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시간과 장소는 무조건 내가 정해야겠구나.]이서는 말문이 막히는 듯해서 곧장 답장하고 싶지 않았다.윤재하가 시간과 장소를 정하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오후 일을 마친 후, 이서는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서 나나를 만났다.나나가 선택한 곳은 5성급 호텔로, 보안 유지가 아주 훌륭해서 파파라치의 도촬 따위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이서가 모습을 드러내자, 나나가 서둘러 맞이하며 그녀를 껴안았다.“이서 언니, 오랜만이에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마음이 따뜻해진 이서가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다.“나도 보고 싶었어. 촬영 현장은 어땠어?”“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저를 잘 보살펴 주셨어요.”모두 나나 뒤에 윤씨 그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하씨 가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 마치 최후에 나나의 미움을 산 사람이 어떤 말로를 마주했는지 머릿속에 생생히 새긴 것 같았다.그 사람은 심씨 가문의 미래 상속자인 심동의 여자 친구였다.이런 배후조차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나나에게 미움을 살 용기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나는 성격이 온화해서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하씨 가문의 몇몇 유명 스타들이 그녀를 무시하고 가끔 괴롭히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나가 말한 대로 그녀를 특별히 챙겨주었다.“다행이네.”이서가 나나를 자리에 앉히자, 그녀가 말했다.“당연하죠.” “이제 너도 돌아왔으니, 다음 계획에 관해서 이야기할게. 지금의 윤씨 그룹은 더 이상 이전의 윤씨 그룹이 아니야. 내 손에는 충분한 자원이 있고, 너를 국제적인 대스타로 키워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계획이 성공하려면 네가 더 강해져야 해.” “네 실력이 내가 가진 자원에 걸맞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어.”“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앞으로는 선생님을 모셔서, 네가 체계적인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할 생각이야.”“즉, 앞으로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말인데...
세 사람은 주문을 마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던 중, 나나가 갑자기 소희를 언급했다. “한 명이 빠져서 아쉽네요. 넷이 모여야 했는데 말이죠.” 이서와 하나는 모두 침묵했다.잠시 후, 하나가 말했다.“소희가 이 자리에 올 수는 없지만, 영상 통화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심 대표님 내외가 늘 소희를 감시한다고 해도, 우리와 영상 통화도 못 하게 할까?”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의견에 동의했다.이내 전화음이 연결되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하나는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는 사람은 없었다.그들은 알 리가 없었다.소희가 심씨 가문의 사당에서 심씨 가문 사람들의 심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심씨 가문의 사당.이미 어두운 밤이 되었지만, 이 일대는 대낮처럼 밝기만 했다.사당의 등불은 모두 켜져 있었고, 입구에는 표정이 엄숙한 사람들이 가득 서 있었다. 하나같이 말이 없었는데, 고요한 밤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맨 앞에서는 소희가 두 남자에게 눌려 어르신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냉담하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눈동자에는 차가운 빛만이 가득했다.그리고 소희의 멀지 않은 곳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심근영 부부가 있었고, 그 옆에는 조롱하는 듯한 표정의 강경숙과 심유인이 있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 있는 소희는 그 어르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장 중간에 앉은 어르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심소희, 이제 네 잘못을 알겠니?” 소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여러분이 괜히 사적인 재판을 열고 있는 거라고요!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건 여러분이에요.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라고요!” 이 말을 들은 어르신은 아주 노여워했다.“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 게냐? 심소희, 이번에는 범행의 증거도 있어!”
이런 행위는 표절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었다.그러나 게임 회사의 자료는 모두 기밀에 부쳐져 있었고, 모든 직원은 기밀 유지 협의서에 서명한 상태였다.심지어 그들의 이메일과 핸드폰도 조사했지만, 회사의 기밀을 넘긴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그렇게 혼란이 가중되던 찰나, 익명의 누군가가 제보를 보내왔다.[심소희가 벌인 짓입니다!][증거는 그 여자의 가방 안에 있을 거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곧장 심씨 가문의 고택으로 달려온 것이었다.그들은 고택에 들어서자마자 소희를 때리려 했다. 일부 사람들은 자기가 공들여 개발한 게임이 수포가 된 것이 억울하다고 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개인적인 앙금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기를 원했다고 했다.이 말을 들은 심근영은 황당하기만 했다.“소희는 며칠 동안 집에만 있었고, 너희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너희의 기밀문서를 훔칠 수 있었겠어?!”“게다가 어떤 방법으로 기밀문서를 훔쳤다는 거지?” 하지만 그들은 심근영의 말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 누군가는 소희의 방에 쳐들어가 그녀의 가방에서 USB를 찾아내기도 했다. 물론 그 안에는 게임에 관한 자료가 쌓여 있었다.그래서 그들이 소희를 사당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르신들은 곧장 가문의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았고, 지금과 같은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이 USB는 네 가방에서 나온 거야!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증언할 수 있는데도, 내가 너를 모독한다는 게냐?” 소희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을 거예요.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여러분은 이 모든 게 제가 한 일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 USB가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그 USB 안에 회사의 기밀이 숨겨져 있다고 하셨죠? 저는 여러분의 회사에 가본 적도 없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그 기밀문서들을 복사해 냈다는 거죠?” “당연히 회사에 갈 필요가 없었겠지! 너는 심씨 가문의 아가씨야. 네 말 한마디면, 너나 할 것 없이
하지만 지난번 소희가 폭로하겠다고 위협한 후, 어르신들은 그 생각을 포기했었다.다만, 매일 같이 그녀가 스스로 실수를 저질러 자신들에게 약점을 잡히기를 기다릴 뿐이었다.어쩌면 헛된 망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이 소희의 대담한 행동으로 큰불을 일으키자,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하지만 소희가 자신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어르신들은 마음속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왜 네 가방에 USB가 있었던 거지?”심지훈은 마침내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그동안 회사 기밀을 훔친 사람을 찾아 소송을 걸기 위해 조급해했다.그래야만 손실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자, 점차 냉정해지며 이전에는 이상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이제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했다. ‘잠깐, 심소희가 말한 대로 우리는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이해관계도 없어. 그렇다면... 왜 우리 회사의 기밀을 훔친 걸까?’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그 익명의 제보야.’‘그 사람은 심소희의 가방에 USB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게 명확한 제보를 한 걸 보면, 우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린 것만 같아.’ ‘그리고 심소희!’‘정말 심소희가 게임 자료를 훔쳤다면, 이미 팔아넘긴 USB 자료를 폐기하지 않았을까?’‘계속 가방에 넣어 두면 우리가 찾을까 봐 두렵지 않았겠냐고.’“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제대로 조사해 보는 게 어떨까요?”소희가 심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가 고개를 숙였다.심지훈은 진심으로 기밀을 유출한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기밀을 유출한 사람을 고소하여 배상금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설령 소희가 기밀을 유출한 사람이라고 해도, 법원은 USB만으로 이 사건의 범인을 소희라고 단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조사할 필요가 있겠니?”심지훈의 표정이 풀린 것을 본 어르신이 급히 말했다.“범죄의 증거가 확보된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이 일이 심소희가 한 일이라면, 심 대표가 배상하면 될
한참이 지나서야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요!”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떨어졌다.‘심유인?’사람들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왜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된다는 거지?”심근영은 눈빛으로 심유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내가 벌인 일이라고, 심소희를 모함하고 싶었다고 말할 순 없어. 만약 경찰이 내가 벌인 일인 걸 알게 된다면...’상황을 지켜보던 강경숙이 서둘러 핑계를 찾았다.“가족끼리 잘잘못을 따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이 일이 밖으로 퍼지기라도 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요? 제 생각엔, 차라리 조용히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르신들도 이 일을 속전속결 시키려 했다.“우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어. 어쨌든, 소희의 가방에서 USB가 나온 건 사실이잖나? 설령 이 일이 소희가 벌인 일이 아니라고 해도, 소희는 대가를 치러야 해! 교훈을 얻어야 하는 법이니까!” 소희가 말했다.“어르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가 벌인 일이 아닌데도, 제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요? 피해자한테도 죄가 있다는 건가요?” 어르신은 수치와 분노가 섞인 얼굴로 말했다.“내 말이 틀렸다는 게냐? 다른 사람의 가방이 아닌, 네 가방에 USB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반성해야 하지 않겠니?” 소희는 정말이지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좋아요, 경찰에 신고하시죠. 도대체 누가 제 가방에 USB를 넣은 건지 밝혀내야겠어요.”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직접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소희가 정말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본 어르신들이 아연실색하며 말했다.“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심씨 가문의 일은 우리가 결정해야 해! 우리가 결정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네 멋대로 결정을 내리다니! 이... 이런 안하무인을 봤나!” “그저 경찰에 신고한 것뿐이에요. 심씨 가문의 규칙도 이 시대에 맞게 바뀔 필요가 있어요.”소희는 이 말을 마친 후, 양쪽에 있던
‘사람들은 내가 강경숙 모녀를 모함한다고 할 게 뻔해.’‘허,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는 건 참 좋은 거구나.’소희가 말했다.“네, 제가 하지 않은 일이니 제가 책임을 질 필요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진범은 흔적을 남겼을 테니까요.” 심유인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경숙이 웃으며 말했다.“맞아, 진범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법이지. 경찰이 반드시 기밀을 유출한 사람을 찾아낼 테니까 지켜보자꾸나. 시간이 늦었으니, 나와 유인이는 이만 돌아가 보마.” 강경숙은 이 말을 끝으로 심유인을 끌고 갔다.심유인은 입구에 다다른 후에야 강경숙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엄마, 왜 말도 못 하게 해요? 심소희가 뭔가 발견한 건 아니겠죠?”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너는 우리가 심소희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는 걸 다 폭로했을 거야, 내 말이 틀렸니?!”화가 난 강경숙이 말했다.‘어휴, 화를 가라앉힐 줄 모르는 딸이라니, 정말 골치 아프군.’ “엄마, 제가 그걸 말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요.” “그래, 말하지 않는다고 치자. 네 얼굴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아니?! 급하고 당황한 표정이 네가 이 사건과 관련 있다는 걸 뻔히 드러내고 있다고!” 심유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엄마...” 강경숙은 그제야 너그러운 어투로 말했다.“유인아,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야. 단지 이 엄마도 화를 참을 수 없어서 그래.”“경찰이 뭔가 알아내면 어쩌죠?”“허.”강경숙이 냉소를 지었다.“심소희의 동생이라는 녀석, 시골에서 왔지만 능력이 탁월하더구나. 걔는 오늘 저녁에 심소희가 경찰에 신고할 거라는 걸 일찌감치 짐작했어. 그래서 모든 준비를 해놓고, 걔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이번에는 아주버님이 나서서 심소희를 보호하려고 해도, 심씨 가문 전체가 심소희를 지지한다고 해도, 심씨 가문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을 거야.” “엄마?”심유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심태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심소희를 쫓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예요
이서는 병실로 돌아왔지만, 조용한 옆 병실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이맘때에는 불을 밝게 켜고 향기로운 음식 냄새를 풍기면서 나를 유혹하려 하더니, 오늘은 왜 저렇게 조용한 거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이서는 그들이 또 다른 계획을 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냥 검사실로 들어가자.’하지만 그녀가 검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지환의 병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이서는 인상을 찌푸린 채 병실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문을 열고 자신의 병실로 들어갔다.그녀는 밤새 귀를 쫑긋 세우고 옆 병실의 인기척을 들으려 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이서는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퇴원했을 리는 없는데...’ ‘퇴원한 게 아니라면,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밤새 잠을 뒤척이던 이서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곧장 옆 병실로 갔다.하지만 지환의 병실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이서는 회사에 도착한 후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동료의 인사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일에 몰두하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불안했다.‘하지환 씨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질 리가 없는데?’ 이서가 핸드폰을 꺼내 머뭇거리던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윤 대표님.”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늘이 아닌 고이서였다.이서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이서의 시선이 고이서가 들고 있는 꽃차에 떨어졌다. 고이서는 꽃차를 이서의 앞에 놓고 웃으며 말했다.“윤 대표님, 조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뵀는데 정신이 없으신 것 같더라고요. 어젯밤에 잘 못 쉬신 건가요?” 이서가 말했다.“네.”“이 꽃차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고이서가 말했다.“윤 대표님, 잠이 오지 않으시면 이 꽃차를 한 잔 드세요. 바로 잠
이서의 머릿속에는 꽃차의 효능을 시험해 보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걸 마시면 정말 잠들 수 있을까?’‘나는 지금 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데...’ 병원으로 돌아와서 검사를 마친 이서는 결과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병실로 돌아갔다. 옆 병실은 문은 그때까지도 굳게 닫혀 있었다.이서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바로 그때, 간호사가 병실 앞을 지나갔다.이서가 얼른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저기... 뭐 좀 여쭤볼게요.”“이 병실에 있던 환자, 퇴원했나요?” 간호사가 병실을 힐끗 보았다.지환은 이 병원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지 않은가. 그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아, 하 대표님이요? 퇴원하진 않으셨는데, 며칠간 병원에 묵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상처 부위는 좀 나았고요?”“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뿐이거든요. 의사 선생님께 자세히 물어봐 드릴까요?” 이서가 얼른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것뿐이에요.” 간호사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걸까?’ 이서가 얼굴을 붉히며 자기 병실로 들어갔다.방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심장이 뛰는 듯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야.’‘설마...’‘하도훈 때문에?’ ‘하도훈 일이라면...’이서는 지체 없이 핸드폰을 켜고 지환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그와 냉전 중이라는 생각에 이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이천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수신자가 이서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온몸에서 차가운 카리스마를 내뿜었다.이천은 그 기세에 눌려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대표님... 받을까요?”이천이 긴장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봤다.‘내 목숨이 날아가는 건 아니겠지?’ 지환은 그를 흘겨보며 말하지 않았지만, 온몸에서 뿜어내는 차가운 기운으로 이천을 짓누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