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519화

작가: 류한나
박지연의 말을 들은 온승준은 순간 멈칫했다.

“지연아, 나 오늘 야근 안 해도 되니까 저녁에 만나서 잘 얘기해보자.”

온승준이 이렇게 차근차근 그녀를 달래려고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는 항상 바쁘다는 이유로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는 게 일쑤였다.

지금 먼저 얘기를 나누자고 한 것만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크게 양보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지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된 친구로서 고은서는 이내 박지연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고 그녀의 폰을 빼앗아 전화 너머에 있는 온승준을 향해 소리쳤다.

“더는 그쪽이랑 할 말이 없거든요. 그리고 지연이 이미 저랑 살기로 했으니까 그쪽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을 거예요.”

고은서는 씩씩거리며 온승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는 박지연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지연아,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전에 네 시어머니가 너한테 했던 말들을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괴롭힐 당할 때 온승준이 뭐 하고 있었는지도 잘 돌이켜봐.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평생 그 집 사람들 괴롭힘을 받으며 살 생각이야?”

“아니.”

박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럼 더는 망설일 필요도 없잖아. 네가 아직도 온승준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말로만 이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적어도 그 집안에서 마땅한 태도를 표해야 다시 고려해볼 거 아니야. 절대 온승준의 말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

고은서가 말을 보태었다.

사실 박지연은 자신을 대하는 시댁의 태도가 변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친부모님처럼 모시는 박지연과 달리 그들은 항상 그녀를 하녀 취급을 했다. 이번 일로 그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온승준의 마음속에는 항상 일이 먼저였고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뻐하든 슬퍼하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유혜린이 아니었더라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빨리 이혼하는 게 더 나아. 더 끌 필요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잠긴 챕터

관련 챕터

  • 어게인, 비긴   제520화

    “알겠어, 알겠어. 명심할 테니까 걱정하지마. 나 먼저 일하러 갈게.”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아침을 챙겨 먹고 ZY 그룹으로 갔다.송민아는 그녀가 출근하자마자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어제는 왜 출근하지 않았어요?”“볼 일이 좀 있어서요.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송민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머뭇머뭇 말했다.“어제 데이터 분석하는 거 가르쳐준다고 했잖아요.”‘아, 그 일 때문에 온 거였구나. 송민준이랑 비기면 완전 애네.’송민준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존재와 같았다.반면 송민아는 오만하기는 하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제때 꼬리를 내리는 본성은 착한 사람이었다.“전에는 회사에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분들 찾아가면 되잖아요.”송민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고집부렸다.“그분들한테 민폐 끼치기 싫어서 그래요. 난 딱 은서 씨만 못살게 굴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시후 오빠 마음을 함부로 빼앗으라고 했어요?”“진짜 제가 민시후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고은서가 되물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속마음을 들킨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일에 몰두하라면서요. 그래서 지금 배워달라고 직접 찾아까지 왔는데 왜 거절할 것처럼 그래요? 설마 일부러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거예요?”“아니요, 그럴 리가요. 일하겠다는데 전면적으로 지지해줘야죠. 나중에 자신의 사업을 가꿔나가는 게 남자한테 구애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어제 준 서류들은 다 봤어요? 투자할만한 프로젝트가 있던가요?”“모르겠어요. 저는 다 괜찮아 보이던데요.”송민아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계획서에는 다 프로젝트의 우점과 프로젝트를 칭찬하는 말들만 있었기에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를 구분하기 어려웠다.고은서도 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비웃는 대신 간단한 데이터 분석법을 알려주면서 연관된 전공 책들까지 추천해

  • 어게인, 비긴   제521화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성아연의 제안에 고은서는 꽤나 당황스러웠다.지난번 경찰서에서 성아연은 고은서를 지독히 미워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민아야, 너는 먼저 회사로 돌아가. 나는 잠시 볼일 있어.”고은서가 송민아에게 말했다.송민아가 물었다.“급한 일이야? 같이 가줄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래. 맞아. 이제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니 하나만 물어봐도 돼?”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뭔데?”“당시 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거야?”고은서는 조금 의아했다.병원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호텔로 돌아오기까지 기껏해야 두 시간 남짓이었다.하지만 송민아가 어떻게 그 소식을 알게 된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그 말을 듣고 송민아는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누가 나한테 문자로 네가 병원 산부인과에 갔다고 알려줬어. 반신반의하면서 사람을 시켜 알아봤는데 정말 병원에 간 게 맞더라고. 임신 3주라는 사실까지 확인돼서 화도 나고 무서워서 호텔로 찾아가서 아이를 지우라고 협박했지.”말을 끝낼 무렵 송민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비록 진숙희가 너를 해친 게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집에 가서 큰 소리를 지르며 화냈는데 아주머니가 내 편을 들어줫어. 하지만 난 절대로 아주머니가 너를 직접 해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고은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고 물었다.“누가 너한테 그 문자를 보냈는지 알아봤어? 번호는 있어?”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번호는 있는데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없는 번호라고 되어있더라고.”“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그 문자를 보냈는지는 의심해 보지 않았어?”“시후 오빠를 좋아하는 어떤 여자가 산부인과에서 너를 보고 나한테 알린 것 같아. 시후 오빠를 좋아하는 여자가 워낙 많아서 그들 중 몇몇은 다른 여자들을 몰아내려고 나를 이용하거든.”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너 말고는 나랑 민시후 사이를 오해한 사

  • 어게인, 비긴   제522화

    “특별히 날 보자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야?”고은서가 싸늘하게 물었다.성아연이 답했다.“엄마가 꽃에 물을 주다가 실수로 넘어져서 머리를 다쳐서 지금 병원에 있어. 병원에 가서 돌봐주고 싶지만 지금은 나갈 수가 없어. 고소를 취하해 주면 안 될까? 경제적인 보상도 좋고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고은서가 콧방귀를 뀌었다.“성아연, 나한테 이런 부탁 한다는 게 우습다고는 생각 안 해?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내가 용서할 것 같아?”그 말을 들은 성아연이 뭔가를 떠올린 몸을 떨고는 다시 간청했다.“은서야. 내가 잘못했어! 이번 한 번만 나를 용서해 줘. 앞으로 절대 너를 건드리지 않을게. 네 말만 들을게. 네가 무릎 꿇으라면 꿇고 발등에 키스하라고 하면 그것도 할게.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난 부하도 내 말만 듣는 사람도 필요 없어. 할 말이 이것뿐이라면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했다.“고은서!”성아연이 황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나도 너나 고씨 가문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뭐가 어쩔 수 없었는데? 백유미가 칼을 네 목에 들이대기라도 했어?”고은서가 싸늘하게 되물었다.성아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은서야, 도와줘. 부탁이야. 정말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성아연, 내가 널 도와줄 리 없잖아. 네가 백유미와 손을 잡기로 했으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든지 아니면 문제가 생기면 그 여자를 찾아가야지. 내가 아무리 만만해 보인다고 해도 네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말을 마친 고은서는 인내심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백유미가 우리 아빠의 불법 행위 증거를 가지고 있어.”성아연이 크게 외쳤다.고은서는 걸음을 멈추고 성아연을 돌아보았다.성아연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말을 이었다.“아빠가 다른 사람이 금융 업계에서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친구들과 의논해 업종을 바꿨는데 잘되지 않았어.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의 말만 듣

  • 어게인, 비긴   제523화

    “은서야, 제발 날 좀 도와줘.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을게.”성아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빌었다.그녀는 미세하게 몸을 떨었고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은서야, 널 배신하고 사람을 시켜 널 납치하게 한 건 정말 내 잘못이야.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마지막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정말 맹세할게!”고은서는 성아연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대체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어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야?”‘백유미는 아닐 거야. 백유미가 협박했다면 성아연이 두 사람의 관계까지 나한테 털어놓지는 않았겠지.’그 말을 들은 성아연은 더는 숨길 수 없다는 듯 울면서 말했다“며칠 전에 곽승재가 사람을 보내 나한테 경고했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그리고 단 이틀 만에 엄마가 다쳤어.”“그래서 네 말은 곽승재가 시켰다는 거야?”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성아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나한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어. 하지만 곽승재가 그러는 게 널 위해서라는 건 알아.”성아연은 고은서에 대한 곽승재의 태도가 변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몇 년 전 일을 생각하면 성아연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지난번에 곽승재가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말했을 때도 반신반의했다.좋아한다면서 몇 년 동안 냉담하게 굴고 심지어 결혼하고도 따로 방을 썼기 때문이다.하지만 성아연의 아버지가 아무리 인맥을 동원해도 그녀를 빼내지 못한다고 했을 때, 또한 이번 판결로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제야 곽승재가 정말 화났음을 알 수 있었다.오늘 어머니의 예상치 못한 사고를 듣고 성아연은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곽승재가 고은서를 대신해 처벌을 내리고 있음을 말이다.그녀에게 제일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는 것을 말이다.그래서 성아연은 고은서에게 빌 수밖에 없었다.고은서가 얘기해야 곽승재가 그만둘 것 같았다.“은서야,

  • 어게인, 비긴   제524화

    “그리고 고씨 가문은 너희들 때문에 치명타를 입을 뻔했어!”고은서가 싸늘하게 일갈했다.“네 아빠에게 불법 행위를 자수하라고 설득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너희가 관용을 받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우리더러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성아연이 울며 외쳤다.“집안이 망하면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고은서가 답했다.“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 처음에 그 길을 선택했을 때부터 이런 결과도 예상했어야지.”“무슨 대가! 무슨 결과!”성아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서! 여기서 잘난 척하며 설교하지 마. 곽승재가 아니었으면 너희 고씨 가문이 뭐라도 될 것 같아? 지난 2년 동안 너희 가문에서 곽승재 덕을 봤다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 네가 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척해? 우리는 너보다 운이 나빴을 뿐이야!”성아연의 독설을 들으면서도 고은서는 화내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웃으며 답했다.“운도 내 시력이야. 너도 반성해 봐. 왜 하늘은 너에게 그 운을 주지 않았을지 말이야.”“너!”“성아연, 앞으로 날 찾지 마. 다시 널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마친 고은서가 자리를 떴다.성아연은 뒤에서 소리 질렀다.“고은서! 이 못된 계집애야! 네가 곽승재를 부추켜 엄마를 괴롭게 만들었으니 너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했다.“증거 있으면 신고해. 경찰은 악행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니 나한테 죄가 있다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겠지.”“건방지게 굴지 마! 내가 널 어쩔 수 없다고 해서 백유미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성아연은 여전히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너는 나보다 천 배, 만 배 더 비참해질 거야! 하하하!”누군가 들어와 성아연을 제지했고 고은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경찰서를 나섰다.밖에는 여전히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고은서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쓸쓸함이 스며들었다.10년간의 우정이 한낱 거짓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것이다.차

  • 어게인, 비긴   제525화

    회의실 밖으로 나온 곽승재가 연락을 받으며 담담히 물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어딘가 설렘이 묻어 있었다.고은서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그녀와 한 번 만나기보다 어려웠다.그런 사람에게 연락을 받았으니 곽승재의 기분은 좋지 않을 리 없었다.“성아연한테 사람을 보냈어?”전화 너머에서 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만났어?”“그래. 엄마가 다쳤다던데 그것도 당신이 한 일이야?”곽승재가 차분히 답했다.“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업가야. 대화하러 사람을 보낸 건 맞지만 그 외의 일은 나랑 상관없어.”잠시 생각을 마친 고은서가 그 일에 집착하는 대신 물었다.‘곽승재의 행보를 떠올려 봐도 그래. 직접 나서서 성아연의 어머니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을 거야.”“언제부터 성아연과 백유미가 고씨 가문을 상대로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았어?”“나도 최근에 알게 된 거야.”곽승재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고은서, 네 말이 맞았어. 성아연과 백유미는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 왔고 전에는 내가 널 오해했어.”곽승재의 말을 듣고 고은서는 드디어 병원에서 곽승재가 왜 주민기에게 그녀를 납치한 사람이 백유미와 관련되었는지 물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또한 어제 중국집에서도 고은서가 백유미에게 물을 뿌린 뒤 평소와는 달리 자신을 걱정하며 백유미를 무시했던 곽승재도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백유미와 성아연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알아차렸던 거야. 그리고 백유미가 나에게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곽승재, 오해했다는 말 이제 무슨 의미가 있을까?”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성아연에 했던 일로 나를 얼마나 몰아세웠었는지는 잊었어? 내가 괜한 문제를 일으키며 백유미를 괴롭힌다고 했지. 아무리 성아연의 행동이 나와는 관련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잖아. 네가 보기에는 성아연은 내 절친이었고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의도에서

  • 어게인, 비긴   제526화

    고은서에게서 먼저 온 연락이 좋은 시작인 줄 알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그다지 좋지도 않은 듯했다.‘하아... 이번 달 보너스는 물 건너갔구나.’곽승재는 직접 운전해서 육현석의 집에 도착했다.육현석은 캐주얼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헤어스타일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를 보자 육현석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곽승재는 육현석 집 소파에 앉으며 꽃단장한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물었다.“어디 가려고?”육현석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더 활동적이고 밝고 멋지게 보이도록 했다.“지연이가 얘기했는데 다음 주에 시내 병원 몇 군데에서 배구 혼성 경기를 한다더라고. 그런데 지연이네 병원에 배구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외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대. 마침 시간도 있고 해서 구경도 할 겸 참여하려고.”곽승재는 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지연이? 네가 언제 지연 씨랑 그렇게 친했냐?”육현석은 손을 휙휙 휘저으며 웃었다.“그냥 평범한 호칭일 뿐이야! 지연이가 친구 사이에 굳이 지연 씨 하면서 생소하게 부를 필요 없대. 그래서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어.”“그래서 성까지 빼고 부르냐?”“성까지 붙이면 딱딱해 보이잖아.”육현석은 말하며 곽승재를 향해 불평하기 시작했다.“형, 형은 늘 형수님 이름을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데 좀 더 애정이 담긴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는 거야?”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난번 숙부가 주최한 집안 연회에서 친척들의 칭찬에 답하며 그는 고은서를 은서야라고 불렀었다.고은서는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남몰래 눈을 흘기며 몹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그 후로 그는 호칭에 대해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어차피 고은서도 그를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생각을 눈치채곤 말했다.“형, 이건 자존심을 세울 일이 아니야. 친근하게 부르다 보면 형수님도 익숙해지실 거야.”곽승재는 그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너한테 가르침을 받고 싶진 않다.”

  • 어게인, 비긴   제527화

    육현석이 곽승재와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은 이유는 박지연이 화낼 까봐 걱정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오히려 육현석은 박지연이 고은서의 일로 곽승재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미리 알리지 않고 곽승재를 데리고 나타난다면 박지연은 분명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쏘아붙일 것이다.설령 박지연이 억지로라도 냉랭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곽승재처럼 도도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얼음장처럼 서 있는다면 분위기도 얼려버릴 게 뻔했다.그렇게 되면 누가 기분 좋게 배구를 할 수 있겠는가?‘형은 안 가는 게 나아.’곽승재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본 육현석은 억지로라도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 웃으며 말했다.“형, 지연이한테서 연락 왔을 때 형수님도 그 자리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가도 도움 되지 않을 거야. 그냥 회사로 돌아가서 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요즘 바쁘잖아.”곽승재는 그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육현석보다 먼저 문을 나섰다.“형, 걱정하지 마. 형수님 보면 바로 연락할게!”육현석이 서둘러 말했다.하지만 곽승재는 그를 무시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육현석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위로를 얻고자 일부러 나를 찾아온 것일 텐데 형과 함께 갈 용기조차 내지 못했어.’그러나 병원에 도착해 박지연과 그녀의 동료들을 본 순간 그는 곽승재가 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곽승재가 왔다면 갑과 을이 맞닥뜨리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을 테니 말이다.그랬다면 분위기가 완전히 깨졌을 것이다.“육현석! 여기야!”박지연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자 육현석은 멋지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박지연은 병원 동료들을 소개해 주었고 육현석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훈련에는 상대 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번 배구 훈련에는 병원 직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도 참석해 다소 활기찬 분위기였다.첫 훈련은 가볍게 팀을 나눠 감각

최신 챕터

  • 어게인, 비긴   제1088화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 어게인, 비긴   제1087화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 어게인, 비긴   제1086화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 어게인, 비긴   제1085화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 어게인, 비긴   제1084화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 어게인, 비긴   제1083화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 어게인, 비긴   제1082화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 어게인, 비긴   제1081화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 어게인, 비긴   제1080화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