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준은 오늘 게임 내부 테스트가 있는 날이라 송민아가 특히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녀를 응원하러 왔다.송민아의 제안을 들은 송민준이 고은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은서 씨 생각은 어떠세요?”이전까지 송민준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는 솔직히 그와 단둘이 식사하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송민아가 먼저 말을 꺼냈고 송민준도 직접 물어온 상황에서 곧장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게다가 송민준은 그녀를 여러 번 도와준 적이 있었다.이전의 페인트 사건은 물론이고 이번 게임 내부 테스트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민준 씨, 저는 좋죠. 안 그래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어요. 미리 준비한 자리는 아니지만 괜찮으시다면 가볍게 식사라도 하시죠.”어쨌든 송민준을 초대하는 자리였기에 고은서는 그의 취향을 고려해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요리뿐만 아니라 전통 차로도 유명한 식당을 골랐다.고은서와 송민준이 건물을 나와 운전기사를 기다리려던 순간 정장을 입고 노트북 가방을 든 한 남성이 급히 다가왔다.“고 대표님이십니까?”송민준이 고은서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누구시죠?”“악의는 없습니다. 고 대표님께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제 기획서를 한 번만 봐주실 수 있을까요?”그는 서류봉투를 내밀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고 대표님,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의 신원을 알 수 없었기에 고은서는 서류를 바로 받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프로젝트에 관하여 논의하시려면 저희 회사 이메일로 먼저 제안서를 보내주세요. 조건이 맞다면 담당자가 연락드릴 겁니다.”그러자 남성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world 게임이 유일 투자은행의 투자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메일로 여러 번 기획서를 보냈지만 번번이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지만 경비팀에서 단순 영업사원으로 오해해 건물 출입을 막았습니다.”투자 회사에는 매일 수많은 투자 제안서가 쏟아진다.특히
송민준은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은서 씨는 원래 정이 많으신가요?”고은서는 담담하게 답했다.“저도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저분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희망마저 사라지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하지만 본인의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고은서는 단번에 알아차렸다.‘다른 사람이 무너지든 말든 왜 본인의 시간을 낭비하냐는 뜻이겠지.’고은서는 가볍게 웃었다.“때로는 한 순간에 큰 전환점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저분은 모든 용기를 내어 저를 찾아왔어요. 저는 단 몇 분을 투자해 그에게 기회를 줬을 뿐이죠. 지금 당장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앞으로 계속 도전할 힘은 얻었을 겁니다.”그러고 나서 고은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아니면 그냥 제가 성인군자 놀이하는 걸로 생각해도 좋아요.”송민준은 고은서를 한 번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는 않고 조용히 다른 화제를 꺼냈다.약 30분 후 차는 식당 앞에 도착했다.이곳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회원제 운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비회원은 출입이 불가능했는데 고은서는 고객들과 자주 만나야 했던 탓에 자연스럽게 회원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직원이 두 사람을 2층 별실로 안내했다.완전히 밀폐된 방은 아니었지만 구슬발이나 병풍이 자리마다 설치되어 있어 적당한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비록 식사 자리는 고은서가 마련했지만 메뉴를 정하고 주문하는 것은 송민준이 맡았다.그는 예의 바르게 고은서의 취향을 물었고 직접 차를 우려 따라주며 품격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식사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송민준은 대화를 이끌면서도 고은서가 이야기할 때는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고 일말의 어색함도 없이 매끄럽게 자리를 이어 나갔다.그는 마치 귀족처럼 세련되고 교양 있었는데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과하게 나서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를 민시후처
“재경아.”주인혁의 매니저가 반갑게 불렀다.그 이름을 들은 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설마 그 인플루언서 마재경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고은서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 사람은 이미 다가오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아는 마재경이었다.그녀는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며칠 전 손을 데었을 때의 창백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아는 사이였던 주인혁의 매니저와 마재경은 친근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밥 먹으러 왔어? 우연이네. 마침 재경이랑 얘기할 게 있었는데 저쪽에 앉을까? 은서 씨랑 친구분 방해하지 말자.”매니저가 주인혁에게 물었다.주인혁의 매니저인 이지호는 최근 교체된 인물로 더 나은 인맥과 경력을 갖춘 사람이었다.그는 주인혁을 담당하기 전부터 많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주인혁이 앞에 있는 고은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촬영장에서도 주인혁은 고은서와 관련된 일에 신경을 썼고 촬영이 끝난 후에는 뒤풀이도 가지 않고 곧장 해성으로 달려갔다.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연예인이 스캔들에 휘말리면 팬들을 대거 잃을 수도 있기에 매니저는 절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인혁을 빨리 데려가고 싶었다.그 말을 듣고 주인혁이 잠시 망설이자 마재경이 먼저 고은서에게 인사를 건넸다.“은서 씨, 우리 정말 인연인가 봐요. 여기서도 다 마주치네요.”그녀는 일부러 가방을 눈에 띄게 들어 보였다.그제야 고은서는 마재경이 유명 브랜드의 최신 컬렉션 원피스를 입고 있고 손에는 구하기도 어려운 한정판 명품 가방을 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그녀의 태도로부터 그 물건들을 누가 선물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마재경의 유치한 행동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가 주인혁에게 말했다.“인혁 씨, 먼저 일 보세요.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식사해요.”“와, 은서 씨는 정말 매력이 넘치나 보네요.”주인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마재경이 과장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멋지고 성공한 남성이 옆에 있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말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곽승재를 마주하자 고은서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여긴 왜 또 온 거야?’지난번엔 작은 병원에서 마주치고 이번엔 식당에서 다시 만나다니 너무도 기막힌 우연이었다.고은서는 짜증이 밀려왔지만 반대로 마재경은 마치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그녀는 곧장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곽승재를 향해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곽 대표님...”하지만 곽승재는 마재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신 주인혁과 송민준을 한번 훑어보았다.주인혁도 온라인에서 떠도는 곽승재와 마재경의 소문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에게 그다지 호감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민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곽 대표님, 우연이네요.”그러자 곽승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송 대표님과 고 대표님은 최근 협업하나 보죠? 요즘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네요.”송민준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곽 대표님 덕담 감사합니다. 고 대표님의 회사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함께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게는 영광이죠.”비록 송민준이 속한 회사는 해성에 있는 한 지사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력은 고은서의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배려였다.곽승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대신 그는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재경을 바라보며 물었다.“여기서 먹을 거야? 아니면 장소 옮길까.”마재경은 고은서와 주인혁을 의식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긴 싫어요.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잖아요.”직접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그 말투와 분위기에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그제야 곽승재는 옆에서 계속 눈치를 보고 있던 이지호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소속 연예인이 재경이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매니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고은서는 처음부터 곽승재와 말다툼을 벌일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주인혁을 빌미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마재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지금 저를 개에 비유하신 건가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단지 은서 씨 인기가 부럽다고 했을 뿐인데 주인혁이 일부러 나서면서 은서 씨한테 잘 보이려고 한 건 사실이잖아요. 사과해야 할 일입니다.”“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나서서 도와주지 않나요?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듣기 싫으면 본인의 언행부터 조심하세요. 괜한 도발이나 억울한 척하는 행동은 하지 말고요.”고은서가 싸늘한 말투로 일갈했다.“저는 그런 적...”얼굴이 붉어진 마재경은 더 이상 반박을 이어 나가지 못했고 그녀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곽 대표님, 다 제 잘못이에요. 은서 씨 인기가 부럽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잘못인 줄 알았으면 사과하세요.”고은서는 비꼬듯 말하고 곧장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 대표님이 잘못한 사람이 사과해야 한다고 하셨죠. 이제 와서 편파적으로 행동하진 않으시겠죠?”마재경은 치를 떨었다.‘분명 곽승재의 힘을 빌려 주인혁에게 사과를 받아내려 했는데 왜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지? 다 고은서가 능수능란하게 말싸움을 주도한 탓이야.’마재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곽승재가 나서서 도와주기를 기대했지만 곽승재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고 이 상황 자체에 짜증이 난 듯했다.그녀는 곽승재가 누구 때문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어느 쪽이든 도박을 걸기는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고은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고은서는 처음부터 마재경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다만 곽승재가 주인혁에게 억울한 사과를 강요하려 했기에 기어코 마재경에게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이미 상대가 물러섰으니 더 따질 필요도 없었다.“멀리 안 나갑니다.”고은서의 축객령에 곽승재의 얼굴은 폭풍전야처럼 어두워졌다.그는
“이대로 가면 이 게임은 틀림없이 대박 날 거야! 우리도 게임 업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어.”송민아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은서야, 네 안목은 정말 대단해. 존경스러울 정도야.”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조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명운 주류와 제인 제약은 그래도 노력한 결과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world 게임은 단순히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송민아는 깊이 생각하지 않겠지만 송민준이라면 의심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고은서는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투자라는 게 적자 날 때도 있고 흑자 날 때도 있는 거지. 우연히 아이디어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준 것뿐이야.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어.”그녀의 말에 송민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보면 은서 씨의 선의도 꼭 시간 낭비는 아니었군요.”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점심때 갑자기 찾아온 남자에게 십여 분의 시간을 준 것뿐인데 송민준에게는 그럴듯한 이유로 받아들여진 것이다.그 남자를 떠올린 고은서는 문득 한 가지 일이 뇌리를 스쳐 미간을 찌푸렸다.“왜 글? 뭘 걱정하는 거야?”송민아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고은서는 말하려다 송민준이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생각나서. 오빠랑 밥 먹어. 난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게.”송민아는 고은서가 업무에 철저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대신 도시락 두 개를 건넸다.“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먹어야 해.”“알았어, 고마워.”사무실로 돌아온 고은서는 곧장 world게임 회사의 창립자이자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다.“고 대표님, 내부 테스트 데이터가 엄청 좋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큽니다.”상대방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은서는 몇 마디 축하의 말을 건넨 후 본론을 꺼냈다.“게임의 도용 방지 대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전생에 이 게임은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투자사와의 소송으로 최적의 출시 시기를 놓쳐 뒤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나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고은서 씨, 잘 지내셨어요? 현재 백유미는 특수 병동에 갇혀있습니다. 비록 간병인이라는 명목으로 배치되었지만 직접 마주할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짧은 몇 차례의 접촉을 통해 본 백유미의 상태는 심각합니다. 멍하니 아무 반응도 없거나 아니면 극도로 난폭해져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병원 측에서는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 일반 병동으로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갑자기 미쳐버린 거지? 백승엽의 죽음조차 백유미를 완전히 무너뜨리진 못했는데 더 큰 충격은 받은 건가?’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문득 곽승재를 함정에 빠뜨리기로 결심했던 그날 밤 육현석이 했던 전화가 떠올랐다.그때 곽승재는 한동안 전화를 받지 않다가 박지연의 핸드폰으로 연락해서야 겨우 연결되었는데 전화기 너머로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었다.‘울음소리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었는데 백유미였던 걸까?’곽승재는 바람둥이와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그와 특별히 가까운 여자는 백유미뿐이었다.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경찰로부터 백유미가 정말 미쳐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울음소리가 정말 백유미였다면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한 비서님, 최근에 백유미를 면회하러 온 사람이 있었나요?”한지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아니요. 아무도 없었습니다.”“곽 대표도 안 갔나요?”“네.”한지나는 뭔가 오해한 듯 급히 덧붙였다.“고은서 씨, 곽 대표님과 백유미 사이에는 사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매번 백유미가 곽 대표님을 찾아온 것도 업무적인 일 때문이었어요. 곽 대표님께서 정말 백유미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백유미도 제게 돈을 주고 대표님의 동선을 알려달라고 할 필요도 없었겠죠.”이생에서 곽승재는 아직 백유미를 사랑하게 되지 못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난 생에서는 결국 결혼까지 하기로 했던 사이였다.고은서는 속으로 냉소했다.고
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좋아. 끝나고 나면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나야, 내가 갈게.”박지연은 의욕이 잔뜩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차 사려고 했잖아. 육현석이 연습용으로 한 대 빌려줬어.”“선물로 준 게 아니라?”“내가 그렇게 비싼 걸 어떻게 받아. 얼른 내려와.”고은서는 자신의 운전 초보 시절이 떠올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지연아, 너 운전면허 대학 때 땄지? 그동안 운전 거의 안 했잖아. 괜찮겠어?”“무슨 뜻이야? 당연히 괜찮지!”박지연은 자신만만했다.“며칠 동안 육현석이 시간 날 때마다 나랑 같이 연습했어. 나 운전 완전 잘해.”“육현석은?”“오늘 바빠서 시간 못 낸대. 헛소리 그만하고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짐을 챙긴 고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연이 반짝거리는 새 차를 타고 도착했다.그녀는 일부러 경적을 한 번 울리고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자신만만한 모습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운전이 엄청 어려운 일인 줄 알겠네.’고은서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지연아, 너 혼자 운전하는 거 처음 아니지?”박지연은 의욕이 넘쳤다.“걱정하지 마! 처음 아니야. 오늘 아침에도 혼자 병원 주차장 한 바퀴 돌았어. 그리고 방금도 병원에서 여기까지 잘 왔잖아.”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래도 괜히 초 치지 말고 믿어야지...’그녀는 손잡이를 꽉 잡으며 장엄하게 말했다.“출발하시죠!”박지연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정상적으로 행동해. 나 진짜 운전 잘해.”고은서의 걱정 속에서 박지연은 무사히 목적지까지 운전했다.주차를 마치자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다 고은서는 갑자기 곽승재가 대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고까지 낸 운전자의 조수석에 앉을 용기가 있다니... 내가 실수라도 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고은서와 박지연은 함께 피부과로 들어갔다.직원이 그들을 맞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
고은서가 이런 상태로 곽승재와 대화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아무런 공격성도 느껴지지 않았고 일부러 냉담한 척하지도 않았으며 더는 정신을 곤두세우고 그를 경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약간 씁쓸하긴 했지만 전에 비해 두 사람의 사이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나오면서 말했다.“알겠어. 그럼 C선생을 찾아내고 나랑 고씨 가문이 더는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 당연히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무례겠지.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당신을 사랑하는 것 빼곤 다 해줄 수 있으니까.”그녀의 혼자 힘으론 도무지 C선생을 상대할 수가 없었으므로 유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송민준은 처음부터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주인혁은 연예인으로서 자칫하면 앞날을 망칠 수 있었고 유성준은 MQ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 상태였다.지금으로써는 곽승재가 조력자로서 제일 알맞는 인물이었다.게다가 곽승재가 요즘 들어 계속 몰래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공유하고 이른 시일 내로 손을 잡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었다.“당신이 모자란 게 별로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해볼게.”고은서가 설명을 보태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약간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은서야, 자꾸 날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난 단 한 번도 너한테서 뭘 바란 적이 없어. 일부러 네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돕는 것도 아니야.”고은서는 자기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도움을 받는 입장이면서도 불구하고 거만한 태도를 선보이는 게 확실히 마땅치 않았다.그녀는 이내 그에게 사과했다.“그럼 우린 이젠 한배를 탄 거네. 백유미한테서 더 들은 거 없어? 백승엽 일에 관해서는 어떤 태도였어?”고은서는 이어 백유미에 관한 얘기를 이어갔다.곽승재는 백유미가 백승엽의 일에 관해 많은 의심을 품고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줬다.백승엽이 백
“그런데 아무런 의심스러운 곳도 찾지 못했다는 건 송민준이 C선생이 아니란 뜻이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딱 두 가지 가능성이야. 하나는 송민준이 확실히 무고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한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고은서는 송민준이 무고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나랑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 거지? 애초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집안이잖아.’“백유미는 그 뺑소니 범인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대?”곽승재 또한 전에 백유미한테 물어봤었는데 고은서와 고준석이 해찬시에 갔을 때 두 사람을 처리할 만한 절호의 기회라고만 소식을 전했을 뿐 모든 건 C선생 혼자 계획한 일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그 말인즉슨 백유미는 두 사람이 사고가 날 거라는 걸 알고만 있었을 뿐 자세한 계획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었단 뜻이다.‘곽승재가 두 범인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무런 당황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 난 그저 곽승재가 백유미의 편을 들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고은서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전생에 백유미가 만났던 절도 방화범도 그 두 남자였는데 그러니까 전생의 배후도 C선생이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다친 것도 우리 집이 망한 것도, 또 내가 정신병원에서 겪은 모든 일이 다 그 C선생이 꾸민 짓인 거야.’고은서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곽승재는 몸을 떨고 있는 고은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은서야, 괜찮아? 병원 갈까?”고은서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한기에 휩싸인 듯 마치 당장이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 끝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이번 생에 곽승재와 이혼만 하고 백유미를 망가뜨리기만 하면 나머지 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현실은 매우 잔인했다.백유미는 그
“은서야, 왜 그래? 어디 문제라도 있어?”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리고 사색에 잠긴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자신이 전에 받았던 전화에 관해 얘기했다.그러자 곽승재도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내 추측이 맞았어. 아마 백유미가 일을 망친 데다가 혹시나 무언갈 폭로하기라도 할까 봐 희생양으로 삼고 모든 죄명을 덮어씌운 걸 거야.”녹음된 증거도 있고 해서 고은서는 이미 그 일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그런데 백유미 배후에 있는 사람이 제보자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다.“백유미는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해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는 눈살을 또다시 찌푸렸다.“백유미도 배후가 대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 전에 암암리에 조사해 보았다고는 했는데 딱히 쓸만한 걸 찾아내지는 못했대. 그런데 의심되는 상대가 한 명 있다고 했어.”“누구?”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익숙한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송민준.”고은서는 약간 의외이긴 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앞섰다.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했었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 건 송민준 자체가 원래부터 꽤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백유미 더러 고씨 가문을 해치라고 한 거지?’“송민준을 의심하는 이유는?”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당시 고은서가 사고로 유산하게 된 일을 꺼냈다.송민아의 도우미가 백유미 어머니랑 아는 사이인 건 맞았다. 심지어 진숙희가 먼저 그녀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연락한 것이었다.진숙희 신분을 알게 된 백유미 또한 그 절호의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또 마침 고은서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진숙희에게 그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소식을 송민아한테 전하라고 시켰던 것이다.송민아가 고은서를 찾아가 아이를 없애라고 했던 것도 다 백유미가 계획한 것이었다.“진숙희가 은혜를 갚기 위해 백유미를 도운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그런데 백유미 또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은서는 백유미가 그동안 자신을 상대로 저질렀던 만행들이 모두 누군가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백유미가 고은서는 이미 누군가의 표적이 됐다고 그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백유미는 겉으로는 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사실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어. 너와 너희 가문을 상대하라고 말이야.”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물었다.“이 모든 것도 다 백유미가 너한테 알려준 거야? 그래서 내가 진짜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보내서 날 지켜보게 한 거고?”“말하자면 그렇지.”곽승재의 수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는 죄책감마저 엿보였다.“원래는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내서 네가 더는 위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철저하게 숨은 탓에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고은서는 언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냐고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백유미가 L국에서 납치를 계획할 때부터 백유미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말했다.이후에 백유미는 C선생이라는 사람이 계속 자신에게 모든 것을 지시해왔다고 순순히 인정했다.C선생이라는 말에 고은서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해낸 끝에 그때 백유미가 원지훈 무리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백유미에게 전화가 온 사람이 C선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때 전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C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도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설마 그때 전화가 온 것도 백유미한테 일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물어보려고 그런 건가? 근데 백유미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백유미를 버리려고 한 거고?”고은서는 이 일을 곽승재에게 말해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C선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