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고은혜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은혜도 알아챘을 정도로 여시은은 자신의 의도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은서야, 너랑 여시은 씨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방금 네 말에서 다른 의도가 느껴졌어.”유성준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한두 마디로는 설명이 안 돼.” 고은서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오빠, 여시은이 만약 오빠한테 비즈니스를 소개해 준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 차라리 거절하는 게 나을 거야.” 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금 여시은 씨에게 향수를 개인적으로 선물한다고 한 거야? 그걸 MQ의 기획에 쓸까 봐?” 고은서는 확실이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여시은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왔고 그녀가 자신에게 향수를 맡기려는 목적이 무엇이든 MQ를 떠나서 그건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문제 생기지 않을까?” 고은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사람을 걱정할 줄도 아네?” 고은서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다 계획이 있어.” 복이 아니면 화가 될 테니, 고은서는 여시은이 과연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보려 했다. 그때,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고은혜는 고은서에게 해산물을 사달라고 했다. “최근 인턴 생활 너무 힘들어서 위로가 필요해.” “성준 오빠가 너를 소홀히 한 거야?” 고은서가 일부러 물었다. 유성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냥 내가 더 배우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 공부보다 더 힘들어.” 고은혜는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유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고은혜까 유성준을 초대했다. 유성준은 한동안 고은서를 못 봤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대접할게.”고은혜가 고른 곳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해산물 레스토랑이었다. 주문을 받을 때 웨이터가 하나의 디저트를 추천했다. 그 디저트에는 견과류가 들어 있었
다음 며칠 동안 고은서는 매우 바빴다. 유일 투자은행의 공식 연회가 송민아의 기획으로 예정대로 열렸다. 연회 당일, 주인혁은 자발적으로 현장에 도착해 개막 게스트로 두 곡을 불렀다. 고은서는 그 장면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인혁의 현재 명성에 비해 그가 공연하는 것은 다소 과한 일이었지만 그는 연예인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무대를 도와준다고 했다. “누나, 개업식 때 제가 가려고 했었는데 그때 계약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어요. 이번에는 절대 거절하지 마세요.” 주인혁이 간절하게 말했고 송민아도 부추기자 고은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의 챔피언인 주인혁의 목소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현장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송민아는 리허설에서 이미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전에 왜 팬들이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 조금 알겠어. 진짜 매력적인 점이 있네.” “발라드 왕자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야.” 고은서가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좋아하면 인혁 씨를 남자친구로 만들어서 노래 듣고 싶을 때마다 현장에서 불러 달라고 해.” 송민아가 고은서의 농담에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너한테 관심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게스트로 온 이유도 결국 너 때문이잖아.” 고은서는 주인혁을 도와준 일을 송민아에게 털어놓았다. “사람은 힘든 순간에 받는 따뜻함에 특별히 감동을 받게 돼. 인혁 씨도 결국 언젠가는 깨달을 거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송민아가 고은서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나이 든 사람처럼 말해? 마치 많은 걸 겪은 사람처럼...” 고은서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확실히 많은 일을 겪었다.곽승재가 그 괴상한 남자를 쫓아내 준 순간, 고은서는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난 게 아니었다면 곽승재는 단지 잘생긴 남자
[은서 씨, 방금 저한테 전화했나요?] 송민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지 않고 흐릿하게 들렸다. [민준 씨, 저...][쾅!] 고은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의자와 테이블, 술잔이 부딪히며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읍...] 송민준은 아마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고통에 찬 신음이 들리고 한참 후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먼저 끊을게요.] 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술자리에 있는 것 같았고 소리로 듣기엔 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고은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연회는 이제 거의 끝나고 손님들을 태운 차들이 떠난 뒤 고은서는 자신이 예약한 차로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앱을 열자마자 주인혁의 번호가 번쩍였다. [누나, 송민아 씨의 오빠가 다친 것 같아요. 지금 급히 오빠를 찾으려고 하는데 막아야 할까요?] 주인혁이 급하게 물었다. ‘민아는 술에 취해 발걸음도 제대로 못 옮길 텐데 어떻게 송민준 씨를 찾으러 가겠다는 거지?’ 고은서는 급히 답했다. [가지 못하게 해요. 주소 알려줘요. 내가 송민준 씨 찾으러 갈게요.] 주인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몇 분 후, 고은서는 주소를 받았고 그것은 술집이었다.고은서는 차를 타고 송민준을 찾으러 갔다. 송민준은 셔츠만 입고 카바나 소파에 기대어 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술집의 불빛은 어두웠고 고은서는 그의 표정을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송민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의 온화하고 완벽한 신사의 모습과는 달리 그의 몸에선 몇 분의 무기력함이 묻어났다. 그때, 한 마른 남자가 송민준에게 몰래 다가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송민준이 술에 취한 틈을 타 그의 물건을 훔칠 생각인 듯 보였다. “뭐 하는 거야!” 고은서가 크게 소리쳤다. 마른 남자는 놀라서 멈췄고 송민준도 고은서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살짝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고은서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방금 송민준의 물건을 훔치려고 했던 마른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마른 남자는 얼굴이 술에 취한 듯 붉고 건방진 표정으로 고은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체격에 말투가 거친 남자들이 세 명 서 있었다. “감히 내 일을 방해하다니. 오늘 내가 널 가만두지 않겠어.” 마른 남자가 말을 꺼내자 입에서 술 냄새가 가득 퍼져 고은서의 얼굴에 다가왔다. 고은서는 그 술 냄새에 거의 토할 뻔했지만 술에 취한 사람들은 이성이 흐려지기 마련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무리해서 논리적으로 맞서거나 힘으로 맞서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송민준은 지금 술에 취해 정신이 멀쩡하지 않고 발도 다쳤다.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서 고은서는 전략적으로 약한 척하기로 결심했다. 고은서는 속으로 토를 참으며 말했다. “여러분, 방금 제가 실수했어요. 이렇게 하죠. 제가 사과의 뜻으로 돈을 드리겠습니다. 술값을 계산한 걸로 하죠.” “어이, 그래. 말이 잘 통하네?” 마른 남자는 말을 하면서 동료들을 힐끗 쳐다봤고 그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나서 마른 남자는 반쯤 취한 눈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돈보다는 여자를 더 좋아하거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른 남자는 손을 고은서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너 오늘 우리랑 같이 자면 이 일은 그냥 용서해줄게.” 고은서는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순간적으로 그의 하반신을 향해 날카롭게 발차기를 했다. 약하게 나가서는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마른 남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땅에 주저앉았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연약하게 생긴 고은서가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마른 남자들을 상대로 네 명을 상대하며 직접 손을 쓴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술에 취해 아무런 방비도 없던 마른 남자는
“경찰에 신고하면 너까지 죽일 거야.”비쩍 마른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위협했다.“걔네는 연인이야. 싸운 거야. 지금 장난치는 거라고. 괜히 끼어들지 마.”또 다른 남자가 크게 외쳤다.고은서는 확신했다. 모든 사람이 의협심을 갖고 나서는 건 아니라는 걸.하지만 그녀의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도 송민준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고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저씨, 경찰에 신고만 해주세요. 제가 2천만 원 드릴게요.” 그녀는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부탁드려요... 아저씨.”그 순간, 과일 장수 아저씨의 얼굴이 흔들렸다. 정의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 돈이 솔깃해서인지. 아저씨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곧장 과일 장수 차를 몰아 사람 많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힘껏 외쳤다. “사람 살려! 경찰에 신고해줘!”그제야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몰려들고 몇몇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제여 남자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다. 아무리 깡패짓을 해도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미친 건 아니었으니까. “한 번 봐준다. 이년아.”거친 말을 남기며 세 명의 남자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이 있었다. 이 모든 사단을 낸 비쩍 마른 남자. “신고하지 마. 아니면 이 새끼, 바로 죽여버릴 거야.”그는 이판사판이라는 얼굴로 칼을 꺼내 송민준의 목에 바짝 들이밀었다. 찬란한 조명이 칼날에 반사되며 날카롭게 빛났다. “난 어차피 가진 것도 없는 놈이야. 근데 이 새끼는 다르지?”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스쳤다. “이 정도 되는 새끼랑 같이 죽을 수 있다면 내 인생도 그럭저럭 값진 거지.”“진정하세요.”고은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흔들리는 시선을 놓치지 않은 채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지금 술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세요.”그녀는 조심스레 한 발 다가갔다. “이게
늦은 밤인 탓인지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방금 달아나느라고 땀이 난 고은서는 바람을 맞자마자 약간의 쌀쌀함을 느꼈다.송민준은 이내 자신이 들고 있던 외투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술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괜찮다면 쓰고 있어요.”술이 깬 송민준은 평소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그의 눈빛은 미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추위를 느낀 고은서는 사양하지 않고 외투를 건네받았다.심지어 그녀는 연회 일로 종일 바삐 보낸 데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런 일까지 부딪히게 되니 너무 피곤했다.그래서 행여나 감기라도 걸릴까 봐 냉큼 외투를 받아 걸쳤다.“죄송해요, 은서 씨. 제가 민폐를 확실하게 끼친 것 같네요. 몸은 괜찮나요?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받아보는게 낫지 않을까요?”송민준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아요.”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발이 심하게 부은 것 같은데 민준 씨야말로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아까 경찰한테 부탁해서 임시로 스프레이를 뿌렸는데 많이 나은 것 같아요. 그래서 병원은 잠시 안 가려고요.”송민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마침 송민준의 기사가 차를 몰고 두 사람 앞에 섰다.“은서 씨, 제가 데려다줄게요.”자신의 몸은 자신이 더 잘 아는 법, 고은서는 더는 그를 달래지 않고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워 기절한 듯이 자고 싶었다.송민준은 차로 다가가 고은서를 위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은서는 거절하지 않고 곧장 차에 올랐다.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는 송민준의 팔에 핏자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혹시 손을 다쳤나요?”방금 전 고은서가 칼을 든 남자를 발로 차버리긴 했으나 칼을 휘두르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송민준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실수로 베였을 수도 있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팔을 들고 확인해 보았다.“별로 큰 상처가 아니네요. 약 바르면 괜찮을 거예요.”그래도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기사는 비상용으로 차에 둔 약상자에 상처에 바를만한 연고가 있다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
기사는 차 밖에서 대기 중이었고 송민준은 발 때문인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청하고 있었다.인기척을 느낀 그는 이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죄송해요. 제가 저도 모르게 잠들었네요.”고은서는 목을 어루만지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무의식적으로 송민준 몸에 기대지 않아서 다행이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를 깨우지 그랬어요?”고은서가 물었다.송민준은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화제를 바꾸었다.“저에 대한 경각심을 내려놓았나 봐요. 이렇게 쉽게 잠들다니.”금방 잠에서 깬 고은서는 비몽사몽한 상태라 송민준의 말에 깃든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머쓱해 하며 답했다.“너무 피곤해서 밖을 내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는데 죄송해요.”“제가 해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송민준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차 안은 아주 어두웠는데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비춰 들어왔다.고은서는 송민준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그저 느낌상 그가 평소 젠틀한 모습과 달리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보아낼 수 있었다.“저를 해치기라도 하시게요?”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그럴 리가요.”송민준은 이내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인했다.“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는 은서 씨가 꽤 부럽네요.”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이내 송민준의 뜻을 알아차렸다.“민준 씨는 민아 오빠 되는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송씨 집안 가정교육과 조건을 보아서라도 민준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만한 믿음은 충분히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고은서는 진심이었다.송민준이 아무리 위험한 인물이라고 해도 이런 틈을 타 그녀를 해칠 정도의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그녀의 말은 송민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어릴 적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아무런 곤란도 겪어보지 못하고 자란 걸 보
고은서는 이 일로 더는 송민준과 쟁론하고 싶지 않았는 데다가 그가 원하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은행 카드 번호와 연락처를 송민준한테 알려주고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문을 열자마자 밖에서 공손한 자세로 대기 중인 기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나더러 더 편히 자라고 차에서 내려보낸 거겠지.’고은서는 기사한테 간단하게 사죄한 후 아파트 단지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을 들어서자마자 이미숙이 부랴부랴 달려왔다.“은서 씨, 대체 어디 가셨다 이제 온 거예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이미숙은 그녀가 행여나 다치진 않았는지 이리저리 훑으면서 확인했다.사실 고은서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귀가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심지어 전엔 몇 번이고 고씨 집안 본가에서 하룻밤 머무르다 오곤 했는데 이미숙은 단 한 번도 지금처럼 다급해 한 적이 없었다.‘오늘 무슨 일 있었나?’“아줌마, 저 괜찮아요. 제가 늦게 들어오면 먼저 쉬라고 했잖아요. 아직도 안 주무시고 뭐 하는 거예요?”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이미숙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마침 그녀의 폰이 울렸다.“돌아왔어요. 은서 씨가 금방 집에 들어왔는데 다친 곳도 없고 괜찮은 것 같아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도련님.”이미숙은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반면 고은서는 도련님이란 세 글자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곽승재 연락을 받고 날 걱정하는 거야?’그날 농장에서 곽승재한테 화내면서 자신에게 더는 집착하지 말라고 한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그녀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고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심지어 유일 투자 은행에서 주최하는 연회도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이 늦은 시간엔 무슨 일로 전화한 거지?’“네, 알겠습니다. 금방 바꿔드릴게요.”이미숙은 말하면서 폰을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은서 씨, 도련님 전화에요.”그녀는 의문스럽긴 했지만 순순히 폰을 건네받았다.“무슨 일이야?”“괜찮아? 아무 일 없어?”곽승재의 목소리로부터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
고은서가 이런 상태로 곽승재와 대화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아무런 공격성도 느껴지지 않았고 일부러 냉담한 척하지도 않았으며 더는 정신을 곤두세우고 그를 경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약간 씁쓸하긴 했지만 전에 비해 두 사람의 사이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나오면서 말했다.“알겠어. 그럼 C선생을 찾아내고 나랑 고씨 가문이 더는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 당연히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무례겠지.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당신을 사랑하는 것 빼곤 다 해줄 수 있으니까.”그녀의 혼자 힘으론 도무지 C선생을 상대할 수가 없었으므로 유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송민준은 처음부터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주인혁은 연예인으로서 자칫하면 앞날을 망칠 수 있었고 유성준은 MQ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 상태였다.지금으로써는 곽승재가 조력자로서 제일 알맞는 인물이었다.게다가 곽승재가 요즘 들어 계속 몰래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공유하고 이른 시일 내로 손을 잡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었다.“당신이 모자란 게 별로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해볼게.”고은서가 설명을 보태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약간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은서야, 자꾸 날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난 단 한 번도 너한테서 뭘 바란 적이 없어. 일부러 네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돕는 것도 아니야.”고은서는 자기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도움을 받는 입장이면서도 불구하고 거만한 태도를 선보이는 게 확실히 마땅치 않았다.그녀는 이내 그에게 사과했다.“그럼 우린 이젠 한배를 탄 거네. 백유미한테서 더 들은 거 없어? 백승엽 일에 관해서는 어떤 태도였어?”고은서는 이어 백유미에 관한 얘기를 이어갔다.곽승재는 백유미가 백승엽의 일에 관해 많은 의심을 품고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줬다.백승엽이 백
“그런데 아무런 의심스러운 곳도 찾지 못했다는 건 송민준이 C선생이 아니란 뜻이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딱 두 가지 가능성이야. 하나는 송민준이 확실히 무고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한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고은서는 송민준이 무고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나랑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 거지? 애초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집안이잖아.’“백유미는 그 뺑소니 범인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대?”곽승재 또한 전에 백유미한테 물어봤었는데 고은서와 고준석이 해찬시에 갔을 때 두 사람을 처리할 만한 절호의 기회라고만 소식을 전했을 뿐 모든 건 C선생 혼자 계획한 일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그 말인즉슨 백유미는 두 사람이 사고가 날 거라는 걸 알고만 있었을 뿐 자세한 계획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었단 뜻이다.‘곽승재가 두 범인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무런 당황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 난 그저 곽승재가 백유미의 편을 들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고은서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전생에 백유미가 만났던 절도 방화범도 그 두 남자였는데 그러니까 전생의 배후도 C선생이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다친 것도 우리 집이 망한 것도, 또 내가 정신병원에서 겪은 모든 일이 다 그 C선생이 꾸민 짓인 거야.’고은서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곽승재는 몸을 떨고 있는 고은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은서야, 괜찮아? 병원 갈까?”고은서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한기에 휩싸인 듯 마치 당장이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 끝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이번 생에 곽승재와 이혼만 하고 백유미를 망가뜨리기만 하면 나머지 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현실은 매우 잔인했다.백유미는 그
“은서야, 왜 그래? 어디 문제라도 있어?”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리고 사색에 잠긴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자신이 전에 받았던 전화에 관해 얘기했다.그러자 곽승재도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내 추측이 맞았어. 아마 백유미가 일을 망친 데다가 혹시나 무언갈 폭로하기라도 할까 봐 희생양으로 삼고 모든 죄명을 덮어씌운 걸 거야.”녹음된 증거도 있고 해서 고은서는 이미 그 일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그런데 백유미 배후에 있는 사람이 제보자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다.“백유미는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해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는 눈살을 또다시 찌푸렸다.“백유미도 배후가 대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 전에 암암리에 조사해 보았다고는 했는데 딱히 쓸만한 걸 찾아내지는 못했대. 그런데 의심되는 상대가 한 명 있다고 했어.”“누구?”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익숙한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송민준.”고은서는 약간 의외이긴 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앞섰다.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했었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 건 송민준 자체가 원래부터 꽤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백유미 더러 고씨 가문을 해치라고 한 거지?’“송민준을 의심하는 이유는?”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당시 고은서가 사고로 유산하게 된 일을 꺼냈다.송민아의 도우미가 백유미 어머니랑 아는 사이인 건 맞았다. 심지어 진숙희가 먼저 그녀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연락한 것이었다.진숙희 신분을 알게 된 백유미 또한 그 절호의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또 마침 고은서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진숙희에게 그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소식을 송민아한테 전하라고 시켰던 것이다.송민아가 고은서를 찾아가 아이를 없애라고 했던 것도 다 백유미가 계획한 것이었다.“진숙희가 은혜를 갚기 위해 백유미를 도운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그런데 백유미 또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은서는 백유미가 그동안 자신을 상대로 저질렀던 만행들이 모두 누군가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백유미가 고은서는 이미 누군가의 표적이 됐다고 그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백유미는 겉으로는 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사실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어. 너와 너희 가문을 상대하라고 말이야.”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물었다.“이 모든 것도 다 백유미가 너한테 알려준 거야? 그래서 내가 진짜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보내서 날 지켜보게 한 거고?”“말하자면 그렇지.”곽승재의 수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는 죄책감마저 엿보였다.“원래는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내서 네가 더는 위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철저하게 숨은 탓에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고은서는 언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냐고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백유미가 L국에서 납치를 계획할 때부터 백유미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말했다.이후에 백유미는 C선생이라는 사람이 계속 자신에게 모든 것을 지시해왔다고 순순히 인정했다.C선생이라는 말에 고은서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해낸 끝에 그때 백유미가 원지훈 무리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백유미에게 전화가 온 사람이 C선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때 전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C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도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설마 그때 전화가 온 것도 백유미한테 일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물어보려고 그런 건가? 근데 백유미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백유미를 버리려고 한 거고?”고은서는 이 일을 곽승재에게 말해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C선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