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주성민과는 아무 사이가 아니었기에 강은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주성민과 만날 때면 주성민은 꼭 안정원을 데려왔고 선을 지킬뿐더러 매우 젠틀했다.다만 서진태는 강은하를 다른 남자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강은하는 브로치를 손에 넣기 위해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서진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은하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얼굴을 강은하의 어깨에 파묻고는 잠이 들었다.4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약 효과인지 아니면 서진태의 품이 너무 더웠는지 강은하는 땀이 나기 시작했고 온몸이 끈적거리는 게 너무 찝찝해 샤워하고 싶었다.강은하는 조심스럽게 서진태의 팔을 옮기고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결국 서진태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서진태는 그런 강은하를 도로 눕히더니 잠이 덜 깬 눈으로 젖은 수건을 들어 강은하의 몸을 닦아줬다.강은하는 몸은 시원해졌지만 잠은 깬 상태였다. 왜 이런 순간은 빨리 오지 않고 마음이 싸늘하게 굳어버렸을 때 오는지 생각했다.이튿날 아침, 강은하는 엄마 진채영이 걱정되어 일찍 잠에서 깼다.이미자는 진채영이 이미 깨어났다며,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강은하는 브로치 가져가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서진태네 집 아줌마는 어제 휴가를 냈다. 그제야 어제 거실에서 그렇게 대담하게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강은하가 아침을 준비하자 서진태도 의외로 얌전하게 식탁에 앉았다. 조식은 한식이었다. 찐빵에 만두, 그리고 김치까지, 꽤 구미가 당겼다.강은하는 서진태의 표정이 좋아 보이자 입을 열었다.“브로치는 언제 줄 거예요?”서진태의 안색이 살짝 굳더니 그나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원하는 게 고작 브로치야?”“아니면요?”서진태가 만두를 한입 베어 물더니 앞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꼭 아침부터 이렇게 기분 잡치게 해야 속이 시원해?”강은하는 서진태가 약속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래도 너무 억울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도대체
‘내가 왜 서진태를 좋아하게 된 거지? 어릴 때 만나서 반반한 얼굴에 홀렸나? 아니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 약속을 믿었나?’강은하는 이제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강은하 씨 정말 너무 아름답네요. 연예계에 들어왔다면 완전히 잘나갔을 것 같은데.”홍수아는 마치 안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다리를 꼬고 등을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까만 드레스가 홍수아의 굴곡진 몸매를 더 돋보이게 해줬는데 거기에 브로치까지 더해지자 매우 품위 있어 보였다.강은하는 아무 말 없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테이블에 반쯤 기대 홍수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홍수아가 한마디 덧붙였다.“하지만 강은하 씨, 예쁘기만 한 건 사실 아무 소용이 없어요. 장난감이 되어 잠깐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이내 싸늘하게 식으면 버려질 거예요.”강은하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긴 머리를 묶어 올리며 홍수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홍수아는 강은하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강은하의 기다란 목덜미에 난 빨간 키스 자국을 보고는 모든 걸 알아채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진태가 귀국한 지 고작 얼마나 된다고 벌써 강은하의 몸을 탐내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결혼한 지 한 주 만에 외국으로 나간 것도 강은하를 위해서가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3년 전 강은하는 지금보다 더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기에 더 참기 힘들었지 모른다.“브로치, 직접 빼서 줄래요? 아니면 내가 대신 빼줄까요?”강은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강압적이었다.홍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강은하를 힐끔 쳐다봤다. 3년 전부터 강은하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면충돌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강은하는 홍수아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대처하기 힘들었고 겁을 줘도 전혀 겁먹고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강은하 씨, 내가...”“홍수아 씨의 선택에 따라 내가 강 대표님으로 남을 수도 있고 서 대표님 사모님으로 남을 수도 있어요.”강은하가 홍수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신분에 상관없이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녀예요.
서진태가 짜증스럽게 묻더니 홍수아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강은하가 서진태를 힐끔 쳐다봤다. 이미 그녀를 가해자, 홍수아를 가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더 묻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저 바닥에 흩뿌려진 원석을 주우며 대충 대답했다.“생각하고 싶은 대로 해요.”홍수아가 연약한 모습으로 서진태의 품에 안겨 울먹거렸다.“진태 씨, 다 내 잘못이에요. 은하 씨가 브로치를 잘 받았는지 확인하고 놓았어야 하는 건데...”“대표님, 수아 언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강 대표님이 예민하게 구셨어요.”매니저가 홍수아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수아 언니 손목 빨갛게 부어오른 거 보이죠? 제 뺨도 강 대표님이 때린 거예요.”“강은하, 사실이야?”서진태가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모든 다이아몬드와 원석을 찾은 강은하가 몸을 일으키더니 손바닥에 담았던 물건을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올려놓고 느긋하게 소매를 걷고는 홍수아 앞으로 걸어갔다.강은하는 서진태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전에 홍수아를 서진태의 품에서 끄집어내더니 그대로 귀싸대기를 날렸다.매니저가 비명을 질렀고 홍수아도 그래도 얼어붙고 말았다. 그렇게 연속으로 귀싸대기를 날린 강은하는 홍수아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뒤로 꺾더니 또박또박 말했다.“때리면 뭐 어때서요? 왜 때리는지 정말...”몰라요라는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누군가 손목을 으스러지게 잡았다.“그만하지?”강은하는 코끝이 찡해서 고개를 쳐들고 이렇게 말했다.“그만 못해요.”서진태는 강은하를 한쪽으로 밀쳐내더니 외투를 벗어 홍수아의 머리에 씌우더니 매니저에게 일단 데리고 나가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다.옆으로 튕겨 나간 강은하는 테이블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 눈물이 찔끔 나는데 서진태가 홍수아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렇게 홍수아를 배웅한 서진태가 몸을 돌리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서진태를 노려봤다.“내가 묻잖아. 수아가 말한 게 사실이냐고?”강은하가 목을 빳빳이 쳐든 채 서진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양윤아는 강은하를 부축해 일으키더니 흐트러진 서류까지 정리하고는 강은하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일단 상처 소독부터 해요.”강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양윤아가 비용을 납부하러 간 사이 강은하는 복도에 앉아 브로치를 어떻게 고쳐야 예전과 다름이 없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강은하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땀범벅이 된 주성민이었다.“여긴 어떻게...”강은하가 웃으며 말했다.“윤아 씨가 알려주던가요?”주성민이 고개를 저었다.“전화했는데 윤아 씨가 받더라고요. 저녁 약속 잡으려고 했는데.”주성민은 강은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강은하의 손을 조심스럽게 폈다. 핑크빛 손바닥에 난 길고 얇은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성민은 고개를 숙이고 강은하의 손바닥을 호 불어줬다.이에 강은하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별로 아프진 않아요.”“상처가 이렇게 큰데 어떻게 아프지가 않아요. 누가 그랬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아요.”강은하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홍수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홍수아는 참으로 총명했다. 매니저가 서진태에게 전화한 걸 알고 바로 태도를 바꾸더니 이렇게 말했다.“브로치, 돌려줄게요.”강은하가 손바닥을 내밀자 홍수아는 보란 듯이 브로치로 손바닥을 그어버렸다. 그때는 그런 짓을 하고도 왜 그렇게 당당한지 몰랐지만 서진태가 도착한 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남편 서진태가 정말 홍수아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강은하가 너무 아파 손을 움츠리자 홍수아가 바로 브로치에서 손을 뗐고 그렇게 브로치는 바닥에 떨어졌다.“당연히 중요하죠. 다시는 은하 씨 괴롭히지 못하게 따끔하게 혼내줘야죠.”주성민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은하는 그런 주성민을 바라보며 주성민이 정말 잘해준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내 서씨 가문과 주씨 가문의 사이가 좋던 게 떠올라 체념했다. 자기 때문에 두 집안이 난처해지는 게 싫었다.“성민 씨, 이제 들어가요.”“싫어요. 지금 가면 영원히 점수 못 따잖아요.”강은하는
서진태가 뼈마디를 가지고 놀더니 웃었다.“그래?”황재민은 서진태의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해 얼른 백미러로 서진태의 얼굴을 살폈다.‘내가 쓰기에는 싫고 남 주기에는 아깝다는 건가? 아니면 질투?’황재민은 그중 어떤 상황인지 몰라 이렇게 물었다.“사모님 손에 난 상처를 대표님께서 제때 발견하셨다면 주성민 도련님이 나설 자리도 없었겠죠.”“너... 자리 뺀다?”이 말에 황재민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답답해서 그러죠. 주성민 도련님은 어떻게든 사모님 환심 사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렇게 친히 기회까지 내주시니까요. 사모님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꼭 잡으세요.”서진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뼈마디만 가지고 놀다가 한참 지나 이렇게 말했다.“부탁할 게 있어.”...강은하는 손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도 느껴지는 잔잔한 고통에 기분이 잡쳤다.양윤아는 홍수아가 광고 모델로 하는 일이 어떤 진척인지 물었다. 강은하는 서진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좋은 대표가 될지, 아직은 하나도 전문가답지 않다는 말 말이다.사실 맞는 말이었다. 회사 일은 감정을 실어도 되는 사적인 일이 아니었지만 아까 날린 귀싸대기도 충분히 화를 풀었기에 후회하지 않았다.홍수아가 이걸 빌미로 촬영하지 않고 계약을 위반한다면 회사에도 큰 손실일 것이다.“먼저 나가봐요. 이 일은 내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볼게요.”양윤아가 가고 강은하는 서랍에서 부서진 브로치를 꺼냈다. 마음이 착잡했지만 자기가 저지른 일은 책임져야 할 것 같아 결국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어떤 자리에 있든 고생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말해.”강은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만약 홍수아 씨가 만나준다면 직접 사과하고 싶어요.”목소리에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서는 이것저것 차분하게 잘 따져본 후 내린 결정인 것 같았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는 말은 강은하도 잘 알고 있었다.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던 서진태는 스마트하면서도 패기 있는 와이프에 감탄할 수 밖에 없
서진태가 비꼬자 강은하는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형, 방해는 무슨. 은하 씨 민망해하잖아요. 그리고 아직 점수 많이 못 땄어요.”주성민이 잰걸음으로 달려오며 말했다.서진태가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다.“우리 여...”물을 따르던 강은하가 잔을 엎지르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서진태를 바라봤다. 주성민이 어리둥절해서 서진태를 쳐다봤다.“뭐가요?”서진태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여동생이 그렇게 점수 따기 힘든 사람이었나?”주성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은하 씨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천천히 알아가게 하고 싶고 가능하면 결혼까지 가고 싶어요.”서진태가 대충 대답하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강은하를 보며 말했다.“슬리퍼 갈아 신어야 해?”서진태는 인테리어를 빙 둘러봤다. 4개였던 방이 1개로 변했다. 주방, 서재, 거실이 이어진 설계가 대범해 보였고 전체적으로 하얀 톤이 집 안을 널찍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게 했다. 강은하의 안목은 확실히 너무 높았다.갈아신지 않아도 된다는 강은하의 대답에 서진태는 갖고 온 도시락을 식탁과 이어진 조형물에 올려놓았다.“아까 배고프다고 했잖아요. 먼저 이걸로 허기부터 달래요.”주성민이 얼른 포장을 뜯으며 도시락을 열었다. 하지만 가져온 음식을 보자마자 주성민이 미간을 찌푸렸다.서진태가 조형물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물었다.“왜? 은하가 매운 거 좋아하는 거 몰랐어?”진채영은 강은하가 매운 반찬 없이는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했다.“오늘 손을 다쳐서 맵고 비린 거 먹지 말라고 해서요.”주성민이 설명했다.서진태는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강은하는 조형물 옆에 서서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서진태를 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주성민은 핸드폰 배달앱을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기사님 5분이면 도착하니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가 바로 가져올게요.”강은하가 주성민을 말렸다.“사실 그렇게 배고픈 건 아니에요.”“괜찮아요. 기다리고 있어요.”주성민이 밖으로
강은하는 서진태가 원하는 대로 불렀지만 서진태는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그저 강은하를 보며 웃었다. 서진태를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또 이렇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서진태는 여전히 실눈을 뜬 채 웃으며 강은하의 귓불을 깨물었다.“주성민이 우리 사이를 아는 게 그렇게 두려워?”주성민이 현관문을 열어서야 서진태가 천천히 강은하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줬다. 강은하는 조형물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형... 은하 씨는요?”서진태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강은하를 바라봤다.“여기 있어...”강은하의 서진태의 바짓가랑이를 당겨서야 서진태가 말을 돌렸다.“과일을 바닥에 떨어트려서 치우는 중이야.”강은하는 그제야 한시름 놓고는 헝클어진 머리와 표정을 정리했다. 주성민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내가 치울게요. 손 다쳤잖아요.”서진태가 그런 두 사람을 힐끔 노려봤다. 서진태야말로 강은하의 남편이었지만 소외된 사람은 오히려 서진태였다.‘아까 도와주는 게 아닌데.’서진태는 앉았던 자리로 돌아와 주성민이 강은하를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한 주에 한 번씩 여자 갈아치우던 놈 맞나?’하지만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공주님 잘 챙겨. 나 먼저 간다.”서진태가 이렇게 말하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강은하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떠났다.강은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지 눈빛이 같이 어두워졌다. 한편으로는 이리저리 툭툭 건드리면서 한편으로는 관심 없는 척하는 서진태가 너무 우스웠다.아마 그녀를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되는 물건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흥미가 올라오면 놀아주다가 힘들고 지치면 그녀를 한편으로 내팽개쳤다.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강은하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죽만 먹던 강은하가 이렇게 말했다.“성민 씨, 요즘 나 많이 챙겨줘서 고마워요. 일단 요즘에는 서로 만나지 않는 게 어때요?”주성민이 멈칫하더
강은하의 브로치를 고쳐주기 위해 주성민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강은하의 인정을 받으려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연락해 남궁선을 찾으려 했다.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바람기 가득한 주성민이 강은하를 위해 마음을 다잡고 백 점짜리 남자 친구가 됐다는 소문이 이 바닥에 퍼지기 시작했다.하우스 클럽.송우진은 사람들이 이 일을 토론하는 걸 듣고 있었다. 카드 게임을 하는 서진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게임을 이어갔다. 서진태의 운수가 너무 좋아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심태훈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카드를 테이블에 휙 던졌다.“사랑이 좌절했다고 친구들이 죽어나네.”송우진이 그런 심태훈을 연거푸 불렀다.“무슨 헛소리야. 진태가 어디 좌절하는 거 봤어? 지금이 한창때지.”서진태는 카드 한 장을 내밀며 가볍게 웃었다.“지금이 한창때라고?”“도시락 가져다준 거 아니야?”“가져다줬지.”서진태가 인정했다.“그런 일이 참는다고 참아지는 건 아니잖아.”송우진이 비아냥댔다. 저번에 카드 게임을 할 때도 송우진은 하면 할수록 중독될 거라며 서진태를 놀려댔다.하지만 잠자리를 가지다 병원으로 실려 간 건 약에 취한 탓이지 성욕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브로치 때문에 강은하가 서진태를 찾아간 그날 밤에도 서진태는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서진태는 강은하가 그저 예쁘디예쁜 꽃병 같았다. 아무 감정이 없는데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다 문득 그날 밤 그의 품에 안겨 옷이 흐트러진 강은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오랫동안 차가운 물로 샤워하고 나서야 속에서 들끓는 불을 끌 수 있었다.서진태는 송우진의 말에 절반만 동의했다. 그 일이 참는다고 참아지는 건 아니었다. 특히 강은하가 원하지도 않는 데 꾹 참고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묘한 승부욕이 생기기도 했다.“명인시에 갤러리가 있는 그 건물 내가 가지고 있는 건물이랑 바꿀래?”서진태가 갑자기 일 얘기를 꺼내자 송우진이 되물었다.“한성 그룹으로 돌아갈 생각 없어?”“그런 생각은 애초에 해
송우진에게 묶여있는 강은하는 입에 수건까지 물고 있었는데 얼핏 봐도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옆에 선 고연석이 조급하게 물었다.“송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우리 대표님 병원에 데려가야죠.”송우진이 다리를 꼰 채 일인용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는 인내심 있게 고연석에게 설명했다.“강은하 씨랑 자보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요?”고연석이 미간을 찌푸렸다.“송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강 대표님 아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에요.”“그러니까요. 이렇게 묶어놓지 않으면 저렇게 매혹적인 소리를 내는데 우리가 버틸 수 있겠냐고요?”송우진이 턱을 괴고는 말을 이어갔다.“조금만 더 기다려봐요.”“뭐, 뭘 기다려요?”“남편이 오기를 기다려야죠. 뭐긴 뭐예요.”고연석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흥분하며 물었다.“강 대표님 결혼하셨어요?”송우진이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하더니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는 눈물이 글썽해진 강은하를 바라봤다.‘서진태 제법인데. 참을성 좋네.’강은하는 지금 온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우면서도 뜨거워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서진태라도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10분을 더 기다린 송우진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말해.”예상외로 서진태는 기분이 매우 언짢아 보였다. 요즘 빈번하게 홍수아와 스캔들을 내는 서진태를 보며 심태훈은 서진태와 강은하가 완전히 쫑났다고 생각했다. 당황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태도를 보니 심태훈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내가 정말 방해한 것 같네?”송우진이 웃었다.“병원에 보내면 되지 나는 왜 연락한 거야?”송우진이 대답했다.“그래, 그러면 성민이한테 넘길게.”강은하는 온몸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처럼 너무 힘들었다. 원래도 이성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송우진의 통화가 강은하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이제 상관없다? 주성민 찾아라?’사실 서진태는 쉽게 성욕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혼까지 할 마당에 그녀를
강은하가 쓰러지자 서유미가 허리를 숙이고 한 번 더 불렀다.“강 대표님?”강은하가 아무 반응이 없자 서유미는 그제야 강은하의 얼굴을 들어 자세히 관찰했다. 서유미도 같은 여자였지만 세상에 이렇게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게 그저 감탄스러워 자꾸만 강은하의 얼굴에 눈길이 갔다.아름다운 미모와 굴곡진 몸매, 서유미는 고개를 돌려 50살이 넘어 배가 볼록하게 나온 김지환을 바라봤다. 저런 사람에게 바치기엔 너무 아까웠다.“꽉 잡아요. 카메라는 이미 잘 숨겨뒀어요. 나는 밖으로 나가서 고연석이 일 그르치지 못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까.”서유미가 이렇게 말더니 밖으로 나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만족할 수 있게 잘 준비해 뒀어요.”서유미는 딱히 김지환을 걱정하지 않았다. 강은하가 이 바닥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김지환은 강은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하지만 강은하는 아름다운 그 외모를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굳이 자기 손으로 모든 걸 얻어내려 했다. 게다가 한성 그룹 회장님이 예뻐한 덕에 감히 강은하를 어떻게 할 엄두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김지환은 강은하를 화장실에서 끄집어내더니 소파에 던져버렸다. 바지를 벗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쓰러진’ 강은하도 마침 그때 눈을 뜨더니 김지환이 한눈판 틈을 타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를 가져갔다.“얼굴까지 찍으라고요?”도대체 강은하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했다. 얼굴이 나오게 찍으면 용산이 해성이 아니라 그 어디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김지환은 잠깐 주저했다. 사실 그저 강은하를 따먹고 싶을 뿐 강은하를 바닥까지 끌어내릴 생각은 없었다. 결국 지시받은 대로 하지 않은 김지환이 몸을 돌린 사이 커다란 재떨이가 김지환의 얼굴에 떨어졌다.“이런 미친X이.”김지환은 강은하가 쓰러진 척했을 줄은 몰랐다. 재떨이에 제대로 맞은 김지환은 너무 아파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였다.강은하는 문 쪽으로 도망가지 않고 테이블로 뛰어갔다. 김지환이 강은하의 팔
서진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은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이었고 설렘에 찬 웃음이었다.“일찍 자요. 먼저 올라갈게요.”서진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거실에 혼자 남겨진 서진태는 여전히 반지만 만지작거렸다.남궁선은 늘 서진태가 진지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진지하게 그 아이를 찾아도 그 아이는 마치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이미 많은 노력을 했지만 여전히 그 아이를 찾기는 역부족이었다....이튿날, 강은하가 출근하려고 내려와 보니 서진태는 이미 가고 없었다. 설인숙은 서진태가 일찍 출근했다고 했다.보면 어색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하루 종일 바삐 돌아친 강은하가 퇴근하려는데 무역회사 책임자 고연석이 찾아왔다.“저번에 연남시로 출장 갔다가 오면서 우리 회사가 보낸 물량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잖아요. 그 부분은 일단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일단 그냥 내버려두시면 될 것 같아요. 서 대표님 오셨어요.”강은하가 미간을 주물렀다. 서유미는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사건의 원인은 간단했다. 한성 그룹 계열에서 한 무역 회사가 수출입 무역을 하는데 꽤 크고 전문적인 다제품 공급망을 가지고 있었다.서유미는 전략 파트너 진영민의 유통 업체였는데 동의도 없이 진영민의 브랜드 패키지를 도용해 제품을 만들어 판 것이다. 이익으로 맺어진 사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기에 서로 얼굴을 붉히기 싫었던 진영민이 먼저 강은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사실 이 문제는 서유미가 잘못했기에 진영민이 고소하려고 마음먹으면 100퍼센트 승소할 수 있었다. 약이 잔뜩 오른 서유미는 화풀이할 데가 없어 계속 물량 공급에 문제가 있다고 둘러댔지만 강은하가 봐주려 하지 않자 바로 따지러 온 것이었다.“나 시간 없으니까 알아서 해결해요.”“김지환 씨가 만든 자리입니다.”김지환은 무역하는 사람 중에서도 명성이 꽤 자자한 사람이었다. 온라인 판매와 공구의 물살을 타지는 못했지만 그
주성민도 그제야 뭔가 눈치챈 듯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서진태를 발견하고는 얼른 이렇게 불렀다.“형.”서진태가 시선을 화면 속 놀란 강은하의 얼굴에서 주성민에게로 옮기더니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이 좋아 보인다?”주성민은 약간 민망했는지 괜찮다고 말했다. 통화를 이어가던 강은하가 얼른 통화를 내려 했다.“성민 씨, 그러면 일 봐요. 아까 질문한 건 다음에 알려줄게요. 끊어요.”주성민이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고개를 돌려 서진태를 바라봤다.“혹시 은하 씨랑 싸웠어요?”서진태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둘이 남매 같지는 않아서요.”“그래? 그러면 뭐 같은데? 부부?”주성민이 손사래를 쳤다.“그건 더 아니고요. 만약 은하 씨가 형 와이프였으면 형은 나보다 더 했을 것 같은데. 형이 은하 씨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 나 여러 번 봤어요. 클럽 그날 형도 은하 씨한테 반했죠?”“됐어. 그만해.”서진태가 주성민의 말을 잘라버렸다.“네가 뭘 알아.”서진태가 자리를 뜨려는데 주성민이 얼른 따라붙었다.“형, 그 남자가 누군지 알려준다고 했잖아요.”서진태는 선을 넘는 주성민을 보며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길게 빨고는 물었다.“그 남자가 왜 그렇게 궁금한데?”“뭔가 은하 씨가 그 남자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지기지피 백전백승이라잖아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은하 씨 같은 여자를 기꺼이 버리는지 궁금해서요.”서진태는 말문이 막혔다.“이 일은 묻지 마. 강은하도 알려줄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서진태가 물었던 담배를 버리더니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주성민은 그런 서진태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한편, 강은하는 지금 심장이 너무 벌렁거렸다. 아직 이혼하기 전이라 주성민과 페이스톡 하다가 들킨 게 살짝 민망했다. 서진태가 저열한 근성을 불태우며 다시 그녀를 괴롭힐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강은하는 잠들 엄두가 나지 않아 책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기다리기로 했다. 돌아오면 도대체
일요일.강은하는 주성민과 식사하러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안에 들어서자 주성민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고마워요.”강은하가 꽃을 받아 들더니 주성민을 향해 웃어 보였다.“만날 때마다 이렇게 꽃을 주려는 건 아니죠?”“당연하죠. 이런 소소한 이벤트는 꼭 챙겨야 해요. 곧 남자 친구가 될 사람이잖아요.”주성민이 헤벌쭉 웃으며 이렇게 말했지만 강은하가 불편하지 않게 아직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조심스러워 보이는 주성민을 보며 강은하는 살짝 안쓰러웠다.“조금만 참으면 우리 손도 잡을 수 있어요.”이혼 절차만 밟으면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이 말에 주성민이 자기도 모르게 강은하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사랑스러워요?”예약한 룸에 들어가 보니 요리가 이미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강은하가 밥을 먹으면 주성민은 턱을 괸 채 강은하가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성민 씨는 안 먹어요?”“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요. 사실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거든요.”주성민이 이렇게 말했다. 강은하가 그를 받아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은하 씨, 왜 나를 믿어준 거예요?”“왜 진심이라고 믿어준 거냐고요?”주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내가 믿어줄 수 있냐고 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믿는다고 했잖아요. 우리 아빠였어도 믿긴 개뿔이라고 했을 텐데.”강은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주성민을 바라봤다. 바람둥이라고 날 정도인데도 여자가 끊이지 않는 이유라면 아마도 잘생긴 얼굴일 것이다.“성민 씨, 전에 노란 머리였죠? 마주칠 때마다 늘 껄렁대면서 앞을 지나갔거든요. 하지만 나랑 바닷가 가서 갈매기 볼 때 까만색으로 염색했더라고요.”그래서 그런지 주성민은 예전보다 많이 차분해 보였다. 게다가 하얀 티셔츠에 갈색 슬랙스까지 받쳐입으니 핏도 살아 있었다.“내가 머리 염색한 것 때문에 믿었다고요?”강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것도 새로 출발한다는 의미니까요.”“여자를 홀리는 수
강은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말했다.“그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헤어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아요?”“진태 형이 전화해서 알려주던데요? 은하 씨에게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했어요.”하지만 주성민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그 사람은 헤어지기 싫어하는데 진태 형이 대신 얘기해준 거예요? 그래서 결국 헤어지기로 한 거고? 내가 이해한 게 맞겠죠?”강은하는 순간 영혼이 가출했다.‘이사하라고 하더니 뭐지?’지금은 또 주성민의 입으로 이혼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있다. 강은하는 서진태가 왜 갑자기 질리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이내 그 궁금증이 풀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강은하와 생각했을 때도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홍수아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하룻밤 같이 있었을 뿐인데 서진태의 생각을 바꿔놓았으니 말이다.강은하는 잠깐 마음이 불편했다가 이내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혼한다는 건 더는 서진태와 엮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강은하는 너무 기뻤다.하지만 같이 앉아 있던 안정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상처 주는 것도 참 가지가지네.”이건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에 실컷 즐겨놓고 낮에 차버린다니, 서진태 같은 쓰레기도 드물 것이다.“성민 씨가 좋은 남자죠. 우리 은하를 진심으로 아끼잖아요.”주성민은 강은하가 단둘이 밥 먹는 걸 난처해할까 봐 오늘도 안정원을 불렀다.“앞으로 연지 공주랑 밥 먹을 때 나 부르지 마요.”안정원은 주성민이 강은하를 기쁘게 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연지 공주도 성민 씨 언제 받아줄지 생각해 봐요.”사실 안정원은 강은하가 주성민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주면 주성민이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서진태가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을 한 것이다.“은하 씨, 나 받아줄 생각 있어요?”주성민은 아직도 어떻게 강은하를 대신해 그 개자식을 혼내줄지 생각하고 있다가 안정원의 말에 정신이 팔려 기대에
강은하는 무의식적으로 도망가려 했다. 서진태가 그런 강은하를 으스러지게 잡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러서 눕혔다.강은하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고 눈물이 눈동자에 가득 차올랐다. 서진태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도대체 그녀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농락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서진태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엎어놓았다. 강은하는 서진태에게 빚지는 게 싫어 아득바득 애를 썼지만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코끝이 찡해 난 강은하는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지만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순간 서진태도 마음이 약해졌지만 긴 머리를 테이블에 축 늘어트린 채 반쯤 누워있는 강은하가 너무 매혹적이라 성욕이 온몸을 지배했다.서진태가 강은하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이렇게 말했다.“진심으로 대한다더니 고작 이거야? 너 이거 사기야.”서진태는 그런 강은하를 버려둔 채 옆에 놓인 가운을 입고 자리를 뜨려 했다. 강은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진태가 등을 돌린 순간 강은하는 영락없이 몸을 파는 아가씨가 되고 말았다.강은하는 몸을 가릴 수 있는 게 없어 다리를 꼭 끌어안은 채 바닥에 꿇어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요?”서진태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핏기 하나 없는 강은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왜 그러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강은하는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 그에게 약을 먹이고 억지로 잠자리를 가진 걸 이렇게 복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도시락을 가져다줬다는 것에, 보기 드물게 그가 자세를 숙이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입에 발린 소리 몇 마디 한 것에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서진태에게 그녀는 늘 장난감 같은 존재였는데 말이다.서진태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은하를 보고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옆에 있던 담요를 던져주고는 자리를 떠났다.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 서진태가 황재민이 데리러 오길 기다리며 길가에 서서 담배를 연거푸 몇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강은하가 서진태의 허벅지에서 일어나 한 쪽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우스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서진태도 딱히 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물었다.“그러면 네가 나를 믿을 때쯤에 다시 토론할까?”강은하는 정말 당장이라도 서진태를 뻥 차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손에 들려있는 브로치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숨을 길게 내쉬었다.“방법이 하나 있어요.”...심태훈이 가로수길 6번지로 향했다.연갈색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진태의 목에 어제 할퀸 상처가 보였다.강은하가 팔짱을 앞으로 낀 채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했다.“이거 주성민에게 돌려줘.”심태훈이 브로치가 담긴 박스를 들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거 그 브로치 아니야? 이걸 왜 주성민에게 줘?”“주라면 그냥 줘. 말이 그렇게 많아.”서진태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심태훈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해 이리로 불러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다 고친 브로치를 주성민에게 건네주라는 것이었다.“주성민에게 건네주고 형수님한테 전화하라고 해.”서진태는 형수님이라는 말에 힘을 줬다. 심태훈이 가고 서진태가 뭉게뭉게 피어오른 담배 연기 사이로 강은하를 바라봤다.강은하가 생각해 낸 방법은 참으로 묘했다. 서진태를 믿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심태훈에게 넘기겠다는 데도 동의하지 않았고 주성민만 믿었다.“이제 만족해?”서진태가 물었다.강은하의 길고도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진태에게 말했다.“아주 만족해요.”서진태가 코웃음을 치더니 강은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이따가 나도 만족시켜 주길 바랄게.”강은하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심태훈이 여기서 출발해 주성민에게로 가려면 적어도 반 시간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그 시간 동안 서로 얼굴을 굳힌 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신경전을 벌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강은하의 핸드폰이
강은하는 소파에 기댄 서진태를 바라봤다. 19살에 봤을 때와 변함없이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30살이 된 서진태에게서 19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똑같이 웃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양아치 같았다.숨을 길게 들이마신 강은하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서진태는 강은하의 순종하는 태도에 두 손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뻗은 채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강은하는 심플한 디자인을 즐겨 입었기에 오늘도 까만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하고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어 그저 노말한 출근룩 같앗지만 왠지 모를 우아한 아우라가 느껴졌다.서진태는 눈을 살짝 찌푸린 채 그런 강은하를 바라봤다. 강은하가 앞으로 다가와 서자 서진태는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지만 그가 기대하던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다. 강은하는 그대로 서진태를 덮치더니 미친 듯이 할퀴고 때리기 시작했다.도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런 서진태를 좋아하고 사랑한 자신이 너무 미웠다.갑자기 들이닥친 주먹에 서진태는 목을 할퀴고 말았다. 강은하가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었기에 서진태에게 바로 제압당해 허벅지 위에 갇히고 말았고 손도 뒤로 꺾여 어쩔 수 없이 서진태와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얍삽하기 그지없는 서진태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강은하의 손목을 꽉 잡고 있어 강은하는 어쩔 수 없이 서진태와 바짝 붙을 수밖에 없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강은하가 언성을 높였지만 서진태는 전혀 언짢아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강은하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진짜 왜 그러는 거예요?”“강은하, 막무가내로 나온 것도 너고, 말을 듣지 않은 사람도 너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도 너야. 이사하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이사할 생각 없어 보이고 수아를 모델로 쓰라고 하니까 때리기나 하고. 나 이 정도면 나이스하지 않아? 손 다쳤다고 밥도 가져다주고 기회도 여러 번 줬는데 나 모른 척한 건 너야.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너 집으로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지.”강은하는 아무 말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