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니까 민준 씨가 제가 민시후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민아를 위해 그 도우미랑 손잡고 저를 해치려 했다는 거죠?”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면서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저는 은서 씨를 데리고 직접 도우미를 만나고 또 백씨 집안 기업까지 도와 망가뜨린 거로 충분히 저의 성의를 표했다고 생각하는데요.”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날 유산하게 만든 게 자신이 꾸민 일이라고 백유미가 직접 인정했는데. 만약 진희숙이 송민준의 지시를 받은 거라면 송민준도 백유미랑 연관되어 있단 소린데 왜 날 도와 백씨 집안 기업을 망가뜨린 거지? 그리고 백유미가 이토록 처참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걸까?’띵.고은서는 엘리베이터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은서 씨, 시간도 늦었는데 혼자 돌아가시기에는 위험할 것 같아요. 은서 씨한테 사고라도 생기면 민아가 분명히 저를 원망할 거예요. 그러니까 기사한테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할게요.”송민준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저랑 같은 차에 타는 게 불편하다면 은서 씨가 먼저 가고 저는 따로 갈게요.”더 거절해 보았자 무례하게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고은서는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럼 집까지 부탁드릴게요.”송민준은 이내 고은서를 위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그녀가 차에 오른 후 그는 눈치 있게 조수석에 올랐다.두 사람은 가는 길 내내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라이트문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고맙다고 간단히 인사한 후 차에서 내렸다.“은서 씨.”송민준도 따라 차에서 내리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밤바람이 약간 차갑게 느껴졌다.고은서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송민준을 바라보았다.“은서 씨, 제가 아무리 이익을 중요시하는 사업가라고는 하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을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민아가 은서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민아가 이렇게 우수한
고은서는 낮에 연락이 닿지 않던 곽승재를 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다퉈 보았자 일만 더 시끄러워질 뿐, 게다가 이미 송민준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굳이 그와 모순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고은서는 이내 화를 억누르고 곽승재를 무시한 채 지나가려고 했다.그러나 일이 그녀가 소원하는 대로 될 리가 없었다.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화난 듯한 말투로 캐물었다.“아침까지 그 연예인 일로 바삐 돌아 채더니 이 늦은 시간엔 왜 송민준과 함께 있는 거지?”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손을 빼내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러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더니 계단 쪽으로 끌고 가 벽에 밀쳤다.“고은서, 송민준이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내가 경고했지.”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에 답하는 대신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곽승재의 힘이 하도 세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이내 이를 악물고 무릎을 들면서 곽승재를 공격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마냥 뒤로 한발 물러서면서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그리고 이내 그녀의 다리까지 속박하면서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나쁜 자식, 얼른 이거 놔. 정말 머리에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끝내 참지 못하고 화냈다.“술까지 마셨어?”곽승재는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그는 고은서의 턱을 치켜올리면서 분노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언제부터 송민준이랑 술 마실 정도로 친해진 거야? 심지어 집까지 바래다주고 말이야.”짜증이 솟구친 고은서는 그를 째려보면서 반박했다.“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곽승재, 대체 왜 또 이러는 거야? 왜 자꾸 내 일에 참견하는 건데?”“나한테 전화하고 문자 보낸 사람이 누군데?”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머리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얼굴을 홱 돌리면서 말했다.“마재경이 아니면 당신이겠지. 그런데 두 사람 중에 누구든 무슨 차이가 있어? 찔리는 게 없다면 왜 내 전화는 안 받은 거야?”그러자 곽승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내가 왜 네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네가 다른 남자를 위해 날 비난하는 걸 듣기 위해서?”‘그러니까 내가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알고 있었단 말이야?’“듣기 싫으면서 왜 찾아온 거야?”고은서가 호통쳤다.“난...”똑똑.바로 이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이어 마재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대표님, 안에 계시는 거예요?”‘이 늦은 시간에 마재경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고은서는 순간 며칠 전에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함께 있는 마재경의 모습이 떠올랐다.‘설마 집을 바꾸지 않고 끝내는 라이트문에 살기로 정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곽승재도 마재경을 만나러 온 거겠네.’고은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곽승재도 그녀를 마주 보면서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마재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방금전에 오신다고 연락이 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밑에 내려가 보려고 했는데 비상계단 쪽에서 소리가 들려서요... 곽 대표님, 괜찮은 거 맞으시죠?”고은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콧방귀를 뀌면서 대신 답했다.“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머리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대신 구급차 좀 불러주시지 그래요?”“고은서 씨가 왜 대표님이랑 같이 있는 거죠? 우연하게 만난 건가요?”마재경이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아까 큰소리로 다툰 데다가 그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며.’“먼저 올라가 있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마재경은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올라가서 기다릴게요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그래도 그녀가 찾아온 덕분에 고은서는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곽승재를 밀어냈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 해성에 아파트가 많고도 많은데 왜 하필 이곳이야?
곽승재의 의도를 알아차린 고은서는 짜증이 극치에 달했다.그녀는 곽승재가 캐묻는 틈을 타 입으로 그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스읍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고은서는 그를 방심한 사이에 힘껏 밀쳐내고는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마재경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일부러 기다리는 흉내를 냈다.그녀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질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뚫어지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그녀를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고은서 씨, 대체 무슨 일인데 늦은 시간까지 곽 대표님이랑 함께 있는 거죠?”고은서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찰나 뒤에서 마재경의 울분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바로 그때 마재경이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으면서 앞으로 다가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은서한테 경고를 건넸다.“곽 대표님이 아직 당신한테 미련이 남았다고 잘난 체 하는 것 같은데 감히 날 사과하게 만들어? 내가 그대로 갚아줄 거야.”마침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 어느새 곽승재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마재경은 이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비굴하게 애원하는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은서 씨, 제가 곽 대표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저 옆에서 바라보게만 해주세요. 은서 씨 곁에는 훌륭한 남자들이 많잖아요. 곽 대표님을 저한테 양보하면 안 될까요?”그사이, 곽승재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마재경의 말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고은서가 그녀의 손목을 물어서인지 표정이 어두웠는데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마재경은 계속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헛웃음을 치더니 이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곽승재의 멱살을 잡고 그에게 입술을 맞추었다.마재경뿐만 아니라 곽승재도 깜짝 놀랐다.부드러운 입맞춤에 곽승재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더 진한 키스를 하려고 했다.그러나 고은서가
생각할수록 화가 난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발로 엘리베이터 문을 찼다.집으로 들어서면서까지도 씩씩거리는 모습 그대로였다.이미숙은 약간 머뭇거리면서 그녀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오랫동안 함께 생활해 온 고은서는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아줌마, 할 말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이미숙은 한참 동안 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해 질 무렵에 산책하러 나가면서 맞은편 집에 한 여자가 입주했던데...”“곽승재랑 스캔들이 난 여자를 닮았던가요?”고은서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대신 이어갔다.이미숙도 얼마 전에 곽승재의 스캔들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마재경을 곽승재를 유혹하는 염치 없는 여자라고 욕하기까지 했었다.그러나 그 여자가 이리도 대담하게 고은서의 맞은 켠 집에 입주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파렴치하게 굴 수가 있지?’“아마 은서 씨가 여기에 사는 줄 모르고 우연하게 입주하게 된 걸 거예요.”이미숙은 겉으로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고은서를 애써 위안하려 했다.“그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 저랑 상관없어요.”고은서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곽승재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아무튼 이젠 감정도 없는데 어디에 살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도 굳이 쓸데없는 사람 때문에 힘들게 이사할 필요가 없지.’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이랑 사모님이 재혼하길 바랐는데. 어렵겠네.’...송민준의 일 처리 속도는 여전하게 빨랐다.고은서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확인해 보았는데 주인혁에 관한 기사가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경찰 측에서도 연관된 일에 관해 아직 조사하고 있지만 새로운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주인혁이 먼저 시비를 건 측은 아니라고 입장을 밝혔다.여론의 방향이 이내 뒤바뀌게 되었다.특히 주인혁의 팬들은 누명을 벗은 사람 마냥 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착한 사람인지 이리저리 알리기 위해 날뛰었다.또다른 소식에 따르면 주인혁과 시비가
고은서는 이지호가 자신이 주인혁 일로 곽승재를 찾아간 적이 있는 슬쩍 떠보는 거라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또한 일이 곧 잠잠해질 테니 더는 주인혁이 곽승재랑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매니저도 주인혁 일이 타사 연예인이 저지른 일이라는 게 신임이 가지 않는 모양이네. 아마 이번 일을 해결함에 있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겠지.’고은서는 직설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주인혁처럼 정직한 사람이 굳이 이런 일로 누군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만 말했다.그녀는 전화를 끊은 후 소파에 앉은 채 생각에 빠졌다.‘곽승재가 마재경 대신 화풀이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젯밤에 화내는 걸 보아서는 곽승재가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굳이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대체 누가 주인혁을 모함한 거지? 마재경인가?’고은서는 한참 생각하다가 송민준한테 감사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저는 별로 도운 게 없어요. 주인혁 씨가 운이 좋아서 정의감 있는 사람을 만난 덕분이에요.”‘송민준이 도운 게 아니라고? 그럼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 때마침 하루 저녁에 목격자가 나타났다는 게 말이 돼? 송민준이 아니면 대체 누가 도와주고 있는 거지?’“어찌 됐든 고마워요. 주인혁이 나오면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어요.”고은서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송민준이 허허 웃으면서 답했다.고은서가 세수하고 이미숙이 준비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마침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서 장 보러 나갔단 이미숙이 들어왔다.“은서 씨, 방금 장보고 돌아오면서 들었는데 아파트 관리원 여러 명이 잘렸대요. 듣기로는 우리 단지에 사는 인플루언서가 어제 짐을 가지고 나갈 때 뒤에서 수군거렸다면서 고소당했다나 뭐라나. 혹시 우리 맞은편 집에 사는 그 사람 아니에요?”이미숙이 추측하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마재경이라면 한밤중에 짐을 들고 나갈 리가 없는데. 설마 곽승
번화로운 도시와 달리 농장은 아주 생기가 흘러넘쳤다. 꽃도 있고 풀도 있고 연못도 있었는데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적합했다.고은서와 송민아는 각각 자기 차를 몰고 왔는데 주차하고 정원으로 들어가자마자 미리 도착해 있는 주인혁이 눈에 들어왔다.흰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한 그는 과일나무 아래서 무언갈 보고 있었는데 따뜻한 햇살이 그를 비추면서 마치 청춘 만화 속 남자주인공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연예인은 확실히 다른가 봐. 엄청 평범한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엄청 멋있어 보이잖아.”송민아가 감탄했다.고은서는 그녀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보기와 다르게 덕후의 잠재력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데.”“덕후는 무슨. 그냥 간단하게 감탄해 본 것뿐이거든.”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면서 반박했다.바로 그때, 인기척을 느낀 주인혁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누나!”그는 고은서한테 인사하고 이내 시선을 송민아한테로 돌렸다.“송민아 씨시죠?”“네. 맞아요.”송민아는 손을 내밀면서 그와 악수하려 했다.주인혁도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 그녀와 악수했다.“송 대표님은?”“오빠는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시간 되는대로 올 거예요.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꽤 좋은 것 같은데 아까는 뭘 보고 있었어요?”송민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인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뭇가지에 병아리 두 마리가 앉아 있어서 어떻게 올라갔는지 궁금해서 보고 있었던 거예요.”주인혁이 머쓱해 하며 답했다.“정말이에요? 저도 보러 갈래요.”송민아는 말하면서 총총 달려갔다.“고은서, 얼른 와 봐. 엄청 귀여워.”두 사람이 한창 병아리와 놀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주인혁이 제안했다.“누나, 민아 씨, 뒤에 농장주가 직접 심은 채소도 있는데 뜯으러 가지 않을래요?”고은서에게 있어 이는 너무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평소 고준석이 정원에 꽃 외에 채소도 심는 바람에 시간만 나면 그를 도와 뜯곤 했었다.그러나 마침 할 일도 없었는지라 그녀는 아주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고은서의 덤덤한
“은서 씨!”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인사했다.고은서는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 씨.”“은서 씨,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이 고은서한테로 다가오면서 생긋 웃으며 말했다.“혼자 왔어요?”“아니요.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왔어요.”고은서는 채소밭이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여시은 씨는 농장 체험하러 온 건가요?”“오랜만에 만나는 아줌마 한 분이 해성에 왔는데 도시에 오래 있다 보니 시골 생활도 체험시켜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은서 씨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시선을 한 정자를 바라보았다.정자에는 녹색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중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부잣집 귀부인 출신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민시후 비서가 준 조사자료에 의하면 여시은이 확실히 가까이 지내는 아줌마 한 분이 있다고 했는데 여시은 어머니의 절친이라고 했지. 여시은 보러 자주 해성에 온다더니 그분인가?’그러나 상대방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탓에 고은서는 그녀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은서 씨, 저한테 마침 금붕어 먹이가 있는데 같이 뿌려주지 않을래요?”여시은은 금붕어 먹이를 들고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시은을 보면서 차마 그녀가 마재경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위해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은서 씨, 저한테 할 말이 있는 거죠? 그럼 같이 먹이를 주면서 얘기 나누지 않을래요?”여시은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전에는 만날 기회가 없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그녀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확실하게 알아볼 생각이었다.연못 옆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고 손님들이 편하게 앉으라고 둔 큰 돌덩이도 여러 개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각자 하나씩 차지해 앉았다.여시은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은서는 백유미가 그동안 자신을 상대로 저질렀던 만행들이 모두 누군가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백유미가 고은서는 이미 누군가의 표적이 됐다고 그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백유미는 겉으로는 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사실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어. 너와 너희 가문을 상대하라고 말이야.”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물었다.“이 모든 것도 다 백유미가 너한테 알려준 거야? 그래서 내가 진짜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보내서 날 지켜보게 한 거고?”“말하자면 그렇지.”곽승재의 수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는 죄책감마저 엿보였다.“원래는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내서 네가 더는 위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철저하게 숨은 탓에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고은서는 언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냐고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백유미가 L국에서 납치를 계획할 때부터 백유미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말했다.이후에 백유미는 C선생이라는 사람이 계속 자신에게 모든 것을 지시해왔다고 순순히 인정했다.C선생이라는 말에 고은서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해낸 끝에 그때 백유미가 원지훈 무리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백유미에게 전화가 온 사람이 C선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때 전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C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도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설마 그때 전화가 온 것도 백유미한테 일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물어보려고 그런 건가? 근데 백유미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백유미를 버리려고 한 거고?”고은서는 이 일을 곽승재에게 말해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C선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곽
“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좋은 성과를 따내기 위해서 남자들한테 개보다도 못한 장난감 취급을 받았어!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백유미는 또 넋을 놓고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난 그저 성공하고 싶었어. 내가 모든 사람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면 곽 회장님도 날 무시하지 않으실 거고 그렇게 되면 내가 곽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수 있는 거야! 하하하!”고은서는 눈앞의 백유미가 미친 척하던 지난번과 달리 확실히 정말 정신이 나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백유미는 소리를 질러대며 울다가도 다시 웃기를 반복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백유미에게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곽승재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유미는 그저 미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동시에 처절하게 절망하기도 했다.아무래도 백유미가 미쳐버린 건 확실해보였다.하지만 왜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가 얼마나 멘탈이 강하고 독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더더욱 갑자기 미쳐버린 백유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난 곽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사람인데 내 이미지에 금이 가서야 되겠어! 나쁜 건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 먼저 나한테 눈독을 들이고 날 위협했다고...”뭐가 생각난 모양인지 미친 사람처럼 웃던 백유미는 또 갑자기 몸을 덜덜 떨며 곽승재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승재야, 나 좀 살려줘. 난 버리는 카드가 아니야, 나 아직 쓸모 있다고. 나 죽기 싫단 말이야! 아악, 당신들 누구도 날 해할 생각 하지만! 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백유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난동을 피웠다. 백유미는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며 철제 난간을 입으로 물어뜯기 시작했다.워낙에 요란한 소리에 직원들이 급히 달려왔다.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백유미를 난간에서 떼어놓고 그녀에게 진정제를 투입했다. 일련의 과정은 꽤 소란스러웠다.복잡한 과정에 고은서가 부딪치기라도 할라 곽승재는 고은서를 데리고 정신병원에서 나왔다.“
곽승재는 냉큼 반대편으로 달려와 고은서의 어깨를 부축하며 말했다.“의사가 한 말 잊은 거 아니지? 잘 쉬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의사는 애초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그저 곽승재의 개인적인 해석에 불과했다.고은서는 곽승재와 말다툼을 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저 그런대로 곽승재가 자신의 어깨를 부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병원 로비에 들어서니 병원 원장이 곽승재를 맞아주었다.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병원 측의 관계자가 둘을 백유미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백유미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한 비서를 발견했다.한 비서는 간병인 복장을 하고 있었고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는데 아마 금방 식사를 챙겨주고 나온 것 같았다.한 비서는 고은서를 발견하고 기뻤지만 같이 온 곽승재를 발견하자 순식간에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차 표정이 얼어붙었다.“곽, 곽 대표님.”한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곽승재는 냉랭한 태도로 한 비서를 무시하고는 고은서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갔다.곧이어 둘은 백유미가 있는 집중 관찰실에 도착했다.이곳은 한눈에 봐도 일반 병실보다 안전성이 더 높아 보였고 문도 이중문으로 되어있었다.바깥의 철문을 여니 철제 난간이 나타났다.직원은 이렇게만 면회가 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밖에서 본 백유미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백유미는 얇은 환자복을 입고 간이침대에 홀로 앉아있었다. 낯빛은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버석했으며 눈빛은 퀭했다.지금의 백유미에게서 예전의 세련됨과 온화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곽승재를 살폈다.백유미는 곽승재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고 한때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했었다.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백유미를 보는 곽승재의 마음이 어떨지 고은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는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담담하게 고은서에게 말했다.“이건 백유미가 자초한 일이야.”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내내 멍하던 백유미가 반응
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는 여전히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일단 나랑 어디 좀 갈 데가 있어.”곽승재의 얼굴에 보기 드문 진지함이 서렸다. 아마도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그런 곽승재의 모습을 보자 고은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아랫배의 고통도 아까보다 심해지는 것 같았다.곽승재의 운전석 칸막이에 노크하고는 말했다.“근처에 호텔을 찾아서 차를 세워줘요.”“호텔에는 왜 가는 건데, 또 뭘 하려고 그래?”고은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곽승재를 한껏 경계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말없이 고은서에게 딱 붙어 앉더니 팔로 고은서의 허리를 감쌌다.“곽승재, 너...”경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서가 느낀 건 포옹의 온기가 아닌 아랫배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감각이었다. 곽승재가 고은서를 대신해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져주고 있었던 것이다.곽승재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고은서의 옷을 뚫고 피부에도 전해졌고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은 아랫배의 통증을 어느 정도 완화해주었다.“아까 무슨 생각 한 거야?”곽승재는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물었다.“지금 몸도 성하지 않은 사람한테 내가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데?”살짝 민망해진 고은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곽승재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곽승재가 다른 한 손으로 고은서를 제지했다.“배 아프다며? 가만히 있어.”곽승재의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있었다.“일단 호텔에 가서 네가 따뜻한 물에 처방받은 약을 먹고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좀 쉬고 난 후에 내가 가려던 곳에 같이 가줘.”고은서는 곽승재의 다정한 말투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으니까 좀 떨어져 줄래?”하지만 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계속해서 아랫배를 어루만져주는 데 집중했다.“...”“곽 대표님, 호텔에 도착했습니다.”고은서가 더는 참지 못하고 뭐라고 하려던 찰나에 마침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를 세우고 나서 곽승재는 고은서를 데리고 호텔로 들
“그동안 마재경과의 스캔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유포한 거고 다 거짓이야.”곽승재가 이어서 말했다.일부러 짜고 친 판일 것이라는 예측은 박지연도 진작에 했었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모두 다 거짓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던데. 마재경이 네 손을 잡고 너한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봐서는 너에 대한 감정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았거든.”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안광이 돌았다.“은서야 너 지금 마재경이 신경 쓰이는 거야?”고은서가 반문했다.“네 생각엔 내가 신경 쓸 것 같아?”곽승재의 안광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일부 행동들은 마재경에게 일부러 시킨 것이라고 털어놓았다.비록 곽승재는 눈치를 못 챘겠지만 고은서는 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진짜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애교를 부리고 살갑게 굴었던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마재경이 고은서를 볼 때마다 얼굴에 다 드러나던 질투와 원망만은 절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곽승재 너 솔직히 말해봐. 마재경을 이 큰 판에 끌어들여서 연기하게 만든 게 오로지 나한테 당한 걸 갚아주기 위해서야?”고은서가 곽승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곽승재는 잠깐 난처해하더니 이내 대답했다.“네가 질투를 하고 화를 내길 바란 건 사실이야.”곽승재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라이트문 아파트에 집을 산 건 단지 고은서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고 처음부터 마재경을 그 집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이다.곽승재는 그날 밤 마재경이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서 자신을 기다린 것도 자기가 시킨 것이라고 했다.왜냐하면 곽승재는 고은서가 주인혁의 일 때문에 송민준을 찾아간 것을 알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유치하긴.”“유치하고 웃긴 건 나도 인정해.”곽승재는 민망한 듯 자신의 유치함을 인정해버렸다.곽승재는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고은서의 마음속에 아직도 자신이 남아 있다는
말을 마친 고은서는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고은서가 도아름과 박지연을 요가원에서 만났을 때도, 레스토랑에서 송민준과 밥을 먹고 있을 때도, 팔에 화상을 입어서 주인혁이 함께 병원에 가줬을 때도, 지인들과 농장에 갔을 때도... 고은서는 모두 우연히 곽승재와 마재경을 만났었다.결국 그 모든 우연은 진짜 우연이 아니었고 곽승재가 고은서의 뒤를 밟아 우연으로 위장한 계획된 만남에 불과했다.고은서의 질문에도 경호원은 그저 침묵을 유지하며 운전에만 몰두했다. 그 와중에도 눈치가 빨라서 재빨리 뒷좌석의 칸막이 버튼을 눌러 둘만의 대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차갑기 그지없는 고은서의 얼굴을 발견한 곽승재는 팔을 뻗어 고은서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은서야, 난 일부러 사람을 시켜서 너의 뒤를 밟게 한 게 아니라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런 거야.”곽승재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걱정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곽승재는 더는 억누르고 있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은서에게 이마를 맞대고는 작게 속삭였다.“네가 뒤풀이를 하던 날 밤, 내가 출장을 간 바람에 부하더러 널 지켜주라고 했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해줘서 하마터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날 뻔했잖아. 난 지금까지도 계속 그걸 후회하고 있어.”고은서는 그날 밤 송민준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준 후에 이미숙에게서 곽승재가 자신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곽승재는 그날 밤 고은서에게 예상치 못할 사고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는 피부로 느껴지는 곽승재의 체온과 자신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이 묘하게 불편했다.결국 고은서는 고개를 옆으로 빼며 말했다.“이거 좀 놔줘.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 동안 고은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고은서를 놓아주었다.다시 좌석에 앉은 고은서가 말했다.“내 안전이 걱정돼서 그랬다고 했지. 그럼 내가 안전하지 못할 건 또 뭐가 있는데?”곽승재는 고
고은서는 곽승재를 힐끔 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이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 사람은 제가 약을 먹었는지 모르거든요.”의사는 환자의 태도에 화가 나 다시 고은서를 꾸짖으려고 했으나 곽승재에 의해 제지당했다.“모두 제 잘못이니까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두 분 다 잘못이 있어요!”곽승재가 잘못을 승인한 것을 들은 의사는 여태 고은서가 곽승재를 감싸주고 있었던 거로 오해해 더 화가 났다.“아직 젊은 사람들이 오직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원래도 몸이 허약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멋도 모르고 무작정 약을 먹었다간 언제 몸이 망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요!”고은서도 자신이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어 재차 의사에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했다.고은서의 현재 상황에 맞는 약효가 빠른 약이 없었기에 오로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컨디션을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의사는 고은서에게 약을 처방해주었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고 나서야 진료가 끝났다.고은서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랫배가 다시 아파져 왔지만 감히 티를 낼 수 없었다.고은서는 아픔을 참고 걸어 나갈 생각이었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를 순식간에 번쩍 안아 올렸다.“함부로 움직이지 마.”고은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문밖에는 아직 기웃거리며 상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와 병원에서 다툴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서 아예 가방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곽승재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진료실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곽승재는 고은서를 안고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내려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덤으로 작게 경고까지 했다.“엘리베이터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린 고은서는 부끄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와 이를 꽉 깨물고 곽승재에게 말했다.“곽승재, 넌 진짜 나쁜 놈이야!”고은서는 곽승재 몰래 계략을 꾸민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곽승재는 애초에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린 적이 없었다.곽승재가 찾아간 방은 고은서의 방이었기 때문이다.사실 고은서는 깼을 때 곽승재이진 않았을까에 대해 의심을 했었다.하지만 곽승재가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려 잔뜩 분해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모자라 가시 돋친 말을 퍼붓고 그대로 돌아섰기에 고은서도 더는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그 이후에도 마음속에 이 일을 더 담아두지 않았고 굳이 곽승재를 찾아가 사실확인을 하지도 않았다.그렇게 고은서는 그저 꿈이라고 여겼다.반면 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부끄러움과 짜증만 보아냈을 뿐, 아이를 지우는 것에 대한 슬픈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아내지 못했다.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이 채 가시지 않은 말투로 고은서에게 물었다.“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온 게 아니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다가 막 곽승재에게 말하려던 참에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고은서의 진료 순서가 온 것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무시하고 비상계단 출입구의 문을 열었다.곽승재를 따라온 남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고 잔뜩 진지한 태도로 궁금해서 기웃대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있었다.그리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재빨리 그중 한 사람이 곽승재와 눈빛을 주고받는 걸로 보아 곽승재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지시를 확인한 남자는 공손하게 고은서에게 길을 내주었다.고은서는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의 추측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아무런 표정의 동요도 없이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가 고은서의 개인 정보를 확인하는 동안 곽승재도 따라 들어왔다.워낙 별 상황을 다 겪어본 의사는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곽승재에도 딱히 곽승재의 외모에 감탄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저 한번 흘기고 말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이번 달은 불규칙해졌다. 일주일이나 늦춰진 건 둘째치고 여태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몸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챈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레 건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결국 고은서는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타서 기사에게 근처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말했다.아랫배가 자꾸 은근하게 아파 고은서는 가는 내내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차에서 내렸을 때 코를 쿡 찌르는 과일 썩은 냄새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고은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재빨리 진료 접수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산부인과 층이라 그런지 역시 여성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진료 접수도 했겠다, 고은서는 그저 복도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진료 속도에 조금 답답해진 고은서는 사람이 적은 앞쪽으로 가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복도에 소음이 아까보다 커진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의 “잘생겼다”, “키 엄청 크네”와 같은 감탄 소리도 들었다.산부인과에도 남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같이 온 가족들이었다.‘남자도 같이 온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감상을 해도 되는 거야?’고은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서가 금방 몸을 돌렸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고은서의 앞에 나타났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곽승재의 뒤를 따른 건 사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고은서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잔뜩 어리둥절해 있었다. 고은서의 환각이 아니라면 곽승재가 정말 산부인과에 나타난 것이다.“따라와!”곽승재는 고은서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은서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왜 이러는 거야, 곽승재. 왜 또 멋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