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한번 알려줄 필요는 있었다.다음날, 내 문에 걸린 연꽃 장식품과 ‘욕망을 자제하라’는 커다란 스티커를 보며 만족스러웠다.엄마가 부른 공사팀이 곧 오는데 마침 나도 외지로 출장을 가야 했다.특별히 기사님께 이곳에 살아야 하기에 돈을 보태 밤새워 일해서 마감일을 앞당기라고 당부했다.푸들 씨와 오랫동안 다투었으니 나도 예의상 작은 선물을 보내야 하지 않겠나.어리둥절했다.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줄 수 없나.왜 푸들 씨가 상석에 앉아있는 걸까.우리 회사에서 함께 일하게 될 성우가 저 사람이었다.세상에 이런 일이.그가 나를 몰라서 다행이다. 아니면 우리 부서의 안쓰러운 실적이 또 날아갔을 테니까.“안녕하세요, 윤성입니다. 윤슬의 윤, 별 성을 따서 윤성이라고 지었습니다.”역시 성우는 성우다. 자기소개를 하는 목소리마저 나른하고 부드러운 게 아주 귀에 착 감겼다.윤성, 국내 유명 성우인데 오프라인 행사에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못생겨서 카메라 앞에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아마 그 사람들은 이 잘생긴 겉모습을 보게 된다면 아무 말도 못 하겠지.모습을 공개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니면 인기가 올라가면 우리 회사에서 그와 함께 일할 기회는 없으니까.어쩐지 여자 친구가 매일 가만두지 않더라니. 나였어도 매일 집에 숨겨두고 데리고 놀았을 거다.외모면 외모, 목소리면 목소리, 성격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우리 회사의 온갖 이상한 약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무니까.진 과장은 내가 웃음거리가 되길 바라서 나에게 계약을 넘긴 것 같은데 상대가 보자마자 사인할 줄이야.수익은 3:7, 예상 화제성에 도달해야 최종 지급이 이루어지며 일하는 기간도 장담할 수 없었다.이런 조건에 반박하거나 질질 끌지도 않는 상대는 무척 드물었다.계약서를 들고 본사로 돌아갈 때까지도 믿기지 않았다.진짜 푸들인가, 괴롭힘당해도 말을 안 하네.언젠가 보답하는 의미에서 쓸만한 것 좀 보내줘야지.진 과장의 믿을 수
깜짝 놀라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아무도 없는데? 문득 최근에 읽었던 서스펜스 소설이 떠올랐다.더러운 것에 씐 건 아니겠지?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남자가 더 무서워졌다.지나치게 탐닉하다가 몸이 허해서 귀신이 노린 걸까.아니면 왜 반나절 동안 말이 없지?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어디선가 순백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고양이가 우아하게 걸어가자 앞에 있던 180 남자가 그대로 꿇었다.저주인 건가.이해는 안 되지만 우선 나도 무릎을 꿇었다.남자는 새끼 고양이를 껴안고 안타깝게 울었다.할 말을 잃었다.너무 울어 목소리가 갈라져 말을 못 했던 걸까.말하자마자 당장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질 정도였다.내내 그가 죽을 결심을 한 줄 알았는데 고양이가 몰래 집을 나간 것 때문이었다.윤성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쪽이 왜 여기 있습니까?”나는 머리를 긁적였다.“그쪽 옆집에 살아요. 며칠 늦게 돌아올 거예요.”아무 일 없으니 이만 가볼 생각이었다. 이런 낭패한 꼴은 못 본 척하는 게 예의니까.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엄마가 부른 공사팀은 매우 신속하게 일주일 만에 집 전체에 방음 시설을 설치했다.회사 게임 사업부에서 나는 주로 인기 캐릭터의 대화 플롯을 편집한다.윤성과 계약한 후 회사에서는 캐릭터 프리뷰도 가장 먼저 공개했다.하지만 기대했던 칭찬이 아닌 내 대본 표절이 먼저 화제가 되었다.새집에서 포름알데히드를 들이마시던 난 어리둥절했다.내가 언제 표절을 했지? 왜 난 모르는 일일까.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열자 윤성이 착한 ‘딸’을 안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인터넷을 봤겠지.그를 집으로 들이자 역시나 첫 마디는 이러했다.“표절한 기사 봤어요?”“봤어요. 근데 난 장담컨대 표절 안 했어요.”“그쪽 믿어요. 회사에 연락해서 물어볼래요?”회사 홍보팀은 대체 뭐 하는 건지.먼저 나한테 전화하지도 않고 내가 전화를 걸어도 못 들은 척 받지 않는다.나는 무기력하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내 피규어에게 애도했다. 아가, 널 희생해도 내 명성을 되찾으면 돼.전에 회사에 보냈던 이력서를 살펴보니 역시나 이 이메일에서 겹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전에 입사할 땐 내 제안서에 콧방귀를 뀌더니 이젠 내 걸 그대로 가져다 썼다....윤성은 나에게 돈으로 배상해 주고 내 상사에게 연락해서 모든 증거를 종합해 주었다.회사 홍보팀도 재촉에 시달렸는지 그제야 서둘러 해명을 하고 상대 회사를 표절로 고소했다.진 과장이 단톡방에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곧 새로운 캐릭터 테스트를 공개할 예정인데 고생하기 싫은 낙하산은 당장 그만둬요.]모두의 노력이 담긴 성과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해결하니 또 비꼬면서 말한다.어쩌겠나, 나보다 지위가 높은 걸. 쓸모없는 것.그저 속으로만 욕을 퍼부을 뿐이다. 이번에 내 쪽에 문제가 생길 게 뭐람.근데 진 과장은 왜 우리 팀에 낙하산을 보낸 걸까.안경을 끼고 수줍어 보이는 남자가 나와 윤성이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아주 적극적으로 윤성에게 물을 건네고 옷도 들어주며 걸상도 건네는 걸 보아 말 잘 듣는 낙하산인 것 같다.윤성은 감기 때문에 요 며칠 컨디션이 좋지 않아 녹음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오늘은 이 정도만 하자고 했는데 낙하산이 절대 안 된다며 몇 번이고 다시 해보라는 말만 반복했다.분명 작업 일정이 충분한데 그는 계속 밀어붙였다.꼭 윤성을 스튜디오에 붙잡아둬야 하는 것처럼.일이 잘 안 풀리자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복도로 나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세상에, 이 외딴 녹음 스튜디오 아래에 이렇게 많은 차가 주차된 건 처음 본다.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이 수두룩하다.스튜디오로 돌아가서 윤성에게 휴대폰을 보라고 신호를 보냈다.그는 보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진 과장이 윤성의 외모를 이용해 제대로 화제를 끌어올 생각인 것 같다.지금 몰래 빠져나가지 않으면 나중에 기자들이 몰려올 거고 그가 인기를 끈다면 가장 큰 수혜자는 우리 회사다.
“찾지 마요. 이미 갔어요.”“송지민 씨, 무슨 배짱으로 그래요? 밖에 있는 기자들 데려오는 데 얼마를 썼는지 알아요?”눈앞에 남자는 전처럼 수줍어하지 않고 분노에 찬 표정으로 침까지 튀겼다.“이미 갔는데 그런 말 해도 소용없어요.”화를 내는 남자를 무시한 채 가방을 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뒤에서 남자가 떠나는 내 뒷모습을 노려보며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그렇게 매정하게 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충격, 여성 게임 디자이너 상사와 양다리.][여성 게임 디자이너, 팬심이 현실로.]다음 날 결국 윤성의 사진이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한 계정에서 내가 회사 고위 경영진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며 폭로했다.전에 표절 논란과 맞물려 순식간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심지어 누군가 내가 비싼 차에서 내리며 옆에 중년 남자가 나에게 싱긋 웃는 모습까지 찍었다.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이렇게 말했다.[표정 해명할 때부터 믿지 않았어. 어떻게 갓 졸업한 여대생이 저렇게 실감 나는 대본을 써.][또 어떤 한심한 형제님이 저 여자 실적 올려줬을까.][나 알아. 신영그룹 서 대표님이야. 상장한 회사 대표도 꼬시네. 역시 여자는 돈을 쉽게 벌어.][게임은 여자가 일하면 안 돼. 남자를 몰라.]계정에서는 나와 윤성이 스튜디오에 있는 사진도 올렸다.윤성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을 건네는 게 마치 내가 그에게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몸매가 괜찮았던 난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인터넷에선 이렇게 말했다.[몸매가 좋네. 저러니 남자들이 넘어가지.][저 여자 돈을 참 쉽게 벌어. 남자들이 일거리를 알아서 가져다주잖아.][듣기론 저 여자가 쓴 캐릭터가 윤성이라던데, 이젠 본인까지 꼬시네.][팬에서 여자가 된 거지.][윤성이 잘생기긴 했어.][맞아, 이런 더러운 여자가 우리 윤성 님께 들러붙다니.]곧 이 일이 불거져 우리 가족에게 인신공격을 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어제 스튜디오에는 세 명밖에 없는데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뻔했다.진 과장
그들이 들어온 후 문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나에게 달려드는 여자는 없었다.나 때문에 푸들 씨랑 헤어진 걸까?남자가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딸랑구’를 데리고 따지러 온 걸까.“문 앞에서 뭐 해요?”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착석했고 고양이는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떠나간 자기 엄마를 데려오라는 듯이.“저, 윤성 씨, 제가 해결할게요. 여자 친구분께는 제가 직접 찾아가서 사과할게요. 절대 일부러 화제성을 위해 조작한 건 아니에요.”남자는 당황한 듯 머리를 말리던 손을 멈칫하며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내가 너무 성의가 없었나?“아니면 지금 당장 그분께 전화해서 이번 일 다 설명할게요.”남자가 한층 더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니면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최대한 들어드릴게요.”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아뇨, 제가 언제 여자 친구가 있었는지 의아해서요. 제 주변 사람들을 다 생각해 봤는데 최근에 만난 여자는 그쪽밖에 없어요.”민망한 상황이다.그러면 그동안 밤에 들렸던 소리는 뭔가. 내 착각이었나.하지만 문 앞에 걸린 연꽃 그림도 아직 떼어내지 않았는데.이번엔 내가 침묵했다.머릿속에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남자 친구인가?푸들 씨가 바닥에 있는 고양이를 들어 올리며 털을 쓰다듬었다.“왜 나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요?”차라리 내가 고양이가 되어 저 담요를 냅다 긁고 싶었다.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까.“머리카락을 보니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아서요.”당신이 내는 앓는 소리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하나.상대의 얼굴은 태연한데 오히려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저희 쪽 해명이 필요한지 물어보려고 왔어요.”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그의 젖은 눈동자는 숲속의 사슴처럼 맑고 무해해 보였다.이 청순한 남자가 그 유명한 윤성이라니.“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해명할 필요는 없죠. 하지만 그쪽 얼굴이 공개되는 걸 막지는 못했어요. 미안해요.”“우리 둘
집으로 돌아와 우아한 몸짓으로 물건을 망가뜨리는 고양이를 보며 새로 산 커튼에 조용히 애도했다.남의 집 자식인데 때릴 수도 없으니 집을 버려야지.휴대폰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내가 올린 입장문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나에 대한 악플이 쇄도하고 있었다.고소장으로도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니.적당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파렴치하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지.내가 돈과 힘으로 편법을 쓴다며?그렇다면 제대로 보여주지.서남일이 이번 일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았다.그렇다면 어떻게 진 과장 그 뻔뻔한 놈을 끌어내릴지 생각해야 했다.고양이를 집에 두고 택시를 타고 지사로 향했다.낙하산이 아직도 있었다.녹음기를 켜고 미친 척 지사 담당자에게 따지러 갔다.남자는 유유히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휘젓기까지 했다.“안 좋은 소리 듣기 싫으면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본인 문제나 잘 반성해요, 송지민 씨.”낙하산이 가식을 떨었다.“지민 씨, 몸매가 이렇게 좋으니까 남자들이 괜한 생각을 하죠. 앞으로 조심하면 돼요. 네티즌들이 뭐라고 한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요.”“몸매가 좋은 게 잘못인가요? 많이 찾아보셨나 봐요, 아는 게 많으시네.”다른 직원이 미쳐 날뛰는 나를 보며 거들었다.“틀린 말도 아니죠. 지민 씨, 파리가 괜히 꼬이겠어요?”“그쪽이 파리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가요? 난 누가 내 사진 인터넷에 올린 건지 그거 알아내려고 왔어요.”커피를 천천히 홀짝이던 상사의 머그잔을 낚아채서 안경을 쓴 낙하산 직원에게 뿌렸다.상사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제야 짐짓 그럴듯하게 손해를 봐도 나쁠 게 없다며, 나에게 참고 넘어가라는 헛소리를 해댔다.“내가 이딴 쓰레기 같은 회사에 와서 죽 쒀서 개를 줬네요. 손해를 보는 게 좋아요? 그러면 본인이나 그런 좋은 일 누리세요. 전 그만둘 테니까.”안경남이 불쾌하게 말했다.“이 여자가 감히 나한테 커피를 뿌려? 남자 몇 명이랑
엄마가 비웃듯이 말했다.“와서 회사 물려받으면 좀 좋아? 아저씨 좋아 죽는다. 말해, 왜 갑자기 낙하산을 자처하는 건데?”“누가 힘으로 날 찍어 누르니까 나도 더 연기하고 싶지 않네. 끊어요 엄마. 분풀이 좀 하고 새사람 될 거야.”전화를 끊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여전히 배꼽 빠지게 웃는 꼴들을 보니 오늘 아주 실컷 웃게 할 생각이다.안으로 들어가니 안경남이 먼저 입을 열었다.“허, 그만둔다며? 왜 다시 왔어?”“여기서 나가. 여기 내 회사야.”“이야, 넘어져서 바보가 됐나.”“휴대폰 봐. 방금 이 지사 내 명의로 됐거든.”그들은 경멸의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말도 안 돼.”“뭐가 말이 안 돼. 네가 나보고 낙하산이라며? 당신들 해고야.”조금 전까지 가식적인 표정을 짓던 상사가 진짜로 울음을 터뜨렸다.“날 해고하지 마요. 난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데 회사 그만두면 못 살아요.”“그럼 누가 내 사진을 파파라치에게 팔았는지 알려주세요.”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시치미를 뗐다.상사는 망설이는 얼굴로 침만 삼킬 뿐 말이 없었다.옆에 있던 안경남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유난히 조용했고 전화기 너머 상대가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그래, 해고하면 하는 거지. 나중에 두고 봐.”상사도 당당한 그의 모습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나는 짐을 챙겨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무슨 일을 벌일지 궁금해졌다....정도진이 반나절 동안 준비한 건 기자회견이었다.집에 돌아와 잠시 쉬려고 TV를 켰는데 잘 차려입은 남자가 단상에 서서 따발총을 남발하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이 소동으로 인해 제 친한 친구가 상처를 입었거든요.”“두 사람은 정말로 그렇고 그런 관계인가요?”“루머인 거 아시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공개적으로 도촬한 사진을 유포하고 루머를 만들어
이 자식은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성격이다. 내가 눈이 멀어서 이런 놈을 만났지.단호하게 전화를 끊으며 이 자식을 무시했다.보아하니 낙하산과 진 과장이 날 겨냥해 루머를 퍼뜨려 내 명성을 더럽힌 것도 이 자식이 사주한 것 같았다.그에겐 최후의 카드겠지만 나는 아니다.집에서도 알았는지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이 거의 다 지워졌다.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내 뒤에 누가 있다는 말을 늘어놓았다.그깟 동영상이 뭐 볼 게 있다고 퍼지는지.재미없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남자는 다 개자식이라는 내 편견을 잠재울 거라며 소개해 준 맞선 상대가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문에서 작게 긁는 소리가 나서 열었더니 새끼 고양이가 작은 쪽지와 함께 초콜릿을 목에 걸고 있었다.새끼 고양이를 안고 들어가서 목에 걸린 쪽지를 떼어서 보니 정도진의 수려한 필체였다.[지금은 수컷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요. 뱅이는 여자애니까 옆에 있어 줄 거예요. 나랑 내일 아침 일찍 신고하러 가요. 여자의 순결은 육체에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용감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예요. 처음 런던에서 만났을 때부터 확신했어요. 초콜릿 먹으면 기분 좋아질 거고 뱅이가 아픈 마음 치유해 줄 거예요.”고양이가 내 팔을 잡았다. 말랑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는 초콜릿에 눌린 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뱅이야, 솔직하게 말해줬네. 네 아빠 테스트 통과해 주지 뭐.”불쌍하게 이곳으로 보내져 인형 역할을 해야 하는 고양이를 껴안고 깊이 잤다.다음 날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신고하는데 경찰이 전 남자 친구의 신상을 듣고 두 눈을 반짝였다.“틀림없나요? 이름 진연호, 남성, 29세, 삼천 영해 사람으로 같이 찍은 사진 있나요?”머리를 쥐어짰지만 휴대폰에서 그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는데 옆에 있는 정도진이 먼저 사진을 찾아냈다.“형사님, 이 사람인가요?”휴대폰 속엔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내가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활짝 웃고 옆에 그 망할 자식이 화가 난 얼굴로 있는 사
여전히 인터넷엔 나에 대한 소문이 떠돌지만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전부 받았다.진연호는 사형 집행 전에 나와 만나길 원했고 정도진이 나랑 함께 갔다.그가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송지민, 난 귀신이 돼서도 널 놔주지 않을 거야.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결국 네 손에 죽게 생겼네. 참 웃겨. 내가 너한테 못 해준 게 있어?”“진연호, 모두가 행복해야 진짜 좋은 거지. 집착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굴지 않는 거. 네가 날 가두었던 시간 동안 나는 우리 사이에 진정한 사랑은 없고 오직 변태적인 네 집착만 있다는 걸 깨달았어. 다음 생엔 인간으로 태어나지 마. 어차피 넌 평생 깨닫지 못할 테니까.”정도진이 옆에서 거들었다.“걱정 마요, 내가 좋은 도사님 찾아볼게요.”...우리 회사의 게임이 성공적으로 출시되었다.이전의 열풍으로 인해 이 게임의 인기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경찰서에서도 나와 우리 회사를 공개적으로 치하했다.게임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한 플레이어들 때문에 서버가 몇 번이고 마비되었다.아저씨는 돈을 쓸어모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정도진의 음성은 인터넷에 재차 편집되어 올라오며 입소문을 탔다.정도진의 사진이 떠올랐다.당시 유학 중이었을 때 구걸하고 있던 남자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돈을 주고 데려가서 빵도 사주었다.진연호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오지랖을 부리냐며 나한테 크게 화를 냈었고 나는 왜 아이도 질투하냐며 놀렸다.지금 생각하면 진작 낌새가 보였다.정도진과 결혼하던 날 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동안 품고 있던 의문들을 쏟아냈다.“도진 씨, 내가 이사 왔을 때 밤마다 왜 그런 소리를 냈어요?”술을 마신 정도진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대사랑 목소리 연습하고 있었어요. 그때 애정신 때문에 공부 중이었죠.”“아, 공부했구나. 효과가 있던가요?”흐릿했던 정도진의 눈빛은 사라지고 곧바로 나를 안아 들었다.내 귀에 바짝 다가와 입김을 불며 말했다.“직접 들어보면 알잖아요.”...서로를
이 자식은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성격이다. 내가 눈이 멀어서 이런 놈을 만났지.단호하게 전화를 끊으며 이 자식을 무시했다.보아하니 낙하산과 진 과장이 날 겨냥해 루머를 퍼뜨려 내 명성을 더럽힌 것도 이 자식이 사주한 것 같았다.그에겐 최후의 카드겠지만 나는 아니다.집에서도 알았는지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이 거의 다 지워졌다.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내 뒤에 누가 있다는 말을 늘어놓았다.그깟 동영상이 뭐 볼 게 있다고 퍼지는지.재미없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남자는 다 개자식이라는 내 편견을 잠재울 거라며 소개해 준 맞선 상대가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문에서 작게 긁는 소리가 나서 열었더니 새끼 고양이가 작은 쪽지와 함께 초콜릿을 목에 걸고 있었다.새끼 고양이를 안고 들어가서 목에 걸린 쪽지를 떼어서 보니 정도진의 수려한 필체였다.[지금은 수컷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요. 뱅이는 여자애니까 옆에 있어 줄 거예요. 나랑 내일 아침 일찍 신고하러 가요. 여자의 순결은 육체에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용감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예요. 처음 런던에서 만났을 때부터 확신했어요. 초콜릿 먹으면 기분 좋아질 거고 뱅이가 아픈 마음 치유해 줄 거예요.”고양이가 내 팔을 잡았다. 말랑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는 초콜릿에 눌린 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뱅이야, 솔직하게 말해줬네. 네 아빠 테스트 통과해 주지 뭐.”불쌍하게 이곳으로 보내져 인형 역할을 해야 하는 고양이를 껴안고 깊이 잤다.다음 날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신고하는데 경찰이 전 남자 친구의 신상을 듣고 두 눈을 반짝였다.“틀림없나요? 이름 진연호, 남성, 29세, 삼천 영해 사람으로 같이 찍은 사진 있나요?”머리를 쥐어짰지만 휴대폰에서 그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는데 옆에 있는 정도진이 먼저 사진을 찾아냈다.“형사님, 이 사람인가요?”휴대폰 속엔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내가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활짝 웃고 옆에 그 망할 자식이 화가 난 얼굴로 있는 사
엄마가 비웃듯이 말했다.“와서 회사 물려받으면 좀 좋아? 아저씨 좋아 죽는다. 말해, 왜 갑자기 낙하산을 자처하는 건데?”“누가 힘으로 날 찍어 누르니까 나도 더 연기하고 싶지 않네. 끊어요 엄마. 분풀이 좀 하고 새사람 될 거야.”전화를 끊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여전히 배꼽 빠지게 웃는 꼴들을 보니 오늘 아주 실컷 웃게 할 생각이다.안으로 들어가니 안경남이 먼저 입을 열었다.“허, 그만둔다며? 왜 다시 왔어?”“여기서 나가. 여기 내 회사야.”“이야, 넘어져서 바보가 됐나.”“휴대폰 봐. 방금 이 지사 내 명의로 됐거든.”그들은 경멸의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말도 안 돼.”“뭐가 말이 안 돼. 네가 나보고 낙하산이라며? 당신들 해고야.”조금 전까지 가식적인 표정을 짓던 상사가 진짜로 울음을 터뜨렸다.“날 해고하지 마요. 난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데 회사 그만두면 못 살아요.”“그럼 누가 내 사진을 파파라치에게 팔았는지 알려주세요.”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시치미를 뗐다.상사는 망설이는 얼굴로 침만 삼킬 뿐 말이 없었다.옆에 있던 안경남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유난히 조용했고 전화기 너머 상대가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그래, 해고하면 하는 거지. 나중에 두고 봐.”상사도 당당한 그의 모습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나는 짐을 챙겨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무슨 일을 벌일지 궁금해졌다....정도진이 반나절 동안 준비한 건 기자회견이었다.집에 돌아와 잠시 쉬려고 TV를 켰는데 잘 차려입은 남자가 단상에 서서 따발총을 남발하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이 소동으로 인해 제 친한 친구가 상처를 입었거든요.”“두 사람은 정말로 그렇고 그런 관계인가요?”“루머인 거 아시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공개적으로 도촬한 사진을 유포하고 루머를 만들어
집으로 돌아와 우아한 몸짓으로 물건을 망가뜨리는 고양이를 보며 새로 산 커튼에 조용히 애도했다.남의 집 자식인데 때릴 수도 없으니 집을 버려야지.휴대폰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내가 올린 입장문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나에 대한 악플이 쇄도하고 있었다.고소장으로도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니.적당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파렴치하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지.내가 돈과 힘으로 편법을 쓴다며?그렇다면 제대로 보여주지.서남일이 이번 일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았다.그렇다면 어떻게 진 과장 그 뻔뻔한 놈을 끌어내릴지 생각해야 했다.고양이를 집에 두고 택시를 타고 지사로 향했다.낙하산이 아직도 있었다.녹음기를 켜고 미친 척 지사 담당자에게 따지러 갔다.남자는 유유히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휘젓기까지 했다.“안 좋은 소리 듣기 싫으면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본인 문제나 잘 반성해요, 송지민 씨.”낙하산이 가식을 떨었다.“지민 씨, 몸매가 이렇게 좋으니까 남자들이 괜한 생각을 하죠. 앞으로 조심하면 돼요. 네티즌들이 뭐라고 한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요.”“몸매가 좋은 게 잘못인가요? 많이 찾아보셨나 봐요, 아는 게 많으시네.”다른 직원이 미쳐 날뛰는 나를 보며 거들었다.“틀린 말도 아니죠. 지민 씨, 파리가 괜히 꼬이겠어요?”“그쪽이 파리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가요? 난 누가 내 사진 인터넷에 올린 건지 그거 알아내려고 왔어요.”커피를 천천히 홀짝이던 상사의 머그잔을 낚아채서 안경을 쓴 낙하산 직원에게 뿌렸다.상사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제야 짐짓 그럴듯하게 손해를 봐도 나쁠 게 없다며, 나에게 참고 넘어가라는 헛소리를 해댔다.“내가 이딴 쓰레기 같은 회사에 와서 죽 쒀서 개를 줬네요. 손해를 보는 게 좋아요? 그러면 본인이나 그런 좋은 일 누리세요. 전 그만둘 테니까.”안경남이 불쾌하게 말했다.“이 여자가 감히 나한테 커피를 뿌려? 남자 몇 명이랑
그들이 들어온 후 문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나에게 달려드는 여자는 없었다.나 때문에 푸들 씨랑 헤어진 걸까?남자가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딸랑구’를 데리고 따지러 온 걸까.“문 앞에서 뭐 해요?”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착석했고 고양이는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떠나간 자기 엄마를 데려오라는 듯이.“저, 윤성 씨, 제가 해결할게요. 여자 친구분께는 제가 직접 찾아가서 사과할게요. 절대 일부러 화제성을 위해 조작한 건 아니에요.”남자는 당황한 듯 머리를 말리던 손을 멈칫하며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내가 너무 성의가 없었나?“아니면 지금 당장 그분께 전화해서 이번 일 다 설명할게요.”남자가 한층 더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니면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최대한 들어드릴게요.”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아뇨, 제가 언제 여자 친구가 있었는지 의아해서요. 제 주변 사람들을 다 생각해 봤는데 최근에 만난 여자는 그쪽밖에 없어요.”민망한 상황이다.그러면 그동안 밤에 들렸던 소리는 뭔가. 내 착각이었나.하지만 문 앞에 걸린 연꽃 그림도 아직 떼어내지 않았는데.이번엔 내가 침묵했다.머릿속에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남자 친구인가?푸들 씨가 바닥에 있는 고양이를 들어 올리며 털을 쓰다듬었다.“왜 나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요?”차라리 내가 고양이가 되어 저 담요를 냅다 긁고 싶었다.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까.“머리카락을 보니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아서요.”당신이 내는 앓는 소리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하나.상대의 얼굴은 태연한데 오히려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저희 쪽 해명이 필요한지 물어보려고 왔어요.”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그의 젖은 눈동자는 숲속의 사슴처럼 맑고 무해해 보였다.이 청순한 남자가 그 유명한 윤성이라니.“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해명할 필요는 없죠. 하지만 그쪽 얼굴이 공개되는 걸 막지는 못했어요. 미안해요.”“우리 둘
“찾지 마요. 이미 갔어요.”“송지민 씨, 무슨 배짱으로 그래요? 밖에 있는 기자들 데려오는 데 얼마를 썼는지 알아요?”눈앞에 남자는 전처럼 수줍어하지 않고 분노에 찬 표정으로 침까지 튀겼다.“이미 갔는데 그런 말 해도 소용없어요.”화를 내는 남자를 무시한 채 가방을 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뒤에서 남자가 떠나는 내 뒷모습을 노려보며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그렇게 매정하게 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충격, 여성 게임 디자이너 상사와 양다리.][여성 게임 디자이너, 팬심이 현실로.]다음 날 결국 윤성의 사진이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한 계정에서 내가 회사 고위 경영진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며 폭로했다.전에 표절 논란과 맞물려 순식간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심지어 누군가 내가 비싼 차에서 내리며 옆에 중년 남자가 나에게 싱긋 웃는 모습까지 찍었다.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이렇게 말했다.[표정 해명할 때부터 믿지 않았어. 어떻게 갓 졸업한 여대생이 저렇게 실감 나는 대본을 써.][또 어떤 한심한 형제님이 저 여자 실적 올려줬을까.][나 알아. 신영그룹 서 대표님이야. 상장한 회사 대표도 꼬시네. 역시 여자는 돈을 쉽게 벌어.][게임은 여자가 일하면 안 돼. 남자를 몰라.]계정에서는 나와 윤성이 스튜디오에 있는 사진도 올렸다.윤성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을 건네는 게 마치 내가 그에게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몸매가 괜찮았던 난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인터넷에선 이렇게 말했다.[몸매가 좋네. 저러니 남자들이 넘어가지.][저 여자 돈을 참 쉽게 벌어. 남자들이 일거리를 알아서 가져다주잖아.][듣기론 저 여자가 쓴 캐릭터가 윤성이라던데, 이젠 본인까지 꼬시네.][팬에서 여자가 된 거지.][윤성이 잘생기긴 했어.][맞아, 이런 더러운 여자가 우리 윤성 님께 들러붙다니.]곧 이 일이 불거져 우리 가족에게 인신공격을 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어제 스튜디오에는 세 명밖에 없는데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뻔했다.진 과장
마음속으로 조용히 내 피규어에게 애도했다. 아가, 널 희생해도 내 명성을 되찾으면 돼.전에 회사에 보냈던 이력서를 살펴보니 역시나 이 이메일에서 겹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전에 입사할 땐 내 제안서에 콧방귀를 뀌더니 이젠 내 걸 그대로 가져다 썼다....윤성은 나에게 돈으로 배상해 주고 내 상사에게 연락해서 모든 증거를 종합해 주었다.회사 홍보팀도 재촉에 시달렸는지 그제야 서둘러 해명을 하고 상대 회사를 표절로 고소했다.진 과장이 단톡방에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곧 새로운 캐릭터 테스트를 공개할 예정인데 고생하기 싫은 낙하산은 당장 그만둬요.]모두의 노력이 담긴 성과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해결하니 또 비꼬면서 말한다.어쩌겠나, 나보다 지위가 높은 걸. 쓸모없는 것.그저 속으로만 욕을 퍼부을 뿐이다. 이번에 내 쪽에 문제가 생길 게 뭐람.근데 진 과장은 왜 우리 팀에 낙하산을 보낸 걸까.안경을 끼고 수줍어 보이는 남자가 나와 윤성이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아주 적극적으로 윤성에게 물을 건네고 옷도 들어주며 걸상도 건네는 걸 보아 말 잘 듣는 낙하산인 것 같다.윤성은 감기 때문에 요 며칠 컨디션이 좋지 않아 녹음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오늘은 이 정도만 하자고 했는데 낙하산이 절대 안 된다며 몇 번이고 다시 해보라는 말만 반복했다.분명 작업 일정이 충분한데 그는 계속 밀어붙였다.꼭 윤성을 스튜디오에 붙잡아둬야 하는 것처럼.일이 잘 안 풀리자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복도로 나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세상에, 이 외딴 녹음 스튜디오 아래에 이렇게 많은 차가 주차된 건 처음 본다.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이 수두룩하다.스튜디오로 돌아가서 윤성에게 휴대폰을 보라고 신호를 보냈다.그는 보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진 과장이 윤성의 외모를 이용해 제대로 화제를 끌어올 생각인 것 같다.지금 몰래 빠져나가지 않으면 나중에 기자들이 몰려올 거고 그가 인기를 끈다면 가장 큰 수혜자는 우리 회사다.
깜짝 놀라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아무도 없는데? 문득 최근에 읽었던 서스펜스 소설이 떠올랐다.더러운 것에 씐 건 아니겠지?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남자가 더 무서워졌다.지나치게 탐닉하다가 몸이 허해서 귀신이 노린 걸까.아니면 왜 반나절 동안 말이 없지?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어디선가 순백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고양이가 우아하게 걸어가자 앞에 있던 180 남자가 그대로 꿇었다.저주인 건가.이해는 안 되지만 우선 나도 무릎을 꿇었다.남자는 새끼 고양이를 껴안고 안타깝게 울었다.할 말을 잃었다.너무 울어 목소리가 갈라져 말을 못 했던 걸까.말하자마자 당장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질 정도였다.내내 그가 죽을 결심을 한 줄 알았는데 고양이가 몰래 집을 나간 것 때문이었다.윤성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쪽이 왜 여기 있습니까?”나는 머리를 긁적였다.“그쪽 옆집에 살아요. 며칠 늦게 돌아올 거예요.”아무 일 없으니 이만 가볼 생각이었다. 이런 낭패한 꼴은 못 본 척하는 게 예의니까.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엄마가 부른 공사팀은 매우 신속하게 일주일 만에 집 전체에 방음 시설을 설치했다.회사 게임 사업부에서 나는 주로 인기 캐릭터의 대화 플롯을 편집한다.윤성과 계약한 후 회사에서는 캐릭터 프리뷰도 가장 먼저 공개했다.하지만 기대했던 칭찬이 아닌 내 대본 표절이 먼저 화제가 되었다.새집에서 포름알데히드를 들이마시던 난 어리둥절했다.내가 언제 표절을 했지? 왜 난 모르는 일일까.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열자 윤성이 착한 ‘딸’을 안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인터넷을 봤겠지.그를 집으로 들이자 역시나 첫 마디는 이러했다.“표절한 기사 봤어요?”“봤어요. 근데 난 장담컨대 표절 안 했어요.”“그쪽 믿어요. 회사에 연락해서 물어볼래요?”회사 홍보팀은 대체 뭐 하는 건지.먼저 나한테 전화하지도 않고 내가 전화를 걸어도 못 들은 척 받지 않는다.나는 무기력하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한번 알려줄 필요는 있었다.다음날, 내 문에 걸린 연꽃 장식품과 ‘욕망을 자제하라’는 커다란 스티커를 보며 만족스러웠다.엄마가 부른 공사팀이 곧 오는데 마침 나도 외지로 출장을 가야 했다.특별히 기사님께 이곳에 살아야 하기에 돈을 보태 밤새워 일해서 마감일을 앞당기라고 당부했다.푸들 씨와 오랫동안 다투었으니 나도 예의상 작은 선물을 보내야 하지 않겠나.어리둥절했다.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줄 수 없나.왜 푸들 씨가 상석에 앉아있는 걸까.우리 회사에서 함께 일하게 될 성우가 저 사람이었다.세상에 이런 일이.그가 나를 몰라서 다행이다. 아니면 우리 부서의 안쓰러운 실적이 또 날아갔을 테니까.“안녕하세요, 윤성입니다. 윤슬의 윤, 별 성을 따서 윤성이라고 지었습니다.”역시 성우는 성우다. 자기소개를 하는 목소리마저 나른하고 부드러운 게 아주 귀에 착 감겼다.윤성, 국내 유명 성우인데 오프라인 행사에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못생겨서 카메라 앞에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아마 그 사람들은 이 잘생긴 겉모습을 보게 된다면 아무 말도 못 하겠지.모습을 공개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니면 인기가 올라가면 우리 회사에서 그와 함께 일할 기회는 없으니까.어쩐지 여자 친구가 매일 가만두지 않더라니. 나였어도 매일 집에 숨겨두고 데리고 놀았을 거다.외모면 외모, 목소리면 목소리, 성격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우리 회사의 온갖 이상한 약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무니까.진 과장은 내가 웃음거리가 되길 바라서 나에게 계약을 넘긴 것 같은데 상대가 보자마자 사인할 줄이야.수익은 3:7, 예상 화제성에 도달해야 최종 지급이 이루어지며 일하는 기간도 장담할 수 없었다.이런 조건에 반박하거나 질질 끌지도 않는 상대는 무척 드물었다.계약서를 들고 본사로 돌아갈 때까지도 믿기지 않았다.진짜 푸들인가, 괴롭힘당해도 말을 안 하네.언젠가 보답하는 의미에서 쓸만한 것 좀 보내줘야지.진 과장의 믿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