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비께서 한동안 아프셨는데, 저는 안비 마마를 모셔야 해 줄곧 뵈러 올 시간이 없었어요. 왕비의 양해를 구합니다."유진은 말이나 행동은 여전히 우아하고 단정했다.고월영은 지금 그녀를 보며 오히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안비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것 같았다.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제가 왕부의 약고에서 골라낸 좋은 약재들입니다, 여왕비께서는 아래 사람들에게 더 얻으라 해 보신을 잘 하세요.""현왕부의 두 전하는 나이도 어리지 않은데 지금껏 아무런 자식이 없다 보니, 밖에서도 은근히 잡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그러니 왕비는 반드시 몸을 잘 조리하셔서 빠른 시일 내로 여왕 전하와 하얗고 포동한 꼬마세자를 낳으셔야죠."고월영은 조용히 탁자 위에 놓인 약재를 바라보았다.비록 열어 보지는 않았지만 냄새만 맡아도 확실히 좋은 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관심 고마워요 유진 아가씨.""앞으로 다들 한 가족이 될 텐데 당연히 서로 친하고 사랑해야지요."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고월영의 눈빛은 살짝 흔들렸지만 갑자기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유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미소는 부드럽고 아주 예뻤다.그녀는 그녀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고상하다. 이 품격은 현왕 전하의 곁에서 걸어도 다소 잘 어울린다.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 안비의 마음속에도 그녀를 미래의 현왕비라 인정한듯하다.고월영은 비록 마음속에 씁쓸함이 흘러 지났지만 애써 개의치 않으려 했다.지나간 건 지나갔다.유진은 입가의 웃음기를 거두고 갑자기 말했다."청 상궁이 왕비에게 독을 써 현준 씨가 처형해 죽인 일을 왕비는 아십니까?"고월영은 그녀를 한 번 보았다. 놀란건 청아가 죽임을 당한 일이 아니라 그녀가 강현준을 향한 호칭이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별일이 아니기도 했다.이런 날이 올 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그녀가 자신은 여왕 비고 그의 진정한 신분은 현왕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때부터 고월영은 이미 이런 날이 올 것을 생각했었다.현왕은 언젠가는 자신의
고월영은 이해했다. 이것이야말로 유진이 그녀를 찾아온 진정한 목적이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밤 유진의 말은 적지 않았다."현준 씨가 보기엔 차갑고 매정해도 집안의 두 사람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히 생각합니다.""하나는 여왕 전하시고 다른 하나는 바로 친모 안비 마마입니다.""그날 현준 씨는 확실히 화나 나 충동적으로 청 상궁을 죽였어요, 하지만 그도 이 일이 안비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예요.""현준 씨는 안비를 경애하니 자연스레 안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걸 원치 않죠, 요 며칠 그는 이미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그리고 현준 씨가 당신에 대한 미련은..."여기까지 말하자 유진 입가의 웃음기는 사라졌고 표정은 진지했다."여왕비, 당신은 확실히 아주 매력적으로 생기셨어요, 남자야 다 그렇죠, 절세의 미모에 눈이 멀면 마음도 적당히 이끌려 재미를 보려 하겠죠.""하지만 그는 결국 저희 남령의 전신 현왕 전하세요, 그는 차분하고 냉정하며 성숙됐죠, 그는 마음을 아주 조금 풍류에 방임할 순 있어도 그저 잠깐일 뿐이지요.""유진 아가씨의 뜻은 잘 이해했어요, 하지만 유진 아가씨가 저한테 이런 말을 해도 쓸데는 없어요, 저는 사황형에 대해 존경만 있을 뿐 다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고월영은 일어났고 손님을 배웅하려는 태도가 분명했다.그녀의 차가운 태도는 유진을 불쾌하게 하지 않았다.유진도 일어나 그녀를 향해 웃었다."왕비가 어떻게 말씀하시던 제가 오늘 밤 온 목적을 왕비는 잘 이해했을 거라 믿습니다.""현준 씨는 앞으로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왕비도 이 집을 위해 자신의 명예를 위해 매달리 지 말아 주십시오.""앞으로 다들 본분을 지키면 저도 현준 씨와의 과거는 따지지 않겠습니다...""유진 아가씨는 대체 어떤 신분으로 따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고월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만약 따지고 싶으시면 유진 아가씨가 현왕비가 되고 난 뒤에 말합시다."유진은 눈가의
그 검은 그림자가 아주 빨리 걷는 것을 보니 경공이 약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그는 아마도 오솔길에 사람이 있을 줄 모르고 방심해 고월영과 정면으로 부딪혔다.검은 그림자는 길을 막은 자를 향해 손을 쓰려 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길을 막은 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그는 멈춰 서고야 말았다.하지만 고월영은 일찌감치 손을 내밀어 단번에 그의 얼굴을 막은 검은 수건을 잡아내렸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넋을 잃은 틈을 타 검은 수건은 고월영에 의해 내려졌다.달빛 아래에서 그 얼굴은 이토록 또렷했다!"당신!"고월영은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완전히 넋을 잃었다.어떻게... 어떻게 이 사람이지?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갑자기 몸 뒤에서 연일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갑자기 고월영은 잡아 연일을 향해 냅다 던져버렸다.연일은 깜짝 놀라 황급히 앞으로 나아가 허공에 던져진 고월영은 안아들었다.두 사람은 안전히 바닥에 착지했다."왕비, 다치셨습니까?"연일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고월영의 마음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아 그저 망연히 고개를 저었다."빨리 쫓아라!"연일은 무거운 소리로 명을 내렸다.한무리의 시위들이 쫓아갔고 연일도 고월영을 내려놓고 자객을 쫓으러 가려 했다.하지만 고월영은 갑자기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그에게 이끌려 하마터면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연일은 깜짝 놀라 바삐 멈춰서 그녀를 부축했다."왕비, 괜찮으세요? 자객이 왕비를 다치게 한 겁니까?""나... 좀 어지러워요."고월영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계속 손을 놓지 않았다.연일은 감히 그녀를 내려놓지 못하고 그저 자객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고월영을 부축하며 말했다."왕비, 제가 돌아가 쉴 수 있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늘 밤 현왕부의 자객은 아마도 잡지 못한 것 같다.사람을 이끌고 잡으러 간 연일이 결정적인 순간에 놓쳐 사람을 도망치게 했다.고월영은 방으로 돌아와 시안에게 약을 가져오라 시킨 뒤
"피한다고?"말을 듣고 강현준은 차갑게 비웃었다."본 왕과 네가 피해야 할 이유가 있나?"고월영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강현준은 이미 그녀의 앞으로 와 눈을 드리우고 많이 나았지만 여전히 약간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이번에 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본 왕이 다시 한번 묻겠다. 자객은 대체 누구냐?"고월영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정말 본 왕이 너를 어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그는 손을 흔들어 그녀를 뒤집어 책상 위에 눌렀다.고월영은 팔이 조금 아팠다. 그의 동작은 너무 거칠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는 그저 그 자의 수건을 뜯어냈을 뿐이지, 한밤중인데다 달빛도 나무그늘에 가려져있어 정말 그 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강현준은 그녀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다. 오늘 밤의 자객이 무엇을 했는지, 사람을 다치게 했는지, 더욱이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을 알아냈는지 모른다.어쨌든 그 자객은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니다. 강현준은 아직도 사람을 명해 열심히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네가 이렇게까지 지키려는 거면, 설마 장군부 사람인가?"강현준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작은 얼굴에는 식은땀이 서서히 배어 나왔다.그가 다섯 손가락에 힘을 조금 주자 고월영의 미간은 순간 더욱 찌푸려졌다."당신의 장군부에서 이 정도 무예를 가진 사람이라면 고용기 한 명뿐인데, 그 자야?""우리 오라버니는 충성을 다해 애국하시는데 왜 이곳에서 자객을 하고 있겠어요? 사황형, 잘 판단하세요!""그래서 지금 마음을 굳히고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강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고월영, 너 설마 아직도 본 왕이 예전처럼 널 지켜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고월영은 마음속이 황량해졌다.그는 확실히 그러지 않을 것이다.오늘 유진이 그녀에게 한 말들은 사실이다.하지만 그럼 뭐 어떠할까? 어차피 언젠가는 이런 날이
강현준은 결국 고월영을 놓아주었다.고월영은 이것이 단지 아현의 체면을 고려한 것이란 걸 알고 있다.그는 오늘 밤 그녀에게 충분히 매정했다.그녀를 끌고 나간 건, 몽둥이를 치려한 건가?만약 그녀가 진짜 말을 하지 않으면, 그는 청아를 상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죽일 작정이었을까?"놀랐지?"강현우는 그녀를 부축하며 침대 옆에 앉았다.그는 온수 한 잔을 부어 고월영의 입가에 가져갔다.목소리는 시종 온화했다."오늘 밤의 자객은 운려각의 밀실에 침입했어, 누구도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사황형은 이를 많이 중시하고 있지."고월영의 마음이 조여왔다.그가 운려각의 밀실에 침입했다니!그녀는 알고 있다. 운려각에는 분명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아주 중요하기 그지없는 비밀.지난번에 그녀가 밀실에 침입은커녕 그저 지붕 위에 잠복했을 뿐인데 청아에게 끌려가 죽을 뻔했다.그녀는 심지어 그날 잠입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안비는 정말 자신을 죽일 거라 의심된다.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이 왕부에는 대체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얼마나 숨겨져 있길래 이렇게까지 신주하고 신비한 거지?자객... 그는 대체 왜 잠입을 했고 무엇을 조사하려는 걸까?그는 대체 누구를 도와 일을 하고 있을까?"영아, 넌 자객이 누군지 알고 있어, 맞지?"강현우가 갑자기 물었다.고월영은 놀란 나머지 숨을 돌리지 못해 세게 거침을 했다."난, 콜록... 콜록콜록, 난 몰라요, 난...""됐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강요하지 않을게."강현우는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됐어, 나는 단지 일깨워주고 싶을 뿐이야, 만약 다음번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죽을 거야, 그 자가 누군지 안다면... 일찍이 포기하라고 설득해 봐."고월영은 말을 하지 않았다.강현우의 앞에서는 거짓말 하나를 하기도 아까웠다.마치 말하면 그의 거룩함을 더럽힐 것 같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갑자기 강현우의 손을 잡았다."내가 진맥해줄게요."강현우는 손을 뻗어
정왕의 사람이 오라버니를 데려갔다!고월영의 마음은 갑자기 내려앉았다.왜 하필 이때?"아버지, 오라버니께서 나가실 때 당부한 게 있을까요?"고월영이 다급히 물었다.고조연은 고개를 저었다."요즘 용기의 어떤 일들은 이 아버지도 못 알아보겠다, 심지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딸의 앞에서만 고조연은 이 말들을 할 수 있다."영아, 현왕 전하 쪽에서 요즘 우리 장군부를 어떻게 생각하냐? 만약 현왕 전하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시다면 꼭 이 아버지에게 알려다오."고월영이 급히 말했다."저는 비록 현왕부에 있지만 사황형은 매일 많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저도 만날 기회가 극히 적어요."고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버지, 전 아린 씨를 보러 갈게요."고월영이 일어났다.고조연의 안색은 오히려 좀 보기 좋지 않았다."아버지, 아직도 아린 씨의 신분을 마음에 두고 계신 거예요?"무아린은 어디까지나 운조의 사람이다.지금 같은 상황에는 일이 많기보다는 적은 것이 낫다.집안에 운조의 사람이 있으니 장군부 전체의 마음도 당연히 불안하다.고조연이 말했다."그 계집애를 보니 네 오라버니한테 그래도 조금 진심인 것 같더구나, 하지만 네 오라버니는 남령의 대장군이다, 바깥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 황실에서 의견이 있을지 모르겠다.""이 일은 앞으로 다시 얘기해요, 오라버니가 공을 세우고 업적을 쌓은 후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자신의 혼인을 결정하게 할 수도 있잖아요."사실 고월영은 잘 알고 있다. 유용한 인재일수록 황제는 각종 수단으로 그를 견제할 것이라는걸.혼인은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오라버니와 아린의 인연은 잠시 우여곡절이 많을 것이다.고조연의 정원에서 떠난 후 고월영은 무아린이 지내는 곳으로 갔다.지금 무아린은 고용기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는다.노장군이 말을 놓아 그들에게 행동을 조심하라 했고 명분 없이 함께 지내서는 안된다고 했다.무아린은 지금 외진 작은 뜰에서만 지낼 수 있다.하지만 무아린은
"어젯밤?"고용기는 조금 의아했다."어젯밤 나는 장군부에 있었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왜 그러냐?"그의 미간에는 온통 명랑함뿐, 조금의 찔리는 기색이 없었다.고월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그녀는 작은 소리로 떠보았다."어젯밤, 현왕부에 자객이 들어와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난... 자객의 모습을 보았어요.""널 다치게 하진 않았냐!"고용기는 긴장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그녀의 몸 곳곳에서 상처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그는 한숨 돌렸다."어때? 자객은 잡았어?""아니요, 도망쳤어요.""도망을 치게 하다니!"고용기는 조금 걱정스러웠다."그 자객은 대체 무슨 사람이냐, 어서 현왕께 말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제 그가 널 죽일까 무섭구나."말을 해야지 그녀가 안전할 수 있다!고월영은 그저 멍하니 그를 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왜 그러냐?"고용기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왜 그런 눈빛으로 오라버니를 보는 거냐?""오라버니, 어젯밤... 정녕 장군 부를 떠난 적 없는 겁니까?""당연히 없지, 밤에는 병서를 조금 보다 일찍이 잠에 들었다, 아침 일찍이 정왕과 약속이 있어 감히 태만하지 못했다. 늦게 자면 내가 깨어나지 못할 가봐 무서웠어."고용기는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도 생각에 잠겼다."영아, 설마 오라버니한테 어젯밤 네가 현왕부에서 본 자객이 나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여동생을 아는 건 역시나 오라버니라고, 그는 역시 알아맞혔다!고월영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젠장!"고용이는 벌떡 일어나 뜨거운 솥 위의 개미처럼 초조해했다."누가 날 사칭하고 있는 걸까? 이건 날 불의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냐? 설마, 정왕의 사람인가?""오라버니께선 왜 그렇게 추측하신 거죠?""정왕이 갑작스레 나에게 술을 마시자 청해갔다, 물론 별말은 없으셨지만 기어코 날 보내지 않고 하루 종일 남겨 두었다."이것은 분명 그를 끌어들이려는 의도이다.이렇게 결
"난 그저 왕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쓸모없는 왕비예요, 제 부군마저 이 일에 참여를 하지 않는데, 제가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어요?"고월영은 옅게 웃으며 눈가의 마음을 숨겼다.고용기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도리라 생각하고 호기심을 거두고 더는 묻지 않았다.오히려 고월영이 그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선... 아린 씨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 셈이에요?"고용기의 눈동자가 어두워졌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난 그녀가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감사하지만...""설마 아린 씨한테 단지 감사한 마음만 있는 거예요?"고월영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장 걱정하던 일이 결국에는 발생했다.고용기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그렇다.""오라버니, 설마...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는 겁니까?"사실 그녀는 예전에 무아린과 몇 번 대화를 나누었고 무아린이 매번 하는 말에서 은연중 이 점을 알아차렸다.하지만 무아린은 줄곧 고민 없이 직진했고 그로 인해 고월영도 무아린에게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 추측을 눌러내렸다.하지만 지금 보니 오라버니가 그 아가씨에 대한 집념은 그녀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더 깊은듯하다."오라버니, 그럼 아린 씨는 어떡하죠?""만약 네가 나라면 어쩔 것이냐?"고용기는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만약 네가 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는 너에게 일편단심이고 너의 목숨까지 구해줬다면, 또한 이번 생에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인정한다면.""넌, 어떻게 할 것이냐?"... 고월영은 고용기의 이 질문을 갖고 현왕부로 돌아갔다.오라버니가 말한 그 남자, 이미 실제로 나타나지 않았나?아현이 바로 그런 상황이지 않나? 아현과 무아린은 무엇이 다른 걸까?오라버니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그럼 그녀는? 아현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는 거지?돌아간 뒤 고월영이 쉬겠다고 하자 강현우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운려각으로 돌아갔다.봐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