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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6화

Author: 류한나
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좋아. 끝나고 나면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

“나야, 내가 갈게.”

박지연은 의욕이 잔뜩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차 사려고 했잖아. 육현석이 연습용으로 한 대 빌려줬어.”

“선물로 준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비싼 걸 어떻게 받아. 얼른 내려와.”

고은서는 자신의 운전 초보 시절이 떠올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연아, 너 운전면허 대학 때 땄지? 그동안 운전 거의 안 했잖아. 괜찮겠어?”

“무슨 뜻이야? 당연히 괜찮지!”

박지연은 자신만만했다.

“며칠 동안 육현석이 시간 날 때마다 나랑 같이 연습했어. 나 운전 완전 잘해.”

“육현석은?”

“오늘 바빠서 시간 못 낸대. 헛소리 그만하고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짐을 챙긴 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연이 반짝거리는 새 차를 타고 도착했다.

그녀는 일부러 경적을 한 번 울리고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신만만한 모습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운전이 엄청 어려운 일인 줄 알겠네.’

고은서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

“지연아, 너 혼자 운전하는 거 처음 아니지?”

박지연은 의욕이 넘쳤다.

“걱정하지 마! 처음 아니야. 오늘 아침에도 혼자 병원 주차장 한 바퀴 돌았어. 그리고 방금도 병원에서 여기까지 잘 왔잖아.”

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괜히 초 치지 말고 믿어야지...’

그녀는 손잡이를 꽉 잡으며 장엄하게 말했다.

“출발하시죠!”

박지연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

“정상적으로 행동해. 나 진짜 운전 잘해.”

고은서의 걱정 속에서 박지연은 무사히 목적지까지 운전했다.

주차를 마치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고은서는 갑자기 곽승재가 대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까지 낸 운전자의 조수석에 앉을 용기가 있다니... 내가 실수라도 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고은서와 박지연은 함께 피부과로 들어갔다.

직원이 그들을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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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좋은 성과를 따내기 위해서 남자들한테 개보다도 못한 장난감 취급을 받았어!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백유미는 또 넋을 놓고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난 그저 성공하고 싶었어. 내가 모든 사람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면 곽 회장님도 날 무시하지 않으실 거고 그렇게 되면 내가 곽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수 있는 거야! 하하하!”고은서는 눈앞의 백유미가 미친 척하던 지난번과 달리 확실히 정말 정신이 나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백유미는 소리를 질러대며 울다가도 다시 웃기를 반복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백유미에게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곽승재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유미는 그저 미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동시에 처절하게 절망하기도 했다.아무래도 백유미가 미쳐버린 건 확실해보였다.하지만 왜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은서는 백유미가 얼마나 멘탈이 강하고 독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더더욱 갑자기 미쳐버린 백유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난 곽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사람인데 내 이미지에 금이 가서야 되겠어! 나쁜 건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 먼저 나한테 눈독을 들이고 날 위협했다고...”뭐가 생각난 모양인지 미친 사람처럼 웃던 백유미는 또 갑자기 몸을 덜덜 떨며 곽승재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승재야, 나 좀 살려줘. 난 버리는 카드가 아니야, 나 아직 쓸모 있다고. 나 죽기 싫단 말이야! 아악, 당신들 누구도 날 해할 생각 하지만! 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백유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난동을 피웠다. 백유미는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며 철제 난간을 입으로 물어뜯기 시작했다.워낙에 요란한 소리에 직원들이 급히 달려왔다.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백유미를 난간에서 떼어놓고 그녀에게 진정제를 투입했다. 일련의 과정은 꽤 소란스러웠다.복잡한 과정에 고은서가 부딪치기라도 할라 곽승재는 고은서를 데리고 정신병원에서 나왔다.“

  • 어게인, 비긴   제1058화

    곽승재는 냉큼 반대편으로 달려와 고은서의 어깨를 부축하며 말했다.“의사가 한 말 잊은 거 아니지? 잘 쉬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의사는 애초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그저 곽승재의 개인적인 해석에 불과했다.고은서는 곽승재와 말다툼을 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저 그런대로 곽승재가 자신의 어깨를 부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병원 로비에 들어서니 병원 원장이 곽승재를 맞아주었다.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병원 측의 관계자가 둘을 백유미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백유미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한 비서를 발견했다.한 비서는 간병인 복장을 하고 있었고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는데 아마 금방 식사를 챙겨주고 나온 것 같았다.한 비서는 고은서를 발견하고 기뻤지만 같이 온 곽승재를 발견하자 순식간에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차 표정이 얼어붙었다.“곽, 곽 대표님.”한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곽승재는 냉랭한 태도로 한 비서를 무시하고는 고은서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갔다.곧이어 둘은 백유미가 있는 집중 관찰실에 도착했다.이곳은 한눈에 봐도 일반 병실보다 안전성이 더 높아 보였고 문도 이중문으로 되어있었다.바깥의 철문을 여니 철제 난간이 나타났다.직원은 이렇게만 면회가 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밖에서 본 백유미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백유미는 얇은 환자복을 입고 간이침대에 홀로 앉아있었다. 낯빛은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버석했으며 눈빛은 퀭했다.지금의 백유미에게서 예전의 세련됨과 온화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곽승재를 살폈다.백유미는 곽승재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고 한때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했었다.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백유미를 보는 곽승재의 마음이 어떨지 고은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는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담담하게 고은서에게 말했다.“이건 백유미가 자초한 일이야.”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내내 멍하던 백유미가 반응

  • 어게인, 비긴   제1057화

    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는 여전히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일단 나랑 어디 좀 갈 데가 있어.”곽승재의 얼굴에 보기 드문 진지함이 서렸다. 아마도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그런 곽승재의 모습을 보자 고은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아랫배의 고통도 아까보다 심해지는 것 같았다.곽승재의 운전석 칸막이에 노크하고는 말했다.“근처에 호텔을 찾아서 차를 세워줘요.”“호텔에는 왜 가는 건데, 또 뭘 하려고 그래?”고은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곽승재를 한껏 경계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말없이 고은서에게 딱 붙어 앉더니 팔로 고은서의 허리를 감쌌다.“곽승재, 너...”경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서가 느낀 건 포옹의 온기가 아닌 아랫배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감각이었다. 곽승재가 고은서를 대신해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져주고 있었던 것이다.곽승재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고은서의 옷을 뚫고 피부에도 전해졌고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은 아랫배의 통증을 어느 정도 완화해주었다.“아까 무슨 생각 한 거야?”곽승재는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물었다.“지금 몸도 성하지 않은 사람한테 내가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데?”살짝 민망해진 고은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곽승재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곽승재가 다른 한 손으로 고은서를 제지했다.“배 아프다며? 가만히 있어.”곽승재의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있었다.“일단 호텔에 가서 네가 따뜻한 물에 처방받은 약을 먹고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좀 쉬고 난 후에 내가 가려던 곳에 같이 가줘.”고은서는 곽승재의 다정한 말투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으니까 좀 떨어져 줄래?”하지만 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계속해서 아랫배를 어루만져주는 데 집중했다.“...”“곽 대표님, 호텔에 도착했습니다.”고은서가 더는 참지 못하고 뭐라고 하려던 찰나에 마침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차를 세우고 나서 곽승재는 고은서를 데리고 호텔로 들

  • 어게인, 비긴   제1056화

    “그동안 마재경과의 스캔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유포한 거고 다 거짓이야.”곽승재가 이어서 말했다.일부러 짜고 친 판일 것이라는 예측은 박지연도 진작에 했었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모두 다 거짓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던데. 마재경이 네 손을 잡고 너한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봐서는 너에 대한 감정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았거든.”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안광이 돌았다.“은서야 너 지금 마재경이 신경 쓰이는 거야?”고은서가 반문했다.“네 생각엔 내가 신경 쓸 것 같아?”곽승재의 안광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일부 행동들은 마재경에게 일부러 시킨 것이라고 털어놓았다.비록 곽승재는 눈치를 못 챘겠지만 고은서는 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진짜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마재경이 곽승재에게 애교를 부리고 살갑게 굴었던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마재경이 고은서를 볼 때마다 얼굴에 다 드러나던 질투와 원망만은 절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곽승재 너 솔직히 말해봐. 마재경을 이 큰 판에 끌어들여서 연기하게 만든 게 오로지 나한테 당한 걸 갚아주기 위해서야?”고은서가 곽승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곽승재는 잠깐 난처해하더니 이내 대답했다.“네가 질투를 하고 화를 내길 바란 건 사실이야.”곽승재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라이트문 아파트에 집을 산 건 단지 고은서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고 처음부터 마재경을 그 집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이다.곽승재는 그날 밤 마재경이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서 자신을 기다린 것도 자기가 시킨 것이라고 했다.왜냐하면 곽승재는 고은서가 주인혁의 일 때문에 송민준을 찾아간 것을 알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유치하긴.”“유치하고 웃긴 건 나도 인정해.”곽승재는 민망한 듯 자신의 유치함을 인정해버렸다.곽승재는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고은서의 마음속에 아직도 자신이 남아 있다는

  • 어게인, 비긴   제1055화

    말을 마친 고은서는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고은서가 도아름과 박지연을 요가원에서 만났을 때도, 레스토랑에서 송민준과 밥을 먹고 있을 때도, 팔에 화상을 입어서 주인혁이 함께 병원에 가줬을 때도, 지인들과 농장에 갔을 때도... 고은서는 모두 우연히 곽승재와 마재경을 만났었다.결국 그 모든 우연은 진짜 우연이 아니었고 곽승재가 고은서의 뒤를 밟아 우연으로 위장한 계획된 만남에 불과했다.고은서의 질문에도 경호원은 그저 침묵을 유지하며 운전에만 몰두했다. 그 와중에도 눈치가 빨라서 재빨리 뒷좌석의 칸막이 버튼을 눌러 둘만의 대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차갑기 그지없는 고은서의 얼굴을 발견한 곽승재는 팔을 뻗어 고은서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은서야, 난 일부러 사람을 시켜서 너의 뒤를 밟게 한 게 아니라 네 안전이 걱정돼서 그런 거야.”곽승재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걱정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곽승재는 더는 억누르고 있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은서에게 이마를 맞대고는 작게 속삭였다.“네가 뒤풀이를 하던 날 밤, 내가 출장을 간 바람에 부하더러 널 지켜주라고 했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해줘서 하마터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날 뻔했잖아. 난 지금까지도 계속 그걸 후회하고 있어.”고은서는 그날 밤 송민준이 자신을 집에 데려다준 후에 이미숙에게서 곽승재가 자신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곽승재는 그날 밤 고은서에게 예상치 못할 사고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는 피부로 느껴지는 곽승재의 체온과 자신을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이 묘하게 불편했다.결국 고은서는 고개를 옆으로 빼며 말했다.“이거 좀 놔줘.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 동안 고은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고은서를 놓아주었다.다시 좌석에 앉은 고은서가 말했다.“내 안전이 걱정돼서 그랬다고 했지. 그럼 내가 안전하지 못할 건 또 뭐가 있는데?”곽승재는 고

  • 어게인, 비긴   제1054화

    고은서는 곽승재를 힐끔 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이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 사람은 제가 약을 먹었는지 모르거든요.”의사는 환자의 태도에 화가 나 다시 고은서를 꾸짖으려고 했으나 곽승재에 의해 제지당했다.“모두 제 잘못이니까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두 분 다 잘못이 있어요!”곽승재가 잘못을 승인한 것을 들은 의사는 여태 고은서가 곽승재를 감싸주고 있었던 거로 오해해 더 화가 났다.“아직 젊은 사람들이 오직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원래도 몸이 허약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멋도 모르고 무작정 약을 먹었다간 언제 몸이 망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요!”고은서도 자신이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어 재차 의사에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했다.고은서의 현재 상황에 맞는 약효가 빠른 약이 없었기에 오로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컨디션을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의사는 고은서에게 약을 처방해주었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고 나서야 진료가 끝났다.고은서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랫배가 다시 아파져 왔지만 감히 티를 낼 수 없었다.고은서는 아픔을 참고 걸어 나갈 생각이었지만 곽승재가 그런 고은서를 순식간에 번쩍 안아 올렸다.“함부로 움직이지 마.”고은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문밖에는 아직 기웃거리며 상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와 병원에서 다툴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서 아예 가방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곽승재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진료실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곽승재는 고은서를 안고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은서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내려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덤으로 작게 경고까지 했다.“엘리베이터

  • 어게인, 비긴   제1053화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린 고은서는 부끄러움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와 이를 꽉 깨물고 곽승재에게 말했다.“곽승재, 넌 진짜 나쁜 놈이야!”고은서는 곽승재 몰래 계략을 꾸민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곽승재는 애초에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린 적이 없었다.곽승재가 찾아간 방은 고은서의 방이었기 때문이다.사실 고은서는 깼을 때 곽승재이진 않았을까에 대해 의심을 했었다.하지만 곽승재가 고은서가 놓은 덫에 걸려 잔뜩 분해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모자라 가시 돋친 말을 퍼붓고 그대로 돌아섰기에 고은서도 더는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그 이후에도 마음속에 이 일을 더 담아두지 않았고 굳이 곽승재를 찾아가 사실확인을 하지도 않았다.그렇게 고은서는 그저 꿈이라고 여겼다.반면 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부끄러움과 짜증만 보아냈을 뿐, 아이를 지우는 것에 대한 슬픈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아내지 못했다.곽승재는 여전히 의심이 채 가시지 않은 말투로 고은서에게 물었다.“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온 게 아니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다가 막 곽승재에게 말하려던 참에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고은서의 진료 순서가 온 것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를 무시하고 비상계단 출입구의 문을 열었다.곽승재를 따라온 남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고 잔뜩 진지한 태도로 궁금해서 기웃대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있었다.그리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재빨리 그중 한 사람이 곽승재와 눈빛을 주고받는 걸로 보아 곽승재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지시를 확인한 남자는 공손하게 고은서에게 길을 내주었다.고은서는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의 추측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아무런 표정의 동요도 없이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가 고은서의 개인 정보를 확인하는 동안 곽승재도 따라 들어왔다.워낙 별 상황을 다 겪어본 의사는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곽승재에도 딱히 곽승재의 외모에 감탄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저 한번 흘기고 말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고은서에게 물었다.“가

  • 어게인, 비긴   제1052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이번 달은 불규칙해졌다. 일주일이나 늦춰진 건 둘째치고 여태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몸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챈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레 건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결국 고은서는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타서 기사에게 근처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말했다.아랫배가 자꾸 은근하게 아파 고은서는 가는 내내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차에서 내렸을 때 코를 쿡 찌르는 과일 썩은 냄새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고은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재빨리 진료 접수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산부인과 층이라 그런지 역시 여성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진료 접수도 했겠다, 고은서는 그저 복도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진료 속도에 조금 답답해진 고은서는 사람이 적은 앞쪽으로 가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복도에 소음이 아까보다 커진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의 “잘생겼다”, “키 엄청 크네”와 같은 감탄 소리도 들었다.산부인과에도 남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같이 온 가족들이었다.‘남자도 같이 온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감상을 해도 되는 거야?’고은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서가 금방 몸을 돌렸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고은서의 앞에 나타났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곽승재의 뒤를 따른 건 사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고은서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잔뜩 어리둥절해 있었다. 고은서의 환각이 아니라면 곽승재가 정말 산부인과에 나타난 것이다.“따라와!”곽승재는 고은서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은서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왜 이러는 거야, 곽승재. 왜 또 멋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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