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작은 아빠는 신분을 속이고 이서와 결혼한 거잖아.’ 은철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던 양심의 가책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이서가 작은 아빠의 여자였다니.’ 지환을 바라보는 은철의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이때, 지환은 마침내 방금의 충격에서 정신을 차린 듯했다. 철로 된 대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그가 은철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말했다. “방금 한 말, 다시 지껄여 봐.” 철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철의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는 단지... 제가...” 펑!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문은 지환의 주먹 한 방으로 단번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찌그러졌으며, 이를 본 은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은철은 입술만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지껄여 보라고!” 지환은 마치 우레와 같이 날뛰는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은철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은철이 어찌 감히 말을 이어 나갈 수 있겠는가.‘함부로 지껄였다가는 저 철문이 내가 될지도 몰라.’ 바로 이때, 2층에서부터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철아, 왜 그래? 뭐가 깨진 거야?” 이서의 목소리였다. 은철이 얼른 위층을 향해 말했다.“괜찮아, 별거 아니야. 너까지 내려올 필요는 없어.”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외투를 걸친 이서가 달빛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본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은철을 바라보며 말했다.“은철아, 방금 들린 큰 소리는 어디서 난 거야?” 은철이 불안한 눈빛으로 이서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고, 그제야 철문 뒤에 서 있던 지환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과거의 이야기로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하던 이서의 모습을 떠올린 은철이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이야. 괜찮으니까 올라가서 쉬어.” “정말 괜찮은 거야?” 이서가 뒤틀린 철문
‘하마터면 잠깐의 동정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어.’ 은철이 비틀거리며 휴대전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전화를 건 사람이 뜻밖에도 이전에 전화를 걸어왔던 낯선 여자라는 것을 깨달은 그가 즉시 휴대전화를 들고는 모든 화를 그녀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서는 기억을 잃었으니, 반드시 나랑 결혼하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결혼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불구하고 승낙은커녕 퇴짜를 맞았다고요!” 멍하니 은철의 이야기를 듣던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그거야 하은철 씨가 너무 급했으니까 그렇죠. 내가 말했잖아요, 다 방법이 있다고. 내일 다시 전화할 테니까 윤이서 씨를 데리고 나오기만 하세요.] “확실한 방법인 거 맞습니까?” 수화기 너머 여성의 말을 들은 은철은 화가 거의 가라앉은 듯했다. ‘그래도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 [걱정하지 마세요. 내 방법은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요. 거절할 여자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수화기 너머의 여성은 꽤 자신만만한 듯했지만, 은철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이서가 작은 아빠를 잊은 건 확실하지만, 온 신경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고요. 본인의 신경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모를 뿐이죠. 이런 상황에서도 정말 이서가 내 청혼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여자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래서, 윤이서 씨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당연히 하고 싶죠!” 은철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내가 시키는 대로 내일 윤이서 씨를 데리고 나오기만 하세요.] 여자의 명령하는 듯한 말투에 불쾌감을 느낀 은철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이서와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냉큼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수화기 너머의 여성은 확신에 찬 은철의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치켜세우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자,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던 하지호가 천천히 의자를 돌려 앉았다. “왜? 은철이가 이서랑 결혼하겠대?” 박예솔이 머리
뒤로 움츠러든 이서의 시선이 뒤쪽으로 쏠렸다. 창밖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건물들이었으나, 기억 속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더 웅장하고 깨끗해진 것 같아.’ 한 시간가량이 흐른 후, 그들은 마침내 천북 백화점에 다다랐다. 차에서 내린 이서와 은철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을 들을 수 있었다. “강도예요! 강도!” 몇 초 후, 쏜살같은 그림자가 이서의 앞을 지나쳐갔다.이서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은철이 잽싸게 뛰어가 그 사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 사람은 자신을 잡아챈 사람이 하은철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공포에 질려 도망가려 했으나, 은철에 의해 넘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으며, 손에 쥔 핸드백 역시 놓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낭패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 가방을 주워 든 이서가 그것을 빼앗겼던 중년의 여성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요.”그 여성은 몇 번이고 가방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은철과 이서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분들이시네요. 오늘 두 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방금 산 가방을 도둑맞고 말았을 거예요.”눈앞의 여성와 은철에게 꽉 붙잡힌 남성을 번갈아 바라보는 이서의 마음은 어떠한 미동도 없이 고요한 듯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또다시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떠올랐다. 이서가 그림자 주인공의 명확한 이목구비를 떠올리려던 찰나, 중년의 여성이 이서의 이성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가씨, 이 사람, 아가씨의 남편이죠?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네요. 이런 남자를 남편으로 얻었다니 정말 부러워요.” 이서는 그 여성의 감춰지지 않는 동경을 보면서도 영광스러움이나 행복감, 교만함은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출동한 경찰이 가방을 훔친 강도를 체포한 후에야, 그 여성도 자리를 떠났다. “우리도 이만 가자.” 은철이 미소를 지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그제야 은철이 방금의 연
하은철을 바라보는 이서의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은철이 매섭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서는 반드시 내 여자가 되어야 해.’ “응, 내가 준비한 거야. 마음에 들어?” “정말 네가 준비한 거구나, 넌 정말 창의적이야.”이서가 수줍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정말 마음에 들어.”“다행이다.”수줍어하는 이서의 모습을 본 은철은 모든 불안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것 좀 봐.” 은철이 갑자기 이서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든 이서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 곳에는 형형색색의 풍선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풍선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서가 풍선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이서야, 나랑 결혼해 줄래?” 이서가 글자를 다 읽자, 옆에 있던 은철이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어 이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서야, 전에는 내가 정말 잘못했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 앞으로는 절대 너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나한테 과거의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면 안 될까?”그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은철의 간절한 눈빛은 이서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듯했다. “이서야,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 평생 너만을 위하면서 살게, 믿어줘.”은철이 다리를 끌며 이서를 향해 다가갔다. 이서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눈빛이 극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은철아, 그 말, 믿어도 될까?” ‘왜 자꾸 은철이를 믿으면 안 된다는 충고가 들리는 것 같지?’‘하지만... 이렇게나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걸...’‘앞으로는 정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당연하지, 믿어줘. 이서야, 예전에는 내가 정말 나쁜 놈이었어. 앞으로는 달라진 모습만 보여주도록 노력할게.” “너는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난 너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진심인 것 같아.’ ‘정말 간절해 보이잖아.’ 머뭇거리던 이서가 손을 내밀었다.너그러워진 이서의 반응을 본 은철이
“올리자.”하은철이 이서가 승낙하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그녀가 반지를 끼고 있는 사진을 찍었고, SNS에 게시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연예부 기자에게 연락하여 이 소식을 신문의 1면에 실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불과 몇 시간 후, 이서와 은철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소식은 많은 대중을 놀라게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하은철은 윤수정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윤이서랑 결혼한다는 거예요?] [머리 아파 죽겠어요, 연예계보다 명문가가 더 복잡한 것 같아요.] [윤이서는 이미 결혼한 거 아니었어요?] [윤수정은 식물인간이 되었다던데요?][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교통사고가 났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아무도 몰라요.][어머나, 정말 엉망진창이네요.] [...]비록 많은 대중이 혼란스러움을 표했으나, 축복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요.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원래 정혼을 맺었던 건 윤이서랑 하은철이었잖아요.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갔을 뿐이에요.] [윤수정처럼 악독한 여자보다는 윤이서가 하은철에게 더 잘 어울리죠.] [...]인터넷이 이렇게 떠들썩한데, 어떻게 인터넷을 붙잡고 사는 하나가 이 소식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심소희가 참지 못하고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심소희: 형부도 보셨겠지?] 하나가 이미 이서가 기억을 잃게 된 전후 상황에 대하여 알려준 덕분에 두 사람도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상황이었다.[서나나: 알고 계실 거야. 이서 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실 텐데 모르실 리가 없어.] [서나나: 그럼 형부는...]소희는 차마 채팅을 이어 나갈 수 없는 듯했다. 나나도 침묵을 지키며 채팅하지 않았다. 하나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임하나: 내가 걱정되는 사람은 형부가 아니라
바로 이때, 갑자기 임하나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상언에게서 걸려 온 전화임을 확인한 하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도무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내가 본인한테 전화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던 걸까?’ 하지만, 하나가 정신을 차리는 사이에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하나의 마음이 순식간에 처량하고 두려워졌다.‘다시 전화를 걸어야 할까?’그 순간, 다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상언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을 확인한 하나는 너무도 기뻤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받자, 또 후회하지 말고.’ [하나 씨.]상언 역시 하나가 전화를 받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네.”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상언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하나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서요. 그날 진료실 입구에서 하나 씨한테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어요.] 하나가 등을 꼿꼿이 세웠다. [지환이가 이서 씨를 속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지환이 잘못이에요. 지환이를 도와 하나 씨를 속인 저도 잘못한 거고요.][그날...]“이 선생님은 잘못한 거 없어요.”하나가 상언의 말을 끊었다.“적어도 그날, 그런 상황에서 이 선생님이 잘못한 건 없으세요.” “그때 형부를 들여보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했을 거예요.” 하나가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상언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하나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왜 그래요? 제가 말실수라도 한 거예요?” [아니요...]정신을 차린 상언이 대답했다.[전... 하나 씨가 아직도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반응일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하나가 붉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내가 융통성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거예요?”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허, 그런 뜻으로 말한 거 맞잖아요.”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향하는 하나의 말투가 다소 경쾌해졌다.“
[정말이에요! 또 하나 씨를 속이는 거라면 저는 정말 천벌을 받을 거예요!] 임하나가 피식 웃었다.“그건 이 선생님이 가장 잘 아시겠죠. 만약 또 나한테 숨기는 게 있다면, 그땐 정말 하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정말 없어요.]상언은 마음을 꺼내어 하나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듯했다.[하늘에 맹세할게요.] “그래요, 이번 일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저를 속인 적이 없으니까 한 번은 믿어줄게요.” 이 말은 들은 상언은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그럼 우리...]“우리 이야기는 접어두고, 이서랑 형부에 대한 것부터 말해봐요.” 의자에 앉은 하나가 달갑지 않다는 듯 물었다.“정말 이대로 이서랑 하은철이 결혼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거예요?” [마이클 천 선생님도 이서 씨가 기억을 떠올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셨잖아요.]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상언이 말했다. [다만, 이서 씨가 기억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야겠죠.]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하나가 상언을 불렀다.“맞다, 이서가 기억을 되찾으면, 그때는 하씨네 어르신의 죽음에 관한 충격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죠?” 하나의 질문을 들은 상언은 또 한 번 멈칫했다. [계속해서 이서 씨의 기억을 잃게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때도 이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그래요, 다른 방법이 없다면...”하나가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만 집중하자고요.” 하나는 상언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이서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야, 나 좀 도와줘.] 수화기 너머의 이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뭐야, 어디서 몸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거야?’ 하나의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이서는 화장실에 몸을 숨긴 채, 하나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은철과 결혼을 약속한 이후, 이서는 줄곧 불안감을 느꼈고, 핑계를 대고 화장실로 달려가 하나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서야
이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지만, 안에 사람 있어요?”이서가 발아래를 바라보자, 문 아래 빈 공간으로 한 사람의 다리가 보였다. “있어요.”“윤이서 씨 맞죠? 남자 친구가 들어온 지 오래됐다고 걱정하길래 내가 대신 들어와 봤어요.” “윤이서 씨, 괜찮아요?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야기를 듣던 하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이만 돌아가 봐.] “그래.”[내가 한 말, 꼭 기억해야 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알았지?] “그래, 알겠어.”순순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이서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인자한 노인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이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서 역시 예의상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이 인사가 그녀의 걷잡을 수 없는 수다 본능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그녀는 이서를 잡고 은철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한테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는 남자 친구는 난생처음 봐요. 아마 아가씨는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남자 친구가 화장실 입구에 서서 오고 가도 못하고 있더군요.” “아이고,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재미있네요.” 이서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남자 친구가 평소에는 표현을 잘 안 해주나 봐요?” 이서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에이, 그런 눈으로 쳐다볼 거 없어요. 여태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딱 보면 딱 알죠.” “묵묵히 챙겨주고 생색내지 않는 사람인 것 같더군요. 저런 남자를 만난 건 복이에요, 복.”“그런가요?”이서는 고개를 숙인 채 노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은철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나한테 묵묵히 헌신해 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은철을 비꼬는 이 생각은 마음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이의 희미한 실루엣 역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