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어붙었고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려 했다.하지만 상대는 강진혁이었고 그가 원하면 내가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지원아, 왜 다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돼? 나도 그들만큼 널 사랑하는데.”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고 마치 집착과 분노가 뒤섞인 듯한 말투였다.나는 힘을 다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단단하게 붙잡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그의 입술이 내 이마를 스치고 뺨을 따라 내려왔다.그리고 내 목덜미로 파고들려는 순간 갑자기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팔이 강하게 밀려났다.“강진혁 씨, 남녀 사이의 일은 서로의 동의가 있어야 즐거운 법이죠. 억지로 하면 재미없지 않겠어요?”배성재의 목소리는 진정우와 정말 달랐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더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배성재의 옷깃을 붙잡았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다.배성재는 나와 강진혁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강진혁이 마셨던 술이 그의 정신을 흐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선을 넘은 건 단순한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강진혁은 강유형이 떠난 후, 자신에게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그런데 뜻밖에도 진정우를 닮은 남자가 나타났다.강진혁은 한 번 죽였다고 생각한 진정우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자, 분명 더 초조해졌을 터였다.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넌 뭔데 나한테 훈계질이야?”분노로 가득 찬 시선이 배성재를 향했다. 하지만 배성재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명망 있는 집안 자제라도, 강요하는 건 좀 치사한 거 아닌가요?”배성재는 가볍게 웃으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그러나 그의 눈빛 속에는 싸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그렇지 않나요, 강진혁 씨?”강진혁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눈빛이 서서히 위험하게 변해갔다.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극단적으로 치닫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소매를 꼭
“가만히 있어요.”배성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고 그동안 만들어낸 가짜 목소리가 아닌, 내가 익숙한 진정우의 본래 목소리였다.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그를 더욱 떠보며 몸을 기대었다.“몸이 차갑네요. 좋아요...”그때,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이 나오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자, 배성재는 단숨에 나를 번쩍 안아 차로 향했다.그의 품에 안긴 채,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오히려 그의 셔츠 단추를 건드리거나, 품 안에 더 파고들며 장난을 쳤다.그리고 확실히 그의 몸이 점점 긴장하는 게 느낄 수 있었다.팔에 힘이 들어가고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으며 체온까지 뜨거워지고 있었다.‘거봐, 아무리 버티려고 해도 결국 못 버티잖아.’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 남자는 결국 내게 무너질 운명이니까.그가 조수석에 나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나는 그의 목을 다시 감싸안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입술이 그의 목젖 근처를 스쳤고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강하게 빨아버렸다.쪽!솔직히 말해, 나도 꽤 흥분한 상태였다. 진정우와 헤어진 이후로, 너무 오랫동안 남자와 아무런 접촉 없이 지냈다.그리고 이 남자야말로 내가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 사람이기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배성재는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아 내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고 깊고 날 선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지원 씨, 제대로 보세요. 저는 배성재예요. 당신의 진정우가 아닙니다. 그래도 원하시나요?”이 남자는 분명 진정우인데 끝까지 아닌 척을 하고 있다.나는 단숨에 몸을 밀어 올려 그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목젖을 망설임 없이 세게 빨아버렸다.이건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그를 미치게 만들 의도적인 공격이었다.그는 짧은 숨을 삼켰고 어깨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나는 끝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힘이 풀려 의자에 기대듯 쓰러져 숨을 고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배성재도 나를 바
배성재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을 때, 나는 이미 눈을 감고 잠든 척하고 있었다.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뭐가 있겠나?진정우와 닮았지만 그 이유로 그와 함께 밤을 보낼 순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면 나를 너무 쉽게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할 테니까.차에서 나를 안아 들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가 귓가에 낮고도 짓궂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직도 원해요?”그 말투에는 묘한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그가 침대에 나를 내려놓으려 할 때 그의 팔을 붙잡았다.그렇게, 그를 나와 함께 침대에 눕게 했다.너무 오랫동안 혼자였기에 오늘 밤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 그냥 그의 곁에서 자고 싶었다.그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그리고 어두운 방 안에서 들려온 조용한 속삭임.“미안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그 한마디에, 나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유가 있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좋아, 기다려 줄게. 내가 직접 듣게 될 때까지. 네가 내게 ‘나는 진정우야’라고 말하는 그날까지.’아침이 밝아오고 익숙한 냄새가 퍼졌다. 부엌에서 나는 따뜻한 죽 향기를 맡자 묻지 않아도 배성재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예상대로 부엌에서 뭔가를 준비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꿀물을 가득 담은 유리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사실, 어젯밤 나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너무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그를 느꼈기에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그리고 분명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내내 가만히 있었지만 나는 그의 숨소리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흔들림을 알고 있었다.그 모든 생각을 떠올리자,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나는 천천히 다가가며 능청스럽게 물었다.“어? 배성재 씨, 왜 여기 있어요?”일부러 놀란 듯한 연기를 하자, 그가 살짝 돌아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런데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그의 목 아래쪽에서 어젯밤 내가 남긴 흔
‘이 남자, 날 가지고 놀았던 거야.’나는 천천히 입안의 음식을 씹으며 손가락 끝으로 배성재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면서 속삭였다.“배성재 씨, 이미 내 사람이잖아요?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깊어졌다.그가 뭔가 행동을 취하려는 찰나, 나는 재빠르게 손을 거두고 몸을 피했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솔직히 말해, 아침까지 배성재가 곁에 있어 준 게 싫진 않았다.그런데도 이렇게 장난을 치고 싶은 건, 그가 여전히 ‘배성재’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한편으로는 어젯밤 강진혁이 나에게 보인 집착이 떠올랐다.그가 내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는 그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위협적이었다.어쩌면 이제 더 이상 그를 이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그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나는 결국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그리고 어젯밤 일로 강진혁이 배성재를 그냥 둘 리 없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의 계획을 망쳤으니 반드시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욕실에서 나왔을 때, 배성재는 이미 아침상을 다 차려놓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나는 테이블에 앉아 숟가락을 들어 올리며 무심히 물었다.“오늘 어디 가요?”“왜요? 뭐 부탁할 일이라도 있어요?”“어젯밤에 그렇게 강진혁을 자극했으니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죠?”배성재는 별 대답 없이 내 앞에 반찬을 하나 더 올려놓으며 말했다.“이거 좀 먹어 봐요.”나는 그를 노려보았다.“진짜 걱정 안 돼요? 강진혁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그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어차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예요.”그 말은 그가 이미 강진혁이 자신을 없애려 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낮게 중얼거렸다.“강진혁은 절대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타입이 아니에요. 대신, 자기 손이 아닌 다른 손을 움직이겠죠.”배성재는 아
솔직히 나도 정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이미 배성재가 진정우라는 걸 확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으로 인정받는 것만이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배성재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 본 채 대답했다.“저는 저예요. 도련님이라면 제 정체를 이미 충분히 조사하지 않으셨나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용준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행운을 빌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배성재도 조용히 폰을 내려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남은 식사를 마저 끝냈다.그는 통화를 하면서도 계속 식사를 했고 그에 비해 나는 한 입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나도 모르게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안 먹어요? 이러다 다 식겠는데요.”방금까지 강진혁과 용준호 사이에서 위협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그의 태도는 너무나 태연했다.나는 답답한 마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방금 전화, 경고였어요. 그리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암시였고요.”배성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알고 있어요.”“알면서도 이렇게 태연해요? 걱정은 안 돼요?”그는 휴지 한 장을 접으며 담담히 말했다.“걱정한다고 바뀌는 게 있나요?”그의 태연한 모습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나는 어떻게든 그를 지킬 거라고 이미 결심했다. “배성재.”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한번 묻기로 했다.“방금 용준호가 했던 질문, 나도 해볼게요. 당신... 진짜 진정우 맞죠?”그는 휴지를 접던 손을 멈추고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나를 꿰뚫듯 응시했다.“지원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또다시 되묻는 그의 태도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나는 알아요. 진정우 맞아요.”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나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분명 그의 얼굴은 진정우와 똑같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근데 이상해요.”“뭐가요?”휴지가 뭐가 재밌다고 그는 계속 접
배성재가 손가락으로 내 반지를 가리킬 때, 혹시나 하나를 빼가며 답을 해주려나 싶었지만 그는 예상과 다른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나름 잘 어울려요. 개성도 있고.”나는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결국 끝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지.’나는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그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고 그에겐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그는 나를 믿지 않는 걸까, 아니면 나조차 경계하는 걸까?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 상 없었다.“오늘 시간 있으면 나랑 한 사람 좀 만나러 가줘요.”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전에 말했던 진소영 말이에요.”내가 진소영이와 한 약속을 지키려는 거였다.그녀는 어떻게든 ‘진정우’와 한 번 만나고 싶어 했고 내가 만든 ‘대역’을 직접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배성재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그는 내 앞에 놓인 아침 식사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먹어요.”그가 정성 들여 만든 아침이었고 내 입맛에도 잘 맞았기 때문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무엇보다 어젯밤에는 거의 먹지도 못하고 술만 마셨으니 지금쯤 허기가 질 때였다.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배성재는 테라스로 나갔다. 나는 슬쩍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아마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거겠지.그는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그 역시 방금 전 대화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나를 속이고 있는 동안, 그 역시 속으로는 흔들리고 있었던 거였다.그가 그렇게까지 애써 감추는 걸 보면 어쩌면 나보다 더 괴로운 건 그일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드니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그래서 내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부러 부엌 정리를 시작했다.“그거 놔요. 제가 할게요. 지원 씨는 가서 씻고 준비나 하세요.”그가 내게 다가왔을 때, 그의
나는 배성재가 말한 뜻을 이해했다.이소희를 만나고 싶다면 오늘 밤이 기회라는 거다.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배성재와 함께 유치원으로 향했다.도착했을 때 마침 진소영이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태어나서부터 죽기 전까지, 가장 행복한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유치원 시절이 아닐까. 공부에 쫓길 필요도 없이, 그저 신나게 뛰어놀기만 하면 되는 시기.나와 배성재는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서 조용히 지켜보았다.하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특히, 배성재에게 관심이 집중됐다.그러던 중, 한 장난꾸러기 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선생님! 또 새로운 남자 친구 생긴 거예요?”진소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남자 친구 아니고 우리 오빠야.”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고 여기저기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남자 친구! 남자 친구.”진소영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준비해 온 선물 꾸러미를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내밀었고 선물을 받고 나자, 앞서 떠들던 아이가 다시 한마디 했다.“고마워요! 선생님 남자 친구.”나는 순간 빵 터졌고 진소영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요즘 애들은 너무 조숙하다니까.”진소영이 그렇게 말하며 우리 앞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배성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며 긴장감이 몰려왔다.만약 진소영이 배성재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나는 여태껏 그가 진정우라고 확신해 왔지만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직접 인정해 주지 않는 한,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진소영은 1분 가까이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한 걸음 다가가더니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오빠...”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가슴을 울렸다.배성재 역시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낮게 말했다.“선생님 역할, 잘하고 있네.”
아이들은 ‘선물’이라는 말에 환호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내 곁을 떠나 소지훈에게 달려갔다.아이들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그에게 다가가는 걸 보면 이미 친숙한 존재가 된 듯했다.나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 틈에서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고 얼굴과 이마에 남은 아이들의 입맞춤 자국도 휴지로 닦아냈다.그때, 소지훈이 다가와 휴지를 내밀었다.“아이들 장난이 좀 심하죠?”나는 휴지를 받아들며 웃었다.“네, 하지만 참 귀여워요. 아이들이랑 있으면 나도 같이 어려지는 기분이에요.”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배성재와 진소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소지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가끔은 너무 말썽을 부려서 소영이도 몇 번 울더라고요.”그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그가 무슨 이야기를 숨기려는지 알 것 같았다.“그럼 이제 확실해졌어요? 진소영 씨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소지훈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소영이는... 희연 씨와는 달라요.”그 한마디가 모든 걸 설명해 주는 듯했다.그는 지금 진소영이 유희연의 심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렇다면 나와 유희연 씨가 닮은 건 궁금하지 않아요?”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러다 이내 시선을 돌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혹시... 먼 친척이라도 되는 거예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해요.”그러고는 내가 유희연과 어떤 관계인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소지훈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정말 기뻐했을 거예요. 항상 형제자매가 없어서 외롭다고 했거든요.”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나와 함께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을 텐데.그러나 세상은 늘 원하는 걸 쉽게 주지 않는다.나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소지훈에게 진소영을 서울여대로 보내는 계획을 이야기했다.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그의 표정이 딱딱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
“이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요. 대단하신 지원 양이 알아서 해봐요.”함소은은 그렇게 말하며 용은서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준호 오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너랑 놀아줄 틈 없어”“싫어요! 나랑 안 놀아줄 거면 저 언니를 내려놓으라고 해요! 언니가 나랑 놀아주면 되잖아요!”이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그럼 여기서 계속 붙잡고 있어. 난 먼저 간다.”함소은은 아이의 손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용준호에게 한마디 던졌다.“이번엔 너한테 맡긴다. 제대로 잘 봐. 잃어버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그러고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것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이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는 그렇게 내버려둔 채로 신경도 안 쓰고 가버렸다.하긴 자신의 딸을 납치까지 했던 사람이니 용준호한테 애를 맡기는 건 별일도 아닐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용은서가 용준호를 붙잡고 있는 덕분에 날 업고 도망가기는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함소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형이 도착했다.코피는 이미 멈췄지만 낯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용준호, 윤지원 놓아줘. 아니면 오늘 나랑 끝을 보든지 해.”강유형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용준호랑 한패도 아니었고 평소에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코피도 아직 덜 닦았구먼 왜 또 여기서 영웅 행세야?”용준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오빠 피도 아직 안 말랐거든.”용준호가 날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답답하긴 했지만 한마디는 해야겠다 싶었다.용준호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강유형, 이 여자는 이미 딴 남자랑 잤어. 이제 너랑은 아무 관계 없는 여자라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남이 쓰던 걸 다시 쓰고 싶냐고.”‘이 자식이 지금 날 뭐라고 한 거야? 지금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텐데.’“내려놓으라고 했어. 헛소리는 그만하지?”강유형은 더 이상 말다툼할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모두 의혹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용준호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어느 새끼가 감히 널 구하려는지 두고 보자고!”그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했다.“오빠!”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용준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만두 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바로 용은서였다.내가 이 여자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용준호는 콧방귀를 뀌었다.“저리 썩 꺼져.”살벌한 목소리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하지만 용은서는 그의 혈육이었고 평소에도 늘 호통에 익숙했는지 전혀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왜 사람을 업고 있어? 강도 같아!”대담한 발언이었다.“꺼지라니까.”용준호는 음을 길게 끌며 말했다.“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집에서 안 가르쳐줬어?”용은서는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오빤 맨날 이렇게 화내.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용준호가 다시 호통을 치려는 순간 용은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어.”용은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했어도 당장 품에 안아서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용준호는 여전히 사나웠다.“꺼지라고 했지. 말 안 들으면 발로 차버린다.”혈육에게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용은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바지 끝을 움켜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은서야, 언니 구해줘!”나는 목소리를 냈지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져 부끄럽기 그지없었다.“윤지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도움을 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용준호는 나에게도 으르렁댔다.지금의 그는 미친개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중이었다.“오빠, 왜 언니를 업고 있어? 다쳐서 걷지 못해?”용은서의 질문은 철없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묻어났다.용준호의 인내심은 바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