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유정철은 잠시 멈칫하며 신희선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지원아.”“전혀 번거롭지 않아요. 사실 전에 한번 뵈러 가고 싶었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내 핸드폰에는 소지훈이 준 그들의 연락처와 주소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가지 못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조금 더 일찍 찾아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랬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며 경찰에 신고하기까지는 안 갔을 것이다.차를 몰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주었고 도중에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신희선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그녀는 나를 통해 그들의 딸을 보고 있겠지.그들을 집 앞에 데려다주고 안전을 위해 나는 그들이 집으로 올라갈 때까지 함께 있었다.유정철은 집 입구 구석에 있는 담배꽁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 이 담배꽁초도 그 사람이 피운 거야.”“아저씨, 이건 손대지 마세요. 경찰이 오면 증거로 가져갈 거예요.”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유정철은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도록 했다. 나는 예의상 그렇게 들어갔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라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조금 미안했다.“지원아, 앉아. 내가 마실 거 준비해 줄게.” 유정철이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아저씨, 괜찮아요. 그냥 잠깐 얘기 좀 나눠요.” “안 돼, 기다려. 내가 너에게 직접 꿀 자몽차를 끓여줄게. 희연이가 정말 좋아했었거든. 내가 계속 끓여줬는데 아쉽게도 이제 마실 수 없게 됐네.” 유정철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유정철은 차를 준비하면서 신희선도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마 신희선이 내게 무언가 말하는 걸 막으려 했던 것 같았다.그들이 부엌으로 들어간 후, 유정철이 말했다. “여보, 그 아이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 걔가 무서워할 거야. 진짜 우리 딸 아니야.”“그런데 왜 우리 딸이랑 그렇게 닮았지?” 신희선은 작은 목소리로 중
유정철은 물을 내려놓고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우리 가족 사진인데 이제 그 사진 속 사람 중엔 나밖에 남지 않았어.” 유정철은 조용히 말하며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가족 사진?” 나는 중얼거리며 빨간 옷을 입은 작은 소녀를 가리켰다. “이 소녀도 아저씨 가족분인가요?”“응, 맞아. 저건 내 여동생이야. 그때 그녀는 겨우 두 살이었지.” 유정철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이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나는 숨이 갑자기 가빠졌다. 마음속에서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유정철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이때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아저씨...”“그날 여동생은 사라졌어. 바로 그 사진을 찍은 날이었지.” 유정철의 말에 내 심장이 급격히 빨라졌다.“어떻게 사라졌나요?” 나는 본능적으로 유정철의 옷자락을 잡았다.유정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날을 되새겼고 사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은 그날 사진을 찍고 굉장히 기뻐했지. 그들은 사진관에서 만든 키링를 목걸이로 바꿔 여동생에게 선물했어. 그리고 우리를 놀이공원에 데려갔고... 여동생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데려갔는데 엄마가 화장실에서 기절하고 나니 여동생은 사라졌어...” 유정철의 말이 끝날 때, 내 가슴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막히는 기분이었다.“그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나요?” 나는 목이 타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찾았지. 우리 가족은 미친 듯이 찾았어. 부모님은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지키고 그 후엔 도시 전역을 찾았지. 그리고 나서는 전국을 찾아다녔어. 그러다 엄마는 여동생을 찾지 못한 탓에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했어. 아빠는 엄마 장례를 치르고도 계속해서 찾았는데 그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지...”그 말에 나는 몸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국 내 엄마의 실종이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게 만든 것이었다.“그럼 더 이상 찾지 않으셨나요?” 나는
“솔직히 말해봐, 너 윤지원이랑 해봤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와 막 들어가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문틈 사이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지원이가 먼저 다가왔지만 난 관심 없었어.”“강유형, 그렇게 사람 깎아내리지 마. 윤지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미인이야. 꽤 많은 사람들이 윤지원을 노리고 있다고.”말하는 사람은 강유형의 친구 신지태였다. 그는 나와 강유형의 10년 감정을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너무 익숙해서 그래.” 강유형이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14살 때 강씨 집안으로 보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강유형을 만났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강유형과 결혼할 거라고.그 후로 우리는 함께 살았고 어느새 10년이 흘렀다.“그렇지. 너희 둘은 낮에는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얼굴 보고 밤에는 집에 와서 같은 식탁에서 밥 먹고. 아마 상대방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 가는지까지 다 알겠어.”신지태가 농담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지금은 오래 보면 정든다는 시대가 아니야. 남녀 사이엔 그래도 신선함이 있어야 하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래야 감정이 생기고 자극적인 법이야.”강유형은 침묵했고 신지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그래서 너 윤지원과 결혼할 거야?” 신지태의 질문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강유형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혼인신고를 하라고 하셨다. 그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신지태가 나 대신 물어본 셈이다.강유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지태가 웃었다. “결혼하기 싫어?”“...그건 아니야.”“그럼 결혼은 하고 싶은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거지?” 신지태와 강유형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지태야, 이런 말 들어봤어?” 강유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뭔데?”“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강유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유형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굳이 보지 않아도 내 안색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어디 아파?”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말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목구멍에 맺힌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릴게.”강유형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내가 그와 신지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난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난 내가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가 될 줄은 몰랐어, 강유형...”“모든 사람들 눈에는 우린 이미 부부야.” 강유형이 내 말을 끊었다.‘그래서 뭐? 그 사람들 때문에 나랑 결혼하려는 건가?’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였다.‘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손에 든 펜이 닫혔고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혼인 신고서에 머물렀다. “다음 주 수요일에 혼인신고 하러 가자.”이 말은 내가 듣고 싶었 거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아주...난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강유형,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도 그럴 필요 없고.”“윤지원!” 그가 날카롭게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움찔했고 고개를 들어 그의 짜증 난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혼인 신고서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턱이 굳어졌다. “이리 줘.”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몇 초 후, 그가 일어나 내게로 왔고 내 앞에 서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지태랑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어. 넌 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야?”정말 농담이었을까?“너도 알잖아. 남자들에게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 거.”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더니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혼인 신고서를 빼앗아 갔다.“앞으로는 남의 말 함부로 믿지 마.” 그가 돌아서서 혼인 신고서를 서랍에 넣고 옆에 있
하루 종일 이 문제를 고민했지만 오후에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난 그를 따라나섰다.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그리고 퇴근 후 강씨 집안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왜 말이 없어?”돌아가는 길에 강유형이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었다.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강유형, 우리 그냥...”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차량 디스플레이에 이름 없는 번호가 떴고 강유형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그가 긴장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재빨리 차량 스피커를 끄고 블루투스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통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아, 급한 일이 생겨서 집에 데려다줄 수가 없겠어.”사실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까.그래도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를 먼저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었다.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텅 비어 아파왔고 나는 서운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강유형의 턱이 굳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밖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내려줄게. 택시 타고 돌아가.”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듯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더 묻고 떼를 쓰는 건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일 뿐이다.“집에 도착하면 전화... 메시지 보내.” 강유형이 당부하는 사이 핸들은 이미 돌아가 도로변 임시 주차장에 멈춰 섰다.나는 가방을 꼭 쥐고 차에서 내렸다.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가 발신번호를 본 후의 이상한 반응부터 차량 스피커로 통화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이미 예감이 왔다.다만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뿐이다.어떤 일들은 묻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대로 두고 자기 위안을 할 수 있으니.“조심해서 가!” 서두르는 와중에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올 줄이야.그날 내가 부딪힌 건 고작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였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기를 더럽게 만졌다고 우겼고 내가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었다.“어디를 만졌다는 거죠?” 경찰이 꼼꼼하게 물었다.조태혁이라는 소년은 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요, 여기... 이 여자가 다 만졌어요.”‘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나는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강유형 같은 미남도 못 만져본 내가 겨우 털도 다 안 난 꼬맹이를 만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경찰이 다시 나를 쳐다보자 난 그가 묻기도 전에 먼저 부인했다. “전 그 애를 만지지 않았어요. 그저 실수로 부딪쳤을 뿐이에요.”“술 드셨나요?” 경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이 사회에서 남자가 술에 찌들어 사는 건 정상이지만 여자가 술을 마시면 대부분 품행이 의심받게 된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셨어요.”“얼마나 드셨죠?” 경찰의 이 질문이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맥주 한 병이요.”경찰은 믿지 않는 눈빛을 보였다. 난 즉시 내 친구 안리영이 증인이 돼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꼬맹이와 내가 다투고 있을 때 안리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출혈 중인 산모를 구하러 병원으로 긴급 소환됐다고.난 경찰의 의도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전 취하지 않았어요. 술 핑계로 이 꼬맹이를 건드릴 이유도 없고요.”경찰은 내 말을 기록하고 조태혁을 바라봤다. “저 여성분께서 만졌다고 확신해요? 거짓말이나 무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당연히 확실하죠” 조태혁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어나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조태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누나, 왔어?”그가 미성년자니 당연히 보호자를 불렀을 거다. 나는 그의 가족에게 설명하려고 고개를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혔다. 분명 그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게 질투인 걸까?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유형은 내 손을 놓았고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윤지원, 내가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복수하려는 거야?”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으니까.“아니 난...” 설명하려는 내 말은 도중에 끊겼다.“너 정말로 그 녀석을 만졌어? 정말로 그곳을?” 강유형의 턱이 굳어졌고 그의 눈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무서운 빛이 서렸다.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순간 내 마음속의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가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만약 그가 나를 단순히 여동생이나 친구로만 여겼다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졌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야.” 나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태혁이 안에서 나왔고,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변태 아줌마, 또 우리 매형 꼬시려고?”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더니 정말 그랬다.조태혁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비열한 표정은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싶을 정도였다.이쪽으로 걸어오는 남매를 보면서, 특히 조나연의 그 순수한 모습과 그녀가 강유형을 만졌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손을 들어 강유형의 팔을 감쌌다.하지만 그의 근육이 순간 굳어지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또 거짓말이지.” 조나연이 조태혁의 귀를 꼬집으며 다가왔다.그녀는 우리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유형 씨, 지원 씨, 정말 미안해요.”“네 잘못 아니야.” 강유형이 조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아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거야.”“흥.” 조태혁이 불만스럽게 강유형을 흘겨보았다. “당신이 누군데요? 뭔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우리 새 매형이 되겠다면 말 들을게요.”“조태혁!”조나연이 꾸짖으며 그를 한 번 더 때렸고 조태혁은 피하며 말했다. “누나, 저 사람
조나연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는 무사했고 그녀는 병실로 돌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 거기에 하얀 달빛까지 더해져 정말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마. 아이는 괜찮아.” 강유형이 위로했다.“유형 씨, 나 너무 무서웠어.” 조나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유형이 휴지를 건네자 조나연은 그것을 받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그의 손등에 기댔다.비록 가엾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약혼자를 자기 남자처럼 대해도 되는 걸까?나는 다가가 말했다. “나연 씨,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가 흥분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대요. 겨우 아이를 지키셨는데 이렇게 울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거예요.”말하면서 난 그녀를 부축하며 강유형과 살짝 떼어놓았다. 하지만 강유형의 손등에 남은 눈물자국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일상에서도 그렇고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조나연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로 잡았다.“유형 씨, 미안해. 내가 이렇게...”그녀가 휴지를 집어 강유형의 손을 닦으려 하자 내가 가로막았다. “나연 씨, 지금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조나연의 표정이 굳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강유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나연 씨가 널 좋아하나 봐?”“아니야!”강유형이 부인했다.“그럼 넌? 나연 씨를 좋아해?”한 번에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애매하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 초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이야...”정말 그저 친구일까?“석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손을 잡고 나연이를 돌봐달라고 했어...” 강유형의 목소리가 떨렸고 늘어뜨린 손도 마찬가지였다.임석진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격앙되
유정철은 물을 내려놓고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우리 가족 사진인데 이제 그 사진 속 사람 중엔 나밖에 남지 않았어.” 유정철은 조용히 말하며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가족 사진?” 나는 중얼거리며 빨간 옷을 입은 작은 소녀를 가리켰다. “이 소녀도 아저씨 가족분인가요?”“응, 맞아. 저건 내 여동생이야. 그때 그녀는 겨우 두 살이었지.” 유정철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다.“이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나는 숨이 갑자기 가빠졌다. 마음속에서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유정철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이때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아저씨...”“그날 여동생은 사라졌어. 바로 그 사진을 찍은 날이었지.” 유정철의 말에 내 심장이 급격히 빨라졌다.“어떻게 사라졌나요?” 나는 본능적으로 유정철의 옷자락을 잡았다.유정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날을 되새겼고 사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은 그날 사진을 찍고 굉장히 기뻐했지. 그들은 사진관에서 만든 키링를 목걸이로 바꿔 여동생에게 선물했어. 그리고 우리를 놀이공원에 데려갔고... 여동생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데려갔는데 엄마가 화장실에서 기절하고 나니 여동생은 사라졌어...” 유정철의 말이 끝날 때, 내 가슴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막히는 기분이었다.“그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나요?” 나는 목이 타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찾았지. 우리 가족은 미친 듯이 찾았어. 부모님은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지키고 그 후엔 도시 전역을 찾았지. 그리고 나서는 전국을 찾아다녔어. 그러다 엄마는 여동생을 찾지 못한 탓에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했어. 아빠는 엄마 장례를 치르고도 계속해서 찾았는데 그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지...”그 말에 나는 몸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국 내 엄마의 실종이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게 만든 것이었다.“그럼 더 이상 찾지 않으셨나요?” 나는
“어?” 유정철은 잠시 멈칫하며 신희선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지원아.”“전혀 번거롭지 않아요. 사실 전에 한번 뵈러 가고 싶었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내 핸드폰에는 소지훈이 준 그들의 연락처와 주소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가지 못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조금 더 일찍 찾아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랬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며 경찰에 신고하기까지는 안 갔을 것이다.차를 몰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주었고 도중에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신희선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그녀는 나를 통해 그들의 딸을 보고 있겠지.그들을 집 앞에 데려다주고 안전을 위해 나는 그들이 집으로 올라갈 때까지 함께 있었다.유정철은 집 입구 구석에 있는 담배꽁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 이 담배꽁초도 그 사람이 피운 거야.”“아저씨, 이건 손대지 마세요. 경찰이 오면 증거로 가져갈 거예요.”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유정철은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도록 했다. 나는 예의상 그렇게 들어갔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라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조금 미안했다.“지원아, 앉아. 내가 마실 거 준비해 줄게.” 유정철이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아저씨, 괜찮아요. 그냥 잠깐 얘기 좀 나눠요.” “안 돼, 기다려. 내가 너에게 직접 꿀 자몽차를 끓여줄게. 희연이가 정말 좋아했었거든. 내가 계속 끓여줬는데 아쉽게도 이제 마실 수 없게 됐네.” 유정철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유정철은 차를 준비하면서 신희선도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마 신희선이 내게 무언가 말하는 걸 막으려 했던 것 같았다.그들이 부엌으로 들어간 후, 유정철이 말했다. “여보, 그 아이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 걔가 무서워할 거야. 진짜 우리 딸 아니야.”“그런데 왜 우리 딸이랑 그렇게 닮았지?” 신희선은 작은 목소리로 중
고개를 들자 손을 맞잡은 한 쌍의 노인 부부가 긴장과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경찰서 직원 일어나려던 순간 내가 먼저 일어나며 인사했다.“아저씨, 아줌마.”두사람은 유희연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신희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희연아...”“희연이가 아니야.” 유정철은 급히 아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러자 신희선 얼굴에 있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저씨, 아줌마, 뭘 신고하시려고요?”이때 사건 담당자가 다가왔다.“두 분, 신고하시려면 저를 따라오세요.”유정철과 신희선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며칠 전부터 계속 누군가가 우리 집 문을 부수고 다니며 우리가 순순히 하지 않으면 우리의 피를 뽑겠다고 위협했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사건 담당자를 향해 눈길을 돌렸고 그도 미간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누구죠? 아시나요? 혹시 오래된 앙숙이라도 있나요?”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고 유정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리는 그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그 사람이 며칠 동안 괴롭혔나요?” “3, 4일 됐어요” 유정철이 신희선을 바라보았고 신희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형사님,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보호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사를 위해 조금 협조해 주세요. 세부 사항을 확실히 알려주세요,” 사건 담당자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저와 함께 갑시다.”유정철은 나를 바라보며 마치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아저씨, 아줌마 먼저 가세요. 제가 다 처리하고 곧 가서 찾아뵐게요.”“그래. 그래.”유정철은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는 분명히 내가 함께 가기를 원했다.사건 담당자는 그들을 다른 방으로 안내하며 동료에게 넘겼고 나는 나머지 서류를 처리한 후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반복해서 그들을 위협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조나연이 이 직책을 맡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박수를 치자 모두 따라 박수를 쳤다.조나연은 내 옆에 서서 사람들의 환호와 놀라운 시선 속에서 점점 더 자신감을 얻어가는 것이 느껴졌다.그녀는 오랫동안 억눌려 왔고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이제 드디어 정상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그녀가 느끼는 이 감정이 내가 원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숨겨왔던 분노를 발산하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 감정을 잘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녀가 그 분노를 뚫고 나오도록 해야만 나는 그녀를 내 수단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이제 조 매니저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앞에 세우며 그녀가 받을 경배와 존경을 모두 누리게 만들었다.조나연은 분명히 긴장했지만 야망이 컸고 내가 이미 그녀에게 해준 조언을 따라 차근차근 잘 해냈다.작은 인수인계 의식이 끝난 후, 나는 그녀를 매니저실로 안내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표 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내 맞은편에 서 있었다.나는 조나연에게 짜릿함도 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그녀를 반복해서 자극하며 결국 그녀가 나를 미워할 정도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나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조나연, 이제 이 술집을 전적으로 너에게 맡길 거야. 할 수 있겠어? 안 되면 말해, 다른 사람을 찾아서 바꿀 수도 있어.” 나는 내 방식대로 그녀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녀는 이미 사람들 앞에서 말했으니 이제 물러설 수 없을 것이다.“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내가 말을 취소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조나연이 내게 반문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지 않아. 네가 맡기로 했으니 내 원칙을 설명할게.”조나연은 꼿꼿이 내 앞에 서서, 마치 말을 잘 듣는 학생처럼 보였다. 예전의 그녀는 이렇게 겸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세상에서, 돈이야말로 사람에게 자신감을 주는 법이
‘조시언과 안리영 사이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네. 이런 건 놓칠 수 없지.’안리영은 나에게 숨김없이 자신과 구안석이 조시언에게 들킨 일에 대해 털어놨다.“오빠가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것도 삼촌 때문이야.”“하하.” 나는 웃으며 말했다.“구 교수님은 조시언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겠지? 그 사람은 네 작은삼촌인데.”“누가 알겠어, 남자들의 이기심과 소유욕이 강해서 내 주변에서 날아다니는 모기 한 마리도 신경 쓰는 경우가 많거든.”안리영은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그럼 그건 선배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거지. 엄청 사랑한다는 증거야.”나는 안리영과 구안석이 공항에서 나눈 키스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사랑에서의 고통은 죽음으로 인한 이별만 있는 게 아니라, 살아서 서로를 떠나는 이별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안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또 그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그나저나, 우리 회사에서 바디 라이트 쇼를 준비 중인데 내가 찾은 남자 모델들이 해동에서 국내 최고 수준이라 연예인보다 훨씬 멋지거든. 눈이 확 트일 거야. 혹시 구경하러 올래?”“바디 라이트 쇼?”안리영이 내게 물었다.“그거, 벌거벗은 거야?”나는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그렇게 하고 싶긴 한데 정부에서 허락 안 해줄걸?”“윤지원, 너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안리영은 장난스럽게 나를 놀렸다.“짧은 인생 먹고 싶은거 먹고 놀고 싶은 걸 놀아야지. 남자는 쓰레기처럼 놀아도 되고 여자는 안돼?”내 말을 듣자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말 맞는 것 같아.”그러더니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윤지원, 이제 너 본색을 드러내는구나.”“내가 예전엔 그렇게 얌전했어?”안리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예전엔 강씨 가문에서 길러진 모범생 같았어. 지금 진짜 너 자신이 된 것 같아.”만약 내가 꽃이라면 예전에는 사람의 손길로 잘 다듬어진 꽃이었다면 지금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란 야생화가 된 것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한동안 잡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래도 조금 나아진 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간단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공항으로 향했다.허진호가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는데 정말 딱 맞아떨어졌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는 이미 착륙해 있었다.나는 그가 보낸 정보와 사진을 확인하다가 곧바로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키는 180cm가 넘고 검은색 셔츠를 풀어 헤친 채 그 위에 같은 색의 조끼를 걸쳤으며 동일한 컬러의 슬랙스를 입었다. 게다가 거의 연예인 수준의 외모였다.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조시언 씨. 저는 해다 그룹의 윤지원입니다. 허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생기셔서 제가 대신 마중을 나왔어요.”그는 내 시선을 마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시언입니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내 손과 가볍게 악수했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수화물 찾아야 해서요.”“같이 가죠.”나는 그와 함께 수화물 찾는 곳으로 걸어갔고 그곳에서 안리영과 구안석을 마주쳤다.바닥에는 하나의 캐리어가 놓여 있었고 그걸 보자마자 나는 깨달았다.‘구 선배가 떠나는구나...’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손을 맞잡고 묵묵히 수화물 찾는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그 아련한 분위기만으로도 내 가슴이 괜스레 시큰거렸다.수화물 찾는 곳을 1미터 남겨두고 그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마침내, 구안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수화물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안리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구안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걸 알기에 굳이 말을 붙이지 않는 듯했다.“짐 부치고 올게.”구안석이 손을 놓으려는 순간 안리영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까치발을 들더니 그에게 입을 맞췄다.구지호는 순간 놀랐지만 곧 캐리어를 손에서 놓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공항 한
“남자 모델? 아니, 윤지원 씨, 요즘 무슨 일 꾸미고 계신 거예요? 술집을 사더니 이제는 남자 모델 쇼까지 연다고요?”허진호는 내 말을 듣고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냥 재미로요.”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파악하려는 듯했다.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내가 구상한 계획을 설명했다.“우리 회사에서 조명 음악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거기에‘바디 라이트 쇼’ 를 추가하려고 해요. 남자 모델들이 조명을 의상처럼 입고 런웨이를 걷는 형식으로요.”“바디 라이트 쇼?”허진호는 말을 되풀이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와, 윤지원 씨 아이디어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그 반응을 보자 나는 빙긋 웃으며 바로 응수했다.“허 대표님도 괜찮다고 보시는 거죠? 그럼 바로 진행해 주세요.”하지만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이게 시장에서 옷 한 벌 사 오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디자인도 해야 하고 제작 과정도 필요한데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나는 아무렇지 않게 두 손을 모아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허 대표님이 필요한 거잖아요?”그는 피식 웃으며 단칼에 거절했다.“그렇게 애교 부려도 안 돼요. 이건 현실적으로 힘들어요. 솔직히 진정우 씨가 여기 있었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지금 내 심장을 후벼 파겠다는 건가?’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나가버렸다.“지원 씨! 잠깐만요!”허진호가 다급히 뒤에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헐레벌떡 따라와 내 앞을 막아섰다.“죄송해요. 괜히 농담했네요. 기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지원 씨가 진짜 하겠다면 제가 도울게요.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가능한 방향으로 알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허진호가 진심으로 사과하자 나도 웃으며 말했다.“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허 대표님.”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쌓인 업무를 처리하려 했지만 책상 앞에 앉은 지 얼
강진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지원아, 네가 아직 진정우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이렇게 망가뜨리지는 마. 정말 외롭고 힘들다면 날 찾아오면 되잖아.”그의 눈빛은 깊고 표정은 진지했다. 그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조용히 말했다.“진혁 오빠, 저는 오빠랑 강유형이 갈등을 빚는 걸 원하지 않아요. 유형이가 저를 찾아왔어요...”“그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그는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억지로 참아내며 불안한 눈빛을 띄웠다.“오빠도 알잖아요. 부모님도 반대하실 거예요. 그분들도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하지만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난 이미 한 번 널 놓쳤어.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거야. 설령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넌 내 사람이 될 거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집착과 고집은 너무나도 명확했다.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나는 손을 빼내어 테이블 아래에서 옷에 슬쩍 문질렀다.“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아요.”그러자 강진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정말 원하지 않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야?”나는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가장 명확한 답변이 된다.강진혁은 몇 초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그래... 내가 너무 조급했나 보네. 네가 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그는 차분하게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내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지원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난 오랫동안 기다렸어.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모든 걸 내려놓고 날 온전히 받아들이는 날까지.”그가 말하는 '기다림' 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그가 내게 주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감정이 불안과 공포로 변하는
조나연이 내 덫에 걸려들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차례였다. 하지만 술집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이곳은 정상 영업을 하고 있고 매출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 곳을 누가 쉽게 넘기겠는가?즉,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강씨 가문의 힘을 빌린다면 그럼 이 일은 아주 간단할 것이지만 지금 나는 강씨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고민 끝에, 나는 허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원 씨가 사장이 되고 싶으면 제 자리 넘겨줄까요?”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허진호가 얼마나 속세에 무심한 사람인지 다시금 실감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저 한테 사장 자리는 필요 없어요. 그냥 술 마실 때 돈 안 내고 마시고 싶을 뿐이에요.”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 돈으로 술을 사 마시면 다음 생까지 마셔도 못 마실걸요?”그는 농담을 던지면서도 진지하게 충고했다.“지원 씨, 충동하지 마세요. 술집을 사는 건 장난이 아니에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장난이 아닌데요. 술집 주인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만 알려줘요. 안 되면 다른 사람을 찾을 테니까.”내가 술집을 사려는 건 단순한 충동이 아니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하지만 허진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용씨 가문을 조사하는 일은 알면 알수록 위험해지는 일이니까.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았어요. 제가 한 번 시도해 볼게요.”“고마워요, 허 대표님.”그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잠이 오지 않는 두 번째 날이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심각한 불면증을 겪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불면증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그렇게 잠들지 못한 채,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해야 할 일들도 정리했다.그중 하나는 강진혁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우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강진혁은 내가 건넨 넥타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오늘이 내 생일도 아니고 특별한 날도 아닌데?”나는 그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