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안 씻은 사람은 나와 강진혁이었다.나는 아무래도 괜찮았지만 강진혁은 머쓱한 듯했다.“뭐 어차피 내 배 속으로 들어가는 데 문제없으면 그만이죠.”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다가오는 진정우 손에는 물티슈가 있었다.강진혁은 받으려 했지만 진정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 결국은 내가 받으면서 한 장을 꺼내 강진혁에게 건네곤 나도 손을 닦았다.“지원아, 이분은 누구야?”강진혁은 불쾌한 티를 팍팍 내는 진정우가 누군지 아주 궁금했다.“이분은 진정우 씨, 조명 기사님이세요.”나는 강진혁에게 소개했다.나를 보는 진정우의 눈빛에선 압박감이 느껴졌고 결국 진정우에게도 강진혁을 소개하는 수밖에 없었다.“이분은 제... 오빠 강진혁이에요.”“안녕하세요.”강진혁은 진정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그러나 진정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이소희가 바로 입을 열었다.“진 기사님은 결벽증이 있어요.”강진혁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얼른 앉아서 먹어. 식으면 맛없으니까.”이소희는 입맛을 다셨다.“저도 하나 먹어도 돼요?”“물론이죠.”강진혁은 이내 진정우에게도 말했다.“진 기사님도 먹어봐요.”“아니요. 전 죽을 먹을 거예요.”진정우는 차갑게 거절한 뒤 자리를 떴다.이소희는 만두를 먹다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나를 보았다.“언니, 진 기사님 혹시 생리하는 건 아니겠죠?”나는 그런 이소희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정말 그런가 보네요.”강진혁은 나와 이소희의 대화에 웃음을 터뜨렸다.“진 기사님 성격이 좀 까칠하네요.”“아니에요. 사실 성격이 나쁘진 않아요. 조금 쌀쌀맞긴 하지만 이 정도로 까칠하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이소희의 입은 음식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이때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다만 녹두차와 만두를 먹은 나는 더는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이소희와 진정우가 전부 먹어치웠다.이소희는 당연히 진정우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진정우는 먼저 이소희에게 먹으라
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다음 생에요. 다음 생에 전 두 분의 딸로 태어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오빠랑 저는 진짜 남매가 될 수 있겠죠.”강진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만두를 보며 말했다.“더 먹어. 너 요즘 살 많이 빠졌어.”“네.”나는 다시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강진혁은 내가 먹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결국 배가 부른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녹두차를 마셨다.“유형이는 여전히 널 걱정하고 있나 보네. 어머니가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너에게 녹두차를 만들어준 것을 보면 말이야.”강진혁이 말했다.나는 바로 입꼬리를 올리며 픽 웃었다.“있을 때 잘하지 않고 이러는 건 문제 아닌가요?”구내염은 여전히 내 식욕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먹은 것을 정리한 뒤 말했다.“고마워요, 오빠. 이 먼 곳까지 와줘서요. 그리고 돌아가면 아저씨랑 아주머니께도 말씀드려주세요. 일 끝나면 바로 찾아뵐 거라고요.”나는 이 놀이공원을 가리켰다.“여긴 아마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아직 조명 조절 완벽하게 못 했거든요. 그래서 요즘 많이 바빠요.”“그래, 유형이한테서 들었어. 그래도 몸 챙겨가면서 해.”강진혁이 당부했다.“네, 알겠어요.”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바쁘게 일하는 진정우를 가리켰다.“저 이젠 일하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래, 조심히 해.”강진혁은 또 걱정 어린 말로 말했다.진정우는 결국 점심을 먹지 않았다. 오후 내내 나와 거의 말도 섞지 않은 것을 보아 어딘가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나는 정말 그 이유를 몰랐다. 대체 그가 왜 화가 난 것인지를.연이은 며칠, 진정우는 전보다 더 말수가 없었고 차가웠으며 그저 묵묵히 일만 할 뿐이다.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나도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 다만 매일 물 마시며 쉬는 시간이 정해졌다.자기 몸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지 모를 휴식 시간이었다.일주일 동안 진도는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었고 뜻밖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
진정우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노트북 앞에서 기절한 듯 자고 있었다. 은은한 호텔 방 불빛이 내 얼굴에 비치고 그의 시선도 내 얼굴에 닿았다.나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으나 눈이 떠지지 않았다.한참 지나자 그가 나직하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다윤아...”‘다윤아?!'‘지금 날 부른 거야?'‘맞네, 날 부른 거네.'강씨 가문으로 들어가기 전 나의 이름은 다윤이었다. 지원이가 아니라.하지만 그동안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오빠, 난 다윤이라고 해...”그 순간 머릿속에 작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여자아이는 양 갈래로 두 개의 만두 머리를 했고 포동포동한 볼살로 귀엽게 어떤 한 남자아이를 보며 말했다.남자아이는 무뚝뚝한 성격이었던지라 말수가 적었다.곧이어 내가 그 여자아이가 되었고 남자아이는 진정우가 되었다. 나는 어느새 진정우의 등에 업혀 있었다.“오빠, 냄새가 너무 좋아...”“오빠 목 뒤에 까만 콩이 있어. 내가 뜯어줄게.”“다윤아, 그만. 아파.”“다윤아, 오빠 힘든데 그만 뛰면 안 될까?”...“엄마, 난 오빠가 좋아. 크면 오빠랑 결혼할 거야...”“하하...”“엄마, 아빠! 웃지만 말고. 다윤이는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라고!”“다윤아, 넌 오빠랑 결혼할 수 없어. 너한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단다...”“싫어! 약혼자랑 결혼 안 해! 싫어!”그 순간 나는 꿈에서 깨게 되었고 숨을 몰아쉬었다.조금 이상했다.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게다가 몸이 아주 작은 것을 보아 네 살쯤 되는 것 같았다.침대에 누운 나는 멍하니 천장을 30초간 보다가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이 방은 내 방이 아니었다.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어젯밤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지만 진정우는 없었다.나는 이내 고개를 숙여 몸을 보았다. 다행히 옷은 그대로 있었다.놀란 가슴을 달래며 밖으로 나가니 소파에서 자는 진정우가 보였
안리영이 지금 이 시간에 답장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대화창에서 나와 SNS를 열었다. 그러자 신지태가 올린 여유로운 사진을 보게 되었다.사진 속 신지태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엔 다른 사람도 있었고 몇 명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그중 아주 익숙한 손이 보였다. 그것은 강유형의 손이었다.그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싸구려 반지는 내가 선물한 것이기 때문이다.지금 그 반지를 다시 보니 너무도 유치하고 창피했다.그 반지는 한 쌍이었다. 남은 하나는 나에게 있었고 내가 18살 때 생일 선물로 산 것이다. 가격고 기껏해야 19만 9천 원이었다.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여성 사이즈였고 남성 사이즈는 강유형이 끼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강유형은 이 반지를 보며 목줄을 채우는 것이냐며 놀리기도 했었다.그러다 나중엔 그는 더는 이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았다. 궁금했던 나는 떠보듯 물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까 봐 뺐다는 것이다.너무 싸구려라서.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고귀한 몸인 강유형이 고작 20만 원 하는 반지를 끼고 다니기엔 체면을 구기지 않겠는가?하지만 그 반지는 내가 처음으로 가정 교사 아르바이트하면서 번 돈이었다.그날 이후로 나는 더는 이 반지에 관해 묻지 않았고 그도 끼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 속 강유형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나도 이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다만 그 반지는 확실히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도 모르게 항상 강유형의 앞에서 주눅 들어 눈치만 살피며 비위를 맞추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안리영의 답장이 오면서 나는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누구랑 잤는데?]안리영은 직설적이었다.나는 이 문자를 보고도 바로 답장하지 않았다. 강유형이 낀 반지 때문에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강유형?]안리영이 또 문자를 보냈다.[아니, 걔는 아닐 거야.][혹시 정우 오빠?]안리영은 진정우임을 알아맞
정말이지 너무 민망했다.당사자인 이소희보다 내가 더 민망함을 느꼈다.이소희도 물론 민망해하고 있었지만 강철 멘탈인 이소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헤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이소희는 내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와 찰싹 붙었다. 그리곤 걸으면서 말했다.“진 기사님 정말로 생리 중인 거죠? 오늘도 뭔가 히스테리가 심하네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소희는 진정우가 짜증을 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힘들까 봐 진정우가 이소희에게 직접 음식을 가져올 것을 권하는 것으로 들렸다.‘정말로 날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이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얼른 생각을 지웠다. 날이 가면 갈수록 착각만 심해지는 것 같았다.“이따가 우리 그냥 따로 앉아요.”음식을 받은 뒤 어젯밤 진정우의 방에서 잔 일이 떠오른 나는 더는 그를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소희에게 말했다.“왜 따로 앉아요? 아는 사이인데 같이 앉아야죠. 게다가 방금 오늘 할 일도 정해야 한다면서요.”이소희는 일 핑계로 말했기에 나는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다만 나는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소희 씨는 잘생긴 얼굴 조금이라도 더 구경하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아니에요?”“언니, 어쩜 날 그렇게 잘 알아요?!”이소희는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결국 진정우와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괜히 이소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이소희는 엉뚱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머리가 좋았다.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마자 누군가 다가왔다.“어머, 소희야. 정말 너구나?”아주 예쁜 여자가 손에 음식 그릇을 들고 있었다.이소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주었다.“뭐야, 반장!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나야 출장 왔지. 정말 오랜만이네. 우리 같이 먹을까?”여자는 이소희에게 아침을 함께 먹자고 제안했다.이소희의 반응은 나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우를 힐끗 보더
“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 연애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저는 팀장님처럼 경험이 많지도 못해요. 파혼한 약혼남에, 친한 오빠에, 그냥 아는 남자에... 팀장님처럼 알고 지내는 이성도 별로 없어요.”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먼저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저예요. 어젯밤 저희가 같은 방에 있었던 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제가 진 기사님의 명성에 먹칠했다는 거예요?”나는 약간 화가 난 말투로 물었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팀장님 어젯밤은 그냥 잠만 잤잖아요.”진정우의 말을 듣고 있자면 내가 변태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고단수였다.나는 속으로만 씩씩댈 뿐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손에 들린 빵만 애꿎은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명성을 지키려면 저한테서 멀어져야겠네요.”빵을 다 먹고 난 나는 소심하게 반격했다.“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저희같이 일하고 있잖아요.”진정우는 티슈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내가 아침 식사를 끝냈을 때 이소희도 끝냈다. 그녀는 동창들과 인사했다. 다음에는 꼭 오기 전에 연락하겠다면서 말이다.동창들이 차에 탄 다음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언니, 진 기사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둘이 한참 얘기하던데?”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동창들과 밥 먹을 때에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별 얘기 안 했어요.”나는 짧은 말로 둘러댔다. 이소희는 당연히 믿지 않고 계속 말하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그냥 일 얘기예요. 저희 앞으로 야근이 더 잦아질 것 같다고요.”“네?”이소희는 급 울상이 되었다.“기사님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못됐어요, 정말!”나는 말없이 그녀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다. 진정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야 그는 따릉이를 타고 왔다.“언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쉰다니요?”나는 황급히 진정우에게 가서 물었다.“일주일에 두 번은 쉬도록 국가적으로 규정되어 있어요. 요즘은 일이 바쁘니 하루 정도 쉬는 건 문제 없죠?”진정우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대답했다.“맞아요. 근데 저희 시간이 별로 없어요. 진 기사님도 알잖아요. 휴식은 후에 하면 안 될까요? 추가 수당도 줄게요.”진정우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휴식이 필요해요. 쉬어야 일도 더 잘하죠.”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쉴 수 있을 때가 아니다.나는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말했다.“그래서 오늘 꼭 쉬어야겠다고요?”“네.”말을 마친 진정우는 몸을 돌려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또 한 마디 덧붙였다.“다른 분들도 쉬게 해줘요.”나는 화가 치밀어서 그를 보며 외쳤다.“진 기사님은 푹 쉬세요! 저희가 일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요!”한쪽에서 이소희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진정우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다가 팀장님도 일 못해요. 어젯밤...”“진정우 씨!”나는 소리 내어 그의 말을 끊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한층 배었다.어젯밤 일을 비밀로 하자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언급될 뻔했다. 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결국 기세에 밀려나서 타협했다.“알았어요. 저희도 쉬면 되잖아요. 소희 씨, 이만 돌아가요.”나는 이소희를 불러서 가려고 했다.“팀장님.”이때 진정우가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저 부탁할 일이 있어요.”가슴에서는 또다시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왜요, 쉬는 시간에 마사지라도 해줄까요?”“그건 됐고, 사야 할 물건이 있어요. 팀장님이 안내해 줬으면 하는데.”진정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소희 씨랑 같이 가요.”“저는 팀장님이랑 가고 싶은데요.”“풉!”이소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실
“진 기사님, 이게 무슨 뜻이에요? 어제 일로 저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아뇨.”진정우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를 패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생기고 있었다.“저 진짜 이 동네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요. 조금 도와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저도 팀장님 도와준 적 있고...”진정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내가 안 도와주면 나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역시 진 빚은 갚아야 한다. 그게 돈 빚이든, 인정 빚이든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아요, 오늘 어디 가고 싶어요? 뭘 사야 하는지 알려주면 안내해 줄게요.”“집 보고 싶어요.”그의 대답에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집이요? 이쪽 일 끝나고 나면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안 돌아갈 것 같아요. 그래서 미리 봐두려고요.”진정우의 말에 나는 목구멍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이상했다.“기사님 회사 다른 곳에 있잖아요.”“사직하면 돼요.”“...”“참, 저 월세로 알아보고 싶어요. 아직 집 살 능력은 없어서요.”진정우는 지나치게 태연하게 지갑 상황까지 밝혀버렸다.이 점은 약간 놀라웠다. 요즘은 돈이 없어도 있는 척, 할부로 명품을 사며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진정우는 솔직한 편이었다.“그런데 왜 사직해요?”진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것 같았다.그가 한 말 때문인지 나는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를 차에 태우고 시내로 향했다.“시내는 집값이 비싸지 않을까요?”“교외보다는 비싸겠지만 출퇴근이 어려워요. 교통비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여기 사는 게 나아요. 기사님 같은 분이라면 적어도 CBD 쪽 회사에 다닐 거잖아요.”나의 제안에도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정이 많이 어려운가 싶어서 나는 말을 보탰다.“돈이 모자라면 제가 빌려줄게요. 돈이 생긴 다음 천천히 갚아요.”“어쩐지 몸으로 갚으라는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