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준은 황제의 어명으로 급히 불려왔다.걸음을 내디디며 들어올 때 옷자락에는 먼지가 날렸고, 방금 갑옷을 벗었지만 피비린내는 여전히 짙고 강했다.대전에는 대부분 문관들이었고 강현준의 이 피비린내를 마주하니 하나같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아바마마."강현준이 앞으로 오자 그 잘생긴 얼굴에는 아직 핏자국이 묻어있었다.소태감이 조심스레 말했다."폐하께서 전하에게 회조 후 즉시 알현하라 명하셔서, 전하께서는 아직 씻을 겨를이 없으셨습니다..."황제는 손을 흔들었고 소태감은 물러갔다.강현준의 싸늘한 눈동자가 대전 안의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오늘 정왕은 없었지만 웃기게도 하나같이 정왕과 비교적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다.그는 냉소하며 말했다."여러분, 또 본 왕을 토벌하려 온 것입니까?"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도 쉴 새 없이 입방정을 떨던 사람들이 지금은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현왕의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도도하고 패기 있는 기세는 확실히 사람을 무섭게 한다."폐하..."안양 대감은 황제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혈전을 벌이고 온 아들을 보며 난감한 듯 말했다."준아, 운 대감의 일은...""운청해는 난적과 결탁하여 백성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소자는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운청해 한 사람에게만 처형을 내렸고 처자식이 화를 입게 하지 않았습니다.""운청해 스스로 불을 지펴 집 전체를 불태워 처자식과 함께 황천으로 갔습니다.""이 일은 소자가 아직 조사하고 있습니다. 운청해는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고 진정한 배후는 아직도 날뛰고 있을 것입니다.""그럼 진성의 대군은 왜 굳이 적토 부락과 충돌하여 남령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이냐?"안양 대감이 앞으로 나아가 큰 소리로 말했다."분명히 그 전투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정왕께서 이미 적토 부락의 수령과...""적토 아적술이 협의를 체결하자마자 즉시 오유와 함께 진성을 기습했습니다!"강현준은 싸늘한 시선을 그에게로 돌리고 차갑게 말했다."진성의 백
고월영은 오늘 일찍 안비를 따라 궁으로 들어가 태후를 모시고 재계하며 염불했다.점심이 지나자 안비는 강현우를 데리고 침궁으로 돌아가 쉬었다. 하지만 태후는 고월영을 남겨두고 그녀를 끌고 불경을 연구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넘었다.태후가 스스로 지친 후에야 고월영을 놓아주었다. 때는 이미 오후였다.이미 졸린 시간을 지나쳤기 때문에 고월영은 태후를 달래어 돌아가 쉬게 한 후 홀로 태후의 침궁에서 한가로이 거닐기 시작했다.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으려 했지만 뒷마당에서 궁녀 내시들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현왕 전하께서 이번에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어. 그 상처에 폐하께서도 깜짝 놀라셨다네.""나도 들었어. 현왕께서 대전에서 옷을 벗으셔서 그 늙은이들이 겁에 질렸다네.""화는 입에서 나온다고, 입 조심해."누군가 바로 일깨워주었다.그러나 그 계집애는 화를 못 이기는 듯 분개하며 말했다."난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현왕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그들이 모두 전하를 토벌하고 있었다고 소춘 오라버니한테서 들었어!""그런데 전하께서 오시니까 어땠는 줄 알아? 하나같이 놀라서 혼비백산해서는 찍소리도 못했어.""아휴, 우리 전하께서는 정말 용감무쌍하셔, 전하를 한 번만 모실 수 있다면...""죽고 싶어? 이런 말도 함부로 하고, 목을 베이는 것이 무섭지 않은 거야?""무서울게 뭐 있어, 전 남령에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아가씨가 어디 있어? 전하에게 약을 전하러 간 그 궁녀 몇 명들이 다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봐봐.""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고월영은 장랑을 지나갔다.그 녀석이 또 다쳤다. 이번에는 얼마나 다쳤을까.그녀가 가려는 곳을 찾지도 못했는데 앞에서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지언 씨?"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왕비, 정말 여기 계셔서 다행입니다!"그녀를 보자 지언의 긴장했던 마음이 드디어 조금 풀렸다."왕비, 어서 전하를 뵈러 가십시오. 전하께서 많이 다치셨어요.
고월영은 지언에게 약 상자를 갖고 오라 하고 손을 써 강현준의 상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의 몸에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새로운 상처와 오래된 흉터,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의 흉터가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 또 적지 않은 새로운 상처가 추가되었다.보기만 해도 끔찍하다.지언은 목욕물을 받아왔고 이번에는 고월영 스스로 그를 도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히겠다고 요구했다.그녀는 강현준과 가까이 지내려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이 녀석... 고월영이 그에 대한 이해로, 그에게 스스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게 한다면 그는 반드시 단번에 목욕통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자신의 몸에 난 상처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든 말든 그저 바로 몸을 담굴 것이다.천하에 어떻게 이리 무지막지한 남자가 있을 수 있을까?"이 상처들은 이미 며칠이 되었는데, 왜 계속 처리하지 않았습니까?"그를 씻기고 난 뒤 고월영은 그를 침대에 기대게 했다. 그녀는 약을 들고 그의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시중드는 사람이 없어."강현준은 차갑게 대답했다.고월영의 손끝은 조금 멈칫했고 참다못해 말했다."현왕 전하께서 한 마디만 하면, 전 남령 반 이상의 아가씨들이 앞다투어 전하를 모실 것입니다.""너도 포함되냐?""사황형!""본 왕이 널 다치지도 않았는데, 왜 소리를 지르는 거야?"하지만 그 소리는 정말 듣기 좋다.오랫동안 듣지 않다 지금 들으니, 몸에 난 상처의 고통도 많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는 갑자기 약을 발라주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가 본 왕을 아프게 했어.""이렇게 심하게 다치셨으니 소독할 때 분명 아플 것입니다."고월영은 다른 생각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다."그럼 본 왕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강현준의 눈가에는 이상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녀는 그에게 마취를 놓아 줄 수도 없다."본 왕을 아프게 한 것을 인정한 이상, 본 왕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게
그 순간, 그의 눈 안에는 절망뿐이었다.그녀는 그가 왜 이 지경까지 절망하는지 모른다.그녀의 손은 마치 데인 것처럼 뜨거워져 바로 손을 거두었다.조심하지 않아 그의 상처를 잡아당겼다.강현준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아프다!그는 진정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도 아픔을 느낀다!마비될 정도로 아파도 여전히 아프다!"미안해요."그의 얼굴에서 스며나온 작은 식은땀을 보고 고월영은 자신이 정말 그를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강현준은 여전히 눈을 감았다.그의 이마와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점점 더 밀집되지 않았다면 고월영은 그가 잠든 줄로 알았을 것이다.그는 참고 있다.그는 영원히 참고 있는 것 같다."저는... 상처를 자를 겁니다."그녀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를 열어 사용할 모든 도구들을 꺼냈다.그녀는 수술칼을 들고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만약 아픈 게 무서우면, 제가 방법을 생각해 마취약을 얻어...""황조모께서는 한 시간만 주무셔."그가 덤덤히 말했다.고월영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그는 이 상황에서도 그녀를 위해 고려하고 있다.황조모가 잠에서 깨어나시면 그녀를 찾아올 것이다.오늘은 추석이라 그녀는 오후에 바삐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그럼... 사황형, 조금만 참으세요."수술칼을 누르자 선혈이 서서히 흘러나왔다.콩알만 한 땀방울이 강현준의 이마를 타고 끊임없이 떨어졌다.상처 속에는 온통 작은 모래다!고월영은 이를 보고 코가 시큰해졌다. 상처를 청결하며 가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남자의 미간은 시종 굳게 찌푸려졌고, 그녀도 그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다!"앞으로 상처를 입으면,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처리를 먼저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다시 잘라 정리를 해야 합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완쾌할 시기도 지체될 것이에요."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고월영은 자신이 한 말들을 그가 마음에 담아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이 남자는 도도해서 보통
강현준은 결국 잠이 들었다.고월영이 그에게 준 약 속에 몰래 편히 잘 수 있는 수면약을 넣었다.아픔으로 의식이 불분명해질 때 그는 잠이 들었다.지언이 뜨거운 물을 들고 들어왔을 때 고월영은 여전히 강현준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전하께서는 이 상태로 얼마나 지냈나요?"그녀가 물었다.지언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이 상태... 는 무슨 뜻입니까?""자포자기하고,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심지어..."고월영은 손끝을 약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지언을 바라보았다.덤덤한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 자신만이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다."심지어 가끔은 인생을 완전히... 포기하려 하고."지언은 손을 떨었고 하마터면 들고 있던 대야를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다행히 그는 빠르게 다시 단단히 잡아들었다.대야를 내려놓은 후 지언이 말했다."사실... 예전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싸우실 때에는 줄곧 이랬습니다. 다만 요즘..."지언의 마음은 무거웠다.한참 후에야 그는 말했다."최근 몇 차례 난적을 토벌할 때, 전하께서는 조금 충동적인 것 같았습니다. 결과를 따지지 않고 대가도 상관하지 않고 기어코 모든 난적을 베어 죽이려 했어요.""그가 돌아온 후 상처도 치료하지 않았는데, 다들 상관하지 않는 건가요?"고월영은 조금 화가 났다.강현준 자신이 상관을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지언과 같은 부하들도 신경을 쓰지 않는 건가?"난원은요? 그가 항상 사황형의 몸을 책임지지 않았나요?""난원은 군사들을 돌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상처는 전하께서 스스로 처리하셨어요.""그럼 지언 씨도 상관하지 않나요?""전하께서는 아무도 상관하지 못하게 하십니다."어떤 말들을 지언은 마음속에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조금 억울함이 있었다."왕비님과 안비 마마 마음속에는 여왕 전하뿐이십니다, 한 번도... 한 번도 저희 전하를 신경 써주지 않으셨어요. 전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이와 같았습니다...""지금
지난 한 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고월영의 손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아랫배로 옮겨졌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녀는 그저 배가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지언은 원래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정도만 말했을 뿐인데 왕비의 안색이 이렇게 일그러질 줄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얼굴이 창백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왕비?"지언은 놀라서 시선이 그녀의 손을 따라 그녀의 복부를 향했다."왕비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편찮으신가요?"젠장! 그는 이런 말들로 왕비를 자극하지 말았어야 했다!만약 전하께서 아신다면 전하는 그를 죽도록 미워할 것이다!"왕비, 제가... 제가 방자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하지만 고월영은 여전히 배를 움켜지고 창백한 얼굴이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지언은 놀라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왕비님, 제가 바로 어의를 청해오겠습니다!""돌... 돌아와요."고월영은 목이 쉬어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다급히 말했다."돌아와요. 난... 난 그저 음식을 잘못 먹었을 뿐이에요."지언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고월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애써 평온해 보이려 노력했다.그녀는 배를 가린 손을 치웠고 고개를 돌려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강현준을 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전하를 잘 모셔요. 전하의 몸은 사실 그다지 좋지 않아요. 출혈이 너무 많아 심히 허약해요, 그저 억지로 버티고 있을 뿐이지."전하에 관한 말을 꺼내자 지언의 마음은 괴로웠다. 고월영이 방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일은 단번에 잊어버렸다."왕비께서 전하를 기쁘게 할 방법을 생각해 주실 수 없나요? 적어도... 적어도 전하가... 인생이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해주세요."황실에서 태어나 본디 부성애가 별로 없는 데다 어머니도 그를 사랑해 주지 않고 다른 아이를 편애했다.
"사황형, 여기 앉으시면 안 됩니다."고월영이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하지만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바로 일어나려 했다.강현준은 긴 다리를 뻗어 자리에 앉았고 다리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눌렀다.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사황형!"고월영은 화나 나고 급해났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그의 행동은 조금 신중할 순 없는 건가?얼마나 많은 눈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네가 본 왕에게 오늘 술을 마시지 말라 하지 않았는가?"강현준은 고개를 숙여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콧방귀를 뀌었다."본 왕이 저리로 가서 저 녀석들에게 술을 권해 받았으면 하는 건가?""그럴 리가 있겠습니까!"그는 너무 심하게 다쳤다. 오후에 한 잠자고 나서 겨우 정신이 조금 나아졌다.오늘 밤에는 절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몸이 가장 중요하다.하지만 술을 안 마시면 그만이지, 왜 그녀를 들볶으려 하는 걸까?"사황형, 여긴 여인들이 앉는 자리입니다. 사황형께서는...""본 왕은 머리가 아프다."강현준의 팔꿈치는 탁자 위에 닿았고, 고개를 숙여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다.그 모습은 정말 아픈 듯해 보였다.고월영은 그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고 있으니 그를 쫓아낼 수도 없지 않은가?"일어나지도 않고 전하를 쫓아내지도 않을 테니 전하의 존귀한 다리를 치워주실 수 있겠습니까?"더 이상 연약한 척하지 않길! 현왕의 이 ‘연약한’모습이 자리에 있는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강현준은 여전히 기어오르고 있다."의자가 너무 작고 다리가 너무 길어 놓을 자리가 없다.""... 그럼 제가 자리를 옮겨드릴게요, 사황...""본 왕은 머리가 아프다."그는 계속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그럴듯한 모습으로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의 마음을 깨뜨렸는지 모른다.고월영은 정말 그에게 따귀를 때려 그를 단번에 날려보내고 싶었다!마치 누
저 여자가 감히 이런 태도로 현왕 전하와 얘기를 하다니!주위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나같이 간담이 서늘해져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있었다.그러다 아가씨들은 몹시 흥분해 하며 기다렸다!모두 현왕 전하가 그 자리에서 폭주하여 저 여자를 징벌하는 장면을 보려 기다리고 있었다.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현왕부의 저 여왕비가 너무 아름답게 생겼다는 것이다!오늘의 추석 연회에서 모든 양반 댁 아가씨들 중 누가 정성껏 치장하고 오지 않았나?하지만 저 여왕비는 수수한 흰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변변한 비녀 하나도 없었다.간단하고 단아한 모습이 마치 고의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온 그녀들을 풍자하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게도 너무 아름다웠다!누가 승복할 수 있을까?만약 이때 현왕 전하가 여왕비를 벌한다면, 그 모습은 아주 재밌을 것이다.강현준은 확실히 고월영을 노려보았고 눈빛도 아주 불친절했다.이 망할 계집애! 현우를 대할 때는 태도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현우와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는 마치 가끔 불어오는 바람처럼 부드러웠다.하지만 그를 대할 때는 사납기만 하다!감히 그릇을 그의 앞에 세게 내려놓고 귀찮다는 태도를 보이다니!강현준은 지금껏 지내오면서 한 번도 그를 이런 태도로 대하는 아가씨를 본 적 없다!고월영은 죽고 싶은 건가?"드실 거예요? 안 드시면 가져갈게요."고월영은 일부러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오늘 그가 너무 과했기 때문이다.그는 아직도 허벅지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누르고 있다.다른 사람들이야 안 보이겠지만, 주위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들과 내시들은 안 보일 리가 있을까?강현준은 여전히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다만 처음에 느껴진 불쾌함과 원망이 마지막에는 억울함이 되었다.그녀는 줄곧 그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월영은 하마터면 그의 눈가의 억울함에 놀랄 뻔했다.그녀는 화를 내던 것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현왕의 그 억울한 눈빛을 보자 심장이 갑자기 찢기듯이 시큰했고 아파졌다.이게 바로 가슴이 찢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