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혜미를 불쾌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미 싸우기 시작했으니, 나는 그녀의 더러운 속셈을 모두 폭로할 생각이었다.“그래, 때렸어. 적어도 나는 떳떳하거든.”“난 적어도 너처럼 서진우를 좋아하면서 친구인 척하며 들러붙진 않아.”“서진우가 네 더러운 속마음 모를 거라고 생각해?”“너는 어둠 속에서 기어 다니는 구더기처럼 역겹거든.”송혜미는 내 말을 듣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서진우를 쳐다보며 계속 부정했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 하는 거야?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그러나 서진우는 그녀를 막았다.“그만 좀 해.”서진우는 송혜미의 짝사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더라도, 서진우는 여전히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다.송혜미는 나보다 더 비참하기만 했다. 정말 불쌍하고 한심하다.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혜미는 그냥 어머니가 걱정돼서 온 거야. 그냥 한 번 뵙고 가려고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거야?”“엄마는 이미 죽었어. 만나고 싶으면 저승에 가서 만나.”말을 마친 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서진우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했다....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준비를 했다.서진우는 차를 몰고 천천히 내 뒤를 따랐다.묘지에 도착한 나는 매일처럼 엄마의 묘비 앞에 신선한 데이지 꽃을 놓았다.그 뒤를 따라온 서진우도 자연스레 묘비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진아야, 난 정말 몰랐어.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검사에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나도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랐다. 갑작스러운 변고는 언제나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응,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서진우는 내 팔을 붙잡고 죄책감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 그놈들이 자꾸 네가 돈 때문에 나랑 사귄 거라고 말해서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어. 진아야,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응, 상관없어.
서진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같은 자리에 서진우의 차를 보게 되었다.서진우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진아야, 자전거 타고 가는 거 불편하지? 내가 데려다줄게.”그와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서진우는 차 문을 열고, 음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부경탁이 병원에서 잘 지내길 바란다면, 얼른 타.”나는 놀란 표정으로 서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미쳤어?”서진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대답했다.“미쳤냐고? 네가 내 옆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난 이것보다 더 미친 짓도 할 수 있어.”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서진우는 마치 보물을 자랑하듯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꺼냈다.만두, 순대, 짜장면... 뭐 하나 빠짐없이 다 있었다.웬만한 가게를 차에다 실은 것처럼 가득했다.서진우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먹지 않으면 계속 그 음식을 들고 있을 기세를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만두를 몇 개 집어먹고,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셨다.서진우는 그제야 손을 다시 거두고, 만족스럽게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았다.“진아야, 앞으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말해줘. 매일 준비해 가져다줄게.”그리고 내 옷을 한번 훑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너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뭐야! 너무 크고 낡았잖아. 우리 진아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야지.”“잠깐만 기다려, 집에 있는 옷들을 다 가져다줄게.”“옛날 옷이 마음에 안 들면, 새 옷 사러 가자.”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서진우는 또 다른 카드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이 카드는 한도가 없으니 얼마든지 쓰고 싶은 만큼 써.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서진우는 바로 앞의 묘지를 살펴보며 친절하게 말했다.“참, 어머니에게 좋은 풍수지 하나 사드릴까?”나는 그가 말하는 걸 조용히 듣기만 했다.마지막으로 서진우는 내 손을 잡고,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2층 병동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서진우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부경탁을 향해 소리쳤다.“배진아가 내 아내인 거 몰라? 의사 주제에 남의 감정이 끼어들다니, 정말 부끄럽지도 않아?” “오늘 이 병원 사람들한테 당신이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지 알려줄 거야.”부경탁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헤어진 여자친구를 아내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미 헤어졌으면 더 이상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서진우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서씨 가문에서 귀한 자식으로 자랐기에, 아무도 그의 말에 대든 적이 없었다.그는 마치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부경탁에게 달려들었다.“경고야, 배진아는 내 여자야.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배진아한테서 떨어져. 아니면 나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부경탁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도발하는 눈빛으로 서진우를 쳐다봤다.“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서진우는 흥분해서 또다시 달려들려 했고, 나는 재빠르게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서진우가 들고 있던 손이 공중에서 멈추고,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쌍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진아야, 나 다쳤어. 아파.” 예전엔 서진우가 이렇게 투정을 부리면, 나는 언제나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달래곤 했다.그러나 이번엔 달랐다.나는 그를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내 시선은 온통 부경탁에게 쏠려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급히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손은 괜찮아요? 뼈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죠?”손이 다친다면 그의 의사 생활이 끝장나는 거나 마찬가지다.비록 부경탁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가 도와준 일이 많았기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부경탁은 여전히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냥 살짝 상처가 난 것뿐이에요.”이 장면은 서진우를 자극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또 부경탁을 때리려고 했고, 부경탁은 본능적으로 나를 품에 안고 보호 자세를 취했다.서진우
나는 놀란 표정으로 부경탁을 바라보았다.그는 더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곧 간호사가 와서 부경탁의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그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아파서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좀 살살해 주세요.”간호사는 그를 힐끔 쳐다보며 진지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부 선생님, 이제 나이도 많으신데 왜 젊은 애들처럼 싸움질을 하세요? 정말 쌤통이에요.”곧 부경탁은 아파서 한숨을 쉬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본능적으로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그러자 간호사는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아파야 여자분이 마음 아파하죠!”간호사는 말을 마친 후 빠르게 부경탁의 상처를 싸매고 떠났다.순간, 좁은 방안에는 나와 부경탁 두 사람만 남았다.우리 두 사람 중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방 안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결국 부경탁이 침묵을 깨고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제 손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앞으로 쓰지 못할 수도 있어요.”나는 긴장해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네, 한동안 씻지도 못하고 무거운 거 들지도 못해요.”부경탁은 곧 웃으며 말을 이었다.“한동안 진아 씨한테 신세 좀 져야겠어요.”거절하려던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나 때문에 다친 거였으니, 내가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경탁의 간병인이 되기로 했다.그렇게 나는 매일 집과 부경탁 집을 오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었다.바로 서진우였다.그는 항상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그 후, 차를 부경탁 집 앞에 세우고 내가 나가면 다시 조용히 뒤따랐다. 그러나 더 이상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서진우 씨는 진짜 할 일이 없나 봐요.” 부경탁은 팔짱을 끼며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상처가 치유된다 해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그러니 그가 무엇을 하든, 우리 사이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부경
“진우야, 나 1억 빌려줄 수 있어?”방금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룸 안이 순식간에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서진우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깊고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1억? 그 돈으로 뭘 하려고?”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서진우 곁에 앉아 있던 여자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서진우의 오랜 친구, 송혜미였다.“진우야, 내가 뭐랬어? 여태껏 순수한 척하다가 결국 돈을 뜯어내려고 이러는 거잖아. 처음부터 내 말을 믿었어야 했어.” “두 사람 사랑하는 사이라더니, 지금은 너보다 돈이 더 중요한가 보네.”“진우, 너보다 네 지갑이 더 귀한 모양이야.”송혜미는 말을 마치고는 나를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힐끔 쳐다보았다.나는 멍하니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송혜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심지어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주변 사람들은 서진우의 반응을 보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송혜미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송혜미의 자리를 빼앗은 데다가, 뻔뻔스럽게 그들의 무리에 끼어들기까지 했다고 생각했다.평소에는 서진우가 내 편을 들어주곤 했기에, 다들 겉으로는 나를 형수님이라 부르며 웃어넘겼다.그러나 오늘, 서진우가 나서서 말리지 않자 모두들 대담해졌다.“진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1억을 요구하다니.”“우리 진우 형이 왜 그쪽한테 1억이나 줘야 하죠?”누군가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모았다.“다들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마. 괜히 돈이나 요구하면 어쩌려고.”“특히 겉보기에 순수해 보이는 애들이, 돈 달라고 할 때는 정말 무섭더라.”“배진아, 차라리 은행을 털러 가는 게 더 빠를걸?”누군가는 농담조로 말했다. “나랑 만나면 2,000만 원 줄게. 고민해 봐.”서진우는 눈썹을 찡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혜미는 이 말을 듣고 놀란 척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돈 좀 요구한 건데 다들 왜 그렇게까
서진우는 내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내가 참가하는 모임마다 그는 항상 나를 위해 주스를 준비해 주기 위해 특별히 신경 썼다.4년 동안, 단 한 번도 예외 없이.그런데 지금, 서진우가 직접 내게 술을 마시라고 말했다.서진우는 느긋하게 자리에 다시 앉아 나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돈을 원한다면 다 마셔. 이게 바로 규칙이야.”서진우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돈을 위해 참아야 했다. “그래.”나는 한 병, 또 한 병 술을 입에 들이붓기 시작했다.몇 병을 마셨는지, 몇 종류를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나중에는 마시면서 토하기까지 했고, 얼굴에 묻은 액체가 눈물인지 술인지 구분이 안 갔다.모두 내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마지막 술을 마시던 순간, 나는 흐릿한 시야로 태연하게 앉아 있는 서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돈을 빌려줄 수 있는 거지?”서진우는 나를 증오가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도 다른 여자들처럼 돈이나 밝히고 있었던 거야? 정말 천박해.”그리고 경비를 시켜 나를 바에서 내쫓았다.나는 바닥에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서진우, 우리가 만난 지 4년이나 지났는 데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거야?’그날 밤, 나는 알레르기로 인해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이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이튿날, 나는 병원에서 깨어났고, 부경탁이 내 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엄마의 주치의였다.내가 깨어나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알코올 알레르기 있는 거 알면서 왜 술을 마셨어요? 자기 몸으로 장난을 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에요.”“진아 씨마저 쓰러지시면 누가 어머니를 돌볼 거예요?”그의 잔소리에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부 선생님.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그는 일어나며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발아래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다리 힘이 풀리며 차가운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부경탁이 허둥지둥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위로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아주 오래전에 엄마가 한 말이 있었다.“엄마는 네가 진우 그 애랑 사귀는 건 반대하진 않아.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집안이 그런 재벌가와 어울리긴 할까? 결국 네가 상처받을지도 몰라.”당시 달콤한 서진우의 애정에 취해 있던 나는 태연하게 웃어넘겼다.“괜찮아요, 진우가 반드시 잘해줄 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에요.”그러나 서진우가 내 가슴에 가장 깊이 가시를 박을 줄은 몰랐다. 남자의 가벼운 맹세를 진심으로 믿은 내가 바보였다.얼음처럼 식은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나는 흐느껴댔다.“엄마... 이제 서진우랑 절대 안 만날게요. 다 엄마 말씀대로 할게요.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눈 떠주세요.”그러나 텅 빈 방 안에는 내 목소리만 하염없이 메아리쳤다. 한참이 지난 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엄마의 시신을 화장터에 보내려고 했다. 화장 절차를 밟기 위해 정신을 차렸을 때, 병원 측의 차가운 통보를 받았다. 치료비를 모두 정산해야 엄마의 시신을 인계해 준다는 것이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순간, 내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분할 납부는...”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부경탁이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이걸로 정산해 주세요.”“안 돼요!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부경탁은 내가 말리려는 손을 제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되잖아요? 돈은 나중에 천천히 갚아도 괜찮아요.”그의 결연한 눈빛에 나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묘지 비용까지 그가 대신 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서둘러 일자리를 찾아 빚을 갚는 것뿐이었다.부경탁의 도움으로 뒷일을 쉽게 마칠 수 있었다.나와 엄마는 원래 친구가 없었기에 빠르게 절차를 넘길 수 있었다. 장례식 당일,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하늘
나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송혜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우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데이트할 때마다, 송혜미는 어김없이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매번 우리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데이트를 방해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송혜미가 서진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그 때문에 서진우와 다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나를 달래며 말했다. “우린 그냥 친구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 후로 송혜미가 나타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나에 대한 적의는 더 깊어졌다. 지금 두 사람이 그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질투보다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법이지. 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한 채, 침실로 향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송혜미가 일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여자친구가 오해한 건 아니겠지?”분명 나를 도발하기 위해 한 말이다. 그러나 이젠 서진우조차 신경 쓰지 않는 내가 송혜미의 도발 따위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서진우는 방문을 노려보며 독설을 내뱉었다. “배진아는 오해할 자격조차 없어.”그리고 방 안을 향해 소리쳤다. “배진아, 당장 나가지 않으면 불법 침입으로 신고할 거야.”나는 고개를 숙인 채 캐리어에 옷을 넣으며 말했다. “걱정 마, 짐만 챙기고 바로 나갈 거야.”그 말이 서진우를 자극했는지,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와 내가 정리한 옷더미를 발로 걷어찼다. “이건 다 내 돈으로 산 거니까 가져갈 생각 따위 하지 마.”지금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서진우를 보자,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때 서진우는 나를 데리고 백화점을 구경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모두 우리 진아한테 사줄 거야. 넌 나만의 공주님이야.”그는 항상 좋은 것들을 찾아 보물처럼 내게 가져다주었다.그렇게 나는 우리의 사랑이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
나는 놀란 표정으로 부경탁을 바라보았다.그는 더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곧 간호사가 와서 부경탁의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그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아파서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좀 살살해 주세요.”간호사는 그를 힐끔 쳐다보며 진지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부 선생님, 이제 나이도 많으신데 왜 젊은 애들처럼 싸움질을 하세요? 정말 쌤통이에요.”곧 부경탁은 아파서 한숨을 쉬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본능적으로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그러자 간호사는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아파야 여자분이 마음 아파하죠!”간호사는 말을 마친 후 빠르게 부경탁의 상처를 싸매고 떠났다.순간, 좁은 방안에는 나와 부경탁 두 사람만 남았다.우리 두 사람 중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방 안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결국 부경탁이 침묵을 깨고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제 손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앞으로 쓰지 못할 수도 있어요.”나는 긴장해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네, 한동안 씻지도 못하고 무거운 거 들지도 못해요.”부경탁은 곧 웃으며 말을 이었다.“한동안 진아 씨한테 신세 좀 져야겠어요.”거절하려던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나 때문에 다친 거였으니, 내가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경탁의 간병인이 되기로 했다.그렇게 나는 매일 집과 부경탁 집을 오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었다.바로 서진우였다.그는 항상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그 후, 차를 부경탁 집 앞에 세우고 내가 나가면 다시 조용히 뒤따랐다. 그러나 더 이상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서진우 씨는 진짜 할 일이 없나 봐요.” 부경탁은 팔짱을 끼며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상처가 치유된다 해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그러니 그가 무엇을 하든, 우리 사이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부경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2층 병동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서진우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부경탁을 향해 소리쳤다.“배진아가 내 아내인 거 몰라? 의사 주제에 남의 감정이 끼어들다니, 정말 부끄럽지도 않아?” “오늘 이 병원 사람들한테 당신이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지 알려줄 거야.”부경탁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헤어진 여자친구를 아내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미 헤어졌으면 더 이상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서진우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서씨 가문에서 귀한 자식으로 자랐기에, 아무도 그의 말에 대든 적이 없었다.그는 마치 사냥감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부경탁에게 달려들었다.“경고야, 배진아는 내 여자야.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배진아한테서 떨어져. 아니면 나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부경탁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도발하는 눈빛으로 서진우를 쳐다봤다.“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서진우는 흥분해서 또다시 달려들려 했고, 나는 재빠르게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서진우가 들고 있던 손이 공중에서 멈추고,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쌍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진아야, 나 다쳤어. 아파.” 예전엔 서진우가 이렇게 투정을 부리면, 나는 언제나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달래곤 했다.그러나 이번엔 달랐다.나는 그를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내 시선은 온통 부경탁에게 쏠려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급히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손은 괜찮아요? 뼈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죠?”손이 다친다면 그의 의사 생활이 끝장나는 거나 마찬가지다.비록 부경탁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가 도와준 일이 많았기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부경탁은 여전히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냥 살짝 상처가 난 것뿐이에요.”이 장면은 서진우를 자극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또 부경탁을 때리려고 했고, 부경탁은 본능적으로 나를 품에 안고 보호 자세를 취했다.서진우
서진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같은 자리에 서진우의 차를 보게 되었다.서진우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진아야, 자전거 타고 가는 거 불편하지? 내가 데려다줄게.”그와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서진우는 차 문을 열고, 음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부경탁이 병원에서 잘 지내길 바란다면, 얼른 타.”나는 놀란 표정으로 서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미쳤어?”서진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대답했다.“미쳤냐고? 네가 내 옆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난 이것보다 더 미친 짓도 할 수 있어.”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서진우는 마치 보물을 자랑하듯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꺼냈다.만두, 순대, 짜장면... 뭐 하나 빠짐없이 다 있었다.웬만한 가게를 차에다 실은 것처럼 가득했다.서진우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먹지 않으면 계속 그 음식을 들고 있을 기세를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만두를 몇 개 집어먹고,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셨다.서진우는 그제야 손을 다시 거두고, 만족스럽게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았다.“진아야, 앞으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말해줘. 매일 준비해 가져다줄게.”그리고 내 옷을 한번 훑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너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뭐야! 너무 크고 낡았잖아. 우리 진아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야지.”“잠깐만 기다려, 집에 있는 옷들을 다 가져다줄게.”“옛날 옷이 마음에 안 들면, 새 옷 사러 가자.”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서진우는 또 다른 카드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이 카드는 한도가 없으니 얼마든지 쓰고 싶은 만큼 써.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서진우는 바로 앞의 묘지를 살펴보며 친절하게 말했다.“참, 어머니에게 좋은 풍수지 하나 사드릴까?”나는 그가 말하는 걸 조용히 듣기만 했다.마지막으로 서진우는 내 손을 잡고,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는 송혜미를 불쾌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미 싸우기 시작했으니, 나는 그녀의 더러운 속셈을 모두 폭로할 생각이었다.“그래, 때렸어. 적어도 나는 떳떳하거든.”“난 적어도 너처럼 서진우를 좋아하면서 친구인 척하며 들러붙진 않아.”“서진우가 네 더러운 속마음 모를 거라고 생각해?”“너는 어둠 속에서 기어 다니는 구더기처럼 역겹거든.”송혜미는 내 말을 듣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서진우를 쳐다보며 계속 부정했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 하는 거야?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그러나 서진우는 그녀를 막았다.“그만 좀 해.”서진우는 송혜미의 짝사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더라도, 서진우는 여전히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다.송혜미는 나보다 더 비참하기만 했다. 정말 불쌍하고 한심하다.서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혜미는 그냥 어머니가 걱정돼서 온 거야. 그냥 한 번 뵙고 가려고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거야?”“엄마는 이미 죽었어. 만나고 싶으면 저승에 가서 만나.”말을 마친 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서진우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했다....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준비를 했다.서진우는 차를 몰고 천천히 내 뒤를 따랐다.묘지에 도착한 나는 매일처럼 엄마의 묘비 앞에 신선한 데이지 꽃을 놓았다.그 뒤를 따라온 서진우도 자연스레 묘비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진아야, 난 정말 몰랐어.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검사에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나도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랐다. 갑작스러운 변고는 언제나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응,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서진우는 내 팔을 붙잡고 죄책감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 그놈들이 자꾸 네가 돈 때문에 나랑 사귄 거라고 말해서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어. 진아야,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응, 상관없어.
운이 좋게도 묘지를 지키고 있던 아저씨가 바로 나를 채용해 주셨다.매일 아침 나는 엄마의 묘비 앞에 작은 데이지 꽃 한 송이를 놓고, 묘지의 청소를 시작했다.오후에는 묘지의 묘비를 닦고, 하루하루 바쁘게 지냈다.가끔은 새로운 유골이 도착하면, 나는 그 일들을 돕기도 한다.나는 충실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고, 서진우는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헤어진 날, 나는 그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우리 인생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가끔 송혜미의 SNS에서 그를 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감정이 들진 않았다. 엄마가 말했듯, 우리는 원래 다른 세상 사람들이기에 억지로 만날 필요는 없었다.묘지에서의 일상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저 최근 들어 부경탁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얼마 전 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부 선생님, 또 환자분이 돌아가셨나요?”그러자 부경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가,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그는 무심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진아 씨가 돈을 갚지 않고 도망치실 수도 있으니 이렇게 매번 와봐야죠.”나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돈은 될수록 빨리 갚을게요.”부경탁은 웃음을 터뜨렸다.“농담인데 왜 그렇게 놀라신 거예요.”그제야 나는 그가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여기는 조용해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편하거든요.”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이후로, 내 일상에 하나 더 추가된 일이 있다.바로 가끔씩 찾아오는 부경탁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제 내 채무자니까.하루는 평소처럼 묘지로 출근하려고 했는데, 아파트 단지 앞에서 익숙하고 눈에 띄는 번호판을 보았다.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차를 피하려 했다.그런데 서진우가 차에서 뛰어내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살펴보며 말했다.“진아야, 괜찮아? 유성재가 묘지에서 너를 봤다고 했어.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집에 무슨 일이
나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송혜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우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데이트할 때마다, 송혜미는 어김없이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매번 우리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데이트를 방해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송혜미가 서진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그 때문에 서진우와 다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나를 달래며 말했다. “우린 그냥 친구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 후로 송혜미가 나타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나에 대한 적의는 더 깊어졌다. 지금 두 사람이 그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질투보다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법이지. 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한 채, 침실로 향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송혜미가 일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여자친구가 오해한 건 아니겠지?”분명 나를 도발하기 위해 한 말이다. 그러나 이젠 서진우조차 신경 쓰지 않는 내가 송혜미의 도발 따위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서진우는 방문을 노려보며 독설을 내뱉었다. “배진아는 오해할 자격조차 없어.”그리고 방 안을 향해 소리쳤다. “배진아, 당장 나가지 않으면 불법 침입으로 신고할 거야.”나는 고개를 숙인 채 캐리어에 옷을 넣으며 말했다. “걱정 마, 짐만 챙기고 바로 나갈 거야.”그 말이 서진우를 자극했는지,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와 내가 정리한 옷더미를 발로 걷어찼다. “이건 다 내 돈으로 산 거니까 가져갈 생각 따위 하지 마.”지금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서진우를 보자,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때 서진우는 나를 데리고 백화점을 구경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모두 우리 진아한테 사줄 거야. 넌 나만의 공주님이야.”그는 항상 좋은 것들을 찾아 보물처럼 내게 가져다주었다.그렇게 나는 우리의 사랑이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
발아래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다리 힘이 풀리며 차가운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부경탁이 허둥지둥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위로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아주 오래전에 엄마가 한 말이 있었다.“엄마는 네가 진우 그 애랑 사귀는 건 반대하진 않아.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집안이 그런 재벌가와 어울리긴 할까? 결국 네가 상처받을지도 몰라.”당시 달콤한 서진우의 애정에 취해 있던 나는 태연하게 웃어넘겼다.“괜찮아요, 진우가 반드시 잘해줄 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에요.”그러나 서진우가 내 가슴에 가장 깊이 가시를 박을 줄은 몰랐다. 남자의 가벼운 맹세를 진심으로 믿은 내가 바보였다.얼음처럼 식은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나는 흐느껴댔다.“엄마... 이제 서진우랑 절대 안 만날게요. 다 엄마 말씀대로 할게요.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눈 떠주세요.”그러나 텅 빈 방 안에는 내 목소리만 하염없이 메아리쳤다. 한참이 지난 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엄마의 시신을 화장터에 보내려고 했다. 화장 절차를 밟기 위해 정신을 차렸을 때, 병원 측의 차가운 통보를 받았다. 치료비를 모두 정산해야 엄마의 시신을 인계해 준다는 것이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순간, 내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분할 납부는...”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부경탁이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이걸로 정산해 주세요.”“안 돼요!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부경탁은 내가 말리려는 손을 제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되잖아요? 돈은 나중에 천천히 갚아도 괜찮아요.”그의 결연한 눈빛에 나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묘지 비용까지 그가 대신 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서둘러 일자리를 찾아 빚을 갚는 것뿐이었다.부경탁의 도움으로 뒷일을 쉽게 마칠 수 있었다.나와 엄마는 원래 친구가 없었기에 빠르게 절차를 넘길 수 있었다. 장례식 당일,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하늘
서진우는 내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내가 참가하는 모임마다 그는 항상 나를 위해 주스를 준비해 주기 위해 특별히 신경 썼다.4년 동안, 단 한 번도 예외 없이.그런데 지금, 서진우가 직접 내게 술을 마시라고 말했다.서진우는 느긋하게 자리에 다시 앉아 나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돈을 원한다면 다 마셔. 이게 바로 규칙이야.”서진우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돈을 위해 참아야 했다. “그래.”나는 한 병, 또 한 병 술을 입에 들이붓기 시작했다.몇 병을 마셨는지, 몇 종류를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나중에는 마시면서 토하기까지 했고, 얼굴에 묻은 액체가 눈물인지 술인지 구분이 안 갔다.모두 내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마지막 술을 마시던 순간, 나는 흐릿한 시야로 태연하게 앉아 있는 서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돈을 빌려줄 수 있는 거지?”서진우는 나를 증오가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도 다른 여자들처럼 돈이나 밝히고 있었던 거야? 정말 천박해.”그리고 경비를 시켜 나를 바에서 내쫓았다.나는 바닥에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서진우, 우리가 만난 지 4년이나 지났는 데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거야?’그날 밤, 나는 알레르기로 인해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이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이튿날, 나는 병원에서 깨어났고, 부경탁이 내 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엄마의 주치의였다.내가 깨어나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알코올 알레르기 있는 거 알면서 왜 술을 마셨어요? 자기 몸으로 장난을 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에요.”“진아 씨마저 쓰러지시면 누가 어머니를 돌볼 거예요?”그의 잔소리에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부 선생님.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그는 일어나며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진우야, 나 1억 빌려줄 수 있어?”방금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룸 안이 순식간에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서진우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깊고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1억? 그 돈으로 뭘 하려고?”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서진우 곁에 앉아 있던 여자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서진우의 오랜 친구, 송혜미였다.“진우야, 내가 뭐랬어? 여태껏 순수한 척하다가 결국 돈을 뜯어내려고 이러는 거잖아. 처음부터 내 말을 믿었어야 했어.” “두 사람 사랑하는 사이라더니, 지금은 너보다 돈이 더 중요한가 보네.”“진우, 너보다 네 지갑이 더 귀한 모양이야.”송혜미는 말을 마치고는 나를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힐끔 쳐다보았다.나는 멍하니 서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송혜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심지어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주변 사람들은 서진우의 반응을 보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송혜미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송혜미의 자리를 빼앗은 데다가, 뻔뻔스럽게 그들의 무리에 끼어들기까지 했다고 생각했다.평소에는 서진우가 내 편을 들어주곤 했기에, 다들 겉으로는 나를 형수님이라 부르며 웃어넘겼다.그러나 오늘, 서진우가 나서서 말리지 않자 모두들 대담해졌다.“진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1억을 요구하다니.”“우리 진우 형이 왜 그쪽한테 1억이나 줘야 하죠?”누군가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모았다.“다들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마. 괜히 돈이나 요구하면 어쩌려고.”“특히 겉보기에 순수해 보이는 애들이, 돈 달라고 할 때는 정말 무섭더라.”“배진아, 차라리 은행을 털러 가는 게 더 빠를걸?”누군가는 농담조로 말했다. “나랑 만나면 2,000만 원 줄게. 고민해 봐.”서진우는 눈썹을 찡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혜미는 이 말을 듣고 놀란 척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돈 좀 요구한 건데 다들 왜 그렇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