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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5화

작가: 류한나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5-01-09 19:00:00
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핵심을 찔렀다는 것을 눈치챈 고은서는 계속 차분한 말로 설득했다.

“같이 해외로 나왔으니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우리 둘을 같이 제거하면 백유미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백유미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백씨 가문 산업이 있지만 너는 애꿎은 목숨 하나 날리는 거지.”

고은서가 말을 이었다.

“정말 백 보 물러나서 백유미가 너를 살려준다고 해도 너는 평생 숨어지내야 할 텐데 어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어?”

원지훈은 사색에 잠겼다.

전에 내비치던 우월감과 경멸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고은서는 속으로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

“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야. 그러니 얼른 결정을 내려야 해.”

마침내 고개를 든 원지훈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백유미 말을 따르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이 있다고? 내가 너를 이런 곳에 데려왔는데 네가 날 용서해 줄 리가 있겠어?”

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가 나를 배신한 건 정말 화가 나. 앞으로도 널 신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나는 뻔뻔하게 널 괴롭힐 생각은 없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큰돈을 줄게. 그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비록 영광스러운 귀향은 아니겠지만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지금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고은서는 이어 원지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고향은 너에게 익숙한 곳이고 백씨 가문과는 어쨌든 친척 관계잖아.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백유미도 굳이 너희를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

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마음은 기울기 시작했다.

백유미의 잔혹함으로 보건대 고은서가 말한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 백유미를 배신한다면 죽을 길밖에 없겠지만 배신하지 않아도 좋은 날을 없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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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서가 몸을 홱 돌렸다.“누가 버리라고 했죠? 당장 주워요.”프런트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어차피 대표님은 볼 생각도 없을 텐데 굳이 헛수고할 필요 있어요? 그동안 챙겨온 물건도 다 버리라고 했거든요.”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하는 게 힘들까 봐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며, 옷이며,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마저 가져다주었다.게다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처럼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은 진심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꼴이라니.어떻게 고작 프런트 직원이 감히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냐는 말이다.고은서는 싸늘한 시선으로 프런트 직원을 노려보았다.“대표님이 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리죠? 얼른 챙기지 못해요?”여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알겠어요, 다시 챙기면 되잖아요. 목을 매서 겨우 대표님을 만난 주제에 어디서 사모님 행세를 하는 건지, 참.”“무슨 일이죠?”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내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의 비서 주민기가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주민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프리미엄 맞춤 정장 차림의 곽승재였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비록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지만 비주얼 자체가 워낙 훈훈한지라 오히려 남성미를 한층 더 부각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를 만날 때마다 고은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입도 벙긋하기 싫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주민기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잽싸게 대답하는 예전과 달리 고은서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곽승재가 인정한 아내가 아니었다.남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처세술에 불과했으니까.“무슨 일이지?”고은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곽승재는 프런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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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게인, 비긴   제6화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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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이제 네 차례야.”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어디 가!”고운서가 버럭 외쳤다.“사인 안 해?”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네가 꾸민 짓이지?”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고은서, 우리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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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핵심을 찔렀다는 것을 눈치챈 고은서는 계속 차분한 말로 설득했다.“같이 해외로 나왔으니 같은 사건에 휘말렸다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우리 둘을 같이 제거하면 백유미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백유미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백씨 가문 산업이 있지만 너는 애꿎은 목숨 하나 날리는 거지.”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정말 백 보 물러나서 백유미가 너를 살려준다고 해도 너는 평생 숨어지내야 할 텐데 어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그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어?”원지훈은 사색에 잠겼다.전에 내비치던 우월감과 경멸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야. 그러니 얼른 결정을 내려야 해.”마침내 고개를 든 원지훈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백유미 말을 따르지 않고도 살아남을 길이 있다고? 내가 너를 이런 곳에 데려왔는데 네가 날 용서해 줄 리가 있겠어?”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네가 나를 배신한 건 정말 화가 나. 앞으로도 널 신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나는 뻔뻔하게 널 괴롭힐 생각은 없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큰돈을 줄게. 그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비록 영광스러운 귀향은 아니겠지만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 지금 상황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고은서는 이어 원지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고향은 너에게 익숙한 곳이고 백씨 가문과는 어쨌든 친척 관계잖아. 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백유미도 굳이 너희를 어떻게 하진 않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의 마음은 기울기 시작했다.백유미의 잔혹함으로 보건대 고은서가 말한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이번에 백유미를 배신한다면 죽을 길밖에 없겠지만 배신하지 않아도 좋은 날을 없을 거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은

  • 어게인, 비긴   제644화

    “백유미가 제가 누나한테 돈을 받고 누나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서 저를 한바탕 때렸어요. 갈비뼈 두 대가 부러져서 지금도 기침하면 아파요. 그리고 엄마도 매일 개장 안에 갇혀 몇 시간 동안 무릎 꿇는 자세를 강요받고 있어요. 시간을 못 채우면 풀어주지도 않는데 제가 백유미 말을 안 들을 수 있겠어요?”고은서는 많이 놀랐다.‘역시 백유미는 원지훈이 나한테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하지만 고은서는 백유미가 원지훈 모자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한 수를 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원지훈에게 반박할 힘이 없다는 사실도,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혀 티 내지 않은 것도 충격적이었다.“전에 고은혜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것도 백유미가 시킨 거야?”고은서가 묻자 원지훈은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의 의도를 솔직히 얘기했다.“그건 제 생각이었죠. 지난번 대원에서 발생해야 했던 일을 현실화시킨다면 백유미가 저를 그냥 놔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정말 짐승만도 못한 놈이야.’지금 이 일로 화를 낼 겨를도 없었던 고은서가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이렇게 큰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왜 나한테 말해서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지 않았어?”“절 위해 해결책을 찾는다고요? 누나가 원하는 건 제가 더 망가지는 거 아니에요?”원지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제가 모를 것 같아요? 누나는 속으로 저를 무시하며 저를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잖아요.”원지훈이 말하는 무시는 고은혜와 관련된 일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했다.고은서가 답했다.“네가 은혜랑 잘되길 원하지 않았던 건 맞아. 우리 사이도 결국 이익 관계니까. 하지만 이익으로 묶여 있기에 넌 더 나를 믿어야 했어!”원지훈이 갑자기 폭발하며 소리쳤다.“믿지 않아! 그 누구도 믿지 않아! 너희 중 누구도 좋은 사람은 없어! 고은서! 내가 들어 온 것도 너에게 백유미가 곧 도착할 거라고 알려주기 위해서야. 오늘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 그리고 누구도 널 구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 어게인, 비긴   제643화

    “괜한 힘 빼지 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원지훈이 냉소적으로 말했다.“아까 물 줬는데 안 마신 건 누나 탓이죠.”온몸에 힘이 빠진 고은서는 머리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가 보면 알겠죠.”원지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차 뒷좌석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채 마지막 힘을 다해 가방 속 핸드폰을 더듬어 찾았다.그리고 그녀는 힘껏 옆면에 있는 긴급 전화 버튼을 눌렀다.이는 경호원들과 미리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연락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고은서는 어지럽고 무기력한 상태에서도 원지훈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그녀는 혀를 꽉 깨물며 간신히 의식을 유지했다.희미해진 시야로 화면을 바라보며 SOS 번호를 누르려 했으나 제대로 눌렀는지 통화가 연결됐는지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차는 계속 질주했고 고은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혀를 깨물 힘마저 사라진 그녀는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고은서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허름한 창고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주위는 매우 더러웠고 악취마저 풍겼다.고은서는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로 나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밖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현지어를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간혹 한국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원지훈 혼자서 T 국 사람들과 이런 일을 꾸밀 수는 없어. 백유미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게 분명해. 온갖 방법으로 해외로 데려온 이유는 국내에서는 쉽게 구해질 것 같아서인가? 의식을 잃은 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경호원들은 위험을 눈치챘나? 민시후도 T 국에 온다고 했는데 호텔에 도착하지 않은 걸 알게 되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채겠지?’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얼마간 안심이 되었다.몸을 움직여보니 체력이 조금 돌아왔음을 느꼈지만 손발이 꽉 묶여 있던 터라 뼛속까지 욱신거리며 통증이 심했다.겨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려던 순간 침대 옆의 낡은 서랍장을 건드렸다

  • 어게인, 비긴   제642화

    원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에요. 비즈니스석이 처음이라서 조금 어색하네요.”비행기에서 내리니 시차 때문에 T 국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고은서가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민시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원지훈에게 먼저 가서 차를 잡으라고 한 뒤 고은서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고은서, 어디 갔어? 송민아 말로는 이틀 동안 회사에 안 나온다던데?”고은서는 T 국에서 볼일이 있다고 솔직히 알렸다.“백씨 가문과 관련된 그 프로젝트?”민시후는 바로 눈치챘다.고은서는 부정하지 않았다.“담당자랑 만나서 얘기 나누기로 했어.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게.”“호텔 위치 보내. 조금 있다 갈게.”“네가 와서 뭐 하게?”“다른 나라에서 너랑 나 둘뿐인데 내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그럼 주소는 안 보낼래.”“고은서, 지금 누구를 경계하는 거야? T 국에서 가서 특색 요리 좀 먹으려고 그런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십중팔구 그녀가 혼자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해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게다가 그가 오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민시후의 끈질긴 전화 공세를 막기 위해 고은서는 결국 호텔 이름을 그에게 보냈다.[방 하나 더 예약해 줄게.][고은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속으로는 나랑 같은 방 쓰고 싶었던 거야?][자꾸 그러면 차단할 거야.][알았어. 알았어. 내가 졌어.]“은서 누나. 우리 차례예요. 가시죠.”원지훈이 앞쪽의 택시를 가리키며 말했다.경호원들이 고은서에게 비행기에서 내려 몰래 뒤따라오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고은서는 문자를 확인한 후 핸드폰을 넣고 원지훈과 함께 택시에 탔다.운전기사는 현지인인 듯했다. 그는 서툰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했다.고은서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원지훈은 비행기에서의 긴장이 사라진 듯 몇 가지 지역 특산품에 관해 물어봤다.“누나, 목마르지 않아요? 물 좀 마실래요?”원지훈은 말하며 개봉하지 않은 생수병을 건넸지만 고은서는 받지 않았다.“괜찮아.”원지훈은

  • 어게인, 비긴   제641화

    고준석이 입을 열었다.“우리 집에 와서 잠깐 바둑을 둘 때 네가 할머니 보러 가서 브로치를 놓고 왔다면서 마침 전해주더라구나.”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곽승재 정말 대단하네. 오전에 할머니 댁에 보낸 브로치를 오후에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져오다니. 조금 전 골동품 가게에서 마주쳤을 때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으면서...’“은서야, 왜 말이 없어? 또 할아버지가 승재랑 만났다고 화내는 거야?”고준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에도 말했지만 너희가 이혼했다 뿐이지 원수가 된 건 아니잖니. 날 보러 왔다는데 그냥 내쫓을 수는 없잖아.”고준석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고은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애교 몇 마디로 웃어넘기고는 전화를 끊었다.잠시 고민한 고은서는 굳이 곽승재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브로치를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다시 경매에 올려서 돈으로 송금해 주면 되지 뭐.’...다음 날, 고은서는 원지훈의 연락을 받았다.원지훈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방이 최후통첩했어요. 이틀 안에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네요.”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면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어제 민시후는 원지훈에게서 특별히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백유미는 최근 판주 투자은행에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어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고은서는 원지훈과 함께 T 국에 있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은서 누나, 조금 전에 알아봤는데 점심 항공편이 있대요. 그걸로 가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원지훈이 말했다.“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건 어려울 것 같네. 신분증 보내주면 다 처리하고 나서 항공편 알려줄게.”‘원지훈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혹시 클라이언트랑 음모라도 꾸며서 나한테 사기 치는 거라면 미리 충분한 대비를 해야 해. 출장 일정도 완전히 맡길 수는 없어. 안 그래도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비행기 티켓까지 나한테 맡기지 않는 건 뭔가를

  • 어게인, 비긴   제640화

    고은서의 특유한 향기가 은은하게 밀려왔는데 곽승재는 그녀를 차로 강제로 안고 가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참았다.그는 그녀에게 누구한테 주는 선물이기에 직접 쇼핑몰까지 와서 선택하는 거냐고 캐묻고 싶었다.‘방금전 반응을 보아서는 고국성 생일조차 까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고국성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아닐 테고. 그런데 왜 저렇게 쉽게 다른 사람한테 선물을 사주는 거야. 정장을 선물한 것도 모자라 이젠 남자 팔찌까지 선물하려는 거야? 아까 직원이 분명히 나한테도 어울린다고 했는데 왜 나한테는 안 사주는 거야?’...민시후는 고은서의 팔찌를 받자마자 팔에 차고 이리저리 보면서 좋아했다.“보는 눈이 좀 있네.”그의 하얗고 가늘지만 힘 있어 보이는 팔목에 확실히 잘 어울렸다.“직원이 추천해준 거야. 내가 직접 고른 게 아니야.”고은서가 이실직고했다.“고은서, 넌 네가 직접 고른 거라고 거짓말이라도 좀 하면 안 되겠냐?”민시후가 불쾌해하며 말했다.“양심을 가책을 느껴서 못하겠어.”“...”민시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런 사소한 일로 깊게 따지고 싶지 않았던 그는 화제를 바꾸면서 그녀에게 원지훈에 관해 조사한 결과를 알려줬다.“요즘 매일 정상적으로 출퇴근하고 있어서 별로 수상한 점은 못 찾았어. 그런데 얼마 전에 얼굴이랑 손이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다른 사람이랑 싸웠다고 하던데.”민시후는 백씨 가문 기업의 주주가 때린 거라고 설명을 보태었다.두 사람이 시비가 붙었는데 주주가 원래부터 원지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데 하필 그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낙하산이라고 욕하는 바람에 원지훈이 참지 못하고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고 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먹을 먼저 휘두른 것 치고는 도로 상대방한테 얻어맞기만 했다고 한다.백유미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백씨 가문 기업에서 쫓겨났을 것이라고 민시후가 말했다.고은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얼마 전에 전화하면서 긴장해 했던 게 이 일 때문이었던 거야?’“한 가지 더 알려줄까? 곽현수가 최근에 주주들

  • 어게인, 비긴   제639화

    익숙한 설송향이 고은서의 코끝을 간지럽혔는데 그녀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 향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어제 곽씨 가문 본가에서 만난 것 외에는 두 주일 동안 곽승재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은서가 그가 더는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곽 대표님, 아까 볼 일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여긴 무슨 일로?”여시은이 의외라는 듯 곽승재에게 물었다.“손님, 혹시 남자친구분이세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남주보다 더 잘생기셨어요.”젊은 직원이 부러운 눈길로 여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염주 팔찌가 손님 남자친구분과 엄청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하나 사시지 그래요?”그 말을 들은 여시은은 황급히 팔찌를 내려놓으면서 설명했다.“어우,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제 남자친구 아니에요. 저분이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제 옆에 서 있는 이분이라고요.”직원은 그제야 곽승재가 가게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곽승재의 외모에 푹 빠진 직원일지라도 이내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다.그녀는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곽 대표님, 은서 씨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내리신 거죠. 그럼 저는 이만 자리 비켜주면서 쇼핑하러 가볼게요.”여시은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은서 씨, 제가 재촉하는 게 아니라 퍼퓸 완성품이 너무 기대돼요. 그러니까 빠른 시간 내에 부탁할게요.”여시은이 나가면서 말을 보태었다.“알겠어요. 조심히 가세요.”그녀가 나간 후 고은서는 가게 문 쪽에 서 있는 곽승재랑 눈이 마주쳤다.“마음에 드는 거 있어? 내가 사줄게.”곽승재가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필요 없어.”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면서 직원에게 말했다.“이 팔찌 포장해주세요.”직원은 팔찌를 포장해주면서 곽승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손님, 저분한테도 하나 선물하시는 건 어때요? 진짜 어울리실 것 같은데.”직원이 참지

  • 어게인, 비긴   제638화

    온승준은 점점 멀어지는 육현석의 차를 한참 바라보다가 자신의 차에 올랐다.그는 종래로 감정에 목을 매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혼하고서도 평소처럼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얼마 전에 조수연이 했던 좋아해서 결혼했겠니라는 말을 들은 후로 시도 때도 없이 박지연이 생각났다.보고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아무리 학술 연구에 몰두한다고 해도 요동치는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그는 이레 병원으로 이직만 하면 박지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현실은 박지연이 종일 그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는 것이었다.심지어 그와 통화할 때도 낯선 사람과 통화하듯이 아주 무덤덤해 보였다.그녀와 통화하면 조금이나마 진정되면서 답답하던 마음이 나아질까 했는데 통화하고 나니 더 심란해졌다....고은서는 민시후의 선물을 사주기 위해 해성에 있는 한 쇼핑몰로 갔다.어제 약속한 일을 오늘 아침부터 준비되었냐고 조르는 바람에 없던 일로 치려고 해도 칠 수가 없었다.그러나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아도 민시후에게 무슨 선물이 어울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예전에 곽승재 선물을 고를 때는 항상 제일 비싸고 또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물건들로 선택했다. 예를 들면 가죽 벨트, 넥타이, 커프스단추 등을 선물했었는데 그가 싫다고 해도 그녀는 전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선물했다.하지만 민시후한테 똑같은 선물을 줄 수는 없는 법.고은서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쇼핑몰 맞은 편에 있는 력셔리 골동품 가게로 들어갔다.“손님,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실까요?”젊은 직원 한 명이 다가와서 물었다.“친구한테 줄 선물을 찾고 있는데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남자예요.”“친구분 나이랑 직업이 어떻게 되나요? 어떤 성격의 소유자신가요?”직원은 자신의 물음에 어리둥절해 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설명을 보탰다.“친구분 성향에 맞춰서 선물을 추천해드리려고 물어본 거예요.”“얼굴은 엄청 잘생겼고 성격이라면 아마 종일 껄렁거리며 다니는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고

  • 어게인, 비긴   제637화

    박지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온승준도 이내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이혼하기 전에는 박지연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이미 이혼한 마당에 무슨 자격으로 묻는단 말인가.“미안. 같이 밥 안 먹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진심이야. 그러니까 밥 한 끼쯤은 괜찮지 않아?”온승준이 사과하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그러나 그와 달리 박지연은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당신 부모님이 알게 되면 또 나를 찾아와서 난동을 부릴지도 몰라. 그리고 우리 이미 이혼한 사이야. 난 더는 당신이랑 엮이기 싫어.”“지연아...”“홧김에 하는 말이 아니야. 병원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사이었는지 몰라. 그러니까 오늘 점심때 같은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게 주의해줬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그저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지나가면 돼. 오늘처럼 귀찮게 굴지 말고.”박지연은 말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온승준은 폰을 든 채 한참 동안 선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전에는 일부러 박지연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당시 마침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고 또 세미나에 참가하러 가는 길이어서 별것 아닌 일로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먼저 볼일을 보러 갔던 거였다.‘다른 사람한테 거절당하고 무시당한 느낌이 이런 거구나.’박지연은 오늘 육현석과 함께 저녁밥을 먹기로 약속했다.그녀가 이혼한 후로 육현석은 오히려 꾸준히 사업에 몰두하면서 그녀 앞에 전처럼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매일 그녀한테 계약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곤 했다.하지만 그녀는 종일 껄렁대며 친구들이랑 놀러만 다니던 부잣집 도련님이 왜 갑자기 사업에 이렇게 몰두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나 예전부터 사업에 엄청 관심이 많았거든! 못 믿겠으면 승재 형한테 물어봐. 전에 내가 직접 도맡아서 계획서를 작성했던 LH 그룹 프로젝트도 있어.”반면 육현석은 그녀의 물음에 항상 이런 신뢰도가 일도 없는 답을 하곤 했다.그렇다고 박지연이 곽승재를 직접 찾아가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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