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아영 변호사와 오후 3시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차가 막히는 바람에 몇 분 늦고 말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김아영은 이미 도착해있었고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부럽다...’사실 예전에는 나도 직장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2년 전에 임신했을 때 장상혁은 아이를 위해서 일을 그만두라고 설득했었다. 후에 아이를 잃고 나서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더니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집에서 장승열을 보살피라고 했다.김아영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뭘 그렇게 봐요?”“아, 오셨어요? 요즘 아주 핫한 동영상을 보고 있었어요. 어떤 남자가 금방 아이를 잃은 아내를 안고 우는 영상이에요.”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병원에서 투신했다는 그 영상 말인가요?”“네. 맞아요.”나는 씁쓸하게 웃었다.“그 남자가 바로 제 남편 장상혁입니다.”김아영은 멈칫하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내저으면서 웃었다.“아까 댓글에 어떤 네티즌이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남자한테 와이프가 있고 이 여자를 위해서 위독한 아버지마저 거들떠보지도 않았대요. 그렇지 않아도 영상을 보면서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하나 씨 남편이었군요.”“제 요구는 간단해요. 그냥 순조롭게 이혼했으면 좋겠어요.”내가 원하는 건 이혼이었다. 장상혁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고 돈 때문에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그것뿐인가요?”“그것뿐입니다.”김아영은 더는 묻지 않고 이혼 합의서를 작성한 후 나에게 보냈다.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 영상을 보았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전부 좋은 댓글이었는데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사실 지난번에 사람들이 다 이 남자를 좋게 평가해서 뭐라 하진 않았는데요. 이 남자 관상이 별로예요. 딱 봐도 아주 무정한 사람이에요.][선생님, 저도 좀 봐주실 수 있어요?][관상은 과학입니다. 여러분이 이 남자한테 속은 것 같아서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얘기
경찰서에 와서 벌금을 내고 배상에 관해 상의하고 사인한 다음 가도 된다고 했다.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경찰서에 가서 이혼 얘기를 꺼내기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단둘이 그와 이혼 얘기를 나눌 용기가 없었다.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장상혁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아주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결국 벌금을 냈고 상대에게 6백만 원을 배상했다.장상혁은 의자에 놓았던 외투를 챙기고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형님이 올 시간이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너한테 연락한 거야.”나는 보기만 해도 역겨운 남자를 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장상혁, 우리 이혼하자.”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나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진심이야?”“진심이야.”그런데 그는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나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땐 나랑 결혼하겠다고 그렇게 매달리더니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장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왔다. 잠재의식 속에 있던 공포가 다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와 대치할 준비를 충분히 마쳤다고 생각했는데도 저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려 뒷걸음질 쳤다.“난 동의 못 해. 왜냐하면...”장상혁은 나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지영이 복수를 못 했거든. 만약 그날에 나더러 오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지영이한테 그런 일이 없었을 거야. 나도 모든 걸 잃지 않았을 거고.”멀리서 보면 그가 나를 껴안은 것처럼 보였다. 장상혁은 할 얘기를 마치더니 웃으면서 옷깃을 정리해주었다.“왜냐하면 난 널 사랑하니까.”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얘기를 했다.“날 사랑한다고? 허. 날 사랑한다는 사람이 아버님이 위독하다는데 다른 여자랑 같이 있어? 날 사랑한다는 사람이 아버님 장례식에서 나한테 손찌검하고 죽으라고 해? 그뿐만이 아니라 아버님 장례식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여자한테 갔잖아.”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 녹음을 들려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
“지금 당장 그 사람들 옆으로 가서 속죄해!”대체 어디서 칼을 꺼냈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장상혁, 문 열어!”이 곤경을 어떻게 벗어날까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는데 바로 장태일이었다.나는 바로 달려가 문을 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장상혁이 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까.“장상혁,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열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장상혁은 줄곧 장태일을 존경했다. 그런데 장태일의 말을 들은 순간 두 눈에 살기가 스쳤다. 그는 나를 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대체 언제부터 장태일이랑 붙어먹었어? 응? 내가 지금 널 사랑하지 않고 터치하지 않으니까 굶주려서 형한테 매달린 거야? 임하나, 넌 정말 상스러운 년이야!”“장상혁, 다른 사람도 너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랑 장태일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평소에 연락도 별로 하지 않는다고. 나한테 말도 안 되는 누명 씌우지 마.”“장태일 씨? 엄청 다정하게 부르네? 그런데도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럼 그날 어떻게 두 사람이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갔어? 계속 네 옆에 딱 붙어있는 거 봤어. 그리고 지금 얼마나 조급해하는지 봐봐. 이런데도 발뺌할 거야?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그러고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나에게 손찌검을 하려던 그때 나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서 그의 얼굴에 뿌렸다.그가 얼굴을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사이 나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장태일이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갑자기 나온 나를 보고는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그에게서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장상혁이 날 죽이려 해요. 완전히 미쳤어요.”“걱정하지 말아요. 신고했으니까 경찰이 곧 올 거예요.”떨리던 마음이 드디어 조금 진정되었다. 장상혁이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칼을 든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장태일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피해요. 저 사람 칼 들고 있어요.”하지만 장태일이 빨리 피했는데도
장상혁의 하얀 셔츠가 이미 빨갛게 물들었다.장태일은 축 늘어진 장상혁을 보더니 당황해하며 칼을 던졌다. 그러고는 복부의 상처를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몇몇 경찰이 장태일을 제압했다.“이거 놔, 놓으라고! 난 아무 죄가 없어. 정당방위야. 그래. 정당방위! 쟤가 날 죽이려고 해서 살려고 그랬어. 이거 놔!”경찰이 장상혁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맥박이 약하게 뛰고 숨을 쉬는 걸 보고는 재빨리 구급차를 불렀다.잠시 후 구급차가 와서 장상혁과 장태일을 병원에 실어갔다.사건의 당사자 중 한 명인 나는 경찰과 함께 경찰서로 갔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스스로 제작한 고춧물만 사용했다. 그리고 칼에도 나의 지문이 없고 이웃들의 증언까지 더해져 바로 풀려났다.장상혁은 심하게 다친 바람에 병원으로 가는 길에 죽고 말았다.하지만 장태일은 장상혁에게 이미 반항할 힘이 없는 걸 알면서도 칼로 몇 번 더 찔렀다. 그 바람에 장상혁은 제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었고 결국 과잉방위로 유기징역 10년 3개월을 선고받았다.장상혁의 직계 가족인 나는 간단하게 장례식을 치러주었다.나는 장상혁의 묘비 앞에서 그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홀가분함이었다.그만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장태일의 아내인 유지애가 찾아왔다. 그녀는 검은색 세단에서 내렸고 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목구비가 잘생긴 남자의 두 눈에는 유지애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지애는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색 코트를 입은 채 장상혁에게 국화꽃을 내려놓았다.“당신을 구한 건 나예요.”그녀는 장상혁의 묘비 앞에 서서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와 말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네?”유지애가 나를 돌아보았다.“하나 씨를 구한 건 나라고요. 그날 장태일한테 장상혁이 화를 내면서 뛰쳐나갔다고 했거든요.”나는 그것이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다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아버지 장승열이 내 앞에 쓰러져있었다.어릴 적부터 피 공포증이 있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런데 휴대전화의 잠금을 해제한 순간 전생에서 남편이 식칼로 나를 찌르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그 고통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아 남편에게 전화하려던 충동을 가라앉히고 남편의 사촌 형인 장태일에게 전화를 걸었다.장태일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 빨리 와. 아버님이 쓰러지셨는데 피를 엄청 많이 흘렸어. 어떡해? 나 피 공포증이 있는 거 알잖아. 빨리 와!”나는 당황한 나머지 전화를 잘못 건 것처럼 울먹거리며 말했다.“지금 당장 갈 테니까 진정해요. 당황하지 말고.”장태일네 집이 우리 집과 매우 가까웠다. 평소 도보 10분 거리도 안 되었다.아니나 다를까 5분도 채 안 되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재빨리 문을 열어 장태일을 보고 놀란 척했다.“아주버님? 저 남편한테 전화한 거 아니었어요?”그는 설명하지 않고 장승열을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나더러 얼른 따라오라고 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장태일의 옷에 피가 흥건했다.“환자분의 직계 가족분 계신가요? 위독한 상황이라 직계 가족분이 사인해야 합니다.”간호사가 위급 통지서를 들고 응급실에서 다급하게 뛰쳐나왔다.“제가 며느리예요. 제가 사인할게요.”“안 됩니다. 반드시 직계 가족분이 사인해야 해요.”그러고는 옆에 있는 장태일을 쳐다보았다.“전 조카예요.”장태일의 말에 간호사가 얼굴을 찌푸렸다.“다른 가족분은요?”“간호사님, 일단 수술부터 해주세요. 제가 직계 가족한테 연락하겠습니다.”간호사는 위급 통지서를 들고 다시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장태일이 보는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두 번 모두 거절하다가 세 번째 만에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켠 바람에 장상혁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왜 계속 전화질이야? 죽고 싶어?”“여보, 아버님이 방금 쓰러지셨는데 피를
장태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큰소리로 욕했다.“X발.”그러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장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는 고개를 들어 고마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장상혁이 전화를 받자마자 장태일이 큰소리로 말했다.“장상혁,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든 당장 성세 병원으로 와!”휴대전화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는데 사람이 붐비는 곳에 있는 듯했다.“형? 임하나 걔도 정말 대박이야. 이젠 형까지 끌어들여서 연기하게 해? 걔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게 놔둘 거지, 형까지 왜 나서서 이러는 건데? 진짜 바쁜 일이 있어서 같이 장난할 새가 없어. 내가 매번 지영이를 만날 때마다 집에 들어오라고 갖은 핑계를 대더라고. 근데 이번에는 형까지 불렀을 줄은 몰랐어. 어쩜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지, 참.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장상혁은 장태일의 얘기도 듣지 않고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포기하지 않고 계속 장상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건 딱딱한 기계음뿐이었다.처음에 분노하던 장태일도 점점 무력해지면서 실망에 빠졌다. 결국 장상혁은 장태일의 번호마저 차단해버렸다.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장태일은 들려오는 기계음에 대고 냅다 욕설을 퍼부었다.나는 두 손을 꼭 잡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사실은 자꾸만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전화를 나에게 건넸다.“제 걸로 해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나는 휴대전화를 받고 감사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통화연결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상혁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나의 목소리를 듣더니 다짜고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내가 없으면 못 살아? 지금 네 목소리만 들어도 역겨워 죽겠어. 정말 너랑 한시도 같이 못 살겠으니까 돌아가면 당장 이혼해. 어리석은 년.”그러고는 또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나를 동정하던 사람들이 이젠 하나같이 분
“꿇어! 큰아버지 찾겠다며? 이 유골함에 있어. 네가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다고 해도 어떻게 우리가 다 널 속인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 사람이 어쩜 이렇게 뻔뻔해?”장태일이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자 그의 아내 유지애가 진정하라고 팔을 토닥였다. 그런데 장태일이 너무 흥분한 탓인지 유지애는 동작을 멈추고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장상혁은 유골함과 내가 안고 있는 장승열의 영정사진을 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잡아 뜯으면서 목놓아 울부짖었다.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무섭게 쳐다보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다 네 탓이야. 아버지 연세도 많으신데 며느리인 네가 잘 보살펴드리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야. 생전에 효도하지 못했으니 저세상에 가서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해. 죽어! 죽어! 죽으라고!”장상혁은 내가 아무런 방어 준비도 하지 못한 틈에 나의 목을 힘껏 졸랐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무렵 나의 목을 꽉 조르던 손이 갑자기 풀렸다.나는 힘겹게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장태일과 다른 한 남자가 장상혁을 끌어낸 것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장태일이 장상혁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정신 좀 차려!”이미 눈이 뒤집힌 장상혁이 장태일과 주먹질하려던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 벨 소리가 한지영이 녹음한 음성이었는데 한지영만의 벨 소리로 설정해놓았다.아무래도 장상혁이 한지영을 정말 끔찍이도 사랑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전화를 차분하게 받으니 말이다.“여보세요? 알았어. 지금 당장 갈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그러고는 전화를 끊고 가려고 했다.“어디 가? 큰아버지 친아들이라는 자식이 마지막 길도 배웅해드리지 않으려고?”장태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장상혁을 쳐다보았다.“여기 사람도 많은데 나 하나 없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어? 지영이한테 내가 필요하니까 지금 당장 가봐야 해.”말을 마친 그가 밖으로 걸어
장상혁의 하얀 셔츠가 이미 빨갛게 물들었다.장태일은 축 늘어진 장상혁을 보더니 당황해하며 칼을 던졌다. 그러고는 복부의 상처를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몇몇 경찰이 장태일을 제압했다.“이거 놔, 놓으라고! 난 아무 죄가 없어. 정당방위야. 그래. 정당방위! 쟤가 날 죽이려고 해서 살려고 그랬어. 이거 놔!”경찰이 장상혁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맥박이 약하게 뛰고 숨을 쉬는 걸 보고는 재빨리 구급차를 불렀다.잠시 후 구급차가 와서 장상혁과 장태일을 병원에 실어갔다.사건의 당사자 중 한 명인 나는 경찰과 함께 경찰서로 갔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스스로 제작한 고춧물만 사용했다. 그리고 칼에도 나의 지문이 없고 이웃들의 증언까지 더해져 바로 풀려났다.장상혁은 심하게 다친 바람에 병원으로 가는 길에 죽고 말았다.하지만 장태일은 장상혁에게 이미 반항할 힘이 없는 걸 알면서도 칼로 몇 번 더 찔렀다. 그 바람에 장상혁은 제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었고 결국 과잉방위로 유기징역 10년 3개월을 선고받았다.장상혁의 직계 가족인 나는 간단하게 장례식을 치러주었다.나는 장상혁의 묘비 앞에서 그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홀가분함이었다.그만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장태일의 아내인 유지애가 찾아왔다. 그녀는 검은색 세단에서 내렸고 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목구비가 잘생긴 남자의 두 눈에는 유지애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지애는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색 코트를 입은 채 장상혁에게 국화꽃을 내려놓았다.“당신을 구한 건 나예요.”그녀는 장상혁의 묘비 앞에 서서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와 말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네?”유지애가 나를 돌아보았다.“하나 씨를 구한 건 나라고요. 그날 장태일한테 장상혁이 화를 내면서 뛰쳐나갔다고 했거든요.”나는 그것이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다들
“지금 당장 그 사람들 옆으로 가서 속죄해!”대체 어디서 칼을 꺼냈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장상혁, 문 열어!”이 곤경을 어떻게 벗어날까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는데 바로 장태일이었다.나는 바로 달려가 문을 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장상혁이 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까.“장상혁,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열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장상혁은 줄곧 장태일을 존경했다. 그런데 장태일의 말을 들은 순간 두 눈에 살기가 스쳤다. 그는 나를 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대체 언제부터 장태일이랑 붙어먹었어? 응? 내가 지금 널 사랑하지 않고 터치하지 않으니까 굶주려서 형한테 매달린 거야? 임하나, 넌 정말 상스러운 년이야!”“장상혁, 다른 사람도 너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랑 장태일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평소에 연락도 별로 하지 않는다고. 나한테 말도 안 되는 누명 씌우지 마.”“장태일 씨? 엄청 다정하게 부르네? 그런데도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럼 그날 어떻게 두 사람이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갔어? 계속 네 옆에 딱 붙어있는 거 봤어. 그리고 지금 얼마나 조급해하는지 봐봐. 이런데도 발뺌할 거야?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그러고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나에게 손찌검을 하려던 그때 나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서 그의 얼굴에 뿌렸다.그가 얼굴을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사이 나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장태일이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갑자기 나온 나를 보고는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그에게서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장상혁이 날 죽이려 해요. 완전히 미쳤어요.”“걱정하지 말아요. 신고했으니까 경찰이 곧 올 거예요.”떨리던 마음이 드디어 조금 진정되었다. 장상혁이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칼을 든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장태일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피해요. 저 사람 칼 들고 있어요.”하지만 장태일이 빨리 피했는데도
경찰서에 와서 벌금을 내고 배상에 관해 상의하고 사인한 다음 가도 된다고 했다.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경찰서에 가서 이혼 얘기를 꺼내기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단둘이 그와 이혼 얘기를 나눌 용기가 없었다.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장상혁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아주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결국 벌금을 냈고 상대에게 6백만 원을 배상했다.장상혁은 의자에 놓았던 외투를 챙기고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형님이 올 시간이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너한테 연락한 거야.”나는 보기만 해도 역겨운 남자를 보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장상혁, 우리 이혼하자.”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나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진심이야?”“진심이야.”그런데 그는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나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땐 나랑 결혼하겠다고 그렇게 매달리더니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장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왔다. 잠재의식 속에 있던 공포가 다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와 대치할 준비를 충분히 마쳤다고 생각했는데도 저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려 뒷걸음질 쳤다.“난 동의 못 해. 왜냐하면...”장상혁은 나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지영이 복수를 못 했거든. 만약 그날에 나더러 오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지영이한테 그런 일이 없었을 거야. 나도 모든 걸 잃지 않았을 거고.”멀리서 보면 그가 나를 껴안은 것처럼 보였다. 장상혁은 할 얘기를 마치더니 웃으면서 옷깃을 정리해주었다.“왜냐하면 난 널 사랑하니까.”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얘기를 했다.“날 사랑한다고? 허. 날 사랑한다는 사람이 아버님이 위독하다는데 다른 여자랑 같이 있어? 날 사랑한다는 사람이 아버님 장례식에서 나한테 손찌검하고 죽으라고 해? 그뿐만이 아니라 아버님 장례식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여자한테 갔잖아.”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 녹음을 들려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
나는 김아영 변호사와 오후 3시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차가 막히는 바람에 몇 분 늦고 말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 김아영은 이미 도착해있었고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부럽다...’사실 예전에는 나도 직장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2년 전에 임신했을 때 장상혁은 아이를 위해서 일을 그만두라고 설득했었다. 후에 아이를 잃고 나서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더니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집에서 장승열을 보살피라고 했다.김아영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뭘 그렇게 봐요?”“아, 오셨어요? 요즘 아주 핫한 동영상을 보고 있었어요. 어떤 남자가 금방 아이를 잃은 아내를 안고 우는 영상이에요.”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병원에서 투신했다는 그 영상 말인가요?”“네. 맞아요.”나는 씁쓸하게 웃었다.“그 남자가 바로 제 남편 장상혁입니다.”김아영은 멈칫하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내저으면서 웃었다.“아까 댓글에 어떤 네티즌이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남자한테 와이프가 있고 이 여자를 위해서 위독한 아버지마저 거들떠보지도 않았대요. 그렇지 않아도 영상을 보면서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하나 씨 남편이었군요.”“제 요구는 간단해요. 그냥 순조롭게 이혼했으면 좋겠어요.”내가 원하는 건 이혼이었다. 장상혁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고 돈 때문에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그것뿐인가요?”“그것뿐입니다.”김아영은 더는 묻지 않고 이혼 합의서를 작성한 후 나에게 보냈다.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 영상을 보았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전부 좋은 댓글이었는데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사실 지난번에 사람들이 다 이 남자를 좋게 평가해서 뭐라 하진 않았는데요. 이 남자 관상이 별로예요. 딱 봐도 아주 무정한 사람이에요.][선생님, 저도 좀 봐주실 수 있어요?][관상은 과학입니다. 여러분이 이 남자한테 속은 것 같아서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얘기
장례식이 끝난 후 장상혁은 장승열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묘비에 붙은 사진을 보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억장이 무너질 것처럼 통곡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너무 통쾌했고 남은 거라곤 원망밖에 없었다.장상혁과 단둘이 있을 용기가 없어 사람들이 다 있을 때 이혼 얘기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장상혁의 휴대전화가 또 울렸다.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상대는 그가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걸 기세였다.결국 세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장상혁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지면서 당장 떠나려 했다.“또 어디 가려고?”장태일이 언짢은 얼굴로 장상혁을 불렀다.“형, 지영이한테 일이 생겼어. 지영이 아들이 금방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지영이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겠다고 난리도 아니래. 지금 당장 가봐야 해.”그 소리에 나는 가소롭기만 했다. 2년 전에 나와 장상혁에게도 아이가 생겼었다.그런데 그 아이는 나와 인연이 아니었는지 배 속에서 6개월 만에 내 곁을 떠났다. 그때 내가 통곡했을 때 장상혁은 뭐라 했는가?그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아이가 때를 잘못 찾아왔다며 나중에 때가 되면 다시 아이를 가지자고 했다.그땐 내가 사랑에 눈이 먼 바람에 내가 속상해할까 봐 그렇게 말하는 줄 알고 일부러 씩씩한 척했었다. 나중에서야 아이를 잃게 만든 장본인이 장상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는 엄청난 양의 낙태약을 내가 매일 저녁 마시는 우유에 타서 줬고 휴대전화 전자파가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휴대전화도 가져갔다. 한밤중에 배가 아파서 깨어나 도움을 청하려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나는 홀로 이웃집으로 기어가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했다. 결국 나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그런데 지금 자기 핏줄도 아닌 아이에게 이렇게도 정성을 쏟아붓는 장상혁의 모습이 나는 가소롭기만 했다.장태일이 나를 돌아보며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장상혁은 이미 차를 몰고 휙 가버렸다.차라리 나
“꿇어! 큰아버지 찾겠다며? 이 유골함에 있어. 네가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다고 해도 어떻게 우리가 다 널 속인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 사람이 어쩜 이렇게 뻔뻔해?”장태일이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자 그의 아내 유지애가 진정하라고 팔을 토닥였다. 그런데 장태일이 너무 흥분한 탓인지 유지애는 동작을 멈추고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장상혁은 유골함과 내가 안고 있는 장승열의 영정사진을 보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잡아 뜯으면서 목놓아 울부짖었다.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무섭게 쳐다보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다 네 탓이야. 아버지 연세도 많으신데 며느리인 네가 잘 보살펴드리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야. 생전에 효도하지 못했으니 저세상에 가서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해. 죽어! 죽어! 죽으라고!”장상혁은 내가 아무런 방어 준비도 하지 못한 틈에 나의 목을 힘껏 졸랐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무렵 나의 목을 꽉 조르던 손이 갑자기 풀렸다.나는 힘겹게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장태일과 다른 한 남자가 장상혁을 끌어낸 것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장태일이 장상혁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정신 좀 차려!”이미 눈이 뒤집힌 장상혁이 장태일과 주먹질하려던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 벨 소리가 한지영이 녹음한 음성이었는데 한지영만의 벨 소리로 설정해놓았다.아무래도 장상혁이 한지영을 정말 끔찍이도 사랑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전화를 차분하게 받으니 말이다.“여보세요? 알았어. 지금 당장 갈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그러고는 전화를 끊고 가려고 했다.“어디 가? 큰아버지 친아들이라는 자식이 마지막 길도 배웅해드리지 않으려고?”장태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장상혁을 쳐다보았다.“여기 사람도 많은데 나 하나 없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어? 지영이한테 내가 필요하니까 지금 당장 가봐야 해.”말을 마친 그가 밖으로 걸어
장태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큰소리로 욕했다.“X발.”그러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장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는 고개를 들어 고마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장상혁이 전화를 받자마자 장태일이 큰소리로 말했다.“장상혁,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든 당장 성세 병원으로 와!”휴대전화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는데 사람이 붐비는 곳에 있는 듯했다.“형? 임하나 걔도 정말 대박이야. 이젠 형까지 끌어들여서 연기하게 해? 걔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게 놔둘 거지, 형까지 왜 나서서 이러는 건데? 진짜 바쁜 일이 있어서 같이 장난할 새가 없어. 내가 매번 지영이를 만날 때마다 집에 들어오라고 갖은 핑계를 대더라고. 근데 이번에는 형까지 불렀을 줄은 몰랐어. 어쩜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지, 참.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장상혁은 장태일의 얘기도 듣지 않고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포기하지 않고 계속 장상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건 딱딱한 기계음뿐이었다.처음에 분노하던 장태일도 점점 무력해지면서 실망에 빠졌다. 결국 장상혁은 장태일의 번호마저 차단해버렸다.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장태일은 들려오는 기계음에 대고 냅다 욕설을 퍼부었다.나는 두 손을 꼭 잡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사실은 자꾸만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전화를 나에게 건넸다.“제 걸로 해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나는 휴대전화를 받고 감사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통화연결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상혁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나의 목소리를 듣더니 다짜고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내가 없으면 못 살아? 지금 네 목소리만 들어도 역겨워 죽겠어. 정말 너랑 한시도 같이 못 살겠으니까 돌아가면 당장 이혼해. 어리석은 년.”그러고는 또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나를 동정하던 사람들이 이젠 하나같이 분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아버지 장승열이 내 앞에 쓰러져있었다.어릴 적부터 피 공포증이 있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런데 휴대전화의 잠금을 해제한 순간 전생에서 남편이 식칼로 나를 찌르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그 고통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아 남편에게 전화하려던 충동을 가라앉히고 남편의 사촌 형인 장태일에게 전화를 걸었다.장태일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 빨리 와. 아버님이 쓰러지셨는데 피를 엄청 많이 흘렸어. 어떡해? 나 피 공포증이 있는 거 알잖아. 빨리 와!”나는 당황한 나머지 전화를 잘못 건 것처럼 울먹거리며 말했다.“지금 당장 갈 테니까 진정해요. 당황하지 말고.”장태일네 집이 우리 집과 매우 가까웠다. 평소 도보 10분 거리도 안 되었다.아니나 다를까 5분도 채 안 되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재빨리 문을 열어 장태일을 보고 놀란 척했다.“아주버님? 저 남편한테 전화한 거 아니었어요?”그는 설명하지 않고 장승열을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나더러 얼른 따라오라고 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장태일의 옷에 피가 흥건했다.“환자분의 직계 가족분 계신가요? 위독한 상황이라 직계 가족분이 사인해야 합니다.”간호사가 위급 통지서를 들고 응급실에서 다급하게 뛰쳐나왔다.“제가 며느리예요. 제가 사인할게요.”“안 됩니다. 반드시 직계 가족분이 사인해야 해요.”그러고는 옆에 있는 장태일을 쳐다보았다.“전 조카예요.”장태일의 말에 간호사가 얼굴을 찌푸렸다.“다른 가족분은요?”“간호사님, 일단 수술부터 해주세요. 제가 직계 가족한테 연락하겠습니다.”간호사는 위급 통지서를 들고 다시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장태일이 보는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두 번 모두 거절하다가 세 번째 만에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켠 바람에 장상혁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왜 계속 전화질이야? 죽고 싶어?”“여보, 아버님이 방금 쓰러지셨는데 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