈은 그녀를 보내며 속으로 기쁨을 삼켰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민설아의 엄마였다.그가 가득했던 기대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민설아의 엄마가 보온병을 들고 병실로 들어오자 윤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머님, 설아는 어디 갔나요?”민설아의 엄마는 보온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를 흘끗 쳐다봤다.“설아는 회사에 갔어. 앞으로도 바빠서 여기 오긴 어려울 거야. 내가 대신 올 테니 필요한
민설아는 윤지훈이 자기 말을 그렇게 이해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내가 물어본 건 넌 네 목숨이 아까운지도 모르냐는 거야.”하지만 윤지훈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너를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 필요 없어.”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민설아는 순간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몇 달 전 같았으면 이런 고백에 감동해서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멍한 침묵으로 일관했다.윤지훈은 그녀의 반응이 없자 조급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넌 어디 다친 데 않았지? 내가 늦게 와서 많이 놀랐을 텐데...”그의 말에 민설아는 사건 후 계속 머리를 맴돌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그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며 윤지훈에게 질문을 던졌다.“근데 넌 왜 내 뒤를 따라온 거야?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순 없겠지.”그는 그녀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는지 한순간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짧은 침묵은 민설아의 의심을 더욱 확신으로 바꾸었다.그녀의 표정은 점점 냉랭해졌고 윤지훈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느꼈다.결국 그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내가 인턴으로 있는 회사가 네가 사는 건물 바로 맞은편이야. 오늘 퇴근길에 네가 평소랑 다른 길로 가길래 그냥 따라가 본 거야. 어디 가는지 궁금했는데 네가 강도를 만나는 걸 보게 된 거지. 지갑에 중요한 서류라도 있을까 봐 쫓아간 거야. 나도 그들이 칼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그는 민설아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미안해. 설아야, 일부러 네 뒤를 따라다닌 건 아니었어. 그냥...”하지만 민설아는 그의 말을 끊고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오늘만 그랬던 거야? 아니면 계속 나를 따라다닌 거야?”윤지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변명을 꺼냈다.“꼭 따라다녔다고 볼 순 없어. 퇴근 시간이 비슷하다 보니 우연히 너와 비슷한 시간에 집에 들어간 거야.”그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같았다.두세 달 동안 마주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민설아는 자
윤지훈이 칼에 찔린 건 다행히 급소를 피했고 적시에 응급처치를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그 소식을 들은 민설아는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한 뒤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는 윤지훈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테이블 위에는 핏자국이 선명한 지갑과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붉은 흔적을 보자 민설아는 아까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숨을 고르는 윤지훈을 보며 그녀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퇴근길에 강도를 만난 것도 모자라 윤지훈이 왜 거기서 나타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혹시... 계속 나를 따라다닌 걸까? 그렇다면 난 왜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사이 부모님이 병원에 도착했다.셋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엄마는 병실에 남아 윤지훈을 돌보기로 했고 민설아는 아빠와 함께 경찰서를 찾아 사건 신고를 하러 갔다.신고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윤지훈이 깨어났다는 연락이 왔다.민설아와 아빠는 서둘러 병실로 돌아왔다.병실 앞에 앉아 있던 엄마는 민설아를 보며 들어가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아빠도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엄마가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결국 아빠는 딸이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민설아는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잡은 뒤 병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윤지훈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꽂혔고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민설아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채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짧게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윤지훈은 그녀가 곧 나가버릴까 봐 안절부절못했다.급한 마음에 침대 옆 의자를 끌어오려다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고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민설아는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간호사를 부르러 가려 했다.“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날 이후, 민설아는 윤지훈과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이 아니면 거의 볼 일이 없었다.윤지훈은 매번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지만 민설아는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못 본 척하며 빠르게 지나쳐 갔고 윤지훈은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다음번에 마주치면 또다시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곤 했다.시간은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갔다.윤지훈이라는 다소 신경 쓰이는 이웃을 제외하면 민설아의 일상은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로웠다.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인턴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그녀는 인턴 마무리와 새 학기 준비로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이며 바깥일로 정신없이 지냈다.그날도 퇴근 후, 곧 다가올 가을을 맞이할 겉옷을 몇 벌 사기 위해 쇼핑에 나섰다.적당한 외투를 고르고 계산을 마친 뒤 그녀는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한적한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이어폰을 끼고 모자를 눌러쓴 채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는 자신을 따라오던 두 외국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골목 깊숙이 들어섰을 때 두 남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그제야 민설아는 자신이 강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주변은 텅 비었고 두 남자는 번뜩이는 칼을 들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겁에 질린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지갑을 조용히 내밀었다.그들은 물건을 낚아채고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벽에 기대 숨을 고르던 그녀의 앞을 누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놀라 고개를 들자, 윤지훈이 강도들을 쫓아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윤지훈은 뒤처지던 강도의 어깨를 잡아채며 지갑을 되찾으려 했다.강도는 반항하며 소리를 질렀고 그의 동료도 돌아와 가세했다.셋은 한복판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이를 본 민설아는 강도들이 들고 있는 칼이 생각나 더욱 불안해졌다.큰 사고가 날까 두려워진 그녀는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고 골목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경찰이야! 경찰이야!”그
윤지훈은 한참을 생각하다가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맞아, 서예슬을 좋아했던 적 있어. 하지만 그건 정말 옛날얘기야. 설아야, 너랑 사귀고 나서부터는 너한테 마음이 갔어. 예슬이는 이제 그냥 친구일 뿐이야.”친구라는 말에 민설아의 머릿속엔 귀신의 집 앞에서 윤지훈과 서예슬이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이성 친구끼리 키스를 한단 말이야?’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섞인 냉소적인 미소가 번졌다.“만약 서예슬이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지금까지도 네 차갑고 절제된 태도가 사랑이라고 믿으며 살았을지도 몰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네 사랑이 뭔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어. 내가 본 건 네가 서예슬에게 쏟는 관심과 배려뿐이었어. 너한테 예슬이가 친구라면 나는 네게 친구만도 못한 존재였던 거겠지. 지훈아, 너도 그만 자신을 속여. 네가 진짜로 좋아했던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어.”민설아의 말이 끝나자 민설아의 부모님은 서로를 쳐다봤다.두 사람의 눈엔 놀람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짧은 대화만으로도 딸이 이 관계에서 겪었던 상처가 그녀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전화기 너머의 윤지훈은 할 말을 잃었고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민설아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하지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 부모님의 표정을 보니 두 분 모두 심각해 보였다.그녀는 황급히 태도를 바꾸며 말했다.“헤어지던 날, 난 너에 대한 모든 사랑을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어. 그러니까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야. 우리에겐 과거는 있어도 미래는 없다는 거야.”차갑게 말을 마친 그녀는 윤지훈이 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그리고는 홀가분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께 눈을 깜빡였다.“저 방금 멋있었죠? 엄마 아빠 닮아서 그런가?”민설아의 부모님은 눈가가 붉어진 채 딸을 꼭 끌어안았다.“정말 멋졌어. 우리 설아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설아야, 앞으로는 힘든 일이 생기면 혼자
민설아가 온다고 하니 엄마는 그녀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딸의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을 본 부모님은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설아야, 무슨 일이니?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어? 아니면 새로 이사한 집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돌아오는 길 내내 윤지훈이 바로 옆집으로 이사 온 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던 민설아는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제 발을 밟아서 조금 기분이 상했을 뿐이에요.”딸의 억지스러운 미소에 부모님은 딱히 믿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로 더는 묻지 않고 손을 씻고 밥을 먹으라며 재촉했다.그러나 이렇게 푸짐한 한 상 차림에도 민설아는 계속 마음이 산만했다.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민설아는 먹던 갈비를 씹는 둥 마는 둥 삼키지 않고 입에 물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아빠는 엄마와 눈빛을 교환하며 신호를 보냈고 엄마는 눈치를 챈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설아야,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적응이 조금 어려운 건 당연해.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엄마 아빠한테 말해보렴. 우리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잖아.”부모님의 따뜻한 시선에 민설아의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그녀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말을 꺼냈다.“사실, 오늘 퇴근하고 집에 오다가 윤지훈... 그러니까 제 전 남자 친구를 마주쳤어요.”이 말을 들은 아빠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갑자기 식탁을 손으로 쾅 치셨다.“뭐야, 그놈이 스토커야? 이미 끝난 사인데 왜 또 나타난 거야? 설아야, 밥 먹고 나랑 가서 확실히 따져보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민설아와 엄마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민설아는 서둘러 아빠의 손을 붙잡으며 진정시켰다.“아빠, 진정하세요. 제가 보기엔 그가 저를 쫓아다니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새 학기까지 아직 몇 달의 시간이 남아있었다.민설아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근처 광고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다.평면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이 분야에서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학교 출신답게 상사와 동료들의 많은 배려를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단 하나의 문제는 회사가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긴 출퇴근 시간 때문에 피곤할까 봐 걱정된 부모님은 회사 근처에 작은 원룸을 빌려주었고 주말마다 집으로 오라고 권했다.독립된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설아는 파리의 삶에 금세 적응했다.그녀는 매일 아침 8시에 가방을 메고 하품을 참으며 출근길에 올랐다.그러던 어느 날, 원룸 맞은편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에 새 이웃이 들어온 것을 발견했다.호기심이 동해 누군지 확인해 보려던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그녀는 호기심을 접고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매끄러운 런던 억양이 섞인 낮고 차분한 목소리.민설아는 순간 멈칫하며 속으로 되뇌었다.‘윤지훈? 설마 지훈이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머릿속을 스친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출근길에 올랐다.그날 회사에서 그녀는 여느 때처럼 주어진 일에 몰두했다.일이 워낙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결국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옆자리 동료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마침 금요일이라 그녀는 잠시 집에 들러 짐을 챙기고 부모님 댁으로 가기로 했다.저녁 무렵, 원룸에 돌아온 그녀는 맞은편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흘낏 보고 나서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짐을 챙겨 나서려던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춰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한 사람이 내렸고 그녀는 무심코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타려고 했다.그러나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았다.‘누구야, 이렇게 무례하게.’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얼굴이 굳어졌다.“저녁은 먹었어?”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 사람은 윤지훈이었다.“
차가운 술이 얼굴을 적시자 윤지훈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고는 서예슬의 말을 되뇌었다.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몇 분이 걸렸지만 결국 그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그는 민설아를 좋아하게 된 게 분명했다.‘아니라면, 왜 이별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가슴이 아팠을까?’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맴돌았고 답은 점점 확실해졌다.윤지훈은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그래. 난 민설아를 좋아해.”그 말을 들은 서예슬은 이성을 잃었고 다가가 윤지훈의 뺨을 세게 때리며 외쳤다.“미쳤어? 민설아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계속 잊지 못하는 건데?”그 한 대는 윤지훈의 정신을 더 맑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우리는 3년을 함께했어. 설아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어. 내가 문제였을 뿐이야.”“근데 너희 이미 끝났잖아. 헤어졌다고!”서예슬은 절박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고 윤지훈은 고개를 떨군 채 더 깊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맞아, 끝났어. 하지만 난 설아를 떠날 수 없어. 5일 후에 나도 파리로 갈 거야. 설아를 다시 찾아서 설득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사람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윤지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서예슬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람은 윤지훈이 서예슬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서예슬이 4년 동안 해외에 있을 때 윤지훈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민설아를 위해 파리까지 찾아간다고? 그럼 난 뭔데?’룸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체면이 깎일 대로 깎인 그녀는 억울하고 화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비틀거리며 방을 나가버렸다.방 안의 친구들은 서로를 쳐다보다 결국 윤지훈에게 시선을 돌렸다.“지훈아, 너 정말 프랑스로 갈 거야? 유학 준비하는 거야?”윤지훈은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