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의 차갑고 결연한 표정을 본 백유미는 순간 불안해졌다.‘어느 부분에서 문제라도 생긴 건가? 고은서는 원지훈이 직접 T국으로 데려온 거고 프로젝트도 확실히 존재하는 거여서 내가 T국에 온 것도 아주 마땅한 일일 텐데. 심지어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도 이미 죽었는데 곽승재는 왜 자꾸 이 모든 게 다 내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면 고은서의 말이라면 이젠 굳게 믿는다는 건가?’백유미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있을 때 곽승재는 폰을 꺼내 녹음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T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고은서한테 들켜서는 안 돼. 이번 일까지 망치면 너랑 네 엄마 진짜 감방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다름 아닌 그녀와 원지훈의 대화 내용이었다.백유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등골이 오싹해 나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이건 어디서 난 거야... 누군가 날 모함하려고 하는 거야! 이거 합성한 거야. 승재야, 다시 한번 조사해봐. 난 억울하다고!”백유미가 소리쳤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른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그녀가 T국에 있는 사람과 협상한 내용부터 그녀가 짠 상세한 계획까지 다 녹음되어 있었다.그녀의 섬뜩한 목소리가 병실에서 유난히 잘 들렸다.“똑똑히 들었어? 다신 한 번 더 재생해줄까?”곽승재가 물었다.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진 그녀는 더는 새로운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승재야, 난... 난 그저 은서 씨를 간단하게 겁만 주려고 했어. 진짜 해칠 생각은 없었어.”“온갖 방법으로 은서를 속이면서 T국으로 데려간 것도 모자라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찾아놓고서 그저 겁만 주려고 했다고?”곽승재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승재야,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백유미는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병상에서 일어나 곽승재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내가 거짓말을 했어. 난 지금도 널 사랑하고 있어. 네가 고은서랑 이혼하면 나
박지연과 육현석이 나간 후 고은서는 민시후가 계속 마음에 걸려 그의 병실로 갔다.하지만 병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박지연의 말대로 목숨 바쳐 자신을 구한 민시후의 마음이 가식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고은서에게 있어 이건 하나의 부담과도 같았다.그녀는 민시후가 단지 자신을 놀리게 재밌어서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집착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곽승재를 엿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단 한 번도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고은서?”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문밖에 있지?”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내가 밖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의사와 간호사들은 문을 지키는 습관이 없거든.”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그런데 안 들어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민시후가 무언갈 눈치챈 듯 물었다.고은서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병상 옆으로 다가가 되물었다.“분명히 심하게 다쳤으면서 왜 거짓말한 거야?”‘아니지. 그저 스치면서 상한 거라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심하게 다치지 않았으면 병상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민시후의 성격으로 내 병실로 찾아오지 않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았어. 적어도 곽승재보다는 심하지 않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이런 것까지 비기는 거야?’민시후는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고은서를 보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내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그리 쉽게 죽을 인간이 아니야. 너한테 오랫동안 붙어 다닐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헛소리 좀 그만 쳐!”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알았어. 안 말하면 될 거 아니야.”민시후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먹을 거 가져왔다며. 뭘 가져왔는데?”“이거.”고은서가 손에 있는 사과를 들어 보
민시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뭐가?”고은서는 고개를 들고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 거야?”“왜 갑자기 널 좋아하게 됐다니?”민시후는 거동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콩하고 치고 싶었다.“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고은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종일 껄렁대고 다니는데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어떻게 구분해.”“고은서, 너 진짜 한 대 맞을래?”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얼굴을 홱 돌렸다.고은서도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시후가 그녀를 도와 백유미한테 함정을 파줄 뿐만 아니라 집까지 사주고 또 서운도 함께 가주고 심지어 동물원까지 선물하는 걸 봐서는 그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다.그저 그녀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했을 뿐.고은서는 씩씩거리고 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조심스레 사과 한 조각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맛 좀 보지 않을래?”“싫어.”민시후가 그녀를 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고은서, 넌 확실히 너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력적이기는커녕 보는 사람 화날 정도로 멍청해. 내가 순간 눈이 멀고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널 좋아하게 되었나 봐. 됐지?”“...”고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넌 왜 자꾸 너 자신을 비하하는 거야? 대체 곽승재한테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그 정도로 내리까냐고.”민시후가 씩씩거리며 물었다.“어느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자꾸 그걸 부담으로 생각하는 건데?”민시후는 자책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
목소리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민시후는 아주 똑똑히 들었다.그는 육현석을 힐끗 째려보고는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떨며 말했다.“은서야, 방금 깎아준 사과 엄청 달고 맛있는데 한 조각만 더 먹여주면 안 될까?”나머지 세 사람은 충격적인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육현석은 진저리를 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민 대표님, 은서랑 얘기 더 나누세요. 저는 먼저 밥 먹으러 가볼게요.”박지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하고는 쌩하고 달아났다.병실 안에는 고은서와 민시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다음에는 연기하기 전에 나한테 미리 따로 신호 보내주면 안 될까?”고은서는 아직도 방금전의 놀라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곽승재 껌딱지 새끼를 가만두면 안 되지.”민시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한 시간 후, 육현석은 곽승재가 있는 병실로 찾아갔다.“형, 민시후 그 새끼 진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짝이 없어. 형수님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심지어 사과까지 먹여달라고 한다니까.”방금전 민시후의 모습을 떠올린 육현석은 씩씩거리며 말했다.“형수님을 바라보는 눈길은 또 어찌나 오글거리던지. 형수님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환자만 아니었으면 정말 달려가서 한 대 치는 건데.”그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그 많은 여자 중에서 왜 하필 형수님을 좋아한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육현석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형, 내 말 듣고 있어? 형은 화 안 나?”곽승재는 방금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육현석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하필 그 위급한 상황에 백유미를 구하려고 한 거야?”육현석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답답해 났다.“그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면서 힘겹게 형수님을 찾았으면 당시 상황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형수님 곁
곽승재는 육현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아침의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고은서는 정신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살이 빠져있었고 얼굴도 전과 다르게 핼쑥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가 알고 있는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다르게 꿈속의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냉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고은서는 이미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었다.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형, 왜 그래...”육현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지. 형 지금 눈시울이 빨개진 거야?’오랫동안 곽승재와 지내오면서 그의 이런 모습은 육현석도 처음이었다.마치 하나뿐인 동반자를 잃은 늑대처럼 처절하고 비참하면서도 후회막심해 보였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육현석이 위안했다.곽승재는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어제 백유미가 칼을 들고 자살하려고 할 때 유난히 당황스러웠어. 마치 백유미를 막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난 후로 그 이유를 알겠더라. 고은서도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 그땐 내가 미처 구하지 못했다는 걸.”“그러니까 지금 전생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거지? 방금전에 말한 일도 전생에 발생한 일이고.”육현석이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아주 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꿈에서 봤던 일들이 진짜 현실에서 발생한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이런 모습이 약간 적응되지 않았다.항상 강인한 모습만 보이며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없었던 곽승재가 갑자기 전생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형, 그저 꿈일 뿐이야. 너무 자책하지마.”육현석이 애써 그를 위안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형, 전생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돼?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저 악몽 꾼 걸 거야.”비록 고은서의 변화와 곽승재의 말들을 잘 되새겨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육현석 또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형수님처럼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살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자신의 주장도 과감하게 제기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은 일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데다가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왜 자살을 한다는 거야?”그러나 곽승재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육현석의 말대로 고은서는 자신을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절망을 느껴서였을까?’“형, 방금전에 백유미 찾아가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육현석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손에 있는 증거를 경찰 측에 넘기면 되잖아. 왜 굳이 직접 찾아간 거야?”곽승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증거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수상해.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뭐? 누군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건데?”육현석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그저 내 직감일뿐이야. 자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해.”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튿날, 고은서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약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지 머리가 계속 띄엄띄엄 어지러워 났다.“고은서!”그녀가 누워서 좀 더 쉬려고 할 때 박지연이 흥분해 하며 병실로 달려 들어왔다.“빅뉴스야!”반면 고은서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뭔데?”“백유미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지금 중환자실에 들어갔대.”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누가 때린 건데?”“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봐.”박지연이 웃으면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T국에 있는 백유미랑
박지연은 또 다른 한 가지 소식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이 원지훈 유품을 확인할 때 그의 폰에서 백유미가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한다.아마 원지훈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 동영상으로 백유미를 협박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동영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백유미한테는 기필코 아주 큰 타격이 될 것이다.범가온은 동영상을 확인한 후 아들의 죄를 덮어주기는커녕 사람을 찾아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했다고 한다.그 동영상은 업데이트되자마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고 여론이 점점 커져갔다.“조회수가 어마어마하대. 특히 외국 사이트는 심사가 별로 엄하지 않아서 벌써 T국 여러 사이트 실검에 올랐어. 비록 국내에서는 동영상 풀버전을 볼 수는 없지만 전파 속도가 하도 빨라서 이미 본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백유미 이번엔 진짜 끝장이야.”그러나 고은서는 마음이 별로 놓이지 않았다.백유미에겐 곽현수라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아니나 다를까, 오후쯤이 되어서 고은서는 휠체어에 앉은 백승엽과 곽현수가 T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비록 이미 GS그룹 경영권을 곽승재에게 물려주고 회사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만 T국 상류계층 사람들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은 여전했다.그 사람들과 곽현수의 참견으로 T국 경찰 측에서는 얼마 되지 않아 원지훈을 죽인 백유미의 행위가 정당방위라는 조사결과를 공포했다.왜냐하면 원지훈이 찍은 동영상에서 백유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경찰 측에서는 원지훈이 앙심을 품고 백유미를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칼을 들고 정당방위 하는 그녀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고 판단했다.고은서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녹음 파일과 증인이 다 있었기에 백유미는 거의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러나 백승엽이 이름 있는 정신병원 진단서를 내밀며 백유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박지연은 종래로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깊은 사고를 거친 후에야 결정을 내리는 타입이었다.그뿐만 아니라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고은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부했다.“적당히 해. 화내면서 눈물 흘리며 찾아오기 없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농담을 뒤로 한 채 마치 곽승재를 후회하게 만들 히든카드라도 손에 쥐고 있는 듯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섰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아침에 어머니한테 불리워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나마 나랑 함께 지연이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됐어. 당하고 나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뭐.’...박지연은 이내 곽승재가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어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탓인지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갈 때 그는 병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는 비서 주민기가 서 있었다.주민기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곽승재는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걸 먼저 예상이라도 한 건지 아주 덤덤한 표정을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박지연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박지연은 냉소를 흘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 대표님, 백유미가 은서한테 얼마 악독한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고작 정신병원 진단서 하나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가요?”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은서한테 백유미를 대가 치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이게 곽 대표님이 말한 그 대가인가요?”박지연이 계속 캐물었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해성으로 돌아간 후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예요.”“거참. 고작 정신병원 하나로 끝내겠단 말씀이세요?”박지연이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백유미가 아무런 병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저 핑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고 드러머의 타격은 천둥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가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끌어냈다.그 순간, 고은서는 완전히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 마치 처음 밴드를 만났을 때의 설렘이 되살아난 듯, 음악의 리듬에 맞춰 형광봉을 흔들며 몸을 흔들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여유 속에서 고은서는 그저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콘서트의 분위기보다 민시후를 더 즐겁게 한 건 고은서가 온전히 음악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은서가 주위 관중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민시후는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공연이 끝나자 고은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민시후가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배고프지? 간장게장 맛집이 있어. 한번 가볼래?”세 시간 가까이 노래를 따라 부른 고은서는 배가 고팠고 간장게장 얘기만 듣고도 침이 고여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사람들이 많아 출입이 불편할까 봐 민시후는 차를 경기장 뒤쪽의 한적한 주차장에 세웠다.밤하늘 아래, 도시의 네온 불빛이 부드럽게 깜빡였고 오래된 수상한 SUV 한 대가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 그 차는 그림자 속에 숨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은서와 민시후가 차에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부신 차 불빛이 켜졌다.두 사람이 반응할 시간도 없이 SUV가 미친 듯이 그들에게 돌진해 왔다!빠른 엔진 소리에 공기까지 진동하는 듯했고 고은서가 피하려는 순간, 차는 이미 눈앞까지 다가왔다!“조심해!”민시후가 소리치며 고은서를 힘껏 옆으로 밀쳤다.고은서는 민시후의 힘에 밀려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민시후는 공중으로 떠오르다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민시후의 머리가 시멘트 기둥에 부딪혔다.“시후 씨!”고은서가 놀란 얼굴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하얀 후드티의 모자를 빨갛게 물들였다.그때, SUV의 차주는 도망치지 않고 후진한 뒤 다시 악셀을 힘껏 밟아 두 사람을 향해
민시후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다는 말에 고은서는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민시후는 오늘 좀 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흰색 후드티와 편안한 바지를 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고은서도 편안함을 위해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이거 커플 룩 아니야?”민시후의 장난에 고은서가 그를 흘겼다.“말이라도 못 하면.”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근처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은 후 해성 공연장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고은서가 어젯밤에 민시현이 그를 찾아간 일에 대해 묻자 민시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말했다.“전에 했던 얘기랑 똑같아. 내가 반응 없으니까 형도 지루해져서 그냥 갔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민시현은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고 민시후는 아마도 형한테 큰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민시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바꿀 수 없었고 민시후에게 자신에 대한 감정을 접으라고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곧 공연장에 도착했다.밴드의 팬층은 유명 가수들에 비해 적었지만 여전히 많은 젊은 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포스터를 들거나 형광봉을 흔들며 들떠 있었고 어떤 팬들은 얼굴에 밴드 이름까지 그려 넣었다. 모두 오늘 밤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형광봉을 보고 있던 민시후가 고은서에게 물었다.“우리도 저런 거 하나 살까?”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렇게 흥분되거나 설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좋아!”두 사람은 형광봉과 손목띠를 고른 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LED 미키 머리띠를 골라줬다.“이건 너무 유치하지 않아?”고은서가 질색하며 거절했지만 민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띠를 그녀의 머리에 씌워버렸다.“유치하긴, 내 눈엔 예쁜데!”“정말? 그럼 시후 씨가 한번 써볼래?”고은서가 머리띠를 그에게 건넸다.민시후는 당연히 써볼 생각이 없었고 고은서는 강제로 그에게 씌우려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웃으며 장난
퀸이 케이지를 할퀴자 고은서는 퀸을 안아 올려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돌볼 시간이 없으면 승연이에게 줘. 마침 심리 상담사가 승연이한테 온순한 반려동물을 키우라고 권했어.”“승연이한테는 다른 애를 선물할 거야. 퀸은 내 것이니까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곽승재가 내 것이라고 말할 때 묘하게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퀸을 다시 케이지 안에 넣으며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이야?”곽승재가 공연 티켓을 내밀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청풍 밴드 좋아한다면서? 내일 해성에서 공연이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보러 갈래?”그가 내민 티켓을 본 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씁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전생에서도 그녀는 청풍 밴드의 공연 티켓을 산 적이 있었다.당시 고은서는 백유미와 곽승재의 관계가 질투나 자주 울고 떼를 쓰며 곽승재를 다그쳤고 그로 인해 둘 사이는 점점 냉랭해졌다.청풍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할 때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곽승재를 보지 못해 몹시 그리워했다.마침 두 사람이 할머니 댁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생겨 그녀는 먼저 사과하며 공연을 함께 보러 가자고 제안했었다.전미자가 자리에 있어서일까, 곽승재는 예상과 달리 거절하지 않고 그날 밤 그녀와 함께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들뜬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공연 볼 준비에 열을 올리며 입을 옷을 골랐고 응원용 스티커와 도구도 샀으며 세심하게 물과 간식까지 준비했다.마침내 저녁이 되었고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회의가 있다며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그녀는 곽승재가 바쁘다는 것을 알았기에 신이 나서 먼저 공연장으로 향해 그를 기다렸다.저녁 6시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입장이 마감될 때까지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곽승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집으로
범가온은 원래 이기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아들을 잃고 희망이 사라진 그녀가 이제는 손자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미쳐 날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은서가 박지연에게 물었다.“백유미 지금 상태는 어때?”“유산도 했고 가위에 찔려서 과다 출혈로 응급실로 실려 갔어. 치료가 늦어지면 목숨도 위험할 거야. 백승엽이 곽승재한테 찾아가 백유미를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고 의사도 바꿔 달라고 부탁했는데 곽승재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대. 아마 곽승재 아버지한테 가서도 부탁하겠지. 그쪽에서 신경 써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곽현수는 백유미가 자기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적이 있으니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게다가 백승엽과의 오랜 신뢰 관계도 있으니 백유미가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아마 백유미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박지연과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민시후는 백유미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백유미가 비참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기에 그는 따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대신 그는 고은서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너 전에 청풍이라는 밴드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 그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한데. 같이 보러 가자.”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형 만나야 하잖아. 내일도 나랑 연락할 수 있을까?”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형이라도 나를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어. 맨날 상사처럼 나한테 훈계질이야. 듣기 싫어 죽겠어. 그러니까 그냥 내일 저녁 같이 밥 먹고 공연 보러 가는 걸로 하자.”“네 형은 더더욱 내가 너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확신하겠네.”“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민시후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을 빨리 인정하면 내 연애를 막아보겠다는 헛된 꿈도 빨리 포기하겠지.”“나 거절해도 돼?”“안 돼!”결국 고은서는 민시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한편으로는 민시후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
두 사람은 음식을 주문한 후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요리가 나오자 두 사람은 식사를 즐겼고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민시후가 입을 열었다.“이번 출장에서 유일 투자은행을 대신해 백씨 가문 산업에 있던 고객들과 접촉했어. 유일 투자은행이 가진 능력을 확인한 후 그쪽에서 협력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으니까 직원들에게 후속 조치를 하라고 하면 돼.”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순간 얼어붙었다.‘출장을 다녀온 게 나를 돕기 위해서였어?’“그냥 겸사겸사 진행한 거야. 미래 투자은행에도 진행할 프로젝트가 있었거든.”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그리고 백유미 말인데. 우리 쪽에서 한 의사를 찾아냈어. 그 사람이 당시 정신 감정이 조작된 거라고 증언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을 거야. 그러니까 이 증거는 당장 쓰지 말고 필요할 때 꺼내 써.”고은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왔다.“민시후, 고마워.”“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민시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겉으로 보면 내가 널 돕는 것 같지만 사실 나를 돕는 거야. 네가 돈을 많이 벌어야 나랑 제대로 연애할 생각이 들지.”고은서는 그런 민시후를 바라보았다.평소에 보내오는 시선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되지 않았는데 눈동자까지 반짝이며 말하는 그를 보자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그래도 고마워.”고은서가 말을 마치자 핸드폰이 울렸다.박지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박지연은 다른 도시에 다녀오느라 휴가를 냈었는데 요즘 그 휴가로 인한 당직을 서느라 바빴다.시간이 나도 육현석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렇게 연락 오는 일은 드물었다.“지연아, 무슨 일이야?”“은서야, 방금 육현석이 알려줬는데 백유미가 애를 지웠대!”박지연의 목소리가 컸던 탓에 옆에 있던 민시후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민시후와 시선을 마주한 고은서가 다시 박지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송민준은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두 형제를 바라보며 적절히 나서서 민시현을 말렸다.“형, 같은 가족끼리 싸우지 말고 시후랑 따로 시간 잡아서 얘기 나누시는 게 좋겠어요.”민시현도 지금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민시후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으로 갈게.”하지만 민시후는 그를 무시한 채 고은서의 손을 잡고 곧장 그들 앞을 지나쳤다.주차장으로 돌아와서도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괜히 기분만 잡쳤네. 멀쩡히 잘 있다가 저 두 사람을 만날 줄이야...”반면 고은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민씨 일가 사람들이 원래부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니 말이다.“저녁에 형이 찾아온다는데 제발 싸우지 좀 마. 네 형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잖아.”그녀는 오히려 민시후를 위로하듯 장난스럽게 말했다.“재벌 집 도련님이 주변에 수많은 훌륭한 여자들을 두고 굳이 곽승재의 전처를 좋아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반대했을걸?”“넌 왜 너를 그렇게 낮춰서 말해?”민시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날 낮추는 건 아니야. 다만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지. 난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신분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은서야, 그만해.”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 얘기는 수도 없이 했어. 넌 날 설득 못 해. 네가 날 덜 좋아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더 많이 좋아하면 되니까. 자, 밥 먹으러 가자.”가는 길에 민시후는 여시은을 떠봤던 결과를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 소득 없었어. 여시은이 곽승재를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여자들 직감이 그렇게 예리하다면서 너는 직감이 고장 난 거 아냐?”민시후가 놀리듯 말했다.고은서도 자신이 둔감해졌다고 느꼈다. 예전의 그녀라면 곽승재 주변에 작은 변화만 있어도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췄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그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마음뿐
노을의 황금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으며 물결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장난기가 발동한 고은서가 두 손을 벋어 저 멀리 호수 위의 부서진 다이아몬드 조각과 햇살을 한데 모아 손안에 담으려는 듯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차에서 내리던 민시후가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은서는 고풍스러운 회랑 위에 흰색 니트에 연한 색의 롱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가녀린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잡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저녁노을이 드리운 호수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주황빛 석양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물들여 그녀의 존재 자체가 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그 순간 민시후는 먼 훗날 이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여전히 설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민시후, 거기서 뭐 해?”앞쪽에서 들려온 고은서의 청아한 목소리에 민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미안, 늦었지.”“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은서야, 손을 뻗어서 잡은 게 뭐야? 나도 좀 나눠 줄래?”고은서는 민시후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아까 허공에 손을 뻗었던 모습을 떠올렸다.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눈을 흘겼다.“공기야. 줄까?”그러자 민시후는 두 손을 공손히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고은서는 어이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시후야, 은서 씨?”그 순간 회랑 너머에서 익숙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자 송민준의 옆에는 강한 위압감을 풍기는 민시현도 함께 있었다.그들 뒤로는 레스토랑 직원들과 비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고은서가 반응할 틈도 없이 민시후는 재빠르게 고은서를 등 뒤로 감쌌다.“여긴 무슨 일이야?”민시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레스토랑으로 예약할걸. 좋던 분위기 다 깨졌네.’민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민준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뜨라고 제스처를 보낸 뒤
서연정의 질문에 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어제 그 남자는 분명 서연정을 향해 호감을 보였고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 장면을 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죄송해요, 어머니.”서연정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넌 착한 아이니 나랑 승재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혹시 불필요한 오해로 갈등이 깊어질까 봐 말하지 않은 거겠지.”서연정이 말을 이었다.“어제 그 친구와는 꽤 오랜 인연이 있어. 예전에 Y 국에서 일했는데 최근에야 귀국했어.”서연정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 남자가 서연정 때문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눈치챘다.담담하면서도 온화한 서연정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그분 혹시 어머니 좋아하시나요?”서연정은 가볍게 웃었다.“우리 나이쯤 되면 좋아한다는 감정에 그리 열정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아. 그 사람은 젊을 때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오랜 세월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 왔어.”고은서는 순간 곽현수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또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묻고 싶었지만 고은서는 궁금증을 꾹 참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서연정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승재 아버지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어.”고은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단순한 오해나 제삼자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깊고 복잡한 문제 같았다.그때 곽승연이 다가오며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전시회 관람을 마치자 이미 오후였다.서연정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할 때 마침 고은서의 전화가 울렸다.민시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은서야, 나 출장 끝나고 돌아왔어.”민시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리고 네게 전할 소식이 하나 있어.”“무슨 소식인데?”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궁금하면 시간 내서 이 도련님이랑 밥이
그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담담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다음 날 일요일 아침 고은서는 서연정의 연락을 받았다.그녀는 해성에서 그림 전시회가 열리는데 곽승연을 데려가 보고 싶다며 함께 갈 시간이 있는지 물어왔다.서연정이 곽승연을 데리고 호원 저택으로 옮긴 이후로 고은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서연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여서 고은서는 함께 가기로 했다.고은서가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정과 곽승연은 이미 와 있었다.“언니!”오랜만에 만난 곽승연은 그녀를 보자 기뻐했다.“승연아, 어머니.”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언니!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인데 선물로 줄게요.”곽승연은 그림을 내밀었다.고은서가 받아 보니 그것은 지난번 본가에서 자신이 드럼을 치던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비록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당당한 그녀의 자태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고마워, 승연아. 정말 잘 그렸네. 너무 마음에 들어.”고은서는 그림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언니가 사줄게.”곽승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그냥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언니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승연아, 금방 좋아질 거야. 우리 들어가서 전시회 보자.”그림을 좋아하는 곽승연은 난해해 보이는 예술 작품도 깊이 빠져들어 감상했다.그녀가 몰입해서 감상하는 동안 고은서와 서연정은 휴게 공간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은서야, 승재 통해 보낸 캔들 잘 받았어. 고마워.”서연정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어.”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어머니, 방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두 사람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고은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은서야, 혹시 지난번 고양이 행사에 갔었어?”서연정이 갑자기 묻자 고은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