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씨, 설마 안비마마는 조금이라도 걱정되지 않으세요?”강현준은 유진을 향해 두 발자국 걸어갔다. 유진은 바로 강대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녀의 가슴팍의 혈기는 끊임없이 뒤집어졌다. 그녀는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현준씨, 저는 단지 도우려고 했을 뿐이예요!”“본왕이 니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 강현준의 눈길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본왕이 다시 한번 물어볼께. 오늘 밤, 그녀를 몇뺨 때렸니?”유진은 현재 그를 바라보았는데 분명 바로 능지당할 것 같은 공포감으로 휩싸였다.“니가 말을 하지 않으니 본왕은 그녀 얼굴의 모든 지인이 모두 니가 남긴 거라고 생각할께.”강현준은 손을 들어 올렸다.유진은 놀라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하나예요! 하나뿐이예요! 진짜예요! 진짜 한 번 밖에 …아!”강현준은 손을 휘둘렀다. 유진은 줄 끊어진 연처럼 날려가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얼굴은 화끈거렸다. 그녀는 피를 토하더니 저도모르게 손을 올려 자기의 얼굴을 만졌다. 뜨끈하고 걸죽하였다. 고개를 내려 보았더니 손에는 전부 피였다. “아! 아!” 유진은 놀라서 자기의 얼굴을 만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내 얼굴, 내 얼굴! 아!아!아아아…”그녀의 얼굴은 망가트려졌다. 강현준한테 철저히 망가졌다.“왜? 왜?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아,아,아아아…”피범벅이 되었다. 아무리 출중한 의술이나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하여도 치료해낼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망가졌으니 그녀의 평생이 모두 망가졌다고 볼 수 있다. 유진의 비명소리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함이 섞여있었다. 밖에 있던 시위들이 들었을 때도 온 몸에 소름을 끼쳤다. 강현준은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뼈를 찌르는듯한 차가운 눈길에는 아무런 정서적인 변동이 없었다. 유진은 얼마동안 비명을 질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무력해져 바닥에 미끄러져 머지 않은 곳에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남자의 마음은
이게 바로 진정한 현왕전하였다. 온 몸에서 뿜겨져 나오는 패기는 지옥에서부터 온 것 같이 보기만 하여도 얼음굴에 빠진 듯 하였다. 그가 걸어오고 있을 때 고월영은 저도모르게 침대안쪽으로 숨게 되었다. 눈길 하나 뿐이었지만 강현준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아무 온도가 없는 눈길은 그녀의 얼굴에 머물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방안의 온도는 무서울 정도로 낮았다. 고월영은 의식적으로 자기 몸의 이불을 잡았다. 추웠다. 허약한 몸은 차가운 온도로 인해 떨리기까지 하였다. 손은 자기의 몸을 지탱하여 앉았는데 이때 손은 너무 뻣쳐 힘들어져서 살짝 떨렸는데 갑자기 시큼하고 나른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지탱하지 않고 온 몸은 나른해지더니 미끄러 내려갔다. 한기가 덥쳐오더니 그의 거대한 모습은 눈깜짝할 사이에 침대옆에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줬다. 고월영은 놀라서 그의 손을 밀어버렸다. 아무 힘도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차갑게 밀렸다. “본왕이 두려워?” 강현준의 눈가에 남아있던 온도마저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고월영은 멍해져 가볍게 그를 밀고나서 자기절로 침대를 집고 앉았다. 머리속에는 유진이 떠올랐고 그녀의 피범벅이 된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두려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마귀보다 더 무서웠다. “니가 나를 동정해?” 강현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을 했다. 고월영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안비의 정신상태는 온정하지 않았다. 신경이 혼란스러워진것 같았다. 가여운 사람이다. 유진은 안비를 이용하여 강현준을 가까이 하고 안비를 손을 빌려 고월영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그녀를 동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방금 발생한 광경은 너무 비참하여 고월영이 보고 나서 마음속이 불편하였다. “현우씨를 보러 가고 싶어요!” 지금 그녀는 강현준과 단 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알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고월영은 이불을 제끼고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하였는데 손목은 그에게 불쑥 잡혔다.“그래서, 니 마음속에는 현우밖에 없느냐?”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모든 사람들이 신생을 얻은듯했다.오직 그 사람만!오직 그 혼자만 여전히 심연에서 발버둥 치고 있고, 여전히 지옥에서 연명하고 있다!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이 집에서,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월영은 강현준에게 눌렸다. 그녀가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고 할 때 그가 단번에 뒤집었다.그녀는 가장 수치스러운 자세로 그의 몸 아래에 엎드렸다."사황형, 제발 이러지 마세요!"그녀는 지금 반항할 힘이 없다.최상의 혈청을 제련하기 위해 그녀는 여러 날 동안 독을 복용했고, 지금은 온몸이 병적으로 허약해졌다.반항은커녕 손을 들어 올리기도 힘들다."사황형, 이 집은 좋아질 것입니다. 사황형, 제발..."고월영의 목소리는 다소 무기력하게 잠겨있었다.남자의 손바닥이 그녀의 등을 짓눌렀고 쉽게 그녀의 연약함이 느껴졌다.지금 이 계집애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을 정도로 여리다.마른 몸은 아직도 떨고 있었다.이 집은, 정말 좋아질 수 있을까?그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더 방자한 행동도 하지 않고 침대 옆에 앉아 높은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긴장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 고월영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글쎄 잠이 들었다.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잤다.깨어났을 때는 자신이 이미 영하각의 방으로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그날 이후로 그녀는 강현준을 본 적 없다.시안이 소식을 알아내고 조심스레 와서 보고했다."현왕 전하께서는 이유 없이 안양 대감 댁의 셋째 아가씨를 다치게 한 이유로 연명으로 토벌당했습니다. 지금 안양 대감과 정왕이 손을 잡고 전하를 상대하고 있어요.""황제 폐하께서도 전하를 책망하여 전하에게 난적을 평정하라 어디로 보내신 건지... 아이고, 자세한 소식은 저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누가 감히 말을 하지도 못하고.""이틀 전 전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상처도 입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날도 밝기 전에 또 성을 나가셨어요.""요즘 황성에 적지 않은 적국의 첩자가 잠복
이틀을 쉬었지만 고월영의 몸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뛰쳐나갈 때 발걸음이 비틀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을 졸였다.그는 바로 이불을 열어젖히고 쫓아가려 했다.안비는 재빨리 그를 도로 눕혔다."영이가 조용히 몸조리를 하라고 말했잖니, 벌써 영이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야?"강현우는 감히 듣지 않을 수 없었다.자신이 지금 겨우 좋아진 건 모두 영이가 목숨을 걸고 바꾼 것이다.만약 아끼지 않는다면 그녀의 노력을 짓밟는 것이다."하지만..."그녀는 아주 불편한 듯해 보였다.안비가 다급히 말했다."본 궁이 보러 갈 테니 넌 당황하지 말거라."강현우를 위로하고 안비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고월영은 장랑 끝에 서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시안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자 안비는 마음이 조여왔고 무언가가 마음속을 스쳐 지났다.안비는 이내 걸음을 재촉하며 다가갔다."영아, 너... 괜찮은 게냐?""전... 괜찮습니다."고월영은 겨우 가라앉히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입을 열자 바로 또 참을 수 없이 헛구역질을 했다."어서! 따뜻한 찻물을 가져오거라! 어서!"안비가 급히 말했다.그녀의 모습은 정말 이상하다.안비는 보고 몹시 긴장되었다.마음은 조마조마했다.가까스로 고월영은 구토의 충동을 멈추었다.시안의 시중을 받으며 따뜻한 찻물로 양치를 하고서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안비를 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전 정말 괜찮아요.""너..."안비는 말을 하려다 멈췄고 손을 흔들어 시녀들을 물러가게 했다. 시안마저도 쫓겨난 뒤에야 안비는 고월영의 손을 잡았다.고월영의 손은 너무도 차가웠다.안비는 다급해졌다."난원에게 맥을 짚어 보라 하자.""모비, 저도 의원입니다."고월영은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안비는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너... 너 설마...""그저 요 며칠 몸이 좋지 않아 그렇습니다. 어제는 몸살에 걸렸고 오늘은 또 음식을 잘못먹어
"... 뭐라고?"고월영의 심장은 거세게 부딪히는 것 같았다.그녀가... 두 달 동안 환경이 오지 않았다다니?그동안 고월영의 신경은 온통 강현우의 해독과 치료에 쏠려있어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두 달 넘어... 그럼 혼례를 올린 그날 밤 강현준과 함께인 후로 월사가 없었단 말이 아닌가?시안은 고월영의 곁에서 그녀를 보살피다 보니 아가씨의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시안도 어린 계집애일 뿐이라 처음에는 이 일을 알지도 못했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하지만 아가씨는 요즘 헛구역질을 자주 하고 식욕이 부진하며, 더욱 무서운 건 배가 가끔 은은히 아프다는 것이다."아가씨...""시안아, 헛소리하지 마!"고월영은 그녀를 노려보았다.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아가씨, 전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아가씨의 모습은... 정말..."이 모습은 그녀가 어렸을 때 향매 아주머니가 임신으로 구역질을 하던 모습과 너무 비슷했다."아가씨, 그냥 의원을 찾아보는 게 어때요?""나도 의원이다.""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맥을 짚어 본 적 없잖습니까."시안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아가씨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아가씨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독액을 주입했다...고월영의 손가락이 떨려왔다.스스로 맥을 짚어 보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는 갑자기 용기가 나지 않았다.말도 안 된다. 만약 그녀가 정말 회임을 했다면, 그동안 했던 일들은 자신의 아이를 직접 죽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그러면 안 된다..."아가씨..."고월영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결국 시안은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주고 그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올라 문을 나섰다.그들은 성에서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의원에 찾아갔다.고월영이 들어갈 때 시안은 그녀에게 모자를 씌웠고, 아무도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의사는 고월영의 맥을 짚은 후 안색이 어두워졌다."부인, 이... 이 아이는... 아마도 지켜내지 못할 듯 하옵니다."고
강현준은 요즘 계속 밖에 있었다.오늘 밤 마침내 왕부로 돌아왔다.고월영은 편청에 들어서자마자 약 냄새를 맡았다.시선은 참지 못하고 강현준의 몸에 떨어졌다.그는 상처를 입었다.하지만 그녀도 그저 한 번 보았을 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안비는 강현준과 그녀가 어떠한 얽힘도 생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것에 대해 고월영은 속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강현우도 오늘 밤 자리에 있었다. 며칠 쉬었더니 많이 좋아 보였다.고월영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바로 일어나 직접 맞이했다."영아, 이리 와서 앉아. 모두 너만 기다리고 있어."고월영은 그와 함께 탁자 옆으로 걸어가 안비와 강현준에게 인사를 올렸다."모비, 사황형.""앉거라."안비는 그녀를 보고 또 무의식 간에 강현준을 쳐다보았다.큰아들이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는 것을 보고서야 안비가 말했다."영아, 이리 오거라. 본 궁 옆에 앉거라.""예."고월영은 그녀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강현우도 자리에 앉았다.한 가족이 이렇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긴 처음인 것 같았다.지난 일들은 격세지감이다.오늘 밤 안비의 안색은 많이 좋아졌다. 왜냐하면 강현우의 몸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다."며칠만 지나면 추석이다."안비는 두 아들을 바라보다 끝으로 고월영에게 시선을 돌렸다."본 궁은 요 며칠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왕부의 추석 연회는 영이가 많이 신경 써야 해."고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예."안비는 또 강현우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현우는 지금 몸이 많이 좋아졌는데, 이번 추석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냐?"사실 강현우는 요 몇 년 동안 많이 괴로웠다.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잠을 편히 자지도 못하게 병마가 그의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괴롭혔다.듣기 싫게 말하면, 제대로 한 끼조차 먹어본 적 없었다. 매일 약을 복용하니 혀끝에는 쓴맛을 제외한 다른 맛이 나타난 적 없었다.강현우는 그저 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영이가 무엇을 하고 싶으면 소자도 무엇을 하고 싶
강현준은 잔을 내려놓고 강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은 어떠하냐?"요 며칠 강현준은 계속 성 밖에 있었다.오늘 돌아와 강현우의 안색을 보니, 역시나 조금 더 좋아졌다.저 계집애의 의술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하다.도대체 어디서 배웠고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모른다."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게,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강현우의 말을 절대 과장이 아니다.강현우가 웃으며 말했다."방금 떡갈비를 먹었는데, 단 맛을 느꼈어요."강현준은 손끝을 살짝 조이며 그를 바라보았다.다른 사람에게 있어 간단한 일과 조금의 단 맛을 느끼는 게, 강현우에게 있어서 매우 어렵다!십여 년이다.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달콤한 맛을 맛보지 못했나?"안 써?"강현준은 비록 무표정인 듯했지만 눈빛에는 약간의 흥분이 담겨있었다.강현우는 옅게 웃었다."여전히 좀 쓰지만 단맛도 아주 뚜렷했어요. 영이가 며칠 후 내가 좀 좋아지면 다시 식단을 조절해 미각을 회복시켜 주겠답니다."그는 미각이 이상하게 된 지 꽤 오래되었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하지만 달콤함을 맛본 후, 씁쓸한 맛에 대해 이렇게 거부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도 정상인처럼 신맛과 단맛, 쓴맛과 매운맛을 일일이 맛보고 싶어졌다.강현준은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잔을 들어 차를 음미하였다.멀리 정자 아래에서 고월영과 안비는 아직도 추석 연회의 일을 토론하고 있었고 시안과 몇 명의 시녀들은 함께 옆에 서서 때때로 의견을 내주었다.화기애애하다."사황형도 언젠가 이 집에서도 이런 웃음소리가 들려올 줄 생각지 못했죠?"강현우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강현준은 시선을 거두었다."이러니 참 좋구나.""하지만 사황형의 마음이 괴로운 것을 저는 압니다."그의 눈빛이 어두워진 것을 보며 강현우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저에게 한 달만 시간을 더 주세요, 사황형. 한 달 뒤 제가 직접 영이에게 진실을 말할 것입니다."강현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강현우는 진지한
밤이 깊어졌다.강현우는 직접 고월영을 영하각으로 바래다주었다.그는 아주 느리게 걸었다. 마치 빨리 걸으면 이 길이 빨리 끝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고월영은 조금 피곤해 연달아 하품을 두 번 했다."영아."강현우가 갑자기 소리를 내었다.고월영은 멈춰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왜요? 어디 아파요?""영이 너 자신의 몸도 아직 허약한데, 다른 사람을 관심할 줄만 알고."강현우의 말은 책망인 건지 마음 아파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저 아주 건강합니다, 뭘 걱정하는 거예요?"고월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이 명랑한 웃음 아래의 처량한 마음을 누구도 알아볼 수 없다.강현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그녀 입가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심장이 서서히 요동치며 씁쓸한 아픔이 퍼졌다.그녀는 곧 자신의 것이 아니다.한 달.그는 자신이 입을 열어 부탁을 한다면 사황형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사황형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에게 양보를 해왔다.마치 가정에서 모든 비바람을 감당하면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있듯이.사황형이 바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사람이다.강현우도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지만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한 달밖에 가질 수 없다.한 달 뒤면 그녀는 그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뼈에 사무치게 원망할 것이다."왜요?"고월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훑어보았다."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건가요?""영아."강현우가 다시 불렀다.고월영은 입가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조금 걱정하기 시작했다."아현, 왜 그래요?""만약 어느 날, 내가 널 속인 것을 발견한다면 날 미워할 거냐?"고월영은 그저 그를 바라보며 답하지 않고 반문했다."절 속이실 건가요?"강현우의 심장은 무언가에 의해 심하게 찢기는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무의식적으로 심장이 있는 곳을 움켜쥐었다."난... 모르겠다."고월영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 담담하게 웃었다."무방해요. 이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