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지안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 개XX, 전에 뭐라고 했더라? 소아연과는 그냥 친한 오빠와 동생 사이일 뿐이라며! 하, 이혼서류 처리도 아직 안 끝났는데 벌써 호텔행?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네.][너희 아직 법적으로 부부잖아? 이건 명백한 혼인 중 외도야! 이참에 그냥 제대로 엿 먹여! 위자료 제대로 받고, 재산분할도 확실하게 받아! 무조건 빈털터리로 만들어버려!]나는 어이없게 웃었다. ‘지안이가 저렇게 흥분한 이유가 다 있었네...’하지만 심사언을 빈털터리로 만들 수
지금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예전의 나는, 심사언과 소아연이 조금만 가까워져도 가슴이 미어지고, 질투와 분노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진짜... 웃긴다...’심사언은 내가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냐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나를 보는 그 눈.아무 말도 하지 않던 내 머릿속에 뭔가 스쳐가는 게 있었다.“지금 인터넷에 당신 불륜 어쩌고 떠도는 거 봤어. 아마 상대 쪽에서 먼저 터트린 거 같아. 빨리 대응 안 하면 타격 클 것 같아.”나는 심사언이 소아연이랑 잘 되어가는 게 정
예전에 나는 심사언한테 진심으로 말한 적이 있다. 몇 가지 기억이 정말 안 난다고.그 말에 심사언은 무언가 희망을 본 사람처럼 커다란 걸음을 내디뎠고, 곧장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여보, 진짜였어? 정말 기억을 잃은 거야?”심사언은 지금, 진심으로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이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잊고, 이혼하자고 그렇게 단호했던 이유가 성립하니까.그래야만, 그가 소아연과 호텔에 있다는 기사가 터졌을 때, 내가 아무렇지 않게 남편을 변호하려 한 행동들이 설명되니까.‘심사언이
심사언과 소아연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심사언은 소아연을 무척 아꼈다. 특히 늘 소아연을 먼저 챙겼고, 나보다도 그녀를 위해 더 많이 움직였다. 위험한 순간에도, 먼저 손 내밀어준 대상은 내가 아닌 소아연이었다. 심사언이 소아연에게 그간 해준 것들은 그냥 친구 사이엔 도저히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해주는 건, 그건... 사랑 아닌가?’‘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답답한 마음에 내 머리를 감싸 쥐던 그때, 해외에 의뢰한 민간 조사기관의 메일이 도착했
“아연 씨, 제발 진정해요. 다치면 안 돼요. 이번엔 안 됐지만... 다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김은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소아연은 더 폭발했다.“다음? 진짜 다음이 있다고 생각해? 진짜?” ‘이 바보야... 내가 심사언이 어떤 사람인 줄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심사언은 같은 실수 두 번은 안 해. 다시는... 그 사람이 술에 취해 나한테 마음의 문을 열 일은 없어...’ 그날 밤처럼, 소아연이 그렇게 쉽게 심사언의 곁으로 갈 기회는...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심사언과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는 충분히 준비했고, 이제는 마음의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구은호에게 연락했다. 정지호 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구은호가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는 길 내내, 나는 너무 긴장해서 심호흡만 벌써 수십 번은 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구은호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까지 긴장 안 해도 돼. 이설 씨는 정 교수님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잖아요.”“그래서 더 무서운 거잖아요.” ‘교수님... 날 얼마나 아꼈는데... 난 그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으니까.’ 나는 앞으로는 다시
심사언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소아연이 자기 배를 손으로 잡고 힘없이 중얼거렸다.“사언 오빠... 나, 배가 너무 아파...”그 한마디에, 심사언은 마치 모든 걸 잊은 사람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곧장 소아연을 두 팔로 안아 들고,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며 날 노려보았다.“당신, 이혼서류 깔끔하게 받고 싶으면, 다른 남자랑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으로 가서 나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 그때 다시 얘기하자.”이 말과 동시에, 그는 소아연을
“F학점이 싫으면 공부를 더 해요. 여기 와서 편법 쓰지 말고.”정지호 교수님의 단호하고 날카로운 한마디에, 나와 구은호는 동시에 눈을 마주보았다. ‘설마... 진짜로 누가 정 교수님한테 로비를 시도한 거야? 간도 크네.’정지호 교수님은 서화대학교에서 냉철하기로 유명한 원칙주의자였다. 누가 어떤 ‘집안’이든, 무슨 대단한 연줄을 대든, 정지호 교수님의 기준 앞에선 전부 무용지물이었다.대체 누가 이런 무모한 짓을...? 혹시 교수님이 잠시 강의 안 하셨을 때 들어온 신입생인가?정지호 교수님은 한동안 강의를 내려놨다
세상에는 친딸에게도 아랑곳하지 않는 엄마도 있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수 있는 엄마도 있었다.나는 박만화처럼 솔직한 엄마가 좋았다. 그리고 박만화 같은 엄마를 둔 딸이 부러웠다.“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여기서 나가든 못 나가든, 언니가 딸과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내 말이 끝나자, 박만화의 눈가가 붉어지며 울컥한 감정을 애써 참는 듯했다.박만화는 정말 좋은 엄마였다. 간신히 지켜낸 딸과 함께 정말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그래서 나에게 한가지 약속했다.“사모님, 여
엄기준 변호사가 보석 절차를 처리하러 나간 후, 나는 다시 구치소 안의 생활실로 돌아왔다. 챙길 것도 딱히 없었고,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던 터라 그냥 자리에서 눈이라도 붙이려는 순간, 누군가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내 뒤엔 금속으로 된 수납장이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부딪치면 그 충격에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거리. 하물며 온몸에 철심이 박힌 내 몸은, 한 번만 잘못 넘어져도 반신불수는 각오해야 했다.‘이대로 밀리면 끝이야.’나는 전혀 방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나는 생각에 잠겨
심사언은 내가 갑자기 그와 소아연을 이어주려는 듯한 말을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쾌하게 말했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랑 아연이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왜 자꾸 나랑 아연이를 엮는 건데?”‘왜냐하면, 당신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애니까.’‘그렇게까지 아끼고 지키는 모습이, 도대체 사랑이 아니면 뭔데?’‘우리 엄마 말대로, 사랑에 ‘과거’가 그렇게 중요하면, 이 세상에 다시 시작할 사랑은 하나도 없지. 옛날 황제도 새어머니랑 결혼했다는데, 너는 왜 못 해?’‘나더러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심사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럴 수밖에 없었다.심사언이 말한 내가 소아연을 해친 ‘그 일’ 말고는, 나는 단 한 번도 누굴 해치거나, 도덕적으로 선을 넘은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내가 계속 물었다. “심사언, 우리는 8년이나 알고 지냈어. 사귄 건 7년이고. 그런데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됨됨이를 믿어주지 않았어.” “누가 영상 하나 들이밀자, 아무 확인도 없이,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했지. 그걸 보고 ‘이설이가 그랬을 거야’라고 확신했잖아.”“그렇게 쉽게, 나를 믿는 대신 의심을 택
다음 날 아침, 구치소 직원이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면회가 있다는 말에 나는 당연히 엄기준 변호사가 보석 절차를 준비해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나타난 사람은... 심사언이었다.심사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눈가엔 온통 핏줄이 터져 있었고, 밤새 단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구치소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밤을 보낸 나보다도 더 초라해 보였다.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룻밤 지났으니까, 이제 생각 좀 정리됐
엄마의 눈빛은 잠시나마 흔들렸다. 그제야 문득 떠올린 듯했다. 내가 엄마가 열 달 동안 품에 안고 세상에 낳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딸’이라는 사실을.오빠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지만, 그 복잡함 속에 가장 도드라진 건 묘한 안도감이었다. 내가 구속되어 수년간 살아야 한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인생이 된다.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빠는 그 사실에... 속으로 안심하고 있었다.결국, 나를 감옥에 넣은 건 내 친부모, 피 한 방울 다르지 않은 오빠, 그리고... 함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감싸며 ‘공식 사과만 하면 된다’고 말하던 심사언조차 더는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남자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지금이 마지막이야. 이 기회마저 놓치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지도 몰라.”심사언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내가 계속 버티고,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나를 직접 법정에 세울 것이다. 소아연이 심사언의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이었다. 한참 아름다워야 할 나이에, 인생이 무너졌다. 그 뒤로도 소아연
“당신, 진짜 감옥 가고 싶어?!”나는 더 또박또박 말했다. “감옥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법이 가장 공정한 판단을 해줄 거라고 믿어.”심사언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 정말 대단해. 증거가 눈앞에 이렇게 뻔히 있는데도, 아직도 아니라고 잡아떼?” 나는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 혹시... 내가 한 짓이 아닐 가능성은 생각해 봤어?” “안 했다고? 그럼 영상 속 여자는 뭐야? 그게 본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영상 속 사람
정말 모두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심사언과 나 사이의 상황이 한순간에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예전의 심사언은 성공한 뒤 백마 탄 공주 같은 첫사랑에게 잘해주고, 그와 함께 바닥부터 올라온 조강지처인 나를 무시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가진 거 다 내던지며 심사언을 도왔는데, 결국 돌아온 건 냉대와 외면이었다.그런데 지금? 심사언은 나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내가 뭘 하든 무조건 감싸주고, 보호하는 남편이 되었다. 그렇게까지 망가뜨린 소꿉친구 여동생을 두고도, 나를 감싸겠다며 날 감옥에 안 보내려고 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