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콜록...”감기가 걸렸는지 한밤중에 기침이 나왔다. 나는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에 걸리면 꼭 기침을 심하게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닌 데다 산속은 기온이 낮아 금세 병이 도진 것 같다.“콜록, 콜록...”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뭔가 이물질이 걸린 듯한 답답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물을 마셨음에도 기침이 가라앉지 않을 때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한밤중에 울리는 노크 소리는 섬뜩한 법이지만 여기는 절이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내가 묻기도 전에 문밖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옆방에 있는 운약 스님이네.”운약은 김지영의 법명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불교에 심취해 이미 속가 신도가 된 상태였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공손히 합장했다.“스님.”“기침이 심하더구나. 그래서 목에 좋은 비즙을 가져왔어.”김지영은 온화한 인상이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묶었는데 정수리 부분이 살짝 부풀어 있었고 이마는 둥글고 넓었다. 단번에 복이 많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런 그녀가 잔혹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아들을 두었다.이렇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감사합니다, 사모님. 한밤중에 신경 써 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나는 그녀가 내민 배청을 공손히 받으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힘들게 찾았던 걸 갑작스럽게 찾게 된다는 게 이런 뜻인 것 같다.마침 그녀와 연결고리를 만들 방법을 고민하던 차였는데 감기 덕분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접점을 만들게 되다니.‘역시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몸이 냉한가 보구나. 산속은 기온이 낮은데 젊은 아가씨들은 대개 옷을 얇게 입더라고.”김지영은 내 이불을 흘낏 보며 조용히 말씀하셨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네, 두꺼운 옷을 가져오지 못했어요.”이 말에도 나름 계산이 있었다. 일부러 조금 안쓰러운 척해야 그녀와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김지
옷의 재질을 손끝으로 느끼는 순간 값비싼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넘겨주었고 그 순간 나는 묘한 감동과 함께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나는 그녀를 이용하려 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사모님, 이 옷 너무 귀한 거라서 받을 수 없습니다.”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귀하다니,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야.”그녀의 태도와 모든 걸 초월한 듯한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진정우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무슨 일 있어?” 그녀가 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입술을 꾹 눌렀다. “사모님, 제 이름은 윤지원입니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나는 순간 멍해졌고 그녀는 이내 덧붙였다.“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니까.”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설명했다.“전에 우리 아들이 널 마음에 두고 있어서 당연히 알아봤지. 하지만 네 사진을 보자마자 우리 아들이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어.”‘그랬구나.’나는 그녀의 온화한 눈빛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사모님, 사실 오늘 사모님 뵈러 여기 왔어요.”“그럼 앉아서 얘기해 봐.” 그녀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솔직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따뜻한 사람이었다.나도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그녀 곁에 앉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열리는 법이니까.“사모님, 저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나는 더 숨길 것도 없이 내 처지와 진정우의 상황을 모두 털어놓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회장님과 용준호가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하면 저와 그것을 함께 없애버릴 겁니다. 살아남으려면 사모님의 도움이 필요해요.”그녀는 어느새 손에 염주를 들고 한 알 한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전히 그의 뒷모습뿐이었다.환한 달빛 아래 그 익숙한 실루엣이 또렷하게 보였다. 가깝지만 멀기만 한 거리였다.“강유형, 고마워.”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김지영한테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지영이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준 것도 그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조용히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그가 한때 나를 사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그 순간 나는 머리 위로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강유형과 함께한 10년의 시간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다들 말하길, 헤어진 연인은 마치 젊은 날을 헛되이 버린 것과 같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왔지만 쉽게 잠들 수 없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찍어 SNS에 올렸다.[이제는 놓아줄 거야.]그 순간 안리영이 바로 좋아요를 눌렀고 메시지를 보냈다.[뭘 놓아준다는 거야?][과거.]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아직 안 자? 혹시 이제 막 수술 끝났어?][야근 중.]그녀의 말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작고 붉은 얼굴의 신생아 사진과 짤막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1385번째 천사야.]그 숫자는 그녀가 지금까지 받아낸 아기들의 수를 뜻했는데 그녀의 성과와도 같은 숫자였다.사진 속 갓난아기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라 안리영과의 채팅창을 끄고 진정우의 카톡을 열어 메시지를 작성했다.[돌아와 줘. 우리 아기 갖자.]하지만 메시지는 끝내 답이 없었다. 그가 답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답장을 기다리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정말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그의 답장을 받고 싶었다.[기다려.]그 한마디 말이다.그사이 안리영이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지만 내가 계속 답을 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잠들었
내가 두 손 모아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냈지만 안리영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더 보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급한 일이 생겨 불려 간 것 같았다.내 예상은 맞았다. 1385번째 천사의 엄마가 갑자기 대출혈을 해서 안리영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녀가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다. 손과 수술복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었고 이번 응급 처치는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산모는 고비를 넘겼다.“산모 가족 중 한 분, 제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주세요.”안리영은 간호사에게 지시하며 곧장 탈의실로 향했다.산모가 갑작스럽게 대출혈을 일으킨 원인은 다름 아닌 분노 때문이라는 걸 수술하는 과정에 이미 파악했었다.그녀가 화가 난 건 산모가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모진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모의 남편은 좋은 거 먹이고 마시게 하면서 10달을 공들였는데 고작 이런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면서 원망했고 마침 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2천만 원에 팔겠다고 했다.안리영은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었지만 매번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아직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산모의 남편이 먼저 들이닥쳤고 안리영한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난 동의한 적 없어. 저 여자가 수술받은 비용 난 인정 못 해.”그 말에 안리영은 그대로 폭발했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한 번 더 말해봐요.”안리영의 손에 묻은 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풍기는 기세에 눌린 건지 남자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계속 투덜댔다.“어쨌든 난 인정 못 해.”“인정 안 하기만 해 봐요.”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자 그는 움찔했지만 계속 강하게 밀어붙였다.“인정 못 해. 애 낳고 피 좀 흘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병원에서 돈 벌려고 괜히 호들갑 떠는 거지.”그 뻔뻔한 태도에 안리영은 더욱 화가 치밀어서 그대로 남자의 코앞까지 손가락을 들이밀며 쏘아붙였다.“당신 와이프가 당신 자식을 낳았어요. 그런데 고
구안석이 안리영을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한복판,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듯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에게 쏠렸고 심지어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안리영은 마치 아이처럼 구안석의 품에서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바로 뒤에서 나왔던 소희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그들 곁을 지나쳤다.안리영도 그녀를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구 교수님만 있으면 됐으니까.“안 선생님!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어요!”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쳤다.안리영이 바라보니 낯이 익은 여성이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아마도 자신이 분만을 도왔던 산모일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안리영은 거리낌 없이 구안석의 어깨에 기댄 채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남자친구예요!”“안 선생님, 두 분 행복하세요! 그리고 우리 애처럼 귀여운 아기도 얼른 낳길 바라요!”이보다 더 강력한 덕담이 있을까.안리영은 익살스럽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알겠어요!”이 짧은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둘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공항을 나섰다.“화났지?”구안석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지난번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화났어. 근데 이제 용서해 줄래.”다른 사람들 눈에 안리영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당당한 의사였지만 구안석 앞에서는 그냥 사랑에 빠져 있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구안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입 맞췄다.“우리 리영이 진짜 넓은 마음을 가졌네.”“나 그런 거 싫어.”안리영은 단호했다.넓은 마음과 착한 심성의 전제는 결국 자기희생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할 때 이미 충분히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구안석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이고 싶었다.구안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구안석이 안리영을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한복판,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보다도 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듯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에게 쏠렸고 심지어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안리영은 마치 아이처럼 구안석의 품에서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바로 뒤에서 나왔던 소희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그들 곁을 지나쳤다.안리영도 그녀를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구 교수님만 있으면 됐으니까.“안 선생님!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어요!”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쳤다.안리영이 바라보니 낯이 익은 여성이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아마도 자신이 분만을 도왔던 산모일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안리영은 거리낌 없이 구안석의 어깨에 기댄 채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남자친구예요!”“안 선생님, 두 분 행복하세요! 그리고 우리 애처럼 귀여운 아기도 얼른 낳길 바라요!”이보다 더 강력한 덕담이 있을까.안리영은 익살스럽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알겠어요!”이 짧은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둘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공항을 나섰다.“화났지?”구안석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지난번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안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화났어. 근데 이제 용서해 줄래.”다른 사람들 눈에 안리영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당당한 의사였지만 구안석 앞에서는 그냥 사랑에 빠져 있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구안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입 맞췄다.“우리 리영이 진짜 넓은 마음을 가졌네.”“나 그런 거 싫어.”안리영은 단호했다.넓은 마음과 착한 심성의 전제는 결국 자기희생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할 때 이미 충분히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구안석 앞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이고 싶었다.구안
내가 두 손 모아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냈지만 안리영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더 보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급한 일이 생겨 불려 간 것 같았다.내 예상은 맞았다. 1385번째 천사의 엄마가 갑자기 대출혈을 해서 안리영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녀가 수술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다. 손과 수술복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었고 이번 응급 처치는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산모는 고비를 넘겼다.“산모 가족 중 한 분, 제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주세요.”안리영은 간호사에게 지시하며 곧장 탈의실로 향했다.산모가 갑작스럽게 대출혈을 일으킨 원인은 다름 아닌 분노 때문이라는 걸 수술하는 과정에 이미 파악했었다.그녀가 화가 난 건 산모가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모진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모의 남편은 좋은 거 먹이고 마시게 하면서 10달을 공들였는데 고작 이런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면서 원망했고 마침 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2천만 원에 팔겠다고 했다.안리영은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었지만 매번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아직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산모의 남편이 먼저 들이닥쳤고 안리영한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난 동의한 적 없어. 저 여자가 수술받은 비용 난 인정 못 해.”그 말에 안리영은 그대로 폭발했고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한 번 더 말해봐요.”안리영의 손에 묻은 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풍기는 기세에 눌린 건지 남자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계속 투덜댔다.“어쨌든 난 인정 못 해.”“인정 안 하기만 해 봐요.”안리영이 콧방귀를 뀌자 그는 움찔했지만 계속 강하게 밀어붙였다.“인정 못 해. 애 낳고 피 좀 흘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병원에서 돈 벌려고 괜히 호들갑 떠는 거지.”그 뻔뻔한 태도에 안리영은 더욱 화가 치밀어서 그대로 남자의 코앞까지 손가락을 들이밀며 쏘아붙였다.“당신 와이프가 당신 자식을 낳았어요. 그런데 고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전히 그의 뒷모습뿐이었다.환한 달빛 아래 그 익숙한 실루엣이 또렷하게 보였다. 가깝지만 멀기만 한 거리였다.“강유형, 고마워.”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김지영한테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지영이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준 것도 그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는 조용히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그가 한때 나를 사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그 순간 나는 머리 위로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강유형과 함께한 10년의 시간을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다들 말하길, 헤어진 연인은 마치 젊은 날을 헛되이 버린 것과 같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왔지만 쉽게 잠들 수 없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찍어 SNS에 올렸다.[이제는 놓아줄 거야.]그 순간 안리영이 바로 좋아요를 눌렀고 메시지를 보냈다.[뭘 놓아준다는 거야?][과거.]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아직 안 자? 혹시 이제 막 수술 끝났어?][야근 중.]그녀의 말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작고 붉은 얼굴의 신생아 사진과 짤막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1385번째 천사야.]그 숫자는 그녀가 지금까지 받아낸 아기들의 수를 뜻했는데 그녀의 성과와도 같은 숫자였다.사진 속 갓난아기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라 안리영과의 채팅창을 끄고 진정우의 카톡을 열어 메시지를 작성했다.[돌아와 줘. 우리 아기 갖자.]하지만 메시지는 끝내 답이 없었다. 그가 답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답장을 기다리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정말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그의 답장을 받고 싶었다.[기다려.]그 한마디 말이다.그사이 안리영이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지만 내가 계속 답을 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잠들었
옷의 재질을 손끝으로 느끼는 순간 값비싼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넘겨주었고 그 순간 나는 묘한 감동과 함께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나는 그녀를 이용하려 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사모님, 이 옷 너무 귀한 거라서 받을 수 없습니다.”나는 정중히 거절했다.“귀하다니,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야.”그녀의 태도와 모든 걸 초월한 듯한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진정우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무슨 일 있어?” 그녀가 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입술을 꾹 눌렀다. “사모님, 제 이름은 윤지원입니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나는 순간 멍해졌고 그녀는 이내 덧붙였다.“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니까.”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설명했다.“전에 우리 아들이 널 마음에 두고 있어서 당연히 알아봤지. 하지만 네 사진을 보자마자 우리 아들이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어.”‘그랬구나.’나는 그녀의 온화한 눈빛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사모님, 사실 오늘 사모님 뵈러 여기 왔어요.”“그럼 앉아서 얘기해 봐.” 그녀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솔직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따뜻한 사람이었다.나도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그녀 곁에 앉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열리는 법이니까.“사모님, 저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나는 더 숨길 것도 없이 내 처지와 진정우의 상황을 모두 털어놓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회장님과 용준호가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하면 저와 그것을 함께 없애버릴 겁니다. 살아남으려면 사모님의 도움이 필요해요.”그녀는 어느새 손에 염주를 들고 한 알 한
“콜록, 콜록...”감기가 걸렸는지 한밤중에 기침이 나왔다. 나는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에 걸리면 꼭 기침을 심하게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닌 데다 산속은 기온이 낮아 금세 병이 도진 것 같다.“콜록, 콜록...”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뭔가 이물질이 걸린 듯한 답답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물을 마셨음에도 기침이 가라앉지 않을 때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한밤중에 울리는 노크 소리는 섬뜩한 법이지만 여기는 절이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내가 묻기도 전에 문밖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옆방에 있는 운약 스님이네.”운약은 김지영의 법명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불교에 심취해 이미 속가 신도가 된 상태였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공손히 합장했다.“스님.”“기침이 심하더구나. 그래서 목에 좋은 비즙을 가져왔어.”김지영은 온화한 인상이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묶었는데 정수리 부분이 살짝 부풀어 있었고 이마는 둥글고 넓었다. 단번에 복이 많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런 그녀가 잔혹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아들을 두었다.이렇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감사합니다, 사모님. 한밤중에 신경 써 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나는 그녀가 내민 배청을 공손히 받으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힘들게 찾았던 걸 갑작스럽게 찾게 된다는 게 이런 뜻인 것 같다.마침 그녀와 연결고리를 만들 방법을 고민하던 차였는데 감기 덕분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접점을 만들게 되다니.‘역시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몸이 냉한가 보구나. 산속은 기온이 낮은데 젊은 아가씨들은 대개 옷을 얇게 입더라고.”김지영은 내 이불을 흘낏 보며 조용히 말씀하셨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네, 두꺼운 옷을 가져오지 못했어요.”이 말에도 나름 계산이 있었다. 일부러 조금 안쓰러운 척해야 그녀와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김지
강경이 끝날 때쯤 스님에게 다가간 나는 강유형을 보았다.나를 데리고 처음으로 경을 들으러 온 것이 강유형이었다. 처음에 나는 지루하다고 느꼈지만 후에 경을 들으면 그에게 복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매번 그를 따라와서 진지하게 들었다.몇 번을 듣다 보니 경을 듣는 것이 좋아졌고 심지어 가끔 경서를 따라 읽었다.강유형과 헤어진 후에도 나는 경을 들으러 왔었다. 이제 다시 만나도 그와 나는 평범한 낯선 사람일 뿐이다.그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와 나는 수정 스님 앞에 다가가서 재앙을 소멸하는 법술을 받았다. 이런 법술은 매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운 좋게 맞닥뜨린 것이었다.불교에서 이 법술은 자신의 지은 죄와 재난 그리고 질병을 소멸해 준다. 비록 이것은 마음속 염원에 불과했으나 모두가 좋아한다.불교 의식이 끝난 후 나와 강유형은 법당을 떠났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에 아직도 올 줄은 몰랐어.”“나는 마음을 비우러 온 거야.”나도 그를 속이지 않았다.어떤 일은 그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유형은 알고 있을 것이다.“혹시 내가 도울 거라도 있어?”그는 나에게 물었다.달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저번보다 훨씬 야위었고 심지어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으나 현재 그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 관심을 마음속에 억눌렀다.“아니, 없어.”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바로 그에게 설명했다.“이 일에 너까지 연루시키고 싶지 않아.”강유형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지금 나를 지켜주는 거야?”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렇게 생각하던가.”“나는 내 최선을 다해 너를 지켜줄 거야, 그러니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해.”강유형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나는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일에 참견하려고 했다.“고마워.”나는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낯설었기에 좋지 않았다.“요즘 경을 들
“진혁 오빠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요. 그러나 더는 말하지 마세요. 말해도 저는 답이 똑같을 거예요. 저에게 없다고요.”나는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히고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지 않았다.“지원아,용씨 가문을 네가 이길 수 없어.”강진혁은 나를 설득하는 것이기도 하고 협박하는 것이기도 하다.많은 일을 겪은 후 나는 강진혁의 협박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저는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요, 혹시 알아요? 성공할지?”“사마귀가 수레 막는 식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강진혁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비웃는 것이다.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진혁 오빠는 사람이 동물보다 위대한 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바로 감히 맞서고, 시도하고, 반격하는 것이에요.”강진혁은 나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만약 지원이 너는 정우가 무사하기를 원한다면 물건을 내놔. 그리고 너와 정우는 돈을 가지고 너희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모처럼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는 것을 증명한다.그러나 나는 그의 방식에 따를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나와 진정우의 결과는 더 비참해질 것이다.“진혁 오빠는 저보고 숨어 살란 말이에요?”나는 고개를 흔들었다.“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천지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내가 진혁 오빠가 말한 것처럼 산다면 죽은 후 엄마 아빠 얼굴 보러 갈 면목이 없어요.”강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말해둘게 있어. 용씨 가문에서 나의 체면 때문에 너를 건드리지 않아서 네가 무사할 수 있는 거야.”“진혁 오빠 체면이 값지네요.”나는 강진혁을 공개적으로 비웃었다.나의 말을 들은 강진혁은 표정이 굳어졌다.“네가 끝까지 견지한다면 나도 이젠 해줄 말이 없어.”이 말을 마친 후 그가 떠나려고 할 때 진정우가 생각 난 나는 그에게 말했다.“정우 씨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역시 어리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도 미래 언젠가 후회할 수도 있어.”“미래를 누가 확신할 수 있겠어요? 눈앞의 오늘날을 소중히 여겨야죠.”나는 슬픈 척했다.“그래, 알았어. 지원 씨가 원하는 사람이니 성재가 돌아오면 데려 가요.”용진표는 흔쾌히 승낙했다.나도 따라서 말했다.“용 대표님, 고맙습니다.”“우리는 등가 거래야.”용진표가 말했다.“허허!”나는 웃었다.“무슨 거래요?”내 말을 들은 용진표는 표정이 굳어졌지만 큰 풍파를 겪었던 사람이라 바로 웃으면서 말했다.“아가씨, 물건을 내놓기만 한다면 무엇을 원하던 다 들어줄 수 있어.”그는 흔쾌히 말했으나 내가 원하는 걸 그는 줄 수 없었다.그러나 나는 여전히 말했다.“그럼, 제가 저희 엄마 아빠를 원한다면요?”이는 불가능한 일로서 그가 이루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찔러 부모님께 목숨을 빚졌음을 일깨워주었다.용준표는 얼굴이 굳어졌다.“지원 씨, 이러면 재미없어. 실질적인 걸 요구해야지, 예를 들면 돈이라던가 주식이라던가 혹은 기타 등등.”“용 대표님은 제가 돈이 부족하다고 보세요?”나는 조롱하듯 물었다.“돈은 부족하지 않아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역시 용 대표다운 이론이었다.용진표의 말을 들은 나는 쓸쓸하고 슬픈 기색을 드러냈다.“그러나 돈이 많다고 해도 저에게 가족의 온기를 느끼게 해줄 수는 없어요.”한참 얘기를 나눈 후 용진표도 그가 원하는 걸 내가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럼, 돈이 필요 없고 사람만 원하는 거라면 사람으로 물건을 바꾸지. 어때?”용진표는 배성재로 나를 협박했다.조금 전 배성재를 말했기에 그는 그를 이용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말했으면 그는 다른 사람도 이용했을 것이다.진정우는 나에게 배성재의 정체를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용진표는 가짜인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지금 용진표가 이러는 것은 나를 겁주며 물건을 내놓게 하려는 것이었다.“용 대표님이 방금 저에게 이미 약속하셨잖
나는 용은서를 품에 안고 눈앞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호시탐탐 나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애타는 외침이 들려왔다.“은서야, 두려워 마. 엄마가 왔어.”이 말을 듣고 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함소은은 내 품에서 아이를 빼앗고 나를 밀쳐 버렸다.그녀는 연기를 정말 잘했다.함소은은 용은서를 안고 뽀뽀하며 달래더니 나를 노려보았다.“내가 지원 씨를 그렇게 믿고 은서랑 친구도 하게 해줬는데, 지원 씨는 어떻게 우리 모녀의 믿음과 사랑을 이용해 우리를 해쳐요?”“언니는 나를 해치지 않았어.”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용은서가 말했다.용은서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진 함소은은 딸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함소은이 용은서를 데려가기 위해 그들과 함께 연기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용은서의 이 납치극 함소은에 의해 끝났지만 나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용진표가 나를 찾아왔다.“지원 씨는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을 거야.”용진표는 직접적으로 말했다.나는 그를 보며 함소은이 계획한 이 연극 같은 상황이 생각났다. 사람은 평생 총명하다가도 어리석을 때가 있다고 하더니 지금의 용진표가 그랬다.그는 자신의 여자에게 놀아났다.“용 대표님은 제가 왜 은서를 납치했는지 알고 싶으신 거예요?”나는 용진표에게 물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나를 여기로 초대했다. 함소은의 예측대로 나에게 빚진 것이 있었기에 너그럽게 나를 대했다.그래도 그는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용 대표님은 모르시나요?”나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는 손으로 짐볼을 굴리면서 말했다.“지원 씨는 단순히 복수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닐 거야. 그리고 복수를 한다고 해도 어린아이한테 손댈 사람은 아니야.”‘잔인한 그가 나를 이렇게 떳떳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니!’“지원 씨는 나에게 원인을 말해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앉아서 얘기 나누면서 지원 씨가 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