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은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차에 올랐다. 폭우를 뚫고 X시로 향하는 중이었다.지훈은 X 시에서 대학원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누나 지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매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해 왔다.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상에는 지은과 지훈 두 남매만 남았다.지훈이 없었다면 지은은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훈을 구해준 민호의 아버지에게 보답하기 위해 강씨 집안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왔다.그러나 오늘 벌어진 모든 일들과 민호가 입 밖으로 내뱉은 진심을 들은 후, 그
성재는 은희가 ‘서 대표’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저 여자가 바로 서지은인가?’“주 상무님...”지은은 급히 말했다.“저기, 좀 급한 일이 생겼는데, 혹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제 동생이 사고를 당했는데, 카드에 문제가 생겼어요.”은희는 주저하지 않고, 카드를 꺼내 건넸다.“비밀번호는 7777입니다.”“감사합니다. 이 돈은 내일 꼭 갚겠습니다.”지은은 고마운 마음에 인사했고, 은희는 그녀를 옆에 놓인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런데, 손과 팔에 상처가 있네요. 괜찮아요?”“괜찮아요.” 지은
지은은 은희에게서 빌린 돈을 갚은 뒤, 감사의 표시로 A 시로 돌아온 후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제안했다. 은희는 지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병원에 돌아가서 동생을 돌보던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훈은 계속해서 물었다.“누나 눈이 왜 그렇게 빨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내 동생이 사고를 당했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냐?” 지훈은 아무 말없이 지은을 바라보며,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지은이 자기를 위해 자꾸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사실대로 얘기 안 하면 나 당장 퇴원할 거야.”지훈
최근 몇 년간 지은이 민호를 위해 애써 지켜온 모든 것들이 민호를 더 막무가내로 변하게 만들었다. 지은은 발신자 번호와 함께 민호의 이름이 뜬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며, 그동안 보인 적 없었던 차가운 모습을 드러냈다. 화가 난 그녀는 곧 일회용 젓가락을 부러뜨리고 말았다.민호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받아.” 지훈은 침대에 누워,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두 사람의 화가 난 모습은 매우 비슷했다. 둘 다 왠지 모르게 가까이하기 힘든 느낌을 주었다. “여보세요?” [내가 보낸 메시지 못 봤어? 일마저 그만둘 생각이야
아직 회사에 있는 민호는 지현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밖에 비 오는데 너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일찍 퇴근할까? 내가 널 위해 뜨끈한 국물 요리 좀 해놨거든.”지현은 민호가 현모양처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현모양처 행세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민호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사실은 독립적인 성격의 지은이라는 사실이었다.그 점은 지은조차 모르고 있었다.“국을 끓였다고?” 민호가 물었다. “너 몸 상태 안 좋다고 하지 않았어? 매일 힘도 없으면서 왜 요리는 왜 했어?”지현은 잠시 멈칫했다
몇 초 후, 민호는 지은의 창백해진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뚜렷하게 봤다.“넌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거든.”‘성공?’‘강민호의 실력으로는 성공을 논할 자격조차 없지. 그저 겉만 번지르르할 뿐.’ ‘회사를 책임질 만한 능력도 없으니까.’ ‘백지현이 그렇게 빼앗으려고 안달이 났잖아? 그럼 둘이서 얼마나 잘 살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어.’지은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민호는 핸들을 더욱 세게 쥐었다.그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지은의 말들이 모두 진심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감히 나를 도발해?’민호는 차
1시간 후.A 시의 고급 레스토랑.YJ그룹의 부대표인 이환희가 비즈니스팀과 홍보팀의 이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서 대표님, 저희는 서 대표님을 매우 존경합니다. 만약 서 대표님께서 저희와 함께해 주신다면, 이후 무슨 요구가 있든지 저희가 최선을 다해 맞춰 드릴 겁니다.” 이환희가 웃으며 말했다.“저희 본사 쪽으로 가시면, 서 대표님의 모든 생활은 부대표급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사소한 일들에는 신경 쓰실 필요 없으세요.”식사 내내, 이환희는 지은이가 YJ그룹에 오기만 하면, 바다가 앞에 보이는 집과 자동차를 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곧 핸드폰을 들고 일어섰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은희가 나가자, 지은은 자리에 앉은 채 속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소문으로만 듣던 CY그룹의 대표를 만나는 건, 지은도 처음이었다. 주성재는 왠지 선한 사람 같지 않았고, 적어도 외모만으로는 아무도 그가 자수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성재는 얇은 눈꺼풀 속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무게가 있었다.“서 대표님,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지은의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처럼 좋은 날, ‘강민호’라는 이름을 핸드폰 화면에 발신자로 떠서 그녀의 마음속엔 가시덩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가시가 지은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그로 인해 피가 배어 나오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지은은 민호의 예상대로 완전히 마음을 접지는 못했지만, 그를 향한 사랑은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미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민호를 볼 때 느끼는 아픔은 그저 오래된 감정의 반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고 상처 없이 떠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네가 뭘 알아? 이번 PX그룹의 대회 출품작이 서지은이 만든 거였다고!” 민호는 고함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서지은이 감히 나를 감쪽같이 숨기고, 뒤에서 딴짓하고 있었다고! 심지어 어떤 늙은 여자랑 짜고 나를 속였어!” 그는 작품을 판매했던 임수진에 대해 떠올렸다. 임수진은 당시 작품을 소개하며 그것이 지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이건 분명 서지은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일 거야!’민호는 스스로 이렇게 믿으며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의 말이 끝나자, 어느새 한 손이 그녀의 어깨 근처에 얹혔다. 지은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성재가 서 있었다. 그는 굳건하고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녀 옆에 서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흔들리지 않는 산과 같았다. 민호조차 성재의 강력한 아우라 앞에서 조금도 반박하거나 반응할 수 없었다. 성재는 말 한마디 없이 지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그런 다음 민호의 달라진 얼굴색을 완전히 무시하며 그녀를 데리고 대회장을 떠났다. 이 장면은 남아있던 A 시의 모든 자수 기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뭐지? 그
지은의 한마디에 민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입술까지 떨려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대회장은 고요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고, 모든 시선이 PX그룹과 민호에게 쏠렸다.‘뭐? 그 작품이 서지은이 한 거라고?’민호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지은이 저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도 안 돼! 설령 서지은이 했다 해도, 그건 우연히 잘 된 거겠지.’민호는 속으로 부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행동했다. 그는 지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니, 서
민호의 비아냥과 깎아내리는 말들은 지은이 PX그룹에 있을 때부터 수년간 반복되어 왔다. 그녀는 이미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들었고,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과거의 지은이었다면 민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며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민호의 교만한 태도와 비웃음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마침 대회 측 관계자가 CY그룹 쪽으로 다가와 1위를 축하하려던 순간, 지은이 목소리를 높여 질문을 던졌다. “만약 외부에서 고급 작품을 구매해 출품한 경우,
지은이 PX그룹에 있을 때, 출품 작품 선정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강조했던 원칙이 있었다. 바로 자수 공예 장인들의 이름을 작품에 절대 표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작품 선정과 투표 단계마다 다양한 부서의 관리자를 참여시켜 공정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혹시라도 부정행위가 발생하면 정직하게 노력한 자수 공예 장인들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결과를 초래했다.그녀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무대 뒤, 선정된 자수 공예 장인들이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
지은은 긴장이 풀린 듯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입선했으면 다행히.’CY그룹에 막 발을 들인 그녀로서는, 첫 대회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야만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민호와의 지난 경험은 그녀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다. '손에 꽉 쥐고 있어야 내 거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가 사라질 거야.'뒤쪽에 앉아 있던 CY그룹의 팀장들은 스크린에 비친 작품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색감의 조화, 표면에서 반짝이는 광택감, 그리고 투명함을 강조한 디테일! ‘이건 진짜 대가의 작품이야!’그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회 분위기는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미 세 개 기업이 작품을 제출한 상황에서, 이제 PX그룹의 차례가 되었다. 양나인은 멀리서 지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순간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서 대표님이 정말 PX그룹을 떠나서 CY그룹으로 가셨구나...’ 그녀는 잠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서 대표님이 그렇게 큰 회사로 가셨는데, 혼자서 팀원도 없이 잘 적응하실 수 있을까?’지은이 없는 PX그룹의 분위기가 퍽 어수선해졌기에, 나인은 지은의 현재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혹시 서 대표
지은은 민호의 말에 순간적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지금은 상하관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재의 팔을 살짝 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이런 자리에서 강 대표와 다투는 건 적절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강민호 같은 사람과 말다툼하는 건 내 품격만 떨어뜨리는 일이야.’하지만 성재는 그녀와는 달랐다. 성재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냉랭하게 굳어 있었다. 이 상황을 놓치지 않은 이는 바로 그의 비서, 이무진이었다. 무진은 성재의 미묘한 신호를 읽고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