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언은 나를 아내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부부 사이의 육체적인 관계만큼은 집착했다.이건 전형적인 쓰레기 같은 남자의 행동이었다. 그런데, 과거의 나는 그런 심사언의 행동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다.‘정말로 나를 싫어하고, 지겨워했다면 나를 원하지 않았겠지.’‘이렇게까지 나를 갈망하는데, 분명 사랑하는 거겠지.’‘...’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안다. 남자는 사랑하지 않아도 여자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몸을 허락한다. 사랑이 끝나면, 손끝만 닿아도 역겨워진다.즉, 남자
나는 심사언에게 역겹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몸 상태로는 술에 취한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그래서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날 놔줘. 이렇게 붙잡고 있으면 너무 불편해.”심사언은 내 말을 듣고 조금 느슨하게 팔을 풀었지만, 완전히 놓아주지는 않았다.나는 계속해서 말했다.“다시는 예전처럼 하지 않겠다며? 그럼 자기 진심을 보여줘야지.”“그동안 나한테 준 상처가 얼마나 큰데,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내가 바로 용서해야 해?”그가 나를 물에 빠뜨린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
왕자현이 심사언에게 처음 추천한 요리는 토마토 달걀볶음이었다.조리법이 매우 간단하고 실패할 확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냥 토마토를 썰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달걀과 함께 볶으면 그만이었다. 소금만 적당히 넣어 간을 맞추면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음식이었다.하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다는 심사언이라는 남자는 이 쉬운 요리마저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망쳐버렸다.왕자현은 단칼에 포기했다.‘심 대표 손에 칼을 쥐여준 내 잘못이야.’대신, 실패할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요리를 생각했다.바로, 빵 굽기.심사언은 나를 위해
심사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그는 이제야 기억해 냈다. 견과류를 좋아하는 사람이 소아연이었다.왕자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빵을 만들 때도, 자신은 분명 말했으니까.심사언이 견과류를 너무 많이 넣자, 왕자현은 바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봐온 사모님은 한 번도 견과류를 드신 적이 없어요. 아마 안 좋아하시는 걸지도 몰라요.”하지만 심사언은 단호했다.“아니에요. 이설이는 견과류를 제일 좋아해요.”그가 그렇게 확신하자 왕자현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다양한 견과류 요리를 준비해야겠다고
지안은 엄지를 치켜들며 환하게 웃었다.“아주 좋아, 완벽해!”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나는 주변 사람 모두를 기억하면서도, 딱 한 사람, 심사언만 완벽하게 잊었다.‘그러니까, 정말 완벽하지 않나?’나는 머릿속에서 심사언을 깔끔하게 지워냈다.“좋아, 그 개 같은 놈은 인제 그만 잊고,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제대로 즐겨야지!”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주로 만들어주겠다는 듯, 나는 지안의 팔짱을 끼고 활짝 웃었다.그런데 바로 그때였다.쿵!엄청난 충격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우리
“여보.” 심사언은 정신을 차리고 곧장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나 그가 소아연 곁을 지나치는 순간, 멀쩡히 서 있던 소아연이 갑자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사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다급하게 소아연을 받아 안았다. 마치 내 존재 따위는 전혀 기억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남자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소아연은 나를 향해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흥, 수작 부릴 줄만 알면 뭐 해. 네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주면 좋겠는데.’ 소아연이 바닥에 쓰러지자, 왕여정이 잽싸게 다가갔다. “아
“그건 아연이 어머니의 유언이라고! 오늘은 아연이 어머니의 생신이잖아!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제발 그만 좀 해, 아연이 생각 조금만 해 주면 안 되겠어?” 심사언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재주가 좋았다는 사실을. 내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심사언의 가슴을 찔러댔고, 그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한참 후, 심사언은 소아연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설이는 아직 철이 없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이건 그냥 이설이에게 줘.”
양진성, 내가 대학 2학년이었을 때 교통사고를 당했던 그 동창.그 아주머니는 바로 양진성의 어머니였다.그녀는 조심스럽지만, 애타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다급하게 말했다.“이설 학생, 정말 미안해요. 이런 부탁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이설 학생이 연구하던, 사람을 다시 걷게 해주는 인공지능 칩... 그 연구는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혹시... 희망이 있나요?”“우리 진성이가 학교 다닐 때 집에 와서 자주 이설 학생 이야기를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천재적인 사람이라고요.”“이설
세상에는 친딸에게도 아랑곳하지 않는 엄마도 있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수 있는 엄마도 있었다.나는 박만화처럼 솔직한 엄마가 좋았다. 그리고 박만화 같은 엄마를 둔 딸이 부러웠다.“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여기서 나가든 못 나가든, 언니가 딸과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내 말이 끝나자, 박만화의 눈가가 붉어지며 울컥한 감정을 애써 참는 듯했다.박만화는 정말 좋은 엄마였다. 간신히 지켜낸 딸과 함께 정말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그래서 나에게 한가지 약속했다.“사모님, 여
엄기준 변호사가 보석 절차를 처리하러 나간 후, 나는 다시 구치소 안의 생활실로 돌아왔다. 챙길 것도 딱히 없었고,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던 터라 그냥 자리에서 눈이라도 붙이려는 순간, 누군가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내 뒤엔 금속으로 된 수납장이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부딪치면 그 충격에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거리. 하물며 온몸에 철심이 박힌 내 몸은, 한 번만 잘못 넘어져도 반신불수는 각오해야 했다.‘이대로 밀리면 끝이야.’나는 전혀 방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나는 생각에 잠겨
심사언은 내가 갑자기 그와 소아연을 이어주려는 듯한 말을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쾌하게 말했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랑 아연이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왜 자꾸 나랑 아연이를 엮는 건데?”‘왜냐하면, 당신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애니까.’‘그렇게까지 아끼고 지키는 모습이, 도대체 사랑이 아니면 뭔데?’‘우리 엄마 말대로, 사랑에 ‘과거’가 그렇게 중요하면, 이 세상에 다시 시작할 사랑은 하나도 없지. 옛날 황제도 새어머니랑 결혼했다는데, 너는 왜 못 해?’‘나더러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심사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럴 수밖에 없었다.심사언이 말한 내가 소아연을 해친 ‘그 일’ 말고는, 나는 단 한 번도 누굴 해치거나, 도덕적으로 선을 넘은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내가 계속 물었다. “심사언, 우리는 8년이나 알고 지냈어. 사귄 건 7년이고. 그런데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됨됨이를 믿어주지 않았어.” “누가 영상 하나 들이밀자, 아무 확인도 없이,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했지. 그걸 보고 ‘이설이가 그랬을 거야’라고 확신했잖아.”“그렇게 쉽게, 나를 믿는 대신 의심을 택
다음 날 아침, 구치소 직원이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면회가 있다는 말에 나는 당연히 엄기준 변호사가 보석 절차를 준비해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나타난 사람은... 심사언이었다.심사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눈가엔 온통 핏줄이 터져 있었고, 밤새 단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구치소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밤을 보낸 나보다도 더 초라해 보였다.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룻밤 지났으니까, 이제 생각 좀 정리됐
엄마의 눈빛은 잠시나마 흔들렸다. 그제야 문득 떠올린 듯했다. 내가 엄마가 열 달 동안 품에 안고 세상에 낳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딸’이라는 사실을.오빠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지만, 그 복잡함 속에 가장 도드라진 건 묘한 안도감이었다. 내가 구속되어 수년간 살아야 한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인생이 된다.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빠는 그 사실에... 속으로 안심하고 있었다.결국, 나를 감옥에 넣은 건 내 친부모, 피 한 방울 다르지 않은 오빠, 그리고... 함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감싸며 ‘공식 사과만 하면 된다’고 말하던 심사언조차 더는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남자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지금이 마지막이야. 이 기회마저 놓치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지도 몰라.”심사언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내가 계속 버티고,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나를 직접 법정에 세울 것이다. 소아연이 심사언의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이었다. 한참 아름다워야 할 나이에, 인생이 무너졌다. 그 뒤로도 소아연
“당신, 진짜 감옥 가고 싶어?!”나는 더 또박또박 말했다. “감옥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법이 가장 공정한 판단을 해줄 거라고 믿어.”심사언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 정말 대단해. 증거가 눈앞에 이렇게 뻔히 있는데도, 아직도 아니라고 잡아떼?” 나는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 혹시... 내가 한 짓이 아닐 가능성은 생각해 봤어?” “안 했다고? 그럼 영상 속 여자는 뭐야? 그게 본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영상 속 사람
정말 모두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심사언과 나 사이의 상황이 한순간에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예전의 심사언은 성공한 뒤 백마 탄 공주 같은 첫사랑에게 잘해주고, 그와 함께 바닥부터 올라온 조강지처인 나를 무시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가진 거 다 내던지며 심사언을 도왔는데, 결국 돌아온 건 냉대와 외면이었다.그런데 지금? 심사언은 나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내가 뭘 하든 무조건 감싸주고, 보호하는 남편이 되었다. 그렇게까지 망가뜨린 소꿉친구 여동생을 두고도, 나를 감싸겠다며 날 감옥에 안 보내려고 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