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고씨 가문은 너희들 때문에 치명타를 입을 뻔했어!”고은서가 싸늘하게 일갈했다.“네 아빠에게 불법 행위를 자수하라고 설득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너희가 관용을 받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우리더러 죽으라는 거랑 뭐가 달라!”성아연이 울며 외쳤다.“집안이 망하면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고은서가 답했다.“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 처음에 그 길을 선택했을 때부터 이런 결과도 예상했어야지.”“무슨 대가! 무슨 결과!”성아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서! 여기서 잘난 척하며 설교하지 마. 곽승재가 아니었으면 너희 고씨 가문이 뭐라도 될 것 같아? 지난 2년 동안 너희 가문에서 곽승재 덕을 봤다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 네가 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척해? 우리는 너보다 운이 나빴을 뿐이야!”성아연의 독설을 들으면서도 고은서는 화내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웃으며 답했다.“운도 내 시력이야. 너도 반성해 봐. 왜 하늘은 너에게 그 운을 주지 않았을지 말이야.”“너!”“성아연, 앞으로 날 찾지 마. 다시 널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마친 고은서가 자리를 떴다.성아연은 뒤에서 소리 질렀다.“고은서! 이 못된 계집애야! 네가 곽승재를 부추켜 엄마를 괴롭게 만들었으니 너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했다.“증거 있으면 신고해. 경찰은 악행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니 나한테 죄가 있다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겠지.”“건방지게 굴지 마! 내가 널 어쩔 수 없다고 해서 백유미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성아연은 여전히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너는 나보다 천 배, 만 배 더 비참해질 거야! 하하하!”누군가 들어와 성아연을 제지했고 고은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경찰서를 나섰다.밖에는 여전히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고은서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쓸쓸함이 스며들었다.10년간의 우정이 한낱 거짓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것이다.차
회의실 밖으로 나온 곽승재가 연락을 받으며 담담히 물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어딘가 설렘이 묻어 있었다.고은서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그녀와 한 번 만나기보다 어려웠다.그런 사람에게 연락을 받았으니 곽승재의 기분은 좋지 않을 리 없었다.“성아연한테 사람을 보냈어?”전화 너머에서 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만났어?”“그래. 엄마가 다쳤다던데 그것도 당신이 한 일이야?”곽승재가 차분히 답했다.“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업가야. 대화하러 사람을 보낸 건 맞지만 그 외의 일은 나랑 상관없어.”잠시 생각을 마친 고은서가 그 일에 집착하는 대신 물었다.‘곽승재의 행보를 떠올려 봐도 그래. 직접 나서서 성아연의 어머니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을 거야.”“언제부터 성아연과 백유미가 고씨 가문을 상대로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았어?”“나도 최근에 알게 된 거야.”곽승재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고은서, 네 말이 맞았어. 성아연과 백유미는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 왔고 전에는 내가 널 오해했어.”곽승재의 말을 듣고 고은서는 드디어 병원에서 곽승재가 왜 주민기에게 그녀를 납치한 사람이 백유미와 관련되었는지 물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또한 어제 중국집에서도 고은서가 백유미에게 물을 뿌린 뒤 평소와는 달리 자신을 걱정하며 백유미를 무시했던 곽승재도 이해할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백유미와 성아연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알아차렸던 거야. 그리고 백유미가 나에게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곽승재, 오해했다는 말 이제 무슨 의미가 있을까?”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성아연에 했던 일로 나를 얼마나 몰아세웠었는지는 잊었어? 내가 괜한 문제를 일으키며 백유미를 괴롭힌다고 했지. 아무리 성아연의 행동이 나와는 관련 없다고 해도 믿지 않았잖아. 네가 보기에는 성아연은 내 절친이었고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의도에서
고은서에게서 먼저 온 연락이 좋은 시작인 줄 알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그다지 좋지도 않은 듯했다.‘하아... 이번 달 보너스는 물 건너갔구나.’곽승재는 직접 운전해서 육현석의 집에 도착했다.육현석은 캐주얼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헤어스타일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를 보자 육현석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곽승재는 육현석 집 소파에 앉으며 꽃단장한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물었다.“어디 가려고?”육현석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더 활동적이고 밝고 멋지게 보이도록 했다.“지연이가 얘기했는데 다음 주에 시내 병원 몇 군데에서 배구 혼성 경기를 한다더라고. 그런데 지연이네 병원에 배구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외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대. 마침 시간도 있고 해서 구경도 할 겸 참여하려고.”곽승재는 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지연이? 네가 언제 지연 씨랑 그렇게 친했냐?”육현석은 손을 휙휙 휘저으며 웃었다.“그냥 평범한 호칭일 뿐이야! 지연이가 친구 사이에 굳이 지연 씨 하면서 생소하게 부를 필요 없대. 그래서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어.”“그래서 성까지 빼고 부르냐?”“성까지 붙이면 딱딱해 보이잖아.”육현석은 말하며 곽승재를 향해 불평하기 시작했다.“형, 형은 늘 형수님 이름을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데 좀 더 애정이 담긴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는 거야?”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난번 숙부가 주최한 집안 연회에서 친척들의 칭찬에 답하며 그는 고은서를 은서야라고 불렀었다.고은서는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남몰래 눈을 흘기며 몹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그 후로 그는 호칭에 대해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어차피 고은서도 그를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생각을 눈치채곤 말했다.“형, 이건 자존심을 세울 일이 아니야. 친근하게 부르다 보면 형수님도 익숙해지실 거야.”곽승재는 그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너한테 가르침을 받고 싶진 않다.”
육현석이 곽승재와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은 이유는 박지연이 화낼 까봐 걱정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오히려 육현석은 박지연이 고은서의 일로 곽승재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미리 알리지 않고 곽승재를 데리고 나타난다면 박지연은 분명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쏘아붙일 것이다.설령 박지연이 억지로라도 냉랭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곽승재처럼 도도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얼음장처럼 서 있는다면 분위기도 얼려버릴 게 뻔했다.그렇게 되면 누가 기분 좋게 배구를 할 수 있겠는가?‘형은 안 가는 게 나아.’곽승재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본 육현석은 억지로라도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 웃으며 말했다.“형, 지연이한테서 연락 왔을 때 형수님도 그 자리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가도 도움 되지 않을 거야. 그냥 회사로 돌아가서 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요즘 바쁘잖아.”곽승재는 그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육현석보다 먼저 문을 나섰다.“형, 걱정하지 마. 형수님 보면 바로 연락할게!”육현석이 서둘러 말했다.하지만 곽승재는 그를 무시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육현석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위로를 얻고자 일부러 나를 찾아온 것일 텐데 형과 함께 갈 용기조차 내지 못했어.’그러나 병원에 도착해 박지연과 그녀의 동료들을 본 순간 그는 곽승재가 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곽승재가 왔다면 갑과 을이 맞닥뜨리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을 테니 말이다.그랬다면 분위기가 완전히 깨졌을 것이다.“육현석! 여기야!”박지연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자 육현석은 멋지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박지연은 병원 동료들을 소개해 주었고 육현석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훈련에는 상대 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번 배구 훈련에는 병원 직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도 참석해 다소 활기찬 분위기였다.첫 훈련은 가볍게 팀을 나눠 감각
육현석은 자신의 배경과 외모를 이용해 여자를 꼬시지 않았는데 그 점은 존중받아 마땅했다.“시합에 도움 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바쁜데 괜히 온 거 아니야?”박지연이 물었다.육현석은 웃으며 답했다.“그럴 리가 없지. 너랑 다른 사람이랑 같아? 너는 형수님의 제일 절친일 뿐만 아니라 내 친구이기도 하잖아. 친구를 위해서라면 시합은 물론이고 목숨 거는 일도 마다하지 않지.”그 말에 박지연도 장난스럽게 답했다.“목숨 거는 건 어렵지 않아? 넌 피만 봐도 기절하잖아.”육현석은 박지연이 자신의 약점을 지적하자 멋진 얼굴에 순간적으로 붉은 기운이 돌았다.“나도 매번 그런 건 아니야! 전투력도 꽤 강해서 혼자서 세 명 상대해도 거뜬하다고!”“그래그래! 알았어. 믿어.”박지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박지연의 모습을 보고 육현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어색함이 조금 사라진 듯한 느낌에 그는 멋쩍게 코를 매만졌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피만 보면 어지러워. 사람들은 내가 위험을 피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아.”박지연은 다정하게 위로를 건넸다.“괜찮아. 큰 병도 아니고 치료와 약물 복용을 병행한다면 훨씬 빨리 나아질 거야.”육현석 주위 사람들은 괜히 그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이 증상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스스로 창피하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치료받은 적도 없었지만 육현석은 굳이 이 사실들을 박지연에게 얘기하지 않았다.그는 박지연의 위로를 받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몇 시간 동안 운동 해서 피곤하지? 도와준 게 고마우니까 내가 밥 살게!”박지연이 제안하자 육현석은 흔쾌히 승낙했다.식사는 박지연이 좋아하는 한 식당에서 하기로 했다.두 사람이 주문을 끝낸 후 육현석은 박지연에게 곽승재가 며칠 전에 위장염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꺼냈다.“형은 어릴 때부터 위장이 약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자극적인 음식을 먹은 건지 병원에서 이틀 동안 링거를 맞았다니까 좀 안쓰럽더라.”“그렇지도 않은
육현석의 반응을 본 박지연도 뭔가 눈치챈 듯 말을 이었다.“혹시 그날 식당 이벤트 곽승재가 기획한 거야? 은서가 당첨된 것도 곽승재의 계획이고?”육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지연아, 형은 정말 진심으로 형수님을 다시 잡고 싶어 해. 그러니까 이 일은 형수님께 말하지 말아줘. 응?”이 여행이 곽승재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은서는 열에 아홉을 가지 않을 것이다.“곽승재는 어떻게 은서랑 가려고? 2인 여행권이었는데 당시 은서가 나랑 아름 언니한테 물었는데 둘 다 시간 없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 찾겠다고 하더라고.”“누구?”육현석이 물었다.박지연은 바로 답하지 않고 테이블 위의 하얀 도자기 찻잔을 들어 육현석에게 권하며 말했다.“일단 차부터 마셔”육현석은 박지연의 말에 따라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히고 한 모금 마신 뒤 재촉했다.“그래서 누군데? 애태우지 말고 형수님이 누굴 불렀는지 빨리 말해줘.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박지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말했다.“민시후.”쨍그랑!육현석의 찻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의 얼굴도 얼어붙었다.“민시후?”육현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말했다.“형수님은 어떻게 민시후를 데려갈 생각을 할 수 있어!”‘승재 형이 이 사실을 알면 큰일이야.’곽승재는 안 그래도 민시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게다가 얼마 전 민시후와 고은서 사이에 스캔들이 돌았고 곽승재는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이 상황에서 고은서가 민시후와 함께 판다 기지에 간다는 걸 알게 된다면 곽승재가 얼마나 화를 낼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형수님은 언제 민시후랑 사이가 그렇게 좋아진 거야? 여행까지 같이 갈 정도야?”아직도 믿기 힘든 육현석이 재차 물었다.“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지연아, 넌 분명 알고 있을 거야. 솔직히 말해줘. 형수님 마음속엔 이제 정말로 승재 형은 없는 거야?”“정말 몰라.”박지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하지만 한 가지는
육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도 이렇게 큰 노력을 들여 준비한 일을 그냥 날리고 싶지는 않을 거야. 민시후는... 형이 알아서 하겠지!’“그래!”육현석은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형한테는 말하지 않을게. 형수님이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보면 형도 자극을 받을 거야. 그러면 형도 자기 마음을 더 잘 알게 되겠지!”박지연은 곽승재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보다 이전에 그가 고은서를 앞에 두고 다친 백유미를 안고 가면서 그녀를 무시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이번에 만나게 된다면 그때 은서의 기분도 알게 되겠지! 한번 겪어보라지.’하지만 박지연은 그런 생각을 굳이 육현석에게 전하지 않았다.그녀는 육현석에게 다시 차 한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자, 우리의 비밀을 위해 건배!”“건배!”...고은서가 ZY 그룹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시후가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점심은 송민아랑 먹은 거야?”민시후는 사무실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는 느긋하게 물었다.“그래. 왜?”“혹시 민아한테 남자 다루는 법 같은 거 가르쳐준 거 아니지?”민시후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민시후가 집착하는 곽승재를 우회적으로 비웃고 있다는 걸 알아챈 고은서가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민 도련님. 자뻑도 병이야. 시간 있으면 병원에 한 번 가봐. 민아도 일에만 몰두하고 있지 너한테 집착할 생각은 없어 보여.”민시후는 고은서의 답에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송민아가 진짜 나를 놓아준다면 너한테 배당 더 해줄게. 감사의 표시로 말이야.”고은서는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대꾸했다.“그것 때문에 불렀어? 그렇게 민아한테 신경 쓸 거면 좀 잘해. 민아도 네가 그냥 그런 남자인 줄 알면 더 이상 쫓아다니지도 않을 거라고. 네가 쫓아다녀도 잡혀 줄지 모르겠고.”“뭐라는 거야!”민시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흘겨보고는 반쯤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민아를 쫓아다닐 거면 널 쫓아다니는 게 나아. 적어도 네 얼굴과
“고은서, 지금 내가 다른 여자랑 가까이 지내서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얘기하는 거야?”고은서는 앞에 있는 민시후의 예쁜 얼굴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말했다.“지금 직접적으로 네가 같이 가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재미를 찾아봐!”민시후는 고은서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시 대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고은서, 그만 시끄럽게 하고 내일 차로 데리러 갈 테니까 같이 출발하자. 프로젝트 관련 자료는 네 이메일로 보낼 테니 미리 확인하고 준비해 둬.”고은서는 민시후가 늘 규칙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함께 프로젝트를 조사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이상 그녀는 피할 수 없고 더 이상 논쟁하는 것도 시간 낭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프로젝트 자료는 확인할게. 너랑 같이 가는 건 괜찮지만 너도 내일 바로 갈 필요는 없어. 며칠 뒤에 와서 서운에서 만나자.”“안 돼!”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송민아가 아직 양가 부모님께 파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아직 포기하진 않은 거야. 네가 여행 가는 데 따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너한테 애정을 갈구하는 이미지를 유지해?”민시후는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말했다.“같이 가기로 해! 이제 가서 일 봐.”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사무실로 내려간 고은서는 자료를 한 더미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송민아를 마주했다.고은서가 민시후의 사무실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송민아는 예전처럼 분노하거나 억울한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여전히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오랫동안 좋아한 남자를 말 한마디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민아야, 내일 민시후랑 며칠 서운에 갈 건데 같이 갈래?”고은서가 물었다.어차피 업무차 가는 거니 송민아도 함께 가면 민시후가 송민아에게서 다른 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송민아는 눈을 반짝였지만 바로 무언가 생각해 낸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안 갈래. 시후 오빠가 내가 일부러 둘 사이를 방해한다고 생각할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