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일의 말에 유지환의 표정도 굳어졌다.화가 난 상태라 목소리가 너무 커 옆에 있던 서아진도 전부 듣게 되었다.“혜원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우리 그냥 병원에 가보자. 응?”유지환은 우물쭈물하더니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했다.“아버지, 장난 그만 하세요. 혜원이가 왜...”유성일은 더 이상 유지환의 쓸데없는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그리곤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유지환은 다소 어리둥절했다.옆에 있던 서아진이 그를 달랬다.“그냥 우리 병원으로 가보자. 내 생각엔... 언니는 죽지 않았을 거야. 그냥 다치기만 했을 거야.”“오빠도 오빠 부모님이 혜원 언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말했잖아. 아마 혜원 언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걸 거야.”서아진의 말에 유지환의 표정도 풀어졌다.“그래, 네 말이 맞아. 임혜원이 분명 내 부모님께 뭐라고 말하면서 협조해달라고 한 걸 거야.”“그냥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로 죽을 리가 없잖아. 심각해 봤자 골절이거나 뇌진탕이야. 절대 죽을 리 없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서아진은 그저 계단 세 개 높이에 굴러떨어진 것이니 당연히 죽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서아진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게 되었다.타이밍 적당하게 쓰러진 척 연기한 서아진 덕에 유지환이 막 도착했을 때 보였던 건 나와 서아진이 동시에 굴러떨어지는 모습이었다.유지환은 고민도 하지 않고 서아진의 곁으로 달려갔었다.그러나 내 몸에선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죽어가고 있음에도 유지환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난 살고 싶은 마음에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지만 말이다.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내가 품고 있던 희망은 피와 함께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그렇게 난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아주 절망적이었다.유지환은 지금까지도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나는 유지환과 서아진을 따라 다
순간 정적이 몇 초간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유지환은 화를 냈다.“임혜원이 대체 얼마를 줬기에 이런 큰일을 벌이는 거예요?”“지금 죽은 척 연기해서 기어코 뜻대로 하려는 거죠? 정말 이젠 역겹네요!”‘퍽' 소리가 났다.유성일이 결국 유지환의 얼굴을 또 때린 것이다.“들어가 봐! 안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봐!”유지환은 강한 거부감을 느끼며 영안실로 들어갔다.유성일이 그를 거의 강제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음산한 영안실의 분위기에 유지환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그는 마지못한 얼굴로 가까이 걸어갔다.내 몸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아빠였다. 유지환 대신 내 몸을 덮고 있던 흰 천을 내려주었다.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이 유지환의 시야에 들어왔다.무방비 상태였던 유지환은 놀란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빤히 내 얼굴을 보았다.2분 정도 지났을까. 정신이 든 유지환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임혜원! 그래, 화장 실력 좋은 건 인정할게! 깜짝 놀랐잖아!”“이제 그만해! 이런 장난 그만하라고! 내가 사소한 일로 너랑 다투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내 몸을 밀어보려고 했다.나의 아빠는 이미 비통함에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지환이 이렇듯 내 몸에 손을 대려고 하자 나의 아빠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달려오더니 유지환을 밀쳐버렸다.“짐승보다 못한 놈! 내 딸한테 손대지 마! 너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지환은 철퍼덕 넘어졌지만 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그리곤 내 시체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이 사람은 임혜원이 아니에요! 절대 아닐 거예요!”“혜원이 팔엔 화상 흉터가 있어요. 그건...”유지환은 소리를 지르며 내 팔을 확 잡아 들었다.그는 순간 조용해졌다.한창 유지환이 병원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다.내가 유지환 앞에 나서며 환자의 가족이 휘두른 칼을 대신 맞아주었었다.그렇게 흠집이라곤 하나도 없던 보드라운
나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유지환이 서아진을 감싸줄 거라는 것을.유성일도 예상치 못한 일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분노가 치민 유성일은 손을 들어 또 유지환을 때리려 했다.그러나 이번엔 서아진이 유지환의 앞에 나서며 말했다.“아저씨, 다 제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지환 오빠 탓하지 말아 주세요...”“다 제가 혜원 언니 기분 불쾌하게 만들어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거예요...”서아진은 가련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기에 지켜보는 유지환은 아주 마음이 아팠다.그래서 서아진은 품에 끌어안았다.“아버지가 반대만 하지 않으셨다면 전 이미 아진이랑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 거예요!”“지금은 그냥 오빠로서 아진이를 챙겨주려고 하는데, 임혜원이 자꾸 쓸데없는 질투를 하잖아요! 번마다 아진이를 찾아와 괴롭히기도 했다고요!”유성일은 혈압이 쭉쭉 올라가는 기분에 뒤통수를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넌 내 아들이 아니다! 넌 짐승보다 못한 새끼야!”유성일이 화병으로 쓰러질 것으로 보이자 마침 도착한 아내 한정연과 의사가 얼른 유성일을 부축했다.유지환이 여전히 서아진에게 눈이 멀어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한정연은 화가 치밀었다.“지환아, 넌 왜 아직도 서아진이 어떤 아이인지 눈치를 채지 못한 거니?”“네가 서아진이랑 연애를 한다고 했을 때 나와 네 아버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서아진을 몰래 몇 번이나 미행했었단다.”“그때 우리가 너랑 서아진 사이를 강하게 반대한 건, 나랑 네 아버지가 두 눈으로 직접 서아진이 양아치 같은 놈들과 술집으로 들어가는 걸 봐서였어!”한정연은 결국 그때의 진실을 밝혔다.“서아진은 너랑 연애하면서 남자 세 명이나 더 꼬시고 있더구나. 그러면서 우리 앞에서는 순진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지. 네가 준 돈으로 걔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알기나 하니? 네 돈으로 다른 남자랑 연애하고 있었단다!”“행여나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우린 서아진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단다.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더구나.”
서아진에게 이미 모함당한 적 있었던 나는 그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 미리 손목시계에 아주 작은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고 전부 녹화했다.내가 그런 사고를 당한 후 아빠는 미친 사람처럼 내 행적을 찾아보았다.그러다가 초소형 카메라를 구매한 기록을 발견했다.그 후 아빠는 내 유품에서 그 시계를 찾아냈다.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아빠는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그 진실을 전부 핸드폰으로 백업해 주었다.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이다.유지환은 그 영상을 틀어 보았다.비록 각도는 조금 좋지 못했지만 나와 서아진의 모습이 전부 나왔다.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서아진은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언니, 저랑 지환 오빠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전 절대 먼저 지환 오빠한테 연락한 적 없다고요. 전부 지환 오빠가 먼저 연락한 거란 말이에요...”“혜원 언니, 오빠랑 언니 사이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요. 자꾸 저 찾아오지 말라고요.”서아진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어버렸다.여전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아진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언니, 왜 때리시는 거예요!”화면 속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서아진이 스스로 손을 들어 자기 뺨을 치는 모습이 말이다.그리고 이내 울기 시작했다.“아파요, 언니. 대체 왜 저한테 발길질까지 하세요...”서아진이 이렇듯 연기할 줄 알았던 나는 차갑게 픽 웃었다.“서아진 씨, 그런 연기는 번마다 통하지 않아요.”냉담한 내 모습이 아마도 서아진에게 자극이 된 것 같았다.“그래요?”“그럼, 이런 연기는 어떨까요?”말을 마친 서아진은 이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곧이어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계단 아래로 뒷걸음질 쳤다.나는 서아진이 내가 밀어버린 것처럼 상황을 만들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이렇게 높은 계단 아래서 굴러떨어진다면 아주 위험할 것이었다.나는 서아진이 정말로 스스로 굴러떨어질 담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구해주
서아진의 계략이 전부 들켜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나의 아빠는 서아진을 법정까지 끌고 갔고 재판 당일 유지환도 출석하게 되었다. 서아진은 징역 30년을 받게 되었다.재판이 끝난 후.유지환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나와 같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유지환과 다툰 후로 유지환은 두 달이 넘게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었다.그는 마치 딴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집을 보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몰랐다.나는 유지환이 미친 사람처럼 집안을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를 꼭 찾아내겠다는 듯 내 물건을 전부 뒤져보고 있었다.집안은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지환은 내 옷을 끌어안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았다.“혜원아, 넌 늘 날 이해해주고 있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주고 있었어. 그런데 나는...”“이번에도 날 이해해주면서 돌아와 주면 안 될까? 제발 용서를 구할 기회를 줘...”유지환은 나의 옷을 꼬옥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그는 앞으로 기어가 책꽂이 밑에 있던 예쁜 수첩을 주웠다.그것은 내가 유지환과 연애하면서 쓴 일기였다.일기장엔 그와 했던 데이트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함께 봤던 영화는 티켓을 버리지 않고 전부 소중히 일기장에 끼워 넣었다.하지만 이 데이트 기록은 뒤로 넘기면 넘길수록 점차 적어졌다.유지환이 더는 나와 데이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다 나중엔 일기장엔 내 혼잣말만 적게 되었다.[오늘 또 혼자 병원으로 가서 링거를 맞았다. 총 네 병이라 손등도 부어버렸다. 너무 아프다.][그래도 이건 지환 씨에게 나중에 말해주자.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내가 방해되면 안 되잖아. 나중에 지환 씨가 승진하면 명품 시계를 선물해야지! 엄청 기뻐할 거야!][어머님이 오늘 담낭염으로 입원하게 되셨다. 아파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내일 바로 수술할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수술이 잘 됐으면 좋겠다!][오늘 어머님의 곁을 지켜드리고 있을
유지환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 되어버렸다.그는 매일 눈을 뜨면 집 안을 청소했다.나의 옷을 하나씩 꺼내 곱게 개인 뒤 넣어두곤 옷장 앞에서 한참 멍하니 있었다.대부분 시간을 안방에서만 보내며 내가 쓴 일기장을 읽어보았다.그는 읽으면서 가끔 멍청하게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그리고 매일 어둠이 찾아오면 그는 나의 일기장과 잠옷을 끌어안고 나서야 잠들었다.꼭 이 두 물건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그 외에도 집안일이라곤 전혀 하지 않던 그는 걸레를 들고 집안 이곳저곳을 청소했다.그의 청소 덕에 장식용 도자기엔 먼지 한 톨 없었다.내가 관리하던 화분도 그가 관리하기 시작했고 정성 들여 물도 주고 비료를 주어 아주 잘 자라고 있었다.특히 내가 썼던 생활용품은 매일 깨끗하게 닦으면서 중얼거렸다.“혜원아, 봐. 깨끗하지?”“나 집안일 아주 잘해. 나중에 우리 결혼하고 나면 꼭 행복하게 해줄게.”거울 속에 비친 유지환의 모습은 아주 초췌했지만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그의 모습을 보니 통쾌한 마음도 들지 않았고 동정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냥 그가 비참해 보였다.유지환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다.배고프면 대충 집안에서 라면이나 간식을 꺼내 대충 먹었다.그리고 라면과 간식이 다 떨어지면 물만 마시면서 배를 채웠다.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매일 엄청난 양의 음식 재료를 사 오며 주방을 어지럽혔다.“갈비찜. 그래, 오늘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갈비찜을 만들어 줄게...”“반드시 네가 입맛에 맞는 갈비찜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와서 맛이라도 좀 봐줘...”유지환은 자주 주방을 잔뜩 어지럽혀 놓곤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를 보며 통곡했다.“난 정말 멍청한 놈이야. 갈비찜도 만들 줄 몰라...”한바탕 울고 난 뒤 그는 눈물 닦고 다시 주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날은 화창한 오전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내가 있을 법한 곳을 향해 중얼거렸다.“혜원아, 보고 싶어. 정말 너무 보고 싶어...”말을 마친 그는 창가로 가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12층 높이었던지라 사망하고 말았다.경찰이 도착했을 때 유지환의 시체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나의 아빠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그러나 이 비극은 원래부터 고통 속에서 살고 있던 유성일과 한정연에게 또 한 번 고통을 안겨주었다.두 사람이 영안실에 주저앉아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두 사람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는 수밖에 없었다.‘다음 생에도 제 어머님, 아버님이 되어주세요. 그땐 더 많이 효도할게요.'-끝-
난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다.온몸의 뼈가 골절되었을 뿐 아니라 부러진 갈비는 그대로 자궁까지 뚫어 엄청난 출혈을 일으켰다.서서히 죽어가면서 흘린 피는 하얀 침대를 빨갛게 물들였다.너무도 처참한 몰골도 죽었던지라 의사와 간호사마저도 고개를 돌리며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내고 있었다.아마도 한이 너무 많은 탓에 나의 영혼도 이곳을 떠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나는 멍한 눈길로 내 시체를 보았다.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궁금한 얼굴로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움직였다.역시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지환이었다.응급실에서 그는 분주하게 수술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자신의 첫사랑을 달래고 있었다.“아진아, 버텨. 내가 지금 바로 수술해 줄게!”이내 그는 빠르게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서아진에게 수술을 해주었다. 이렇듯 진지한 그의 표정은 나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수술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안정 상태로 접어든 서아진의 모습에 유지환은 어시를 불러 서아진을 일반 병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어시스트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망설이고 있는 어시스트의 모습에 유지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뭐, 할 말이 있는 거예요?”어시스트가 말했다.“서아진 씨와 함께 실려 온 여자분을 혹시 아세요? 그분이 방금...”어시스트는 유지환에게 나의 사망 소식을 알리려 했다.그러나 유지환은 어시스트의 말허리를 자르며 차갑게 말했다.“난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고 그 여자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어시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긴 유지환은 나를 아주 싫어했고 밖에서도 내가 약혼녀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아직 몰랐다.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그것도 바로 옆 병실에서 말이다.나는 사고가 나기 전 온 힘을 다해 유지환의 바짓자락을 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살려줘...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그날은 화창한 오전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내가 있을 법한 곳을 향해 중얼거렸다.“혜원아, 보고 싶어. 정말 너무 보고 싶어...”말을 마친 그는 창가로 가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12층 높이었던지라 사망하고 말았다.경찰이 도착했을 때 유지환의 시체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나의 아빠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그러나 이 비극은 원래부터 고통 속에서 살고 있던 유성일과 한정연에게 또 한 번 고통을 안겨주었다.두 사람이 영안실에 주저앉아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두 사람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는 수밖에 없었다.‘다음 생에도 제 어머님, 아버님이 되어주세요. 그땐 더 많이 효도할게요.'-끝-
유지환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 되어버렸다.그는 매일 눈을 뜨면 집 안을 청소했다.나의 옷을 하나씩 꺼내 곱게 개인 뒤 넣어두곤 옷장 앞에서 한참 멍하니 있었다.대부분 시간을 안방에서만 보내며 내가 쓴 일기장을 읽어보았다.그는 읽으면서 가끔 멍청하게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그리고 매일 어둠이 찾아오면 그는 나의 일기장과 잠옷을 끌어안고 나서야 잠들었다.꼭 이 두 물건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그 외에도 집안일이라곤 전혀 하지 않던 그는 걸레를 들고 집안 이곳저곳을 청소했다.그의 청소 덕에 장식용 도자기엔 먼지 한 톨 없었다.내가 관리하던 화분도 그가 관리하기 시작했고 정성 들여 물도 주고 비료를 주어 아주 잘 자라고 있었다.특히 내가 썼던 생활용품은 매일 깨끗하게 닦으면서 중얼거렸다.“혜원아, 봐. 깨끗하지?”“나 집안일 아주 잘해. 나중에 우리 결혼하고 나면 꼭 행복하게 해줄게.”거울 속에 비친 유지환의 모습은 아주 초췌했지만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그의 모습을 보니 통쾌한 마음도 들지 않았고 동정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냥 그가 비참해 보였다.유지환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다.배고프면 대충 집안에서 라면이나 간식을 꺼내 대충 먹었다.그리고 라면과 간식이 다 떨어지면 물만 마시면서 배를 채웠다.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매일 엄청난 양의 음식 재료를 사 오며 주방을 어지럽혔다.“갈비찜. 그래, 오늘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갈비찜을 만들어 줄게...”“반드시 네가 입맛에 맞는 갈비찜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와서 맛이라도 좀 봐줘...”유지환은 자주 주방을 잔뜩 어지럽혀 놓곤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를 보며 통곡했다.“난 정말 멍청한 놈이야. 갈비찜도 만들 줄 몰라...”한바탕 울고 난 뒤 그는 눈물 닦고 다시 주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서아진의 계략이 전부 들켜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나의 아빠는 서아진을 법정까지 끌고 갔고 재판 당일 유지환도 출석하게 되었다. 서아진은 징역 30년을 받게 되었다.재판이 끝난 후.유지환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나와 같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유지환과 다툰 후로 유지환은 두 달이 넘게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었다.그는 마치 딴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집을 보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몰랐다.나는 유지환이 미친 사람처럼 집안을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를 꼭 찾아내겠다는 듯 내 물건을 전부 뒤져보고 있었다.집안은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지환은 내 옷을 끌어안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았다.“혜원아, 넌 늘 날 이해해주고 있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주고 있었어. 그런데 나는...”“이번에도 날 이해해주면서 돌아와 주면 안 될까? 제발 용서를 구할 기회를 줘...”유지환은 나의 옷을 꼬옥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그는 앞으로 기어가 책꽂이 밑에 있던 예쁜 수첩을 주웠다.그것은 내가 유지환과 연애하면서 쓴 일기였다.일기장엔 그와 했던 데이트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함께 봤던 영화는 티켓을 버리지 않고 전부 소중히 일기장에 끼워 넣었다.하지만 이 데이트 기록은 뒤로 넘기면 넘길수록 점차 적어졌다.유지환이 더는 나와 데이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다 나중엔 일기장엔 내 혼잣말만 적게 되었다.[오늘 또 혼자 병원으로 가서 링거를 맞았다. 총 네 병이라 손등도 부어버렸다. 너무 아프다.][그래도 이건 지환 씨에게 나중에 말해주자.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내가 방해되면 안 되잖아. 나중에 지환 씨가 승진하면 명품 시계를 선물해야지! 엄청 기뻐할 거야!][어머님이 오늘 담낭염으로 입원하게 되셨다. 아파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내일 바로 수술할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수술이 잘 됐으면 좋겠다!][오늘 어머님의 곁을 지켜드리고 있을
서아진에게 이미 모함당한 적 있었던 나는 그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 미리 손목시계에 아주 작은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고 전부 녹화했다.내가 그런 사고를 당한 후 아빠는 미친 사람처럼 내 행적을 찾아보았다.그러다가 초소형 카메라를 구매한 기록을 발견했다.그 후 아빠는 내 유품에서 그 시계를 찾아냈다.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아빠는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그 진실을 전부 핸드폰으로 백업해 주었다.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이다.유지환은 그 영상을 틀어 보았다.비록 각도는 조금 좋지 못했지만 나와 서아진의 모습이 전부 나왔다.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서아진은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언니, 저랑 지환 오빠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전 절대 먼저 지환 오빠한테 연락한 적 없다고요. 전부 지환 오빠가 먼저 연락한 거란 말이에요...”“혜원 언니, 오빠랑 언니 사이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요. 자꾸 저 찾아오지 말라고요.”서아진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어버렸다.여전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아진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언니, 왜 때리시는 거예요!”화면 속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서아진이 스스로 손을 들어 자기 뺨을 치는 모습이 말이다.그리고 이내 울기 시작했다.“아파요, 언니. 대체 왜 저한테 발길질까지 하세요...”서아진이 이렇듯 연기할 줄 알았던 나는 차갑게 픽 웃었다.“서아진 씨, 그런 연기는 번마다 통하지 않아요.”냉담한 내 모습이 아마도 서아진에게 자극이 된 것 같았다.“그래요?”“그럼, 이런 연기는 어떨까요?”말을 마친 서아진은 이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곧이어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계단 아래로 뒷걸음질 쳤다.나는 서아진이 내가 밀어버린 것처럼 상황을 만들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이렇게 높은 계단 아래서 굴러떨어진다면 아주 위험할 것이었다.나는 서아진이 정말로 스스로 굴러떨어질 담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구해주
나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유지환이 서아진을 감싸줄 거라는 것을.유성일도 예상치 못한 일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분노가 치민 유성일은 손을 들어 또 유지환을 때리려 했다.그러나 이번엔 서아진이 유지환의 앞에 나서며 말했다.“아저씨, 다 제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지환 오빠 탓하지 말아 주세요...”“다 제가 혜원 언니 기분 불쾌하게 만들어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거예요...”서아진은 가련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기에 지켜보는 유지환은 아주 마음이 아팠다.그래서 서아진은 품에 끌어안았다.“아버지가 반대만 하지 않으셨다면 전 이미 아진이랑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 거예요!”“지금은 그냥 오빠로서 아진이를 챙겨주려고 하는데, 임혜원이 자꾸 쓸데없는 질투를 하잖아요! 번마다 아진이를 찾아와 괴롭히기도 했다고요!”유성일은 혈압이 쭉쭉 올라가는 기분에 뒤통수를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넌 내 아들이 아니다! 넌 짐승보다 못한 새끼야!”유성일이 화병으로 쓰러질 것으로 보이자 마침 도착한 아내 한정연과 의사가 얼른 유성일을 부축했다.유지환이 여전히 서아진에게 눈이 멀어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한정연은 화가 치밀었다.“지환아, 넌 왜 아직도 서아진이 어떤 아이인지 눈치를 채지 못한 거니?”“네가 서아진이랑 연애를 한다고 했을 때 나와 네 아버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서아진을 몰래 몇 번이나 미행했었단다.”“그때 우리가 너랑 서아진 사이를 강하게 반대한 건, 나랑 네 아버지가 두 눈으로 직접 서아진이 양아치 같은 놈들과 술집으로 들어가는 걸 봐서였어!”한정연은 결국 그때의 진실을 밝혔다.“서아진은 너랑 연애하면서 남자 세 명이나 더 꼬시고 있더구나. 그러면서 우리 앞에서는 순진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지. 네가 준 돈으로 걔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알기나 하니? 네 돈으로 다른 남자랑 연애하고 있었단다!”“행여나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우린 서아진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단다.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더구나.”
순간 정적이 몇 초간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유지환은 화를 냈다.“임혜원이 대체 얼마를 줬기에 이런 큰일을 벌이는 거예요?”“지금 죽은 척 연기해서 기어코 뜻대로 하려는 거죠? 정말 이젠 역겹네요!”‘퍽' 소리가 났다.유성일이 결국 유지환의 얼굴을 또 때린 것이다.“들어가 봐! 안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봐!”유지환은 강한 거부감을 느끼며 영안실로 들어갔다.유성일이 그를 거의 강제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음산한 영안실의 분위기에 유지환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그는 마지못한 얼굴로 가까이 걸어갔다.내 몸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아빠였다. 유지환 대신 내 몸을 덮고 있던 흰 천을 내려주었다.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이 유지환의 시야에 들어왔다.무방비 상태였던 유지환은 놀란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빤히 내 얼굴을 보았다.2분 정도 지났을까. 정신이 든 유지환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임혜원! 그래, 화장 실력 좋은 건 인정할게! 깜짝 놀랐잖아!”“이제 그만해! 이런 장난 그만하라고! 내가 사소한 일로 너랑 다투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내 몸을 밀어보려고 했다.나의 아빠는 이미 비통함에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지환이 이렇듯 내 몸에 손을 대려고 하자 나의 아빠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달려오더니 유지환을 밀쳐버렸다.“짐승보다 못한 놈! 내 딸한테 손대지 마! 너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지환은 철퍼덕 넘어졌지만 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그리곤 내 시체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이 사람은 임혜원이 아니에요! 절대 아닐 거예요!”“혜원이 팔엔 화상 흉터가 있어요. 그건...”유지환은 소리를 지르며 내 팔을 확 잡아 들었다.그는 순간 조용해졌다.한창 유지환이 병원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다.내가 유지환 앞에 나서며 환자의 가족이 휘두른 칼을 대신 맞아주었었다.그렇게 흠집이라곤 하나도 없던 보드라운
유성일의 말에 유지환의 표정도 굳어졌다.화가 난 상태라 목소리가 너무 커 옆에 있던 서아진도 전부 듣게 되었다.“혜원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우리 그냥 병원에 가보자. 응?”유지환은 우물쭈물하더니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했다.“아버지, 장난 그만 하세요. 혜원이가 왜...”유성일은 더 이상 유지환의 쓸데없는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그리곤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유지환은 다소 어리둥절했다.옆에 있던 서아진이 그를 달랬다.“그냥 우리 병원으로 가보자. 내 생각엔... 언니는 죽지 않았을 거야. 그냥 다치기만 했을 거야.”“오빠도 오빠 부모님이 혜원 언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말했잖아. 아마 혜원 언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걸 거야.”서아진의 말에 유지환의 표정도 풀어졌다.“그래, 네 말이 맞아. 임혜원이 분명 내 부모님께 뭐라고 말하면서 협조해달라고 한 걸 거야.”“그냥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로 죽을 리가 없잖아. 심각해 봤자 골절이거나 뇌진탕이야. 절대 죽을 리 없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서아진은 그저 계단 세 개 높이에 굴러떨어진 것이니 당연히 죽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서아진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게 되었다.타이밍 적당하게 쓰러진 척 연기한 서아진 덕에 유지환이 막 도착했을 때 보였던 건 나와 서아진이 동시에 굴러떨어지는 모습이었다.유지환은 고민도 하지 않고 서아진의 곁으로 달려갔었다.그러나 내 몸에선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죽어가고 있음에도 유지환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난 살고 싶은 마음에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지만 말이다.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내가 품고 있던 희망은 피와 함께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그렇게 난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아주 절망적이었다.유지환은 지금까지도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나는 유지환과 서아진을 따라 다
나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두 사람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로 마주 보곤 끌어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서아진은 그렇게 유지환의 보살핌을 받으며 며칠 동안 입원하게 되었다.퇴원하는 그날에도 유지환이 전부 퇴원 절차까지 해주었다.서아진을 집으로 데려다주자 서아진은 잔뜩 아쉬운 얼굴로 유지환을 잡았다.“오빠, 부모님이 걱정하면 어떻게 하지?”“난 어리바리해서 사실 뭘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해... 오빠가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유지환은 서아진이 자신에게 엄청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좋았다.서아진을 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내가 휴가 신청 내서라도 네 곁에 며칠 동안 있어 줄게.”그 말을 들은 난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나한테 귀찮다고 짜증을 내던 사람이 다른 여자의 부탁을 아무 이유도 없이 들어주겠다고 한다.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다소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가 깨져버렸다.낯선 번호에 유지환은 의아한 얼굴로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나의 아빠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양심도 없는 놈! 네가 감히 내 딸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내 딸을 죽게 만든 거야!”유지환의 표정이 바로 변했다.“하, 그렇게 할 일이 없으세요? 임혜원이 연기에 동참해달라고 해서 지금 이러시는 거예요?”“전에는 아픈 척 연기를 하더니 이젠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척 연기하는 거예요?”“혜원이한테 전해 주세요. 절대 믿지 않을 거라고요! 설령 진짜로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그건 전부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니까요!”나의 아빠는 유지환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내 딸은 네가 죽인 거야! 응당 죽었어야 할 사람은 너랑 그 여자라고!”아마도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은 탓인지 나의 아빠는 다소 횡설수설하였다.유지환은 두어 마디 듣곤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서아진은 궁금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누구야?”유지환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임혜원 아버지.
유지환은 내가 구급차를 타고 같은 병원에 실려 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그는 서아진 대신 나를 찾아와 화를 낼 생각이었다.서아진의 병실을 나서자마자 시체를 옮기는 들것이 그의 앞으로 지나갔다.나는 알고 있었다.그 들것에 실은 시체가 내 시체라는 것을. 내 몸엔 하얀 천이 머리끝까지 덮여 있었다.프러포즈 때 받은 반지가 있는 손이 툭 힘없이 떨어졌다. 그 반지는 8년 전 유지환이 나에게 프러포즈하면서 사준 반지였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반지를 뺀 적 없었다.유지환이 이 반지를 몰라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나는 영혼의 몸으로 유지환의 곁으로 다가가 계속 외쳤다.“유지환, 저 들것에 옮겨지고 있는 시체가 나라고!”유지환이 날 알아봐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난 알고 싶었다. 유지환이 만약 그때의 선택으로 나와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말이다. 이성을 잃게 될까, 아니면 남일 대하듯 담담하게 굴까?“비켜주세요.”들것은 유지환의 바로 앞을 지나갔고 직원이 그에게 입을 열어 말했다.유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들것 밖으로 나온 내 손을 힐끗 보았다.그리곤 짜증스러운 얼굴로 물러서더니 들것이 지나갈 수 있게 자리를 내주었다.그는 약혼녀인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8년이나 사귀었지만 그에게 난 그저 웃음거리였을 뿐이다.직원들은 들것에 내 몸을 싣고 영안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유지환은 내 병실로 들어간 것이다.“여기로 실려 온 임혜원은 어디에 있죠?”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유지환은 간호사를 보며 물었다.간호사는 유지환을 보더니 다급하게 물었다.“유 선생님, 혹시 임혜원 씨와 아는 사이세요? 그게 임혜원 씨는 실려 올 때부터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저희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떠나시게 되었거든요.”“임혜원 씨 아버님은 현재 충격받고 쓰러진 상태세요. 지금 급하게 임혜원 씨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다음 절차를 진행하려던 참이었는데... 유 선생님이 임혜원 씨랑 아는 사이면 잘됐네요. 혹시 바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