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프로젝트는 아주 순리롭게 운행되고 있었고 고은서는 이 기회에 전체 직원들에게 밥 한 끼를 사주기로 했다.밥을 먹은 후 송민아는 먼저 돌아가서 쉬라고 고은서를 달랬다.“돈도 쉬면서 벌어야지. 얼른 돌아가서 쉬어.”그러나 고은서는 뜬금없이 그녀에게 민시후에 관해 물었다.“민시후는 이미 해외 병원으로 이송되었겠지? 잘 도착했대?”송민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네가 나를 통해 민시후 소식을 알려고 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분명히 민시후한테 두 사람 사이에 관해 말했는데 왜 전혀 믿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혹시 민시후한테 뭐라고 한 거야?”고은서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야. 이게 제일 좋은 결과야.”송민아는 더는 캐묻지 않고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M국으로 갔어. 시아 언니랑 시현 오빠도 같이 갔고. 그리고 전에 쓰던 폰이랑 번호도 다 바꿨다고 하던데 필요하면 내가 새로운 연락처를 알아 봐줄게.”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필요 없어.”...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자비하게 흘러갔다.고은서는 매일 회사에서 바삐 보냈고 그나마 보람찬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도아름의 명운주류도 상장에 성공했고 고은서가 전에 투자했던 이백억 되는 투자금도 열 배 가까이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제인 제약까지 잘 운행되고 있는 덕분에 고은서는 투자계에서 꽤 높은 명망을 얻게 되었다.그 어느 평범하게 느껴지던 하루, 고은서가 사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을 때 고은혜한테서 연락이 왔다.“언니, 큰일 났어!”고은혜는 평소와 달리 처음부터 그녀를 부르면서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고은서도 따라서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왜 그래? 설마 할아버지가 편찮으시기라도 한 거야?”마침 전생에 이맘때쯤에 고준석이 다친 다리 때문에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이번 생엔 다리를 다치지 않아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다.그러나 고은혜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졸여왔다.“할아버지는 괜찮아.”고은서는 고은혜의 말
문은 제대로 닫혀 있지도 않았고 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집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소파 쿠션은 이리저리 땅에서 뒹굴고 있었고 카펫 위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찻잎들이 널브러져 있었다.티 테이블 위에 있는 꽃병도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꽃잎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원래는 생기가 넘쳤던 꽃들이 볼품이 없이 되었다.벽에도 물건 던진 탓에 긁힌 자국이 적지 않게 있었다.단은숙은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고 한쪽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까지 보였다.고국성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셔츠가 찢어질 정도로 구겨져 있었고 목에도 손톱에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유리잔에 맞았는지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반면 고은혜는 옆에 서서 무력하게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현장 상황을 봐서는 두 사람이 아주 심하게 다툰 듯했다.“언니, 왔어?”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부랴부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곧 대학 졸업을 앞둔 고은혜는 비록 성인이지만 어릴 적부터 단은숙이 엄격하게 단속하는 바람에 독립적 사고 능력이 비교적 부족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맞서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씩씩거리는 고국성과 단은숙을 보며 애써 침착하게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야, 마침 잘 왔어.”단은숙은 그녀를 고국성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네 삼촌한테 똑바로 물어봐. 이 나이에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했는지.”고국성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호통쳤다.“단은숙,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제삼자고 나발이고 나한테 누명을 덮어씌울 생각하지 마.”“제삼자가 아닌데 당신 아이를 임신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단은숙은 그 여자를 떠올릴 때마다 들끓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국성에 덮쳐들면서 그를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고국성의 힘이 훨씬 강한 탓에 얼마 되지 않아 밀려났다.자신의 힘으로는 고국성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단은숙은 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그래, 힘으론 나 혼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고국성은 창피하긴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자초지종을 고은서에게 알려주었다.그와 오미나는 처음에는 확실히 사업 파트너로서만 연락하다가 나중에 그녀가 여러 새로운 업무를 소개해주면서 몇 번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었다.그러다 어느 한 모임에서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오미나랑 같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그러나 오미나는 화를 내는 대신 두 사람 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일어난 일이라면서 한 번의 사고라 여기고 없던 일로 치자고 하면서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죄책감이 든 고국성은 그 후로 오미나에게 적지 않은 선물을 사줬는데 또 그 일이 단은숙에게 들키면서 고준석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었다.그 이후로 고국성은 오미나와의 만남 횟수를 줄였고 그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도 없었다.그러나 오미나가 갑자기 임신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고국성은 아이를 지우라고 오미나를 몇 번이고 달랬지만 그녀는 기어코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갑자기 오늘 단은숙을 찾아와 고국성을 자신에게 주면 안 되냐고 애원하기 시작했고 단은숙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의 뺨을 후갈리기 시작했는데 옆에서 싸움을 말리려던 고국성까지 봉변을 받게 된 것이었다.단은숙이 행여나 일을 크게 만들까 봐 걱정되었던 고국성은 오미나를 먼저 보내려고 했는데 이는 단은숙의 화를 더 돋우게 되었고 끝내는 참지 못하고 그의 몸에까지 손을 댔고 따라 화가 났던 고국성도 참다못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고 한다.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고은혜도 소란 소리에 깜짝 놀라 거실로 달려 나와 보니 이미 상황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고은서가 전화를 받고 달려왔다.“삼촌, 그래서 어쩔 생각이에요?”고국성이 아무리 실수로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그의 잘못이 분명했다.그는 두 여자에게 모두 상처를 준 사람이 되었다.고국성은 물려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그 아이를 남길 생각이
할 수 있는지는 고은서도 보장할 수 없었다.그러나 MQ와 고씨 집안을 위해서 꼭 찾아가 그 여자가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알아내야만 했다.“해보지도 않고 결과가 어떨지 어떻게 알아.”고은혜도 약간 자신이 없긴 했지만 여전히 참지 않고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아빠, 지금 우리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를 놓아주기 아쉬워서 일부러 우릴 보내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딸의 날이 선 질문에 고국성은 뜻밖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비록 자신의 딸과 조카에게 이런 일 처리를 맡기는 게 창피하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막부득이 한 상황에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일이 해결될 수만 있다면 누가 나서든 상관없었다.고국성은 오미나의 연락처를 고은서에게 알려주었다.“삼촌, 숙모는 삼촌이 좀 달래 봐요. 될 수록이면 이 소식이 할아버지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끔 말이에요.”고은서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고국성은 고은서의 말에 피식거리며 대꾸하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철이 든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체 무슨 속셈인지 가서 얘기해 보고 나한테 알려줘. 그럼 내가 해결 대책을 세울게.”고국성이 이런 태도로 고은서와 말하는 건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전에는 항상 웃어른이라면서 그녀를 향한 불만을 토로하기 바빴다.“해결 대책이 있으면 그 여자가 집까지 찾아오지 않았겠죠.”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이내 고은서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언니, 가자.”고은서는 단은숙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도 전에 고은혜랑 함께 주차장으로 갔다.아까까지만 해도 안절부절못하던 고은혜는 곁에 고은서가 있다는 것만으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안전감이 생겼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고은서라면 영문 없이 믿음이 갔다.“언니, 전에는 내가 언니를 상대로 듣기 싫은 소리를 많이 했는데 정말 미안해.”고은혜가 진지하게 사과하기 시작했다.“전에 형부의 관심을 끌기
“그럴 시간에 조금 이따 그 여자랑 어떻게 얘기할지나 생각해 봐.”고은서가 고은혜에게 주의를 줬다.그 말을 들은 고은혜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언니, 나 이런 일 못 하는 거 알잖아. 그 여자랑도 언니가 나서서 얘기해야 할 걸. 난 그저 집에 있기 싫은 데다가 언니를 응원해주러 따라가는 것뿐이야.”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오미나를 만나러 가는 도중 유성준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그는 전화가 통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은서야, 미안해. 요즘 너무 바빠서 미처 연락하지 못했어.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저씨한테 문제가 생긴 것 같던데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고마워요, 오빠. 저도 이미 들었어요.”함부로 다른 사람한테 말을 꺼낼만한 일은 아니지만 고은서에게 있어 유성준은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녀는 숨김없이 오늘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유성준은 약간 놀라긴 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내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없어?”“아직까진 괜찮은 데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빠한테 연락할게요. 오빠, 그보다 요즘 MQ에는 별다른 일 없죠? 업무 리스트 같은 것도 다 확인했을 텐데 문제가 될 만한 곳은 없었어요?”고은서가 진지하게 물었다.유성준은 긴장해 하는 고은서의 말에 약간 어리둥절하기 했으나 현재 상황 그대로 말했다.“MQ는 정상으로 운영되고 있어. 은서야, 그건 왜 갑자기 묻는 거야? 어디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어?”성아연이 저지른 세무 사건 때문에 유성준도 덩달아 긴장되었다.“아니에요. 그저 생각나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오빠, 요즘 MQ에 좀 더 많이 신경 써주세요. 삼촌 일이 좀 많이 복잡할 것 같아서요.”고은서가 유성준에게 부탁했다.“걱정하지마.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요즘 본가에 가지 않았다며?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 거야? 몸도 챙겨가면서 해.”고은서는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에 관해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필경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고은서가 이어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안에 있던 오미나는 머뭇거리다가 끝내는 문을 열어줬다.문이 열리자 삼십 대 좌우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고은서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오버사이즈 옷을 입고 있었고 단은숙과 비겼을 때 외모가 너무 눈에 띄게 출중하진 않았지만 아주 아련한 상을 하고 있었다.또 단은숙처럼 기가 세가 총명해 보이진 않았으나 연약하면서 강인한 아주 전통적인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엔 아직도 손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고은서와 고은혜를 보고도 욕설을 퍼붓거나 냉대하는 대신 겁에 질린 듯 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제야 왜 고국성이 이 여자한테만 무방비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너무 공격성이 없는 외모 때문에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고국성과 어울리는 면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은서가 오미나를 관찰하고 있을 때 고은혜도 똑같이 그 여자를 관찰하고 있었다.방금 집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지금 자신의 엄마보다 훨씬 젊고 기품이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당장이라도 덮쳐들어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그녀의 분노를 느낀 오미나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쌌다.덕분에 고은혜의 분노가 세게 들끓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고은서가 진정하라고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오미나 씨,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고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미나는 두 사람을 힐끔 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했다.“들어오세요.”고은서는 소파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오미나 씨, 우선 우리 삼촌을 대신해 사과드리죠. 어떻든 이 일은 우리 삼촌 책임이니까요.”여자는 전혀 꿀리지 않고 답했다.“국성 씨 탓이 아니에요. 누구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치 못했으니까요.”“예상치 못한 일인 걸 알면 우리 아빠랑 깨끗하게 끝냈어야죠. 왜 아이로 우리 아빠를 협박하는 건데요!”고은혜가 분
차가 본선으로 진입한 지 얼마 되지 갑자기 강하게 흔들리더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뒤에서 고은서의 차를 박았다.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순간 얼마 전에 민시후와 함께 겪었던 교통사고가 떠올랐다.‘이번에도 누가 날 해치려고 일부러 내 차를 박은 건가?’공포에 휩싸인 고은서는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고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언니?”고은혜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보면서 물었다.“왜 그래? 밖에 지금 누가 창을 두드리고 있어.”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차창 밖을 내다보니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남성 한 명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고은서는 떨리는 손을 애써 공제하며 차창을 내렸다.중년남성은 먼저 사과하고 이어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를 피하려다가 핸들을 급하게 돌리는 바람에 실수로 고은서의 차를 박았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을 보태었다.아직 경각심이 풀리지 않은 고은서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중년남성한테 나중에 배상금액이 나오면 연락하겠다고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길 곳곳마다 감시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에 중년남성이 이후에 책임을 회피하려고 해도 불가능했기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중년남성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연락처를 건네주면서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아직도 긴장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고은서는 백미러를 통해 상대 차량이 시동을 거는 걸 보고 있었다.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차가 고은서의 차 옆에 멈춰 섰다.이내 기사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아가씨, 우리 대표님께서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십니다.”고개를 돌려보니 뒷좌석에는 아주 익숙한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송민준이었다.목적지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금방 일을 꺼내고 나오는 길인지 그는 아주 깔끔하게 블랙 정장과 흰색 셔츠를 차려입고 있었다.송민준도 그녀를 보고 약간 의아해했다.그는 이내 온화한 미소를 띠고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 씨, 이렇게
송민준 말처럼 차가 고장 났기에 계속 몰았다가 불의의 사고라도 날까 봐 겁이 난 동시에 송민준한테 할 말도 있었는지라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의 차에 올랐다.그녀가 차에 오른 후 옆자리에 올랐다.아직 서먹한 탓인지 꽤 멀리 떨어져 앉았다고 해도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슬쩍 차창 쪽으로 붙어 앉았다.반면 송민준은 아주 태연해 보였다.“죄송해요, 은서 씨. 기사님 때문에 은서 씨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네요.”“누구도 사고가 날 거라고 예상치 못했잖아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고은서가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곧 저녁 시간인데 제가 사과의 의미로 밥 한 끼 사드려도 될까요?”송민준이 손목시계를 보면서 말했다.확실히 곧 저녁 시간이기도 했고 또 차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에 고은서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송민준은 고은서의 음식 습관에 관해 물은 후 이내 기사에게 맵기로 유명한 중식집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고은서는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민준 씨가 매운 음식을 안 좋아하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평소에도 엄청 담백하게 드시잖아요.”곽승재랑 똑같았는데 그는 생신한 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았고 또 조금이라도 양념 냄새가 심하면 쳐다보지도 않았다.송민아도 매운 음식을 별로 즐겨 먹지 않는데 송민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아마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 걸 거예요.”송민준이 웃으면서 답했다.그러나 이내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고은서는 송민아를 통해 두 사람이 배다른 남매라는 걸 들은 바가 있었는데 아마 갑자기 어머니 얘기에 좋지 일이 떠오른 듯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의 개인적인 사정까지 캐묻는 사람이 아니었다.“민준 씨, 이만 들어가죠.”송민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은서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이름난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한 후 웨이터는 나가고 룸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고은서는 송민준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민준 씨, 전에 민아를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