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손에 있던 먹이를 한꺼번에 연못에 던지고는 손을 털며 말했다.“먼저 가볼게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여시은은 멀어지는 금붕어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은서 씨, 이러고 어떻게 즐거운 시간이 돼라는 거죠?”고은서는 그제야 여시은의 연기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분명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나를 다른 사물에 비유하면서 천진한 척하기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떠났다.나무다리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어느새 정자에 여재훈까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여재훈과 중년 여성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외감이 느껴졌다.마치 어쩌다 한 번 장모님 집에 간 사위처럼 서로 웃으면서 예의를 갖추어 대화하고 있었지만 어색함은 여전한 분위기처럼 와닿았다.고은서가 여재훈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송민준이 정원으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나무 다리 위에 있는 고은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은서 씨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정자에 있던 여재훈과 중년 여성도 그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는데 고은서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중년 여성의 표정이 왠지 이상하게 바뀐 것 같았다.그러나 선글라스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은서 씨, 저랑 짜릿하고 재밌는 게임 한 번 하지 않을래요?”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귓가에서 갑자기 여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고은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젖혔다.두 사람이 서있는 나무다리는 아무런 난간이 존재하지 않았는 데다가 여시은이 갑자기 뒤로 젖히는 바람에 고은서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졌다.“아악!”여시은의 비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연못으로 떨어졌다.풍덩!커다란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이 튕겼다.그 찰나, 차가운 연못 물이 콧구멍과 입속으로 들어가면서
고은서는 여재훈이 말하면서 자신을 힐끔힐끔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그러나 고은서 또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여시은이 그렇게 좋은 사람일 리가. 짜릿한 게임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어?’고은서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여시은이 왜 자신을 잡고 연못에 빠지려 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여재훈의 반응을 보고서 모든 걸 깨달았다.여재훈은 여시은이 비명을 지르고서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에게는 여시은이 자신을 잡고 떨어진 게 아니라 그녀가 여시은을 밀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서도 밀려오는 추위 때문에 몸이 떨렸다.더 섬뜩한 건 여시은이 이토록 악랄한 사람일 줄 생각 못 했다는 것이다.‘곽현수 하나만으로도 힘겨워 죽겠는데 여재훈까지 날 해치려 한다면 절대 감당하지 못할 거야.’놀란 고은서와 달리 여시은은 아직도 방금전의 공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여재훈의 물음을 들은 여시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고은서를 향해 돌렸다.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고은서는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어 여시은은 여재훈의 품에 얼굴을 숨기고 엉엉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재훈은 이내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고은서를 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 씨, 방금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고은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되물었다.“여 대표님, 저도 제가 왜 물에 빠졌는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실 건가요?”고은서는 샤워 타올을 쓰고도 추위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물 범벅이 되어 있었고 머리카락도 다 젖어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눈초리에마저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약간 화나면서도 이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눈빛은 또 얼마나 결연했는지 평소와 달리 아주 연약해 보였다.여재훈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오면서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여재훈은 딸을 일으켜 세우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 씨도 얼른 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겠어요.”여재훈과 여시은이 떠난 후 송민준은 예의를 지키며 고은서에게 물었다.“은서 씨, 괜찮아요? 제가 부축해드릴까요?”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일어섰다.여시은이 말한 대로 연못은 깊지 않았고 고은서도 제때 자구책을 취했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은서는 휴게실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송민아와 주인혁은 이제야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하며 물었다.“나 인혁 씨랑 옥수수밭에서 옥수수 따느라 이제야 네가 물에 빠졌다는 걸 알았어.”“누나, 미안해...”주인혁도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은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하지 마. 그냥 연못에 빠졌던 것뿐이야. 물도 그리 깊지 않았어.”송민아는 고은서의 몸에 외상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그렇게 넓은 다리에서 어쩌다가 물에 빠진 거야?”송민아가 이상해서 묻자 고은서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운이 없었던 거지. 시은 씨가 발을 헛디뎌 물어 빠지면서 나도 같이 빠졌어.”두 사람이 함께 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자 송민아는 더 의아해했다.“여시은 씨 균형감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다리에 물도 없는데 어떻게 미끄러져서 너까지 같이 끌어내린 거야?”“오빠도 그 자리에 있었어?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해봐. 뭐 이상한 점 없었어?”송민아는 쭉 말이 없는 송민준에게 물었다.송민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그때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어.”“됐어. 사고가 다 이런 거지. 이상할 게 뭐 있어.”고은서는 송민아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송민아에게 오늘 수확한 작물이 어떤지 물었다.송민아는 바로 주의를 돌려 자신이 어떤 작물을 수확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했다.“은서야, 우리 계속 여기 남아서 밥까지 먹
오늘 송민준은 평소보다 말이 적으며 가끔 멍하니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송민아의 말을 듣고 고은서도 송민준을 바라보며 물었다.“민준 씨, 일이 너무 힘드신가요?”송민준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힘들진 않아요. 그냥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네요.”“오빠는 어떻게 종일 일 생각만 해.”송민아는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오빠, 농장 분위기가 이렇게 좋고 재미있는 활동도 얼마나 많은데 제대로 휴식 좀 하면 안 돼?”송민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네가 좀 더 분발해. 네가 앞가림 잘해서 내 일을 덜어주면 나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거야.”송민준이 ST 그룹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회사 규모가 많이 발전했지만, 송민아는 부모 밑에서 한 번도 회사 일에 대해 야망을 품어본 적이 없다.여자에게 사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송민아는 집안 사업에 손대고 싶지 않았다.오빠인 송민준은 겉으로 보기엔 다정하고 점잖아 보이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주 컸다. 그녀는 자기 눈으로 직접 자신의 사촌 형제들이 어떻게 오빠를 오만하게 대하던 데로부터 공손하게 모시는지를 보았다.그래서 송민아는 ST 그룹의 사업에 손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난 회사 일에 관심 없어. 오빠, 나한테 기댈 생각하지 마.”송민아가 서둘러 말했다.“민준 씨, 먼저 일 보세요. 저와 인혁 씨가 민아 곁에 있을게요.”고은서가 나서서 얘기했다.송민준은 거절하지 않고 주인혁에게 예의상 한마디 물었다.“인혁 씨, 지난번 문제는 잘 해결되셨나요?”“네.”주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누나한테서 들었어요. 민준 씨가 저를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어요.”송민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제가 도운 게 별로 없었어요.”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송민준은 자리를 떠나려 했고 송민아는 그를 차까지 배웅했다.“왜? 사과하는 의미로 선물이라도 사줘?”송민준은 송민아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물
송민준이 말했다.“내가 성격이 차갑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니까 은서 씨가 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너도 계속 날 무서워했잖아.”송민아는 말문이 막혔다.송민아는 확실히 어릴 때부터 송민준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송민준은 늘 부모보다 엄격했기에 송민아는 송민준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해성에 온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많이 가까워졌고, 송민아도 점점 송민준을 신뢰하게 되었다.지금 송민준이 이렇게 자신을 조롱하자 송민아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오빠, 어릴 때는 내가 철이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오빠를 완전히 이해해. 걱정하지 마. 은서 쪽에는 내가 기회를 봐서 좋은 얘기 많이 해줄게. 은서가 오빠에 관한 생각을 바꾸는 날이 올 거야.”송민준은 송민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괜찮아. 너무 애쓰지 마.”...송민준을 배웅한 후 송민아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이때 고은서는 나무로 만든 그네 의자에 앉아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싱싱한 토마토를 깨작거리고 있었다.“인혁 씨는?”송민아는 고은서의 옆에 앉아 함께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너희들이 전에 딴 채소를 부엌으로 나르고 있어.”고은서는 토마토를 먹으며 물었다.“민준 씨 갔어?”송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도 더 있고 싶은데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일부터 처리해야지.”“우리 오빠가 ST 그룹을 총괄하고 있어서 때때로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잘 따라주지 않아.”송민아가 덧붙였다.“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다가가기 힘들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우리 오빠도 알아 봐주는 사람이 있길 원해.”고은서는 계속 토마토를 먹으며 얘기를 들었지만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민아야, 어떻게 배웅 한 번 하더니 태도가 180도 바뀌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회사에 몹시 어려운 일이 생긴 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야.”송민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는 머리를 긁
곽승재를 보자 고은서는 미간을 찡그렸다.‘이 농장이 이렇게 유명한 장소인가? 시은에 이어 곽승재까지 만나다니.’송민아는 곽승재를 보자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그녀는 곽승재가 고은서에 대해 마음을 접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방금의 행동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하지만 송민아는 여전히 용기를 내어 곽승재에게 대답했다.“곽 대표님, 저의 오빠가 주견이 있는 건 오빠 일이고 오빠를 도와주는 건 제 마음이죠.”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말했다.“고 대표님은 참 인기가 많으시네요.”고은서는 멀리서 뛰어오는 여자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비웃는 말투로 대꾸했다.“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곽 대표님, 한참 찾았잖아요. 여기에 계셨네요.”마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고은서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마재경의 얼굴에는 실망과 원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은서는 곽승재를 힐끗 보며 말했다.“곽 대표님,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재경이 친근하게 그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고은서 씨, 곽 대표님은 제가 교외 나들이를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온 거예요. 혹시 저희 일정을 수소문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신 건 아니죠?”“머리가 나쁘면 병원에 가봐요. 마침 여기에도 의사가 있어요.”송민아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우리가 여기에 온 지 반나절도 지났어요. 일부러 쫓아온 게 누군지 뻔하지 않아요?”마침 주인혁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그는 재빨리 고은서와 송민아 앞으로 다가갔다.지난번 레스토랑과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마재경은 더 이상 고은서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그녀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애처롭게 말했다.“곽 대표님, 아무도 저를 반겨주지 않네요. 다른 곳으로 가볼까요?”곽승재는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마재경이 만족스럽게 말했다.“곽 대
주인혁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송민아 씨, 사실 드라마 촬영할 때는 다 와이어를 사용...”“푸하하.”송민아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농담이에요. 인혁 씨는 참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요.”주인혁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고은서는 결국 주인혁이 불쌍해 보여 나섰다.“민아야, 인혁이를 그만 좀 놀려.”송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저를 구해줬으니 그 보답으로 장난은 그만 칠게요. 저기 가서 손 좀 씻을까요?”주인혁과 송민아가 화장실에 간 동안 고은서는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여재훈의 명함을 꺼냈다.번호를 저장하자마자 카톡에 새 친구 알림이 떴다.여재훈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해 보니 풍경 사진이었다. 사진은 약간 흐릿했지만 아주 분위기 있는 꽃밭이었다.고은서는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왠지 모를 충동에 친구 추가를 눌렀다.추가 요청이 보내진 후에야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내가 병원비를 받아내려고 친구 추가를 보낸 줄 알면 어떡하지? 내 이름을 입력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를 스팸으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머리가 왜 젖었어?”뒤에서 갑자기 곽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은서는 흠칫 놀라며 핸드폰을 덮고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같이 온 여성 친구를 내버려 두고 왜 나한테 와서 존재감을 과시해?”곽승재는 말이 없이 그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고은서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경계했다.“뭐 하려는 거야?”그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손을 거두며 담담히 물었다.“머리는 왜 젖은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고은서는 옷을 갈아입을 때 잠깐 머리를 말렸지만, 앞머리 부분이 덜 말랐다. 그걸 곽승재가 눈치챌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여시은이 자신을 연못에 빠뜨린 것과 전에 고의로 손을 데운 일을 떠올리자 고은서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당신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래야만 내가 평화롭게 살 수 있어.”고은서는
박지연은 육현석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며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게다가 그의 표정은 박지연의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도대체 왜 은서랑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얘기한 거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지?’박지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베란다에 땅굴을 파서 당장이라고 숨어버리고 싶었다.육현석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박지연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헛기침을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척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배고프지? 주방에 먹을 거 뭐 있는지 볼까?”그러면서 도망치려는데 육현석이 그녀의 길을 막아섰다.별처럼 반짝이는 육현석의 눈을 바라보자 박지연은 심장이 쿵쾅거렸다.“현, 현석아... 뭐 하려고...”육현석이 손을 뻗어 박지연의 머리카락 한 오리를 휘감으며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한밤에 일곱 번이라니. 내가 지연이 마음속에서 아주 용맹한가 봐.”이미 당황한 상태에서 이런 톤과 눈빛으로 말하는 육현석을 보자 박지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세상이 지금 당장이라도 멸망했으면 좋겠어.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박지연은 육현석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방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육현석이 힘껏 밀착하며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박지연은 육현석의 뜨거운 체온과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꼈다.“현... 음.”박지연이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육현석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럽고도 열정적인 이 키스에 박지연은 처음에는 몸을 비틀거리며 저항하려 했다. 어찌 됐든 베란다에서 키스하는 건 너무 쑥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육현석은 그녀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박지연의 얼굴을 감싸 쥐고 숨을 훔치듯 격렬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박지연은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의 리듬에 휩쓸려갔다.육현석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박지연은 숨이 차올라 예전처럼 그의 목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이번 달은 불규칙해졌다. 일주일이나 늦춰진 건 둘째치고 여태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몸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챈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레 건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결국 고은서는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타서 기사에게 근처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말했다.아랫배가 자꾸 은근하게 아파 고은서는 가는 내내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차에서 내렸을 때 코를 쿡 찌르는 과일 썩은 냄새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고은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재빨리 진료 접수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산부인과 층이라 그런지 역시 여성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진료 접수도 했겠다, 고은서는 그저 복도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진료 속도에 조금 답답해진 고은서는 사람이 적은 앞쪽으로 가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복도에 소음이 아까보다 커진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의 “잘생겼다”, “키 엄청 크네”와 같은 감탄 소리도 들었다.산부인과에도 남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같이 온 가족들이었다.‘남자도 같이 온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감상을 해도 되는 거야?’고은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서가 금방 몸을 돌렸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고은서의 앞에 나타났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곽승재의 뒤를 따른 건 사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고은서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잔뜩 어리둥절해 있었다. 고은서의 환각이 아니라면 곽승재가 정말 산부인과에 나타난 것이다.“따라와!”곽승재는 고은서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은서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왜 이러는 거야, 곽승재. 왜 또 멋대로
고은서는 박지연이 깜짝 놀라는 소리에 덩달아 소스라치게 놀랐다.“뭘 알아냈는데 이렇게 놀라는 거야?”박지연이 다급히 대답했다.“여시은이 대놓고 너를 겨냥하는 건 어쩌면 곽승재 때문만이 아니라 여 대표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고은서는 잔뜩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는 박지연을 쳐다봤다.“잘 생각해봐. 여시은은 자기보다 뛰어나고 능력 있는 네가 여 대표님 관심까지 한 몸에 받으니까 못마땅한 거야.”박지연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말을 이어갔다.“여시은은 너한테 불리한 일들을 계속 꾸며서 네 이미지를 망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여 대표님도 너를 싫어하게 되겠지. 여시은이 제일 바라는 건 아마 여 대표님 앞에서 네 이름을 거론만 해도 대표님이 질색하는 거일 거야!”고은서는 여시은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여 대표님은 여시은의 아버지야. 여시은을 끔찍이 사랑하고 여시은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 여 대표님은 그냥 날 아끼는 후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테고 그런 마음에서 나한테 더 잘해주는 거라고 해도 어떻게 딸을 대하는 태도랑 비교하겠어. 여시은이 고작 이런 거로 날 못살게 군다는 건 좀 억지 아닌가?”박지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의 말도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설마 네가 자기보다 예뻐서?”“... 특별한 게 떠오르지 않으면 억지로 생각해내지 않아도 돼.”“억지로 생각해내다니! 여자의 질투심만큼 무서운 게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곽승재랑 여 대표님은 모두 너한테 친절하고 게다가 자기보다 예쁜데 질투가 안 나는 게 더 어렵지. 아마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서 널 제대로 밟아버리고 싶을 거란 말이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잠깐 말을 잃었다.“너 현석 씨랑 같이 있더니 쓸데없는 상상만 늘어난 것 같아.”“이게 왜 쓸데없는 상상이야. 여시은이 여태 널 물고 질척거리면서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딱 두 가지야. 네가 의도치 않게 여시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너한테 복수를
여시은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물론이지!”카페를 나온 고은서는 마음속 답답함을 털어내려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여시은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여시은의 배경이 워낙 큰지라 당장 대항하기 어려웠다.고민 끝에 고은서는 KK에게 전화를 걸어 여시은의 요 며칠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차로 향하던 그녀는 앞쪽에서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재훈이 전날 곽승재도 경찰서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들인 걸까?딸의 일에 여재훈은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고은서가 멍때릴 때 곽승재도 그녀를 발견했다.한 걸음 머뭇거리던 곽승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녀의 냉담함을 떠올리고는 아무 말 없이 카페로 향했다.운전기사가 대기 중이었던 차에 몸을 실은 고은서는 카페 창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의젓한 자태의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여재훈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서 여시은이 달콤하게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각도로 인해 곽승재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여재훈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선명하게 보였다.여재훈은 자신의 미래 사윗감에 대해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박지연은 고은서와 여시은이 경찰서까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유일로 직접 찾아왔다.“이런 큰일을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박지연이 물었다. “어떻게 현석이에서 듣게 해.”고은서가 대답했다. “크게 문제 되지 않았고 이미 해결됐어.”“경찰서까지 간 게 큰 문제가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빨리 말해봐!”고은서는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박지연에게 설명했다.박지연은 듣자마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시은 씨가 진짜 네 앞에서 고양이를 학대했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뿐만이 아니야. 지난번 쿠아가 건물에서 떨어진 것도 그녀가 한 짓이야. 그래서 쿠아가 볼 때마다 여시은을 두려워하는 눈치더라고.”“그 여자 정말 변태야!”박지연이 분노를 표출하며 말했다. “여씨 가문도 대
여시은은 고급 맞춤 제작인 샤넬 원피스를 입고 귀여운 클러치 백을 든 채, 얼굴엔 여전히 달콤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녀가 무표정으로 쿠아를 찌르던 장면이 떠오르자 고은서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아빠.”여시은이 여재훈을 부르고 나서 이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은서 씨도 계셨네요.”전날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듯 그녀의 말투엔 평소의 친근함이 사라지고 호칭도 서먹한 ‘은서 씨’로 돌아왔다.가식적인 친절을 가장하는 여시은보다 이렇게 냉정한 모습이 오히려 고은서에겐 더 나았다. 적어도 속이 덜 뒤집혔으니까.“시은아, 지금 은서 씨와 다 설명했어. 네가 쿠아를 정말로 아껴서 절대 일부러 다치게 한 게 아니라고.”여재훈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다툰 건 분명 네 탓이 더 많을 테니 네가 은서 씨에게 사과해.”여시은은 입술을 삐죽이며 반박했다. “아빠, 제가 팔꿈치도 다쳤는데 그래도 제 잘못이 더 커요?”여재훈이 꾸짖듯 말했다. “은서 씨가 얼마나 차분하고 예의 바른 분인데, 네가 화나게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니?”“시은아, 네가 해성에서 친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항상 아빠한테 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오늘 이 자리도 특별히 마련한 거야.”여재훈이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소한 일로 불편한 관계가 되면 안 되지. 사과만 하면 이 일은 지나가.”여시은은 마치 설득당한 듯 고은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은서야, 미안해. 화 풀어줄 수 있겠니?”고은서는 여시은과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전날 사건에 곽 회장이 개입했다는 게 확인됐다. 본인은 상관없었지만 곽 회장이 다시 고씨 집안을 겨냥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 게다가 여재훈이 직접 만나 중재를 시도한 것만 해도 이미 양보한 거나 다름없었다. 설사 지금 여시은과 대립해도 여시은은 전혀 피해 볼게 없었다.겉보기에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적어도 여재훈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길
“여재훈 씨.” 고은서가 다가가 부르자 여재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은서 씨, 어서 앉아요.”여재훈의 표정에서 고은서는 그가 질책하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대화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앉자 여재훈은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으면서 주문하라고 했다.바쁜 오전 일과를 보낸 후라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재훈과의 교류도 꽤 에너지 소모가 필요할 것 같아 고은서는 평소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 두 가지를 주문했고, 꿀 프렌치토스트를 보자 추가 주문했다.프렌치토스트가 나오자, 고은서는 꿀을 조금씩 발라 먹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여재훈은 약간 의아해하더니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꿀을 위에 뿌리는데, 은서 씨의 방식은 좀 특이하네요.”고은서가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프렌치토스트에 꿀을 이렇게 바르셨어요. 달콤함이 골고루 스며든다고 하셨는데 저도 어머니와 같은 습관이 몸에 배었네요.”이 말을 들은 여재훈은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 사색에 잠겼다. 고은서는 꿀을 다 바르고 한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었다. 여재훈과 한 조각 드셔볼지 물으려는 순간, 혼이 나간 듯한 그의 표정을 발견했다.고은서는 자신이 먹는 데에만 너무 열중한 것 같아 죄송함을 느꼈다. 여재훈이 딸의 문제를 논하고자 마련한 자리인데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실례했어요.” 고은서는 프렌치토스트를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저를 찾으신 건 시은이의 일을 말씀하시려는 건가요?”여재훈은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가 한입 베어 먹은 프렌치토스트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먼저 드세요. 서두를 필요 없어요.”고은서는 더는 먹기만 할 수는 없어 대답했다. “제가 전날 공원 벤치를 걷어차서 따님을 넘어뜨린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시은이가 쿠아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에요.”“경고를 하시려는 건지, 아니면 제가 시은이를 모함한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서 후회
고은서는 본래 고은혜를 놀려보려던 참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은혜가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친절하아양을 떨며 “성준 오빠, 그거 내려놓으세요! 제가 할게요!”라고 하는 통에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전생에서는 고은혜가 비록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마음에 꾸밈이 없었기에 원지훈에게 속아 그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번 생에서 자매 관계가 개선되자 고은서는 그 부분이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이렇게 순진무구해서 여전히 사기당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변호사로부터 피드백을 받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변호사는 고양이가 확실히 스트레스 반응을 보였으나, 조사 결과 하인이 학대하며 약물을 주입한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하인도 직접 시인했다고 한다. 고양이 입술의 상처는 외부 물체에 의한 것이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급하게 먹다가 실수로 다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여시은의 반려묘인 쿠아가 평소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것은 펫숍 직원들도 증명할 수 있었다. 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남들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쿠아를 사랑하는 척하던 여시은이, 알고 보니 고양이를 학대하고 모든 책임을 하인에게 전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물며 고은서 자신도 예전에는 여시은이 쿠아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느꼈으니 말이다.변호사는 추가로, 여시은이 팔꿈치 부상을 당한 사건에 대해 고은서의 ‘무심코 한 실수’라는 이유를 사용했으며 공원에 CCTV가 없고 목격자도 없어 상해죄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한 곽 회장님이 이미 소식을 접하고 연락해 온 사실을 전하며, 최선의 결과는 양측 화해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왔다. 고은서는 더 이상 여시은이 쿠아를 학대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쿠아를 여시은에게서 구출해 낼 수는 없을까?이때 고은서의 전화기에 여재훈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변호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고은서는 여
고은서는 서연정에게 어제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다치게 했고 두 사람이 다툰 것만 언급했을 뿐, 다른 세부사항은 말하지 않았다. 여시은은 곽 회장이 마음에 들어 하는 며느릿리감이었기에, 고은서가 사모님 앞에서 그녀를 헐뜯는 건 뒤에서 고자질하는 것 같아 왠지 꺼려졌다. 고은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서연정은 사정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묻지 않았다.“승재 아버지는 여씨 가문과의 혼사를 반드시 성사하려고 해. 여씨 가문 편을 드는 건 회장님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니, 회장님의 태도는 신경 쓰지 마.”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곽 회장의 태도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단지 곽 회장이 다시 고씨 가문을 표적으로 삼을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아침 식사 후, 서연정은 곽승연과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곽승연은 예상대로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언니, 자주 찾아와도 돼요?”떠나기 전 곽승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전화하면 내가 마중 나갈게.”약속을 받은 곽승연은 서연정과 함께 떠났다.고은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MQ의 근황과 삼촌 내외의 상황을 물어보자, 유성준은 모든 게 정상적이며 삼촌이 최근 의사결정 시 독단적이지 않고 직원들과 상의한다고 답했다. 이 말에 고은서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은서 씨, 지난번 시은 씨가 향수 제작을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어?”유성준이 묻자, 고은서는 그가 걱정할까 봐 이미 완성했고 문제없다고 둘러댔다.“성준 오빠, 커피 좀 끓여줘! 내가 만든 건 맛이 하나도 없어!”전화 너머에서 고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시만, 난 지금 은서랑 통화 중이야.”유성준은 온화하게 응답했다.“그래? 그럼 나도 통화할래!”곧바로 고은혜가 전화를 받아 말했다. “언니, 왜 성준 오빠에게만 전화하고 나한텐 안 해?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고은서는 일부러 놀리며 말했다. “네가 MQ 모든 업무를 책임
고은서는 이런 일에 맞서 그 누구도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방금 여시은과의 썰전을 끝낸 고은서는 곽승재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변호사까지 데려와 날 도왔는데 이번엔 그냥 참고 넘어가자.’고은서는 눈치 있게 화제를 바꾸려 했다.“여시은 집안 하인에 관해 조사한 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그러나 곽승재는 조금 전에 고은서가 했던 말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고은서,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일은 절대 너더러 날 다시 사랑해달라고 도와준 게 아니야.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승연이까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너 자신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나서지 않거든 절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곽씨 집안 사람들 때문에 날 도운 거였어?’고은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답했다.“힘들었겠네.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줄까? 다음부턴 입으로만 알았다 하고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돼.”“...”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라이트문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면서 곽승재한테 말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 마재경 씨가 다쳤다던데 얼른 가서 간호해줘.”고은서는 곽승재랑 올라가는 걸 원치 않았다. 그가 곽승연을 핑계로 자꾸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 것도 싫었다.그래서 일부러 마재경에 관한 얘기를 꺼내며 그를 자극했다.아니나 다를까, 고은서의 말을 들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쌩하고 떠났다....이튿날, 인터넷에서는 곽승재가 저녁에 마재경을 보러 병원으로 갔다는 기사가 떴다.스캔들 기사에 관심이 없던 곽승연도 우연히 보게 되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오빠는 분명히 언니를 좋아하는데 왜 인터넷에서는 오빠가 이 언니랑 같이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오빠랑 언니는 이미 이혼한 사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누굴 좋아하든 누구랑 함께 있든 다 오빠의 선택이라는 거지. 언니랑 상관없는 일이야.”두 사람이
“R국에 있는 계좌인데 누가 이체했는지는 알 수 없더군요.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하인의 아들이 갑자기 거금을 받았다는데 정말 우연일까요, 여시은 씨?”여시은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무언갈 떠올렸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곽 대표님,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곽승재는 부인하지 않았다.여시은은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격동해 하며 반박했다.“저 아니거든요! 곽 대표님, 은서 씨를 도우려 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저를 모함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이 대체 뭐죠? 계속 이러시면 저도 아버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곽승재는 아주 담담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전에 은서랑 함께 물에 빠진 걸 보았다는 직원 한 명을 찾았는데 은서가 밀어서 빠진 게 아니라 여시은 씨가 은서를 잡아당기면서 같이 빠진 거라고 하던데. 이건 증거가 확실하죠?”옆에서 듣고 있던 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정말 목격자를 찾은 거야?’농장은 면적이 하도 커서 다른 레스토랑처럼 웨이터가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은서는 어렴풋이 당시 물에 빠지고서야 소식을 접한 직원들이 달려온 걸 기억하고 있었다.‘목격자는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곽승재의 말을 들은 여시은은 씩씩거리면서 호통쳤다.“증거가 확실하다뇨? 이건 명백한 모함이에요. 그 사람 누구예요? 지금 당장 마땅한 벌을 받게끔 고소할 거예요.”그리고 이내 뒤돌아 변호사한테 말했다.“합의가 불가능하다면 그냥 조사하게 내버려둬요. 고은서 씨의 고의상해죄는 끝까지 추궁하도록 하고요.”‘반응을 보아서는 목격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네.’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얼마든지 추궁해 보세요.”이를 본 곽승재는 더는 여시은과 대화하지 않고 자신의 변호사에게 이번 일을 전적으로 맡겼다.고은서는 경찰을 도와 사건 경과를 기록했다.쿠아는 경찰서에 있다가 곧 감식 센터로 보내질 예정이었다.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니 시간도 꽤 늦어졌다.곽승재는 고은서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