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우야,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상심하지 말거라.”북진연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그런 놈을 위해 상심할 가치가 없으니까.”그 말은 온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맞아요.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이죠!”온사는 긴 한숨을 내뱉고 기분을 추슬렀다.“아가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비록 온씨 가문의 딸이지만 우리 란씨 가문의 딸이기도 합니다. 아가씨는 큰 아가씨의 핏줄이니까요.”란 영감은 오늘 온사를 만나 기분이 좋았다.란씨 가문에 더 이상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온사가 나타난 것이다!“아저씨 말씀이 맞아요. 저는 이미 그 집안을 떠났지만 란씨 가문을 떠난 적은 없답니다.”외가쪽이 오래 전 참사를 당했기에 그녀는 외가쪽과 나눈 정이 거의 없었다.그런데 어쩐지 란 영감에게서 집의 포근함이 느껴졌다.온사는 웃으며 말했다.“마침 진국공부에서 저를 온씨 가문의 족보에서 제명하였으니 족보를 따지자면 저는 이제 란씨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려야 해요.”“그럼요! 저한테 족보가 있습니다!”란 영감은 신이 나서 말했다.“과거 나리께서 스스로 가시는 길이 험난할 것을 예상하시고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가문의 물건을 따로 숨겨두셨지요. 가문이 변을 당한 후, 이 늙은이는 그것을 가지고 이곳으로 숨었습니다. 큰 아가씨께 전하려 했지만 이제 작은 아가씨께서 저를 찾아오셨으니 그 물건들을 아가씨께 드려야지요.”란 영감은 고개를 돌려 북진연에게 말했다.“섭정왕 전하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아가씨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북진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란씨 가문 내부의 일이고 그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온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괜찮아요. 저는 섭정왕 전하를 믿습니다.”그 말을 들은 북진연은 순간 어깨가 경직되었다.‘온사가 나를 믿어준다고?’란 영감은 고개를 돌려 북진연을 빤히 바라보았다.“너무 긴장할
그의 가문은 멸문하고 세자인 그만 살아남았는데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란 영감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런 인연도 다 있네요. 그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란씨 가문과 북진왕부는 또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군요.”“란씨 가문과 북진왕부?”북진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북진왕부가 멸문할 때, 그는 갓 태어난 아기였기에 예전 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전하의 어머니와 우리 큰 아가씨는 아주 친한 친구였답니다. 자주 왕래도 하고 만나기도 해서 란씨 가문과 북진왕부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지요.”그 말을 들은 온사와 북진연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란 영감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하와 온사 아가씨가 태어나기 전에 저희 큰 아가씨와 왕비께서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사돈을 맺자고까지 하였답니다. 증표도 있어요.”그 말을 들은 북진연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하늘이 나를 돕는군!’그는 북진왕부의 외동아들이고 온사는 란자군의 외동딸이었다!둘 사이에 그런 혼약이 존재했을 줄이야!심지어 증표까지 있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북진연은 격앙된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어쩐 일인지 온사에 관련된 일이면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 증표는….”북진연은 애써 침착한 얼굴로 란 영감에게 물었다.온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그걸 왜 물어보십니까?”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한 표정으로 북진연을 바라보았다.‘저런 질문을 왜 하는 거지? 이 상황 너무 어색하다고!’친구 사이에 혼약이 왜 존재하는 것이며, 거기에 증표가 왜 필요한가!하물며 그녀는 이미 출가한 승려였다!온사는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아저씨, 지나간 일은 나중에 얘기해요. 하물며 저는 출가인인데 혼약이라니요! 전하나 저나 곤란해지기만 할 뿐이에요.”“아, 그래요. 나이가 들어서 자꾸 깜빡깜빡하네요.”물론 북진연은 이 대화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북진연은 도망치듯 앞으로 가고 있는 온사를
“여긴….”“이 밀실 공간은 제가 십여 년 전에 발굴한 것입니다. 나리께서 남긴 귀한 물건이 하도 많아서 마을에 둘 수는 없고 그래서 조금씩 이 산에 옮겨왔지요.”란 영감은 조심스레 책장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온사는 안으로 다가가 천천히 밀실 안을 둘러보았다.금은보화는 별로 없고 대부분이 책장에 꽂힌 서책들이었다.“한때 란씨 가문은 경성의 명문세가였지요. 삼대가 장원에 올랐으니 위세가 하늘을 찔렀어요. 그때는 수많은 학자들이 나리에게서 책 한권 구하겠다고 대문 앞에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것들은 이 밀실에서 무려 십 년 묵혀 있었습니다.”온사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란 영감은 자신이 죽은 후에 이것들이 다시 햇빛을 볼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온사는 저도 모르게 슬픔이 몰려왔다.란씨 가문의 멸문은 억울한 개죽음이었다.그들은 단지 선제의 편에 섰을 뿐인데 승리를 거머쥐기 직전에 상대의 보복을 당했다.물론 동맹의 배신도 한몫 했다.“작은 아가씨, 이 물건들은 비록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지만 란씨 가문의 귀중한 보물이니 소중히 대해 주세요.”서책은 란씨 가문의 정체성과도 같은 것이었다.“걱정 마세요, 아저씨. 저한테는 이것들이 금음보화보다 더 귀중해요.”란 영감은 감동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아저씨, 유가마을에 약초를 재배하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저씨 맞으시죠?”온사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예, 저 맞습니다.”영감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에 란씨 가문의 집사가 되기 전에는 아가씨의 증조 할머니께서 제가 영민하다고 생각하시어 저를 옆에 두고 약초 재배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르쳐 주셨지요. 그때 저는 노부인이 가장 아끼는 시종이었답니다.”옛날 얘기가 나오자 란 영감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치 가장 즐거웠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그때 그는 한낱 시종이었지만 그들 일가족은 란씨 가문의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그 역시 란씨 가문을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랬군요.’온사는 환한 미
북진연은 적절한 시기에 입을 열었다.“저야 당연히 좋죠. 그럼 섭정왕 전하께 민폐 좀 끼치겠습니다.”란 영감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옮기고 싶었다.하지만 집에 정리할 물건이 많아서 이틀 후에 금남사로 떠나기로 했다.북진연은 사람을 보내 밀실 안의 책들을 전부 수월관으로 옮기고 흑기군을 파견해 지키게 했다.떠나기 전, 북진연은 담담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했다.“란 노인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만약 자객이 침입하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말고 모조리 죽이거라. 만약 진국공가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일단 란 노인의 얘기를 듣고 움직이도록 해.”“예, 전하.”란 영감이 온사에게는 잘해주지만 북진연은 이 나이든 노집사가 란자군의 혈통을 이어받은 다른 공자들을 봤을 때 어떤 반응인지도 궁금했다.온사는 북진연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수월관으로 돌아간 그녀는 가져온 서책들부터 전부 옥패 공간으로 옮겼다.비록 란 영감이 관리를 잘해주었지만 오랜 시간 밀실에 있어 약간 부패가 있었다. 온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서책들을 다시 정리했다.그러는 과정에서 증조 외할머니가 남긴 약초재배에 관한 서책들도 발견했다.일부는 증조 외할머니께서 직접 쓴 서책이었다.거기에는 약초를 재배하며 얻은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었다.온사는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었다. 그녀가 이름도 못 들어본 약재들이 그 안에 있었다.그렇게 열심히 읽다 보니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이국의 희귀 약재인 서홍화 재배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온사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서홍화?’그녀의 공간에만 존재하고 남들은 고대 서적에서나 봤을 서홍화를 증조외할머니께서 재배에 성공하셨다니!너무 놀라운 발견이었다.온사는 다급히 책을 펼치고 그 안의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증조 외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구나!’다만 왜 서홍화가 외부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어쩌면 누가 가져갔을 수도 있고 란씨 가문이 변을 당하던 날에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온사는
“설마 이 공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변하는 걸까?”그렇다고 하기엔 그녀는 책장이 몇 개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이 정도의 거대한 변화라면 어떤 요구 조건을 달성해서 갑자기 승격한 것으로 보여졌다.온사는 자신이 방금 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결국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일단 이 일은 접어두기로 했다.만약 무언가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면 승격하는 거라면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그녀는 다음 승격 때 원인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온사는 천천히 이제는 오두막이 아닌, 누각으로 걸어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니 7층으로 된 누각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1층과 2층에는 약재를 보관하는 공관이었는데 1층은 일반 약재와 연금대, 그리고 처방을 쓸 수 있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위에는 필묵까지 갖춰져 있어서 나가서 살 필요도 없었다.2층의 약재는 각종 독약이고 역시 연금대가 따로 있었다.온사에게 독약을 연구하라고 마련된 공간으로 보였다.3층과 4층에는 전부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3층에는 그녀가 가져온 책들이 있고 4층의 책들은 원래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로 보였다.하지만 대부분은 마치 금기된 것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지금은 볼 수 없지만 아마 훗날에는 열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온사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그러자 공중에 매달린 거대한 철장들이 보였다.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비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온모가 갇혀 있었다.“읍….”언제 정신을 차린 건지 온모는 철장 안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다행히도 온사가 미리 눈을 가리고 손발을 꽁꽁 묶었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온사는 바로 온모에게 다가가지는 않고 6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사는 다시 온모에게로 돌아왔다.“읍…”‘누구야? 온사? 너야?’온모는 미칠 것 같았다.정상적인 밥을 먹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고 어디로 납치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매번 의식이 깨어나려고 할
온모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날 죽이면 내 사람들이 찾아와 널 갈가리 찢어버릴 거야. 어딜 도망치든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김사도에게서 진실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온사는 온모의 헛소리를 믿었을지도 모른다.“그래? 그럼 오라고 해. 물론 걱정 마. 그렇게 쉽게 보내주진 않을 거니까. 널 죽이기 전에 너한테 도움 받을 것도 있고.”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온모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이게 뭐야! 너 내 몸에 뭘 놓은 거야!”온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언가가 그녀의 몸에서 기어다니고 있었다.온모는 철창 안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그녀는 몸을 철창에 비비며 어떻게든 그것을 떨쳐내려고 했다.온사는 온모의 몸을 기어다니는 거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주먹만한 크기의 거미는 그 크기만으로 흉측했다.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온모가 눈으로 봤다면 그대로 기절했을 것이다.온사는 어쩐지 이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온모의 눈을 가린 천을 벗겨냈다.5층은 아래층과 단절된 공간이라 온모가 주변을 봐도 무방했다.앞을 볼 수 있게 된 온모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기어오는 거미를 보고 경악한 비명을 질렀다.“악! 꺼져!”“이게 뭐야! 당장 꺼져!”“온사! 네 년이 한 거야? 당장 이거 안 치워?”온모는 평소에도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했기에 김사도도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독벌레를 꺼내지 않았다.그래서 온모는 이 독벌레들이 김사도의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철창 밖에서 온사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내 실험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너 미쳤어? 대체 뭘 하려는 거야?”방금 전까지 철창 안에서 비굴하게 애원하던 온모는 이미 분노에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그녀는 힘껏 온사를 노려보며 협박했다.“너 네 어미의 죽음이 궁금하다며? 너 내 몸 털끝 하나 건드리면 영원히 네 어미 시신을 못 찾을 줄 알아!”그 말을 들은 온사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싸늘한 눈을 하고 온
온사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거미에게 물려 기절 직전인 온모를 바라보았다.“그만하면 됐으니까 돌아와.”그제야 독거미는 독니를 집어넣고 온모의 몸에서 떨어져 온사에게로 돌아갔다.“네 집으로 들어가. 여긴 이제 네가 필요없어.”온사는 손가락으로 거미를 한번 쓰다듬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독거미는 김사도가 가져온 독벌레 중 한마리였다.그것은 파군처럼 온사의 영수를 마신 후에 온사를 주인으로 인식했다.하얗게 질렸던 온모의 얼굴은 독 때문에 검게 변해갔다. 그녀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 온사는 해독제를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부어버렸다.“난 인내심이 많지 않아. 독살당하기 싫으면 당장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줘.”온모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면서도 온사에 대한 증오는 점점 깊어져갔다.그녀는 피식 웃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내가 계속 연락이 닿지 않으면 내 사람들이 네 어미의 시신을 훼손할 수도 있어. 음… 토막 낼지도 모르고.”온사는 손을 뻗어 온모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철창에 박아버렸다.쾅! 쾅!그렇게 몇번 반복하자 온모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온사는 온모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에야 그녀의 멱살을 잡고 고개를 쳐들게 했다.“온모, 나한테 그런 협박은 통하지 않아. 지금 말 안 해도 괜찮아. 내 독거미가 이길지 네 자존심이 이길지 두고 보자고!”“쿨럭! 닥쳐!”온모의 코에서는 코피가 줄줄 흘렀지만 이대로 굴복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내가 어떻게 온사 이년한테 굴복해? 어머니는 졌지만 난 절대 질 수 없어!’그녀는 죽더라도 온사를 짓밟고 죽겠다고 이를 갈았다.“하,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봐!”쾅!온사는 그대로 철창 문을 닫아버리고 2층으로 내려갔다.2층은 독약을 놓아둔 곳이었다.다음 날, 밤새 온모를 괴롭힌 온사의 안색도 별로 좋지 못했다.온모가 이렇게까지 이 악물고 버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거의 숨만 붙어 있을 정도까지 괴롭혔는데도 그녀의 입을 여는데는 실패했다.“내가 찾아야겠어! 어떻게든
‘안 돼! 어머니 시신도 찾아야 하는데!’온사는 어쩔 수 없이 막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란자군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얘기를 듣고 막수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급기야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사부님!”온사는 다급히 손을 뻗어 막수를 부축했다.그러고는 공간에서 알약을 꺼내 막수의 입에 넣어주었다.“일단 진정하세요, 사부님!”“내가 어떻게 진정을 하겠어!”막수는 눈물을 흘리며 분노와 고통을 호송했다.“어떻게 자군이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누군가 란자군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옥에나 떨어질 놈들! 절대 가만 안 둬!”온사는 다급히 막수를 달랬다.“걱정 마세요, 사부. 저도 절대 용서 못해요. 하지만 지금 최우선은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경성으로 돌아가려고 해요.”그녀는 진국공부에 가서 온씨 가문 조상묘에 가볼 생각이었다.만약 진짜 누군가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갔다면 온권승이 이 일을 알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아니다, 나랑 같이 가!”막수는 온사의 팔목을 붙잡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두 시진 후, 온사와 막수는 진국공부에 도착했다.“온사 아가씨 아니야?”“어? 정말 그러네!”“뭔 소리야? 저분은 이제 진국공부 아가씨도 아닌데 들여보내면 안 되지.”대문을 지키는 호위들은 온사와 막수를 보고 곧장 앞을 가로막았다.“들어가시면 안….”“성녀인 나를 봤으면 무릎부터 꿇지 않고 어딜 길을 막고 있어!”호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사가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호위는 그제야 온사의 신분을 떠올리고 다급히 예를 갖추었다.“성녀 전하를 뵈옵니다….”온사는 그들을 지나쳐 막수와 함께 진국공부 안으로 들어갔다.“아니, 성녀 전하! 잠깐만요!”호위들이 앞을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안으로 들어간 막수는 분노한 목소리로 온권승의 이름을 불렀다.“온권승! 당장 나와!”“온권승!
“좋아.”사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수 사태가 주저없이 요구를 승낙했다.막수는 고개를 들려 단호한 눈빛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갈 테니 넌 여기 가만히 있어.”온사는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상의할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막수 사태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예, 그렇게 할게요. 조심해요, 사부님.”김사도는 몰래 온사를 힐끗 보고는 짐짓 여유 넘치는 어투로 물었다.“내가 갈까?”사구가 담담히 말했다.“아니, 사칠 네가 가.”눈만 빼고 온몸을 꽁꽁 사맨 사칠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형님.”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구는 일당 중에서도 꽤 지위가 있어 보였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칠을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비켰다.사칠은 관을 내려놓고 맞은편을 향해 걸어갔다.그와 동시에 막수 사태도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사구는 눈앞의 늙은 여승을 빤히 노려보았다.3일 전 수월관에서 만났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악취미가 발동해서 상대를 겁주려고 시도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참 재미없었던 거로 인상에 남았다.그런데 그 여승이 성녀의 사부이자 수월관의 주지 사태였을 줄이야.사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한편, 사칠이 다가오자 검은 인영이 온사의 뒤편에 나타났다.추월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칠이 자칫 조금만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당장 죽여버릴 기세였다.거래 과정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사칠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온사는 칼로 온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그녀는 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관에서 안고 돌아올 때에야 천천히 비수를 내렸다.“아가씨, 가시죠.”사칠의 목소리는 사구보다도 더 흉측했는데 마치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그는 예의고 뭐고 다짜고짜 온모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일행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가자! 빨리 가자!”온모는 허둥지둥 사칠을 따라갔다. 만
‘사구? 사구가 왔어! 드디어 날 구하러 온 거야!’‘온사 이 망할 년! 넌 이제 죽었어!’온모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온사에게 붙잡혀 있는 신세가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사구에게 달려가고 싶었다.“온사 네 이년!”사구 일행은 처참한 모습의 온모를 확인하고 분노를 터뜨렸다.물론 김사도는 예외였다.그는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이 광경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물론 동료가 보고 있으니 안 그런 척은 해야 했다.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짐짓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어찌 우리 아가씨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지금 저 꼴을 봐! 대체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뭔지 모르지만 아주 잘했어!’온사도 그의 눈빛에 숨은 찬탄과 희열을 알아보았다.그녀는 한심한 눈으로 김사도를 바라본 뒤, 담담히 말했다.“난 약속 지켰어. 너와 약속한 이후로는 얘 털끝 하나 안 건드렸으니까.”“그럼 저 상처들은 대체 어떻게 난 거야!”김사도의 목소리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앙칼졌다.온사는 그를 무시하고 음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니 누가 늦게 오래? 뭐 너무 늦은 건 아니지만. 하루만 더 늦게 찾아왔으면 아마 온모의 시신을 마주했을 텐데 말이야.”적나라한 협박에 사구와 그의 동료는 이를 갈았다.사구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성녀, 네 어머니의 시신이 우리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마. 넌 우릴 자극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온사는 냉소를 짓고는 온모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리고 김사도의 충격 어린 눈빛을 무시한 채, 사구를 협박했다.“어디 해봐. 내 어머니의 시신에 손이라도 대는 날엔 나도 너희의 아가씨를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악! 뭐 하는 거야!”온사는 그대로 칼을 빼들어 온모의 목을 겨누었다.“해볼래, 사구?”위협적인 온사의 말투에 온모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눈을 가린 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지
너무 동생이 그리웠던 온자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을 뒤쫓아갔다. 그는 뒤늦게야 온사가 경성 방향이 아닌 근처의 마을로 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한참 후, 앞에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온자신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피월정이잖아? 여긴 왜 온 거지?”그가 의혹에 빠져 중얼거릴 때, 이상한 복장을 입은 세 명의 사내가 피월정에 나타났다.온자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걸음을 멈추었다.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그쪽을 주시했다.“온자신이 따라왔어.”막수는 뒤쪽을 힐끗 보고는 온사에게 말했다.온사는 그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상관없어요. 이따가 제가 하는 일을 방해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막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둘은 전방에서 다가오는 사구 일행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들 중에는 김사도도 있었다.나머지 한명은 온사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얼굴을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눈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등에 관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온사 어머니의 관이었다.이들은 도굴할 때 관까지 통째로 가져갔던 것이다.온사는 주먹을 꽉 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성녀 전하, 이건 우리가 3일 전에 했던 약속과 얘기가 다르잖아?”사구는 온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식간에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지금 약속을 번복하는 건가?”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너희 아가씨는 이곳에 있어. 다만 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한 후에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너희가 어머니 시신에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그녀는 어머니의 시신이 온전한지, 아니면 이들에 의해 훼손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똑같이 돌려줄 것이다.사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걱정 마, 성녀 전하. 네 어머니의 시신은 아주 온전한 상태니까.”말을 마친 그는 장풍으로 관 뚜껑을 열었다.이미 그들이 한번 열었어서 그런지 뚜껑은 아주 쉽게 열렸다.
북진연이 떠난 후, 온사도 공간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온모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삼일 후가 약속한 날이니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특히나 사구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완벽히 준비하고 가는 게 맞았다.독은 사부가 더 뛰어나다고 하지만 상대는 뱀을 부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었다.게다가 전부 다 강한 독성을 가진 독사였다.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그들은 수동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뱀에게 물릴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게 싫었다.온사는 2층 연금대로 바로 갔다.이곳에는 독성이 강한 약재들 외에도 독벌레도 있었다.불개미와 독거미, 지네도 있었다.온사는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맨 마지막에 전갈에게 시선이 갔다.오독 중에 가장 독한 것이 전갈 독이라고 했다.독성도 강할 뿐만 아니라 전갈 자체가 아주 흉포한 벌레였다.온사는 사구를 상대하려면 전갈이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했다.그런데 아직은 체형이 너무 작고 독성이 약했다.온사는 3일 안에 이 전갈을 제대로 육성하기로 마음먹었다.공간에 영수는 넘쳐나고 가진 독약까지 합치면 대왕 전갈을 육성해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삼일 간 온사는 공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그 기간에 막수가 찾아왔지만 추월이 나서서 응대했다.시간은 어느덧 흘러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그날 아침, 온사는 아침 일찍 공간에서 나왔다.3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지만 워낙 공간 안에 농후한 영기로 가득찼기에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정원을 나가자 막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준비는 다 됐니?”온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가시죠.”막수는 의아한 얼굴로 온사의 등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온모는 어디 있니?”“데리고 가는 중이니 걱정 마세요, 사부.”그 말을 들은 막수는 온사가 추월에게 맡긴 줄로만 알고 더 캐묻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당나귀를 끌고 산을 내려갔다.막수는 당나귀 따위를 타기 싫었기에 온사를 위에 태우고 자신은 고삐를 잡고 앞에서 걸었다.남산 산기슭에 다다랐을
그는 혹시라도 막수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해명을 덧붙였다.하지만 그럴수록 막수의 눈에는 더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온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랬군요. 어서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죠.”그녀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고 북진연과 막수만 정원에 남았다.막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의 마음이 너무 티가 납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다 보일 정도예요. 무우는 현재 우리 수월관 사람이니 전하께서 이럴수록 무우의 수행을 망치는 것입니다.”북진연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서신을 받은 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온 그였다.수월관에 도착하고 막수와 부딪쳤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위가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밤중에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다니, 다른 사람이 봤으면 온사의 명성에 큰 누를 끼칠 것이다.북진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군. 사태,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다음엔 더 주의하겠습니다.”막수는 다음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북진연을 노려보았다.이때, 온사가 뜨거운 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세 사람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사는 북진연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막수와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사부님, 독사의 사체는 어디에 쓰려고 남기라고 한 건가요?”온사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구석 쪽을 바라보았다.북진연은 그제야 구석진 곳에 쌓인 피 묻은 보따리를 발견했다.살짝 풀어진 틈새로 독사의 머리가 보였다.비취색의 영롱한 색상을 보고 북진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독성이 매우 강한 독사인데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보따리의 형태로 봐서 적어도 열 마리는 될 것 같았다.이게 모두 온사의 정원에서 나왔고 오늘 온사가 하마터면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북진연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이미 죽은 녀석들이고 좋은 약재로 쓰일 수 있어. 마침 3일 후에 그 사구라는 인간을 만나야 하니 그 전에 이것들로 좋은 선물을 준비할
약속 시간을 잡은 사구는 그 길로 뒤돌아섰다.그렇게 온사의 정원을 지나던 그는 뭔가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늙은 여승이 있었다.사구는 그 여승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그가 옷소매를 휘두르자 뱀들이 소매에서 기어나와 여승이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사구는 그걸 본 여승이 겁에 질려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흥미가 사라진 사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길로 수월관을 벗어났다.사구가 떠난 후, 추월은 정원 안팎을 꼼꼼히 확인했다.그리고 정원 곳곳에서 십여 마리의 뱀을 잡아냈다.“사구 놈이 다녀간 후로 내 처소가 뱀 소굴이 다 되었네.”독사를 전부 처치한 추월은 굳은 표정으로 뱀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 불사르려 했다.그리고 이때, 막수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잠깐, 그 독사들은 그대로 둬.”고개를 돌린 온사가 물었다.“사부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내가 안 왔으면 네가 나 몰래 이렇게 큰 일을 치르고 있을 줄도 몰랐잖니.”막수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사를 쏘아보았고 온사는 괜히 찔려서 어깨를 움츠렸다.사부는 밖에서 그녀와 사구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온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사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작정하고 숨긴 게 아니라 확실해지면 사부님께 말하려고 했어요!”“정말이니?”막수 사태는 못 믿겠다는 어투로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온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저도 출가인입니다, 사부님!”“하, 말은 잘해.”막수는 냉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말했다.“일단은 믿어주도록 하마. 허나 삼일 후 나도 너와 같이 가겠다.”“그건 안 돼요, 사부님!”온사는 당황하며 막수를 말렸다.“아주 위험한 상황이란 말이에요. 상대가 몇이나 데리고 나올지도 모르고 그쪽에서 만약 사람이 많이 오면 한바탕 피바다가 될 거예요. 사부님은 출가인인데 어찌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겠어요?”“그럼 넌 출가인이 아니고?”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그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나에 대한 정보를 대체 누가 줬을까?”중년 사내는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배신자는 빨리 제거해야 해서 말이야.”온사는 당연히 이 시점에 김사도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주인이 워낙 겁쟁이라 좀 겁만 줬을 뿐인데 전부 말하더라고. 그걸 꼭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알아?”“쯧,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사구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참 궁금하단 말이야. 고결하신 성녀 전하는 대체 우리 아가씨한테 어떤 식으로 겁을 줬을까?”능글맞게 웃는 그의 눈매에서 위협이 느껴졌다.하지만 온사에게는 저런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도 많아서 말이야. 궁금하면 너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됐어. 난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성녀 전하의 시련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 본론부터 얘기하지.”사구는 손을 뻗더니 소매 안에서 고급 소재의 헝겊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성녀 전하,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온사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것은 사망하신 어머니께서 입관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온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좋아. 어디 네 얘기 한번 들어보지.”그녀는 소매를 만지는 척하며 공간 안에서 뭔가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피 묻은 머리카락이었다. 딱 봐도 억지로 잡아당겨 뽑은 것으로 보였다.사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물건으로 날 협박하려 하지 마. 네가 어머니를 완전한 상태로 돌려준다면 너희의 아가씨도 무사할 테니까.”물론 지금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그래도 사지 멀쩡하고 손발가락 그대로 붙어 있으니 완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사구는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호통쳤다.“이런 식으로 나에게 협박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어!”“그건 예전이고 지
“뭐라고?”온자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는 그런 그를 싸늘히 노려보고는 말했다.“거래 안 한다고. 알아들었어? 내가 다시 말해줘?”“온사, 너!”온자월이 온사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놀란 온자월은 품에 간직한 비수를 꺼내려 했다.하지만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추월의 주먹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추월은 주먹으로 온자월의 얼굴을 쳤다.퍽!온자월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가 일어나서 반격하기도 전에 추월은 그의 복부를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너… 넌 누구야? 감히 진국공가의 공자에게 무력을 휘두르다니!”온자월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신분으로 추월에게 겁을 주려 했다.온사는 그런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추월이 고개를 숙이고 온사의 뒤에 섰을 때에야 온자월은 상황을 눈치챘다.“이 아이는 내 사람이야. 뭐, 불만 있어?”온사는 바닥에 쓰러져서도 소중히 연을 감싸고 있는 온자월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아들이 원수의 딸을 구한답시고 친히 만들어준 연을 거래 조건으로 들고 나온 걸 어머니가 아시면 참 후회하실 거야.”“원수의 딸이라니! 또 무슨 헛소리야!”온자월은 바닥에 쓰러져 몸도 못 일으키면서도 언성을 높여 말했다.“참, 내 정신 좀 봐. 또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온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니는 생전에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어. 네가 불효자인 걸 아셨어도 후회는 없으셨을 거야.”말을 마친 온사는 온자월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온자월 너는 후회 안 해?”온자월은 주먹을 꽉 쥐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 넌 나와 막내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어. 하지만 착각하지 마. 혈연을 떠나서 막내는 내 동생이야!”“그래?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도 그 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랄게.”그 말을 끝으로 온사는 수월관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온자월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그가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온사는 그가 뭐 하러 온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온자월이 대체 뭘 갖고 왔을지 궁금했다.밖으로 나가서 온자월이 들고 있는 연을 보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연까지 가지고 왔네?”온자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 연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나도 쓸데없는 말 안 할게. 너 어머니의 물건을 원하잖아? 이 연을 너에게 줄게. 당장 막내를 풀어줘.”온사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온모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걔를 위해서 어머니까지 버릴 생각이야?”“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야!”그 말을 들은 온자월은 곧바로 반박했다.“네가 막내를 납치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머니의 물건을 꺼낼 일도 없었어!”온사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넌 결국 어머니와 외부인 둘 중에 외부인을 택했다는 거잖아!”“헛소리하지 마!”온자월은 격앙된 목소리로 호통쳤다.“막내는 외부인이 아니야. 외부인은 너지! 잊지 마, 넌 이미 진국공가의 딸이 아니야. 진국공가의 딸은 막내 한 명뿐이야. 걔가 내 동생이라고!”“그래! 양심도 없는 놈. 역시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끼리 잘 어울리네. 원래부터 너희가 일가족이었나 봐!”온사는 눈을 부릅뜨고 온자월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지금 누굴 욕한 거야?”온자월도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 내가 너한테 주먹을 못 휘두른다고 함부로 막내 욕하지 마!”온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나한테 주먹을 휘둘러? 참 대단하네. 경성의 사내들 중에 여자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너!”온자월은 발끈하며 온사에게 다가가려다가 손에 든 연을 놓칠 뻔했다. 그는 뒤늦게 연이 괜찮은지 살펴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온사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연을 외부인인 나에게 갖고 와서 거래를 하자는 사람이 뭘 그렇게 긴장해?”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이걸 소중히 보관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