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자 연수호는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 하연서를 데려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번쩍거리는 술집 간판을 보고 하연서는 마음속으로 후회하기 시작했다.“내가 이런 곳에 어울릴까요?”“어울리지 않을 건 뭔데요?”연수호가 두말없이 하연서를 끌고 차에서 내렸다.“친구들이 안에서 기다린단 말이에요.”하연서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연수호와 안으로 향했다. 떠나갈 듯한 음악 소리와 짙은 향수 냄새가 하연서를 반겼다. 인파를 비집고 VIP석으로 향한 연수호는 하연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옆자리에 앉히더니 친구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만해요. 그만해요.”하지만 아무리 말려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하연서는 신고하는 수밖에 없었다....15분 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해 싸움에 가담한 사람을 전부 연행했다. 경찰서로 따라가 진술서를 작성하고 밝은 곳으로 나온 하연서는 그제야 연수호의 얼굴에 든 멍을 발견했다. 더 심각한 건 찢어진 이마에서 새어 나온 피가 콧등까지 흘러내린 것이다.“어쩌다 이런 거예요?”하연서가 얼른 가지고 다니던 물티슈를 꺼내 연수호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상처는 크지 않은 것 같은데 경찰한테 말해볼게요. 일찍 가도 되는지
차 안의 분위기는 매우 긴장해 연수호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정확하게 들렸다.하연서가 삼촌과 조카 지간을 번갈아보며 계속 망설이다가 목을 축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연지훈 씨, 이 문제는 사실 내가...”“스물살 넘게 먹고 아직도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는 게 누구 잘못 같아요? 수호 잘못이지.”연지훈이 어두운 목소리로 하연서의 말을 잘라버렸다. 말투만 들으면 굉장히 언짢아 보였다. 한밤중에 술집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연지훈은 연수호가 싸워서 경찰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옷 차림으로 집에서 나왔다. 하연서가 무사하니
“그러면...”연수호가 연지훈을 바라보자 연지훈이 입을 열었다.“앞으로 나도 데리고 다녀.”연수호가 멈칫했다. 연지훈의 입이 움직이는 걸 보지 않았다면 두 귀를 의심했을지 모른다.“넌 미덥지 않으니까 보호자가 한 명 필요할 거 같아.”연지훈이 연수호를 힐끔 째려보더니 말했다.“왜? 의견 있어?”“아니요.”연수호는 다른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배시혁을 별장에 데려다준 하연우는 구급상자를 찾아 상처를 치료해 줬다. 어둡지만 부드러운 불빛 속에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었다.하
배씨 저택.배시혁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젯밤 남긴 흔적을 지우려고 셔츠를 잡아당겼다. 하연우가 아직 별장에 남아있었기에 배시혁은 집을 나서기 전 일찍 돌아가 하씨 저택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던 터라 배시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할아버지,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연서 일로 찾으신 거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나랑 연서는...”날아온 찻잔에 화들짝 놀란 배시혁이 본능적으로 피하자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부서졌다.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면 정말 머리에 피가 터졌을지도 모른다.배시혁이 고개를 찌푸렸다.“할아버지, 할아버지 손주는 나에
“Q”는 막강하기 그지없는 국제 조직이었고 상류사회에만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돈만 주면 어떤 임무든 완성할 수 있었다.그중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이름을 알린 업계 거물이 있었지만 성격이 기괴해 기분에 따라 임무를 받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제일 골치 아픈 일이었기에 지성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내가 잘 신경 쓸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하연서 씨를 설득해 항암 치료를 받게 하는 거야.”연지훈이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알았어.”그러고는 핸드폰을 내려놓는데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수호가 호들갑을 떠는 소리였
연수호가 현관에 앉아 CCTV를 확인하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연서를 바라봤다.“누나, 그 쓰레기가 찾아왔는데 나가서 쫓아버릴까요?”이에 젓가락을 들고 있던 하연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연지훈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경비 불러줄 수 있어요.”“여기서 신세 지내는 것도 미안한데 이런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하연서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현관으로 향했다. 연수호가 따라나서려는데 하연서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어떻게든 혼자 맞서려는 하연서를 보며 연수호도
‘삼촌이 어쩌다 좋은 사람이 된 건 좋은데 관심 정도가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밤이 되어서야 하연서가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보이는 낯선 얼굴에 화들짝 놀란 하연서가 물었다.“누구세요?”“소개할게요. 나는 지성현이라고 지훈이 친구이자 지훈이 가정 주치의에요.”지성현이 하연서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그리고 지금은 성북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요. 필요하면 찾아오세요.”하연서가 명함을 받는 대신 가볍게 입을 열었다.“명함을 쓰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네요.”“하연서 씨, 병이 무섭다고 치료하지 않으면 쓰나요?”
“황 대표님과 사모님이 금실이 좋아 보여서요. 학창 시절부터 연애해서 지금까지 연을 이어왔다고 들었는데 황 대표님은 소문난 애처가라던데요?”하연서는 황 대표와 협업하기 위해 황 대표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오늘 두 눈으로 직접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하연서도 뭔가에 홀린 듯 이런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며 배시혁을 오랫동안 사랑했고 언젠간 그들도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그런 부부가 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웃음거리가 되었고 누구든 이를 빌미로 하연서를 조롱하려 들었다. 운
이 대표가 얼른 슈트를 주웠다.“내가... 내가 다시 똑같은 걸로 사다가 보내줄게요.”“아니요.”연지훈이 모델을 매섭게 쏘아보자 화들짝 놀란 모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이 대표가 가슴을 치며 약속했다.“책임지고 사라지게 할게요.”모델이 넋을 잃었다. 어젯밤만 해도 결혼하자고 칭얼대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를 버린 것이다.모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도 하연서는 조금의 쾌감도 느끼지 못했고 그저 무료하게만 느껴졌다.“그만 가요.”하연서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자 연지훈이 그 뒤를 바짝 따
“콜록콜록...”이 여사가 기침하며 눈빛으로 그 여자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모델은 그 눈빛을 무시한 채 빨간 입술을 다시 열었다.“언니, 좀 가르쳐줘요. 나도 언니처럼 돈 많은 남자 만나고 싶어요.”다른 참석자들이 서로 눈치만 볼 뿐 상황을 모르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복잡한 눈빛이 오가는데 하연서가 그 모델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그쪽은 안 돼요.”모델이 멈칫하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왜요?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 게다가 젊은데.”“실컷 가지고 놀다 버림받은 주제에 무슨 자격으
연지훈 같은 인물이 참가하는 파티라면 업계 거물들과 거래를 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업기밀이 오갈 수도 있었다.하연서는 자신의 포지션을 파티에 도착한 일반 파트너이기에 겨우 체면을 차리는 데 쓰이는 행거칩 정도라고 생각했다.연지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하연서를 보며 설명 대신 자신의 팔 위에 올려진 하연서의 손을 바라봤다.“가요.”두 사람이 파티장에 들어서자 많은 참석자의 시선이 쏠렸다. 곧이어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와 인사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연 대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보네. 어떻게 파티에 여자를 데려올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하연우가 실눈을 뜨고 계좌에 적힌 숫자를 열심히 세봤다. 사업 자금뿐만이 아니라 지분 분할 후 현금화한 돈까지 들어있어 하연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이제 돈이 들어왔으니 하연서도 나름 부자 행렬에 오른 것이다.연지훈이 하연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무슨 일인데 그렇게 기뻐요?”하연서가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 연지훈에겐 하찮을 수 있는 금액이라 딱히 자랑하지도 않았다.“아니에요. 그냥 내가 갖고 싶었던 물건을 가졌거든요.”“배시혁이 돈을 돌려준 거예요?”연지훈이 물
이연희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더니 결국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만약 연서가 정말 장난친 거라면 나는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배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말 할아버지가 연서랑 짠 거라면 할아버지가 연서를 너무 예뻐하는데. 연서랑 결혼하면 할아버지가 어떻게든 나를 통제하려고 할 텐데 연서가 옆에서 돕는다면 나는 영원히 연서의 그늘에서 살 수밖에 없잖아.’생각이 깊어질수록 연시훈의 마음도 무거워졌다....별장.연지훈이 하연서의 방 앞을 서성였지만 문을 두드리진 못했다. 하연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
둘째 하연호가 제일 먼저 반응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시혁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왜...”“무슨 그런 장난을 해요?”배시혁이 씁쓸하게 웃었다.“가능하다면 나도 이게 장난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걸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어요.”배시혁의 진지한 표정에 불안해진 이연희가 배시혁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말해. 연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머리에 종양이 자랐는데 위치가 좋지 않아서 성공 확률이 매우 낮대요.”하씨 가문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기에 다들
연지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여기서 사람을 납치해 가겠다는 말인가요? 그런 거라면 하씨 가문의 힘이 그 정도 되는지부터 생각해 봐요. 협박의 의미가 다분하게 담겨있는 말투에 하도영이 멈칫했다. 하연서가 직접 따라나서지 않으면 하씨 가문도 달리 어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언니.”하연우가 울먹이며 하연서를 부르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줘요... 더는 엄마, 아빠랑 싸우지 마요 네?”이에 하연호가 하연우를 말렸다.“뭐 하는 거야, 일어나.”“연우야, 네가 빌긴 왜 빌어.”이연희가 갈라진
가을이 되자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하연서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호숫가에 심은 나무들이 바람에 따라 날리는 걸 바라봤다. 낙엽도 바람에 맞춰 나비처럼 훨훨 춤을 추다 바닥에 떨어졌다.며칠 동안 조용히 쉬었더니 정신상태도 훨씬 맑아진 것 같았다. 노크 소리에 하연서가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연지훈 씨, 오늘은 출근 안 하나요?”“주말이에요.”연지훈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하연서에게 라테 한잔을 건네줬다.“내가 내린 건데 맛 좀 봐봐요.”“고마워요”하연서가 두 손으로 컵을 받아 들자 따듯한 기운이 두 손을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