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희는 중상을 입었고 그녀의 장풍을 맞은 고월영도 혼수상태가 되었다.왕부의 의원들은 한참을 바쁘게 돌아쳐야 했다.지언은 고월영이 왜 이런 미친 행각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낱낱이 조사했다.현왕의 거처로 돌아온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아뢰었다.“시안이 목을 매달아… 자결했습니다.”문밖을 지키던 연일도 그 말을 듣고 어깨를 흠칫 떨었다.침상 앞에 선 강현준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받아들였다.강현준은 고개를 돌리고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지언에게 물었다.“이유가 뭐지?”지언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시안이 남긴 유서였다.“아가씨, 죄송해요. 그 여자 말이 맞았어요. 제가 살아 있는 자체가 아가씨의 짐이었군요. 저 때문에 아가씨가 곤란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그래서 먼저 갈게요. 제가 떠나면 더 이상 현왕 전하께서도 제 목숨을 가지고 아가씨를 협박하지 못하겠죠. 이제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함께할 수 없어서 죄송해요.”강현준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시안이 남긴 게 확실하느냐?”“그건… 잘 모릅니다.”지언은 조심스럽게 고월영의 얼굴을 살폈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에게서는 생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아씨께서 이런 격한 반응을 보였다는 건 이 유서가 시안 본인의 것이라는 걸 증명하지 않을까요?”“무안희가 직전에 찾아간 적이 있다고?”“예, 어제 월영 아씨의 거처에서 나오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다만 그때 아씨는 장군댁 여덟 째 아가씨의 거처에 가 있어서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시안을 직접 찾아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지언도 이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무안희가 직접적으로 월영과 시안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시안의 유서에서 나온 그 여자는 아마 무안희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무안희가 가서 무슨 말을
한편.“연일, 너 이게 뭐 하는 짓인거냐!”지언은 무안희의 침소 앞에서 연일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아까부터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난원을 물렸을 때 따라 나온 것뿐인데 아니나 다를까 무안희의 침소 마당에서 독기를 가득 품은 연일을 발견했다.“무안희의 내공으로 마음 먹고 피했으면 거의 탈진 상태인 월영 아씨의 손에 다칠 이유가 없단 말이다!”연일의 두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이건 분명한 고육책이야! 일부러 다친 거라고!”“전하께서 그걸 모르셨을 것 같아?”지언은 한심하다는 듯이 동료를 바라보며 말했다.“전하는 네 생각보다 더 현명하신 분이야! 하지만 어떡해? 무안희가 시안을 죽인 것도 아니고 약간 자극을 줬을 뿐인데 시안이 스스로 죽어버린 것뿐이라고!”사실 이런 말을 하는 지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그렇게 단순하고 생기발랄하던 어린 여자애가, 며칠 전까지도 그에게 너무하다며 난리를 부리던 여자애가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은 몰랐다.지언도 속이 말이 아니었다.하지만 죽은 사람을 되살릴 길도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연일도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당장 저 안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무안희에게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아무런 반항 능력도 없는 여인을 죽일 만큼 그는 잔인하지 않았다.하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 사건이 없어도 고월영은 왕부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그런데 옆에서 위로해 줄 유일한 사람인 시안마저 죽어버렸다.“어쩌면… 처음부터 우리가 오해했던 게 아닐까?”연일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지언에게 말했다.지언이 움찔하며 사나운 표정으로 반박했다.“아씨가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전에 했던 잘못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야!”“지언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연일이 실망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너도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니야? 우리가 아씨를 억울한 처지로 내몬 것 같아서 후회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그런 거 아니야!”지언이 언성을 높였다.
고월영은 기절하고 3일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기절한 3일 동안 강현준은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서 내공으로 그녀의 상처를 치유했다.내상은 이미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하지만 난원이 예상했던 것처럼 그녀가 입은 마음의 상처가 언제 치유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정신을 차린 그녀는 울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행동했다.시안을 영하각의 뒷산에 묻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고월영은 당장 가보겠다며 서두르지 않았다.그녀는 덤덤하게 물을 마시고 식사를 했다.체력을 충분히 회복한 뒤에야 그녀는 문을 나섰다.방에는 강현준이 항상 함께 있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강현준은 그 모습에 화가 났지만 정작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갑갑함을 홀로 안고 있었다.고월영은 그 길로 영하각으로 향했고 이번에는 아무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강현준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지언과 함께 입궁했다.고월영의 호위를 맡은 사람은 연이수였다.그는 준비해 온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씨, 이건….”연이수는 저도 모르게 뒤쪽을 살폈다.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그 사람을 위해서였다.“이건 저희 왕부에서 시안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은 것들입니다. 시안이에게 전해질 수 있게 같이 태우시죠.”“사람이 죽었는데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지? 이 세상에 정말 영혼이란 게 존재한다고 믿느냐?”고월영은 시안의 묘비 앞에 앉아 손을 뻗어 묘비에 새겨진 글짜를 어루만졌다.그녀는 누가 시안의 후사를 처리해 주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다만 왕부에 아직도 그들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시안의 무덤 앞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연이수는 차마 그만 일어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결국 몸을 숨기고 있던 연일이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주었다.“아씨, 바람이 찹니다. 이러다가 또 몸져누워요
고월영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연일은 차갑게 식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이성을 되찾았다.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그녀가 차디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이 무슨 불경한 짓이란 말인가!‘미쳤구나!’“송구합니다….”“네가 나를 원한다고 들었다.”고월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연일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그녀가 중심을 잡은 뒤에야 그는 손을 거두고 원래 있던 자리로 물러섰다.“시안의 후사를 네가 처리해 주었느냐?”고월영이 물었다.연일은 공치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맙다.”“아씨,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행한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 드린 말씀은 진심이었지만 절대 불경한 짓을 저지를 마음은 없었습니다!”고월영은 검게 탄 연일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강현준 형제에 비해 준수하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였지만 선 굵은 이목구비에 드러난 강인함이 있었다.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네가 불경한 마음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너의 그런 발언 때문에 난 현왕 전하의 무자비한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아씨….”연일이 흠칫하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고월영은 싸늘한 얼굴로 그를 지나쳐 영하각을 떠났다.이미 그녀에게 속한 곳이 아니었다.다만 시안이 여기 묻혀 있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다.연일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는 차마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슬퍼하고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고월영은 더 이상의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슬픈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너무 담담해서 무슨 생
고여추는 동생이 좀 이상해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수족이 세상을 등지고 떠났으니 분명 크게 상심했을 텐데 고월영의 표정은 너무도 담담했다.“언니,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세요? 장군부에 뭐 심각한 일이라도 생겼나요?”고월영이 물었다.고여추는 착잡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다가 울먹이며 말했다.“아직은 별일 없어. 오늘 현왕 전하께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입궁하셨는데 이 일과 연관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구나.”“너는 장군부 일에 신경 쓰지 말거라. 무슨 소식이 있으면 내가 와서 전해주마.”고여추는 그제야 동생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고월영이 두르고 있는 망토를 보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앞으로 아무 사내가 주는 옷을 몸에 두르지 말거라.”말을 마친 그녀는 연일이 입혀준 망토를 벗겨 바닥에 던졌다.고월영이 담담히 말했다.“언니도 무슨 소문을 들은 건가요?”고여추는 그 질문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고월영도 더 캐묻지 않고 개의치 않은 태도를 보였다.“월영아.”고여추는 그녀의 담담한 얼굴을 보면서도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월영아, 정말… 괜찮은 거니?”고월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나는 네가 시안이 때문에….”고여추는 시안의 죽음에 이처럼 담담한 태도를 보이는 동생이 어딘가 석연치 않아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월영아, 마음이 힘들면 언니한테 얘기해. 혼자 참지만 말고.”“저 정말 괜찮아요.”고월영은 피곤한 기색을 하고 침상으로 다가갔다.“언니, 저 좀 자고 싶어요.”“그래. 어서 자. 언니가 옆에 있어줄게.”“저 정말 괜찮으니까 그만 돌아가요.”“안돼. 이번에는 언니가 꼭 옆에 있어줄게.”고여추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월영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녀는 그렇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잠을 잤다.왕부로 돌아온 강현준이 지언을 시켜 그녀를 침소로 불렀다.고여추는
고월영은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담담하게 물었다.“전하께서 원하던 모습 아닌가요?”홧김에 하는 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강현준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녀가 고분고분하기를 바랐지만 절대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그가 원하던 느낌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지금의 고월영은 허수아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그래서 이제는 내가 뭘 시키든 고분고분 따르겠다는 것이냐?”고월영은 대답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강현준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그녀를 그대로 안고 침상으로 향했다.고월영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그 어떤 반항이나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벗거라!”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자리에서 일어선 고월영은 손을 뻗어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강현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고월영이 상의를 잡아당기려던 순간,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치켜올렸다.“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고월영은 그와 차분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담담히 말했다.“어떻게 하면 전하의 화를 돋우지 않고 덜 아프고 평안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강현준의 가슴을 찔렀다.참다못한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난 한 번도 네 목숨을 취하려 한 적 없단 말이다!”“전하께서는 시안이도 죽일 생각이 없으셨죠. 그렇지 않나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죽어버렸다.“하! 지금 나를 탓하는 게냐?”강현준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고월영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고 싶었지만 그가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화를 돋우기 싫다는 말도 진심이었다.결국 그녀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전하, 계속 옷을 벗을까요?”강현준은 홧김에 그녀를 밀쳐버렸다.시체처럼 생기 없는 그녀의 모습에 흥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그가 씩씩거리며 편전으로 향하자 고월영은 천천히 옷고름을 매고
강현준은 오늘따라 술이 쓰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렇게 몇 잔을 더 마신 뒤에 그는 고월영에게 앉아서 같이 먹자고 권했다.사실 그녀가 많이 피곤해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나한테 할 말이 없느냐?”식사가 끝난 뒤, 시종들이 와서 식탁을 정돈하고 차와 다과를 내왔다.강현준은 너무 고요해서 오싹한 감마저 드는 고월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다.그는 속이 타들어가는데 정작 이 얄미운 여자는 한 점 동요 없이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강현준은 왠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고월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왕부에 침입해서 전하를 습격한 자가 제 큰오라버니가 맞나요?”“그렇다.”강현준의 대답은 확고했다.“내가 직접 그자를 제압해서 궁으로 보냈다. 지금 옥에 갇힌 자가 고용기가 아니라면 모를까.”“그럼 저와 함께 옥으로 가서 오라버니가 맞는지만 확인할 수 있을까요?”고월영이 또 물었다.“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강현준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오늘 이토록 얌전하게 굴었던 게 다 이걸 위해서였나?그는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고월영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답했다.“운에 맡겼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강현준이 물었다.고월영은 그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담담히 말했다.“그럼 전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제가 더 노력해야겠지요.”강현준은 홧김에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이게 지금 고분고분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거냐?”그의 눈에 이는 도발이었다.고월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그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그 말을 믿으면 그건 사리분별 못하는 머저리인 거지!”그날 저녁.궁중의 대문이 열리고 한 쌍의 남녀가 안으로 들어갔다.강현준은 손짓 하나로 주변을 물렸다.고월영은 천천히 불빛을 더듬어 앞으로 걸어갔다. 옥 중은 너무도 조용했고 주변에는 아우성치는 죄인들도 없었다.고용기는 옥 중의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괜찮으시면 옷을 벗고 저에게 좀 보여줄 수 있을까요?”고용기는 두말 없이 겉옷을 벗었다.그는 궁금한 얼굴로 동생에게 물었다.“충독과 충술에 대해 전에 배운 적 있느냐?”“현우 오라버니를 치유할 때 서책으로 조금 접했을 뿐입니다.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어요.”고월영은 미리 가져온 상자를 꺼내 침으로 고용기의 심맥에서 피를 뽑아냈다.상당히 많은 양을 뽑았기에 고용기의 얼굴이 약간 창백하게 질렸다.“당분간은 좀 괴로울 거예요. 심맥에서 피를 뽑았으니 기혈 부족으로 어지럼증도 느낄 거고요. 하지만 이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어요.”고월영은 피곤한 기색을 띄고 있는 오라버니를 위안했다.“아린 낭자와 제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오라버니도 몸 조심하세요.”무아린 얘기가 나오자 고용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다음에 아린 낭자를 보면 더 이상 나를 위해 헛수고하지 말라고 전해주렴.”“아린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아니었나요?”“아니면 다른 낭자를 마음에 품은 건가요? 운조에서 만난 여인인가요?”고용기가 만약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었다면 그녀가 몰랐을 리 없었다.그런데 출정하고 돌아와서 갑자기 이러고 있으니 그 여인이 누군지 갑자기 궁금해졌다.고용기는 황급히 동생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었어. 이미 다 잊었단다.”“하지만 그 인연 때문에 아린 낭자의 마음을 못 받아주시는 거잖아요.”고월영은 사랑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용기가 스스로 내려놓지 않은 이상, 누가 설득해도 소용없었다.“오라버니가 그 여인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처럼 아린 낭자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그래서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어요. 아린 낭자 스스로 택한 길이니까요. 어쩌면 언젠가는 스스로 내려놓게 되겠지요.”“월영아….”고용기는 차분한 동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한 달 사이에 동생이 많이 성장해 버린 느낌이 들었다.“너는 즐겁지 않구나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