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재철은 김지아의 표정을 살피며 긴장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러나 김지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됐어요. 일어나세요.”“정말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기자님을 용서해서라기보다는 기자님께서 저를 위해 해주셔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육재철은 얼른 일어섰다. 이제는 더 이상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김지아 씨, 뭐든 시켜만 주세요.”“당분간 하초연 씨에 대해 좀 알아봐 줬으면 해요. 하초연 씨에 대한 소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로 생각하는데...”육재철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겠죠?”“네! 잘 알겠습니다!”“보수도 드리겠습니다. 하초연 씨가 준 금액의 두 배로요.”육재철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 듯 김지아를 바라보았다.김지아는 여유 있게 미소 지었다.“하지만 한 가지, 내가 원하는 건 진짜 사실이어야 해요.”“물론입니다. 안심하세요!”김지아는 육재철에게 명함과 은행 계좌를 요구했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뒤에서 누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는지 알게 된 순간, 김지아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전태성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김지아를 보자마자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대표님께서 차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운전기사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전태성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힐 때까지 예의를 갖추며 지켜봤다. 그러고는 권재혁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전태성은 문을 열고 들어가 김지아가 육재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고했다.권재혁은 그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고했어. 나가서 일 봐.”...권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지아는 계속해서 권재혁의 행동을 떠올렸다.‘나를 도와준 건가?’기자 회견에 함께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어디 가는데?”최유진은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다.“가보면 알아.”“뭘 또 신비스럽게 알려주지도 않고 그래?”통화를 하는 중 택시가 웨딩숍 앞에 도착하자 김지아는 바로 전화를 끊고 택시에서 내려 웨딩숍으로 들어갔다.김지아를 자주 봤던 웨딩숍 직원들은 그녀가 최유진을 찾으러 왔다는 걸 알고는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각자 자신이 할 일들을 해나갔다.김지아는 익숙하게 로비를 지나서 뒤쪽에 자리 잡은 사무실로 걸어가 서슴없이 최유진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최유진은 편하게 소파에 앉아 복숭아를 먹으며 태블릿 PC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영상에는 김지아의 기자회견에 나타났던 권재혁이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기자회견을 마치고는 김지아의 허리를 감싸안고 떠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김지아가 화면을 잠깐 훑어보자, 최유진은 같은 영상을 반복 재생으로 보고 있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최유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몇 번이나 본 거야?”최유진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했다.“별로 안 많아. 한 열 번쯤?.”“그걸 뭐 하러 그렇게 많이 봐?”“권재혁이 너무 신기해서. 사적으로는 너한테 엄청 차가운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다정한 척 연기를 했다는 거잖아. 배우를 하지 왜? 연기력이 아깝다.”김지아도 최유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런 말을 최유진한테서 직접 들으니 왠지 무안해져 이내 화제를 바꿨다.“참, 너랑 같이 갈 곳이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어딘데?”최유진은 동영상을 끄고 태블릿 PC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클럽.”“무슨 클럽?”“일단 옷부터 골라줘. 저녁에 뭘 입을지 아직 결정 못 했어.”최유진이 사무실 한편에 한 줄로 늘어선 옷장 문을 일일이 열자, 안에는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옷들이 걸려 있었다.전부 최신 유행하고 있는, 화려하지만 촌스럽지는 않은 디자인이었다.자신만의 브랜드 설립이 최유진의 오랜 꿈이었지만, 현재 실력으로는 웨딩숍을 하나 운영하기만으로도 벅찼다.김지아는 웃으며 옷장 앞으로 다
“너 심진우는 어떻게 알게 된 건데?”최유진은 심진우한테 푹 빠진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촬영할 때 내가 엄청난 고객을 한 분 접대했거든. 그 고객이 날 데리고 더블유에 한번 갔었어. 그때 만난 거야.”“그때 딱 한 번 본 거야?”최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오늘이 두 번째가 되는 거지. 오늘 밤에는 그 사람이 요청해서 가는 거야. 술, 음료 전부 무료거든. 괜찮지 않아? 내 생각에는 그 사람도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김지아는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짚었다.심진우가 최유진한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건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심진우는 최유진의 몸을 원한다는 거였다.소문에 의하면 심진우는 자기 눈에 들어온 여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함께 잠자리를 가진다는 거였다.“오늘 안 가면 안 돼?”최유진은 입을 삐쭉 내밀고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왜?”“몸이 좀 불편해서.”“방금까지 괜찮았잖아.”“갑자기 좀 불편해.”김지아는 얼렁뚱땅 핑계를 만들어 냈다.“매우 불편해? 네가 못 가면 나 혼자라도 갈래.”최유진의 고집에 김지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현재 최유진의 머릿속에는 심진우라는 사람으로 꽉 차 있을 거로 생각한 김지아는 고심 끝에 최유진을 따라 클럽에 가기로 했다.김지아는 최소한 자신이라도 있으면 심진우가 최유진을 어떻게 못 할 거로 생각했다.아홉 시에 출발한 두 사람은 아홉 시 이십 분쯤 더블유 클럽에 도착했다.더블유클럽은 규모가 아주 큰 클럽이었다. 젊은 세대를 충분히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분위기도 좋았고 실내장식도 고급스러웠다.그뿐만 아니라 18살 이상부터 35살 이하만 출입이 가능하며 여자들은 주류를 서비스로 제공해 주었다.김지아는 모자와 마스크로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얼굴을 가렸다.그녀와 최유진이 클럽에 들어가자, 양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웃으며 다가와 3층에 있는 KTV 룸으로 데리고 갔다.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이미 술, 간식, 과일로 한
“김지아 씨 아니에요?”김지아를 알고 있던 심진우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권재혁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마누라가 여기 오는 걸 몰랐던 거야?”짜증이 섞인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 권재혁의 안색을 살피던 심진우는 그가 김지아가 최유진과 함께 이곳에 온다는 걸 몰랐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심진우도 최유진과 김지아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몰랐었다.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에 분위기는 갑자기 뻘쭘하고 어색해졌다.하지만 항상 분위기 메이커로 활약해 왔던 심진우는 즉시 최유진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올 때부터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던 옆에 사람을 소개했다.“제 친구예요. 이름은 권재혁. 두 사람, 아는 사이죠?”최유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네, 알아요.”최유진은 심진우가 권재혁과 함께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절대 김지아와 함께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김지아는 멍하니 비어있는 술잔을 손에 들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발견한 최유진은 즉시 김지아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술을 따르고 다시 몸을 일으켜 심진우와 권재혁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심진우는 손을 뻗어 최유진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 말했다.“최유진 씨가 여기 종업원이에요? 술은 왜 따르고 그러세요?”갑자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허리까지 감싸고 있는 심진우 때문에 최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심진우의 품에서 벗어나 다급히 김지아의 옆에 앉았다.이 자리에 권재혁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김지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권재혁의 눈을 더 이상 쳐다보지도 못했다.“김지아 씨, 저랑 한잔하는 거 괜찮죠?”심진우가 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예쁜 살구 모양의 눈을 반으로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나쁜 남자의 웃음은 심진우의 매력을 한층 더해주었다.확실히 남자치고는 예쁜 얼굴이었던지라 최유진이 홀딱 반할 만도 했다.하지만, 그럼에도 김지아의 눈에는 권재혁이 훨씬 더 멋있어 보였다.권재혁은 심진우와는 또 다른 잘생김
심진우는 소파에 단아하게 앉아있는 김지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승훈을 향해 말했다.“와서 이 친구랑 좀 놀아줘.”김지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훑어보던 차승훈은 놀란 듯 말했다.“어라? 바람을 피웠다는 그 유명한 연예인 아니야?”말하며 권재혁의 눈치를 살피던 차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권재혁 때문에 감히 쉽게 김지아한테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김지아를 잘 모시라는 심진우의 말에 비로소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갔다.화가 치밀어 오른 김지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차승훈이 옆에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자, 김지아는 즉시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차승훈은 혀를 차며 언짢은 기분으로 말했다.“뭘 또 내숭을 떨고 그러세요? 당신 같은 여자들 많이 만나봐서 잘 아는데.”“손대지 말라니까요.”김지아는 벌떡 일어나 차승훈을 노려보았다.권재혁은 느긋하게 눈길을 돌려 화가 나서 하얗게 질린 김지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두운 눈빛으로 손에 든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섰다.김지아는 권재혁이 자신을 위해 나서 줄 거로 생각했지만, 그는 몸을 돌려 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차승훈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권재혁도 신경을 안 쓰는 걸 보니 소문이 진짜인가 보네요? 그럼, 오늘 밤에는 내가 잘 보살펴 줄게요. 잘해줄 테니까 걱정 마시고.”말을 마친 차승훈은 김지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김지아가 차승훈의 손을 쳐내려는 찰나, 문을 향해 걸어가던 권재혁이 갑자기 몸을 돌려 다가오더니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들어 차승훈의 머리를 내려쳤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술병은 차승훈의 머리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차승훈은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고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자신을 때린 사람이 권재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꺼져.”권재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차승훈은 거의 기다시피 룸에서 달려 나갔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심
혼자 남아있던 심진우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미친놈이라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심진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들이켜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차승훈을 다시 룸으로 불러들이고 몇몇 여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클럽에서 나온 권재혁은 김지아와 최유진이 택시를 잡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 잡으려 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마침 이용건이 롤스로이스를 몰고 와 차에서 내리더니 공손한 태도로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권재혁은 눈썹을 찡그린 채 차에 올라타 앞에서 떠나는 택시를 바라보며 김지아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액정에 표시된 익숙한 전화번호를 멍하니 바라보던 권재혁은 부질없는 자기 행동이 우스워졌다. 결국 그는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택시에 오른 김지아는 차창 너머로 클럽 앞에 서있는, 어쩌면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권재혁을 발견했지만, 그는 절대 자신을 위해 따라 나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심진우라는 놈, 진짜 나쁜 놈이야.”최유진은 화가 치밀어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었다.“다시 한번 내 눈에 띄기만 해봐. 가만 안 놔둬.”김지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특히 권재혁의 어두운 얼굴과 심진우가 그녀를 모욕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관하던 권재혁의 모습을 떠올리자 더욱 기분이 우울해졌다.“너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권재혁 집에 들어가지 말고.”권재혁을 마주치기 싫었던 김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최유진의 집에 도착한 뒤, 김지아는 휴대전화 전원을 끈 채 씻고 나와 객실에 들어가 잠들었다.권씨 가문 저택, 이층 서재 안.권재혁이 마지막으로 시계를 봤을 때 시간은 이미 열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서재의 문이 열려 있었던 터라 만약 김지아가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침실로 들어간다면 바로 볼 수 있었다.하지만,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있는 지금까지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날이 밝자
권재혁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김지아는 모든 정력을 일에 집중했다.몰로 브랜드의 앰배서더였던 김지아는 오늘 패션쇼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브랜드 측에서는 이번 시즌에 신상으로 나온 가을 의류를 홍보하기 위해 특별히 이 패션쇼를 열었고 연예인과 많은 유명 인사들을 초청했다.김지아가 홍보하는 콘셉트는 그중 하나의 시리즈로서 주제는 ‘단풍’이었다.모두 붉은 단풍잎을 기본 영감으로 삼아 색상이 선명하고 디자인이 트렌디하며 개성이 넘쳐났다.김지아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조이현은 신이나 대기실로 달려오더니 탈의실 문을 사이에 두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권재혁 씨 왔어요. 지금 현장에 있어요.”“누구?”“언니 남편이요.”김지아는 놀란 마음에 한동안 멍해 있다가 물었다.“패션쇼를 보러 왔다고?”“그런 것 같아요.”김지아는 담담하게 ‘그래.’라고 말한 뒤 옷을 마저 갈아입고 마음을 다잡으며 나왔다. 그럼에도 런웨이에서 권재혁이 그녀를 보고 있을 거로 생각하니 긴장한 마음은 떨치지 않았다.“언니, 이건 하초연 씨 매니저가 언니한테 준거예요.”조이현은 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김지아에게 넘겨주며 말했다.“네가 마셔.”조이현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언니, 하초연 씨가 준 커피를 한 번도 안 마시네요?”전에 함께 드라마 촬영을 했을 때도 하초연이 매니저를 통해 전해줬던 커피와 간식 그리고 과일들을 김지아는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었고 전부 조이현한테 줬었다.덕분에 조이현은 눈에 띄게 살이 찌고 있었다.“칼로리가 너무 높잖아.”조이현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그래서 제가 살쪘잖아요.”“괜찮아. 귀여워.”김지아의 말에 조이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긴, 음식의 유혹을 못 이긴 본인 탓이지 누굴 탓하랴.몰로 브랜드의 여성 패션은 하나의 콘셉트만 있는 게 아니라 김지아가 홍보하는 ‘단풍’ 시리즈 외에도 다른 콘셉트를 대표하는 모델과 연예인이 있었다.그중 한 사람이 바로 지난번 김지아한테 누명을 씌웠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김지아한테 메이크업을 완성해 주자 런웨이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가을 콘셉트로 되어있는 이번 패션쇼는 단풍을 기본으로 한 레드, 해양을 기본으로 한 블루, 노랑과 풀색을 어울려 만든 빈티지 콘셉트로 모두 세 가지가 있었다.세 가지 콘셉트를 번갈아 무대에 올려 스타들로 하여금 충분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김지아가 홍보하는 ‘단풍’ 콘셉트에는 모두 여섯 세트의 옷이 있었고 각 세트의 탈의 시간은 5분가량에 머리 모양도 한번 변경해야 했다.패션쇼가 막 시작되려 하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브랜드 측 직원 및 디자이너와 매니저까지 전부 무대 뒤로 모여들었다.모두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이 쇼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단풍’ 시리즈는 이번 가을 패션에서 하이라이트 콘셉트로 김지아가 제일 먼저 무대에 오르게 되어있었다.모든 준비를 마친 김지아는 무대 뒤에 서서 무대 쪽을 슬쩍 훔쳐봤다. 무대는 T자 형태로 되어있었고 쇼를 보러 온 손님들은 U자 형태로 무대를 빙 둘러있었다.공석 하나 없이 꽉 차 있는 사람 중에서도 김지아는 한눈에 권재혁을 찾아낼 수 있었다.권재혁의 좌석은 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중간 자리의 일렬에 있었다.사회자는 브랜드 시리즈를 소개한 뒤 잠시 농담으로 현장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모든 사람이 전부 사회자의 입담에 웃고 있었지만 유독 한 사람, 권재혁만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의 웃음 포인트가 낮은 건지 권재혁의 웃음 포인트가 높은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김지아 씨, 무대 오를 준비 하세요.”뒤에 있던 스태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사회자가 무대 뒤로 물러나는 순간 쇼장의 불빛은 어두워졌고 런웨이만 환하게 비쳤다.경쾌한 리듬의 음악과 함께 김지아는 하이힐을 신은 채 침착한 표정으로 런웨이에 올랐다.맞은 편에는 권재혁이 정면으로 앉아있었고 무대에만 집중되어 있는 조명에도
한대 얻어맞은 차승훈은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권재혁은 주먹을 풀더니 손에 묻은 피가 더러워 손수건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하초연은 이 기회를 틈타 즉시 일어나 차승훈을 데리고 차로 달려갔다.운전석에 앉아서야 차승훈은 휴지로 코피를 닦으며 길옆에 서있는 권재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권재혁, 기다려! 나 차승훈이 이렇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어!”애당초 차승훈 같은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았던 권재혁은 그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한번 쳐다봤다.“이대로 안 넘어갈 테니까 각오해!”권재혁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앉자 기고만장해진 차승훈은 혼자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옆에 앉아있던 하초연은 차승훈의 어깨를 때리며 말했다.“쪽팔리게 그만 소리 지르고 빨리 운전이나 해요.”“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맞았는데요?”“지금 내 탓이라는 거예요?”차가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여전히 다투고 있었다.차승훈과 하초연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나서야 김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권재혁은 피 묻은 손수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김지아를 돌아보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외투에는 따듯한 그의 체온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발렛파킹원이 롤스로이스를 몰고 오자 권재혁은 차 열쇠를 건네받은 뒤 김지아를 향해 말했다.“타.”추워서 발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김지아는 더 이상 심술부리기도 힘들어 순순히 권재혁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위병이 재발한 데다 공복에 술까지 마시고 찬 바람을 맞은 거로도 모자라 스트레스까지 받았던 김지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위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 조수석에 웅크리고 앉아 식은땀을 흘렸다.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권재혁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속도를 올렸다.롤스로이스가 권씨 가문 저택에 들어섰을 때, 시간은 이미 밤 열한 시가 되어있었다.먼저 차에서 내린 권재혁은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웅크리고 있는 김지아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안전띠를 푼 뒤
하초연은 아마 김지아가 자신이 한 짓을 알고 본인이 부주의한 틈을 타 술잔을 바꿨을 거로 생각했다.하초연은 김지아가 어쩌면 사람들의 호감을 살 정도의 미모에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하고 청순한 모습이지만 누구보다 생각이 많고 속셈을 차리는 사람일 거로 생각했다.김지아를 너무 만만하게만 본 것 같아 후회가 밀려온 하초연은 웃음을 거두며 이를 악물고 독설을 퍼부었다.“오늘은 내가 재수가 없었을 뿐이고, 이번 일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 각오해요.”하초연의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알아차린 김지아는 냉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누워서 침 뱉기라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죠.”“뭐라고?”김지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하초연이 손바닥을 들고 김지아를 향해 휘둘렀지만, 온몸이 나른했던 터라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태연하게 하초연의 손목을 낚아챈 김지아가 가볍게 툭 밀치자, 하초연은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마침 차를 가지고 오던 차승훈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즉시 차를 세우더니 노기등등한 기세로 달려와 하초연을 부축하며 김지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본인이 자초한 일이에요.”“권재혁의 마누라라고 내가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데 그거 오산이에요. 지난번 권재혁이 그쪽 때문에 술병으로 내 머리를 내려친 것도 아직 기억하고 있거든요? 조만간 그 빚 받을 테니 각오하세요.”김지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얼마든지 기다리죠.”하초연은 차승훈의 품에 안긴 채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차승훈 씨, 김지아한테는 권재혁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은 쓰게도 안 볼 거예요. 그러니 건드리지 마세요. 괜히 건드렸다가 승훈 씨가 화를 입게 되면 어떡해요.”“권재혁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요? 전혀 안 두렵거든요?”하초연의 도발에 화가 치밀어 오른 차승훈은 김지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권재혁의 마누라가
휴대전화 화면에는 두 사람이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은 문자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김지아의 문자에는 회답도 없던 권재혁이였지만, 김지연과는 계속 문자도 하고 김지아를 옆에 두고 잘 자라는 인사도 나누고 있었다.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김지아는 일 초라도 그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권재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고 그녀가 혼자 클럽을 떠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심진우는 자신의 품에 엉겨 붙는 하초연을 밀쳐내고 권재혁을 놀리며 말했다.“왜 저래? 너희 싸웠어?”권재혁은 심진우의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고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심진우에게 달려드는 하초연을 힐끗 쳐다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너는 거부감도 안 드냐?”아무 생각도 없이 하초연을 안고 있던 심진우는 권재혁의 농락에 입을 삐죽거리며 그녀를 차승훈한테 넘겨줬다.심진우가 아무리 여자가 끊지지 않고 주변에 그를 따르는 여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함께 잠자리했던 여자는 극히 소수였다.그러니 아무리 이쁜 하초연이라도 남자관계가 너무 복잡해 다치고 싶지 않았다.아무 여자와 몸을 나누기는 싫었던 심진우는 차승훈을 보며 말했다.“하초연 씨가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네가 집까지 데려다줘.”붉게 물든 하초연의 예쁘장한 얼굴을 바라보던 차승훈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가 안전하게 잘 모셔다드릴게.”온몸이 달아올랐던 하초연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남자라면 전부 덮치고 싶다는 욕망으로 들끓었다.비록 차승훈이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현재 하초연은 너무 괴로웠고 남자의 손길이 한없이 간절하기만 했다.클럽에서 나온 김지아는 권재혁의 차에 앉아왔던 터라 길옆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혹시 지나가는 누구라도 그녀를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걱정된 김지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있었다.이곳은 그렇게 외진 곳은 아니었지만, 택시를 잡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밤바람은 잘 정리되었던
말을 마친 심진우는 잔에 들어있는 술을 전부 마셨고 이어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연속 세잔을 마셨다.“오늘 제 생일이거든요. 간단하게 파티하는 거예요.”김지아는 ‘아.’하는 탄성과 함께 그의 생일을 축하했다.심진우는 권재혁을 향해 웃어 보였지만 어두운 그의 얼굴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야, 친구 생일인데 그 표정 좀 어떻게 못 하냐? 왜 죽상이야?”권재혁은 심진우를 흘겨보며 말했다.“네 놀거나 놀아.”“알았어.”심진우는 권재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여자들을 이리저리 끌어안으며 신나 날뛰었다.김지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무래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권재혁의 옆에 앉아있었다.그녀가 권재혁을 바라보는 찰나 그는 누군가의 전화 때문에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김지연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김지아는 급히 모른 척 눈길을 피했다.권재혁은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하초연은 이 기회를 틈타 김지아의 옆에 다가와 앉더니 술을 한잔 권했다.김지아는 마다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속이 좋지 않아서.”하초연은 웃으며 뜨거운 물 한 잔을 받아 김지아에게 건네며 말했다.“그럼 뜨거운 물이라도 마셔요.”“고마워요.”“저랑 심진우는 안지, 오래된 친구 사이예요.”하초연은 심진우와 그녀의 사이를 변명이라도 하는 듯 김지아에게 설명했다.하초연과 심진우가 어떤 사이든 전혀 관심이 없던 김지아는 김지연이 도대체 이 밤중에 무슨 용건으로 권재혁한테 전화한 건지 신경 쓰였다. 그녀는 궁금증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김지아가 룸을 나가자, 권재혁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김지연의 전화 한 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권재혁을 보자 김지아는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다시 룸으로 들어온 김지아는 잔에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초연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한
권씨 가문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자, 전희라는 눈이 빠지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검사 결과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그녀는 권재혁을 보자마자 즉시 지팡이를 짚으며 마중을 나왔다.권재혁은 어두운 얼굴로 검사 보고서를 전희라한테 넘겨주고는 말도 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결과를 본 전희라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권재혁 몰래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걸 말할 수 없었던 김지아는 그런 전희라의 표정에 괜히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불안해졌다.“괜찮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전희라는 김지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내가 나이는 많아도 아직 건강하단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조급해할 거 없다.”김지아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전희라는 김지아를 한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 이러면 안 돼. 많이 먹어야지. 너무 말랐잖아. 바쁜 일만 마무리 하면 할머니가 몸보신 시켜줄게.”김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지금은 좀 괜찮아?”“네 많이 나아졌어요.”“그럼, 뭐라도 좀 먹으러 가자꾸나.”“생각 없어요. 저 좀 올라가서 쉴게요.”전희라는 더는 강요할 수 없어 ‘알겠다.’라고 대답한 뒤 김지아를 올려보냈다.급하게 방으로 돌아온 김지아는 권재혁 몰래 서랍에 숨겨 놓았던 피임약을 누구한테 들키기 전에 미리 버리려고 꺼내는 순간 갑자기 권재혁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손에 들어있는 약을 빼앗아 갔다.딱 봐도 피임약에 이미 두 알이 없어진 걸 알아차린 권재혁은 자신과 김지아의 잠자리가 정확히 두 번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눈썹을 찡그리며 손에 쥔 약을 구겨 버렸다.당황한 김지아는 권재혁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현재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 느껴졌다.“괜찮으면 같이 더블유에나 가지.”권재혁은 김지아를 한참 노려보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거절할 새도 없이 김지아는 권재혁한테 손목이 잡혀 끌려 나갔다.손목뼈가 으스러지도록 단단히 움켜쥔 권재혁 때문에 김지아는
“임신일 수도 있잖아.”안달해서 말하는 전희라의 목소리에 권재혁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이때 화장실 문을 열며 나오던 김지아는 전희라와 도우미들이 문 앞에 모여있는 것을 보고 방금 별소리를 다 내며 토했던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할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재혁이와 같이 병원 좀 가봐.”“재혁이 퇴근했어요?”전희라가 계단 쪽을 향해 눈짓하자 김지아의 눈길도 그쪽으로 향했다. 계단에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권재혁의 눈빛은 어딘가 아주 복잡해 보였다.권재혁은 김지아를 한참 주시하다 즉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기세등등한 그의 모습에 놀란 김지아는 머뭇거리며 뒷걸음질 쳤다.“병원 가자.”김지아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괜찮아. 심각한 거 아니야. 음식을 잘못 먹었나 봐.”“데려다줄게. 가자.”“진짜 괜찮아.”표정이 어두워진 권재혁은 더 이상 입씨름하기 귀찮아 두말하지 않고 김지아를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다.그 모습에 속이 덜컹 내려앉은 전희라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놈아, 조심 좀 해. 다치면 어쩌려고 이래.”갑작스러운 권재혁의 행동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김지아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내려줘. 나 진짜 괜찮다니까. 병원 갈 필요 없어.”“권재혁, 내 말 안 들려? 내려 달라고.”권재혁은 빠르게 걸어나가 김지아를 차에 태우고 안전띠까지 매준 뒤 ‘조용히 해.’라는 말로 그녀의 입을 닫았다.김지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권재혁을 바라봤다.차에 올라탄 권재혁은 빠른 속도로 자동차 엔진을 켜더니 쏜살같은 속도로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위가 좀 불편하다는데 왜 심각하게 이러지?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관심을 가졌다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롤스로이스는 이미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권재혁은 김지아를 끌고 병원 안으로 향했고 산부인과라는 글씨를 보고 나서야 그녀는 권재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쥔 채 멍하니 앉아있는 하초연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멀쩡히 하고 있던 몰로 브랜드 홍보대사도 이렇게 물 건너간 셈이었다.하초연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참아야 했다.고개를 푹 숙인 채 얌전하게 있는 하초연을 보고 나서야 김지아는 돌아서서 권재혁을 바라봤다.노기등등해 있던 표정은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았고 심오하던 눈빛은 차갑기만 했던 예전과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김지아는 하초연의 팔을 잡아 자신을 막아준 권재혁을 떠올리자, 마음이 따듯해졌다.“오랜만이야.”어색한 분위기에 김지아는 한참 뒤에야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권재혁은 ‘응.’이라는 간단한 대답을 남긴 채 고개를 돌려 전태성을 보며 말했다.“차에 있는 물건 가지고 와.”전태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무대 뒤에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전태성은 선물 상자를 들고 들어와 공손하게 김지아에게 건넨 후 다시 권재혁의 뒤로 물러섰다.김지아는 손에 든 상자를 보며 약간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권재혁을 바라보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저녁에 나랑 어디 좀 가자.”“어디?”권재혁은 김지아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섰고 전태성과 부하들도 급히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무대 뒤에서 이들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차츰 흩어져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각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선물 상자를 들고 대기실로 들어온 김지아가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는 짙은 색상의 드레스와 액세서리가 들어 있었다.그녀는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으며 조이현에게 물었다.“오늘 남은 스케줄이 더 있어?”“인터뷰와 런웨이를 끝으로, 몰로 브랜드 측 임원들과 저녁 식사가 있어요.”‘저녁 식사?’김지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조이현을 향해 말했다.“주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식사 자리는 취소하라고 해.”말을 마친 김지아는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남은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저녁 7시가 되어있었다. 김지아는 행사장 대기실을 빌려
권재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깊은 두 눈으로 김지아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한 손으로는 가슴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짚은 채 방금의 해프닝은 별것 아니라는 듯 더욱 당당하고 멋있게 걸어 나갔다.김지아는 마침 무대 앞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던 하초연을 가로질러 우아하게 무대를 돌아 들어갔다.등이 반쯤 노출 될 정도로 옷이 찢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쇼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김지아의 모습에 권재혁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았다.김지아의 무대가 끝나자, 권재혁은 다른 사람의 무대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뒤로 향했다. 전태성과 부하 직원 몇몇이 그의 뒤를 따랐다.무대 뒤는 방금 일어난 돌발 상황 때문에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디자이너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단독 행동을 한 하초연이 김지아의 치마를 밟아 피날레였던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눈길을 끌겠다는 목적을 이미 달성한 하초연은 화가 치밀어 오른 디자이너에게 여유롭게 웃으며 사과했다.“죄송해요. 너무 긴장해서 그랬어요.”“처음 무대 올랐을 때도 안 하던 긴장을 왜 하필 마지막에 했다는 거예요?”“정말 긴장했다니깐요. 피날레라고 하니까 어찌나 떨리던지.”“무슨 말이에요 그게! 피날레는 김지아 씨지 하초연 씨가 아니잖아요.”“알고 있어요. 그냥 당시에 너무 긴장되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하초연의 변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디자이너는 하초연이 고의로 자신의 무대를 망쳤다고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하초연 씨, 당신처럼 본인만 눈에 띄면 된다고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람과는 앞으로 절대 협조 안 할 거니까 각오하세요.”하초연은 디자이너의 말에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조소를 띄며 말했다.“별것도 안 되는 디자이너 따위가 큰소리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디자이너는 하초연을 때리려고 손바닥을 치켜들었다.그녀의 손바닥이 하초연의 볼에 채 닿기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김지아한테 메이크업을 완성해 주자 런웨이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가을 콘셉트로 되어있는 이번 패션쇼는 단풍을 기본으로 한 레드, 해양을 기본으로 한 블루, 노랑과 풀색을 어울려 만든 빈티지 콘셉트로 모두 세 가지가 있었다.세 가지 콘셉트를 번갈아 무대에 올려 스타들로 하여금 충분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김지아가 홍보하는 ‘단풍’ 콘셉트에는 모두 여섯 세트의 옷이 있었고 각 세트의 탈의 시간은 5분가량에 머리 모양도 한번 변경해야 했다.패션쇼가 막 시작되려 하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브랜드 측 직원 및 디자이너와 매니저까지 전부 무대 뒤로 모여들었다.모두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이 쇼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단풍’ 시리즈는 이번 가을 패션에서 하이라이트 콘셉트로 김지아가 제일 먼저 무대에 오르게 되어있었다.모든 준비를 마친 김지아는 무대 뒤에 서서 무대 쪽을 슬쩍 훔쳐봤다. 무대는 T자 형태로 되어있었고 쇼를 보러 온 손님들은 U자 형태로 무대를 빙 둘러있었다.공석 하나 없이 꽉 차 있는 사람 중에서도 김지아는 한눈에 권재혁을 찾아낼 수 있었다.권재혁의 좌석은 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중간 자리의 일렬에 있었다.사회자는 브랜드 시리즈를 소개한 뒤 잠시 농담으로 현장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모든 사람이 전부 사회자의 입담에 웃고 있었지만 유독 한 사람, 권재혁만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의 웃음 포인트가 낮은 건지 권재혁의 웃음 포인트가 높은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김지아 씨, 무대 오를 준비 하세요.”뒤에 있던 스태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사회자가 무대 뒤로 물러나는 순간 쇼장의 불빛은 어두워졌고 런웨이만 환하게 비쳤다.경쾌한 리듬의 음악과 함께 김지아는 하이힐을 신은 채 침착한 표정으로 런웨이에 올랐다.맞은 편에는 권재혁이 정면으로 앉아있었고 무대에만 집중되어 있는 조명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