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태의 말을 듣고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아직 신지태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갑자기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주최 측이 자기 사람을 계속 올리는 건 분명 수상해요! 차라리 제가 올라가서 경기해 보죠. 만약 제가 져도 인정하겠지만 이 여자가 이길 수 있다면 아까 그 실수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용설아였고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진정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다. 용설아도 스누커를 칠 줄 아는 데다, 직접 도전장을 내밀 정도로 자신감이 있는 걸 보면 실력이 대단한 게 분명했다.그녀의 도발에 관중석은 일제히 환호하며 외쳤다.“그래요! 저 여자를 올리세요!”모든 관중의 요구에, 심판은 잠시 주최 측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헤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심판은 헤르나의 허락을 받자마자 용설아의 경기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지원 씨, 잘 부탁드려요.”무대에 오른 용설아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미 이 판에 휘말린 상황이었다.신지태를 위해서, 그리고 용설아와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나는 차분하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서로 잘 부탁드려요.”내가 갑작스럽게 등장했을 때 이미 경기장은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용설아까지 참여하면서, 그것도 두 명의 여자가 대결한다는 점이 관중들의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이번 경기가 공식적인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이렇게 쉽게 바꾸고 선수 교체를 허용하다니... 자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이 대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가 이미 무대에 오른 이상,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해야 했다.“그냥 평소처럼 하던 대로 쳐. 관중들이 열광할 만한 경기를 보여주는 게 좋아.”신지태
쿵! 쿵! 공이 정확히 포켓에 들어가자 관중석에서 흥분에 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들의 열렬한 반응에 점점 더 자신감이 붙었고 무엇보다 진정우가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자극했다.‘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보여줘야 해. 네가 그의 상상 속 모습 이상이라는 걸.’진정우와 함께했던 긴 시간 동안, 그는 한 번도 내가 스누커를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왜냐하면 스누커는 강유형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진정우가 그 사실을 알면 마음이 상할까 봐 일부러 숨겼었다.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서 내 실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니.쿵! 또 한 번의 강력한 샷이 성공적으로 이어졌고 포켓에 공이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공이 멈춰버렸다.마치 누군가가 그 자리에 붙잡아 둔 것처럼 멈춰버린 공!결국 이번 턴에서 나는 한 번에 모든 공을 처리하지 못했고 다음 차례는 용설아에게 넘어갔다.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다시 울려 퍼졌고 이번에는 용설아의 샷을 기대하는 함성이었다.‘이상하네.’나와 용설아는 모두 이 경기에 처음 등장한 선수였다. 그런데도 관중들은 자연스럽게 나와 용설아로 나뉘어 응원팀을 만들어냈다.분명 두 명 모두 프로 선수가 아닌데도 이렇게 열렬히 응원받는 광경이 정말 기묘했다.용설아는 큐대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매끄럽고 우아했으며 하나하나가 교과서 같은 동작이었다.게다가 그녀의 균형 잡힌 몸매는 그녀의 경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관중들은 그녀의 퍼포먼스에 감탄하며 소리를 질렀다.“예쁜이, 화이팅!”그녀의 샷은 매섭고 정확했다. 공이 하나씩 포켓으로 빨려 들어가며 점점 그녀가 우위를 차지해 갔다.마지막 공 하나를 남기고 그녀와 나의 점수는 동점이었다. 이 마지막 공이 포켓에 들어가면 그녀의 승리가 확정되는 상황이었다.그 순간, 관중석은 다시금 조용해졌다.만약 내가 패배한다면 이곳에 온 많은 사람들은 방금 전의 신지태와 마찬가지로 패배의 아픔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미 누가 승리해야 하는지는 모두
“감히 말도 못 하겠지!”헤르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칠흑 같았던 공간이 갑자기 환히 밝아졌다.입가에는 섬뜩하면서도 교활한 미소를 지은 채 멀리 서 있는 헤르나가 보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이 모든 상황은 그의 치밀한 계획이었고 나는 이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그리고 실패한 도주 시도는 그를 더 자극했을 것이다. 나는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본능적으로 나를 붙잡고 있던 사람을 뒤로 밀어내고 그 앞에 서서 보호하려 했다.그때, 헤르나가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진, 이제는 여자가 널 보호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냐?”진?그가 진정우를 부르는 것 같은데 여기 진정우가 있다는 건가?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 아닌가?그 순간, 내가 뒤로 밀어냈던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오늘 이렇게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면 길을 비켜.”그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그를 확인하는 순간, 내 눈이 커졌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진정우였다.“어떻게...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나는 혼란스럽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정우를 쳐다봤다.하지만 진정우는 나를 보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헤르나를 노려보고 있었다.“오늘은 네 체면을 많이 구기고 싶지 않으니, 이쯤에서 물러나.”그의 말투는 여유로우면서도 단호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자 헤르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진, 네가 정말로 이 함정을 모르고 왔을 리가 없는데? 난 오늘 너를 딱 ‘올가미에 걸린 새’처럼 잡으려고 준비했어!”진정우는 턱을 살짝 들며 냉철하게 대답했다.“네가 내 심리를 알았다면 내가 여기 온 이상 나갈 방법도 있다는 걸 알았겠지.”헤르나는 비웃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아. 그렇다면 한번 시험해 보자. 과연 네가 이곳에서 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나가는지 보고 싶군.”그 순간, 뒤에서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당당할 때가 아닌
헤르나는 진정우가 내 손을 잡은 모습을 보며 턱을 들어 올렸다.“이것만 봐도 알겠네. 진, 네가 얼마나 한결같은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던 거야?”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도, 헤르나는 여유롭게 이야기를 시작했다.“진, 너 저 여자랑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옆에 둔다고 해서 내가 속아서 그녀를 놔줄 거라고 생각했어? 날 너무 만만하게 본 거 아냐?”헤르나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헤르나는 나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꼬마야, 네가 만난 이 남자가 얼마나 일편단심인지 모르지? 예전에 그가 키우던 강아지가 죽고 나서, 그 이후로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어. 심지어 길에서 강아지를 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 그러니 그의 사랑은 한번 주면 변치 않아.”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렇지, 진?”그 말을 듣자 나는 목이 마치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헤르나의 말은 진정우가 나와의 이별부터 용설아과의 약혼까지 모두 나를 헤르나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 꾸민 연극이라는 뜻이었다.가슴이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했지만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차갑게 헤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말 다 했어?”“다 했지. 이제 네 차례야.” 헤르나는 웃으며 말했다.“네 옆에 있는 여자에게 뭐라도 설명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오해할 텐데.”진정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진정우, 정말이야? 헤르나가 말한 게 사실이야?”쾅!내가 묻자마자 진정우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나는 깜짝 놀라 몸을 낮췄고 이내 주위는 혼란으로 가득 찼다. 욕설, 난투, 그리고 총성이 뒤섞였다.이 소란 속에서 내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진정우의 심장 소리였다.쿵! 쿵!오랜만에 느껴지는 익숙한 두근거림이었다.쾅, 쾅!연이어 두 번의 총성이 더 울렸고 그와 함
진정우는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강유형에게 짧게 말했다.“데리고 가.”그 말에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에 휘둘려서 정신을 놓은 건가?나는 진정우의 손을 서서히 놓았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단호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강유형이 내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가자.”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지만 아까 진정우와 강유형이 보여준 철저한 작전을 보니, 이번 모든 일은 이미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다만 나는 전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이 모든 걸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고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지난번 내가 휴링턴을 떠난 뒤부터.”그때가 바로 진정우가 나와 헤어지자고 했던 순간이었다.그렇다면... 헤르나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어?”그는 입술을 조금 꾹 다물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그건 진정우의 뜻이었어, 널 지키고 싶어서였지.”강유형이 진정우를 옹호하며 말하는 것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그럼 진정우가 나랑 헤어진 것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야?” 나는 끝내 묻고 말았고 강유형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진정우가 직접 말하게 하는 게 좋겠어. 너희 둘의 관계에 대해 내가 함부로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으니까.”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지원아, 진정우든 나든 아니면 신지태든, 우리 모두 널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강유형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의 그는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자기 자신만을 주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모두를 공정하게 언급하는 모습이었다.그래, 그들은 다들 나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고 잘못한 건 아니었다.“지원아, 내가 지금 너를 진혁의 집으로 데려다줄게. 거기서 기다려. 이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가 널 데리러 갈게.”강유형은
강유형도 나처럼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래.”그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한마디로 충분히 확신을 주었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너희도 알고 있었어? 그럼 왜 이 모든 걸 이렇게 꾸민 거야?”강유형은 턱을 굳게 다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경찰차에 탑승한 헤르나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나는 차 안에 있었고 차량의 틴팅 필름 때문에 내 모습을 볼 수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손을 흔드는 모습은 섬뜩했다.역시 모든 게 그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도 그는 결국 진정우와 강유형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하지만 나는 이번 일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고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강유형, 헤르나가 말했어.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또 다른 주모자가 있다고.”“뭐라고?”강유형은 의아한 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입술을 꾹 다물며 잠시 머뭇거렸다. 헤르나는 끝내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니까.강유형은 조용히 말했다.“헤르나는 머리를 잘 쓰는 놈이야. 그가 한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마.”헤르나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경찰차들이 하나둘씩 지나갔고 나는 그 틈에서 진정우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정신이 혼란스러워 놓쳤을지도 몰랐다.“진정우랑 신지태는 어디 있어?” 나는 강유형에게 물었고 그는 잠시 나를 보며 말했다.“경찰서로 따라갔어.”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계속 길을 달렸고 그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한참을 달린 후, 나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눈을 감았다. 희미한 잠결에 강유형의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응, 거의 다 왔어. 알았어, 곧 갈게.”그는 통화를 끝낸 뒤 조용히 있었다.내가 몸을 조금 더 편하게 하기 위해 자세를 바꾸자, 갑자기 강유형이 말을 꺼냈다.“지원
나는 순간 멍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강유형이 진정우와 계속 통화하고 있었던 건가?전화를 끊은 강유형이 나를 보며 말했다.“아까 진정우가 전화 걸었길래, 끊은 줄 알았는데... 아마 네가 안전한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안 끊은 것 같아.”나는 그의 말을 듣고 비웃으며 되물었다.“내가 그렇게 바보 같아 보여?”강유형의 속셈을 들킨 그는 변명하지 않고 솔직히 인정했다.“뭐, 내 개인적인 욕심일 수도 있지. 동시에 진정우에게도 네 생각을 확실히 전해주고 싶었어. 너는 마음대로 부를 수도, 내칠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그의 말에 나는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고 응수했다.“그런 정성 어린 배려, 고맙네.”말을 마친 뒤, 차에서 내렸다. 강유형은 내 뒤를 따라오며 강진혁의 집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이곳은 진혁이 형이 직접 번 돈으로 산 집이야. 지난 4년 동안 여기서 살았고 이 정원에 있는 꽃과 나무들도 전부 형이 직접 가꾼 거야. 가정부나 정원사도 한 번도 고용한 적 없다고 하더라.”강진혁이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내게 말한 적이 없었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과거에 내가 강유형의 가족들과 함께 살 때도 강진혁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가끔 전화가 왔거나 잘 지내고 있다고 짧게 언급하는 정도였다. 마치 그는 가족이 아니라 먼 친척처럼 취급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보니, 강진혁은 지난 4년 동안 혼자서 많은 것을 감내하며 살아온 모양이었다.이 넓은 집과 정원을 혼자서 관리했다니. 그것도 단지 자신의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이 정원도 형이 직접 설계했대.”강유형의 말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우리 형은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이야. 배울 점도 많고. 솔직히 나보다 훨씬 뛰어나지. 너도 알잖아.”그는 자신을 자조하는 듯 웃어 보였지만 말 속에는 강진혁에 대한 깊은 존경이 담겨 있었다.나는 문득 강진혁이 가진 야망을 떠올렸다. 혹시 강유형은 그것을 알고 있는 걸
강유형이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넌 형이 뭘 놓쳤는지 알아?”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아 나는 모르는 척 대답했다.“그건 진혁 오빠만 알겠지.”강유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연못 옆을 지나가다가, 강유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여기서도 형이 물고기를 키웠대. 재밌는 건, 형이 ‘밥 먹자’라고 부르면 물고기들이 줄을 서서 온다더라.”“진짜? 물고기랑 대화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나 보네.”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안 믿는 거야? 그럼 한 번 해보자.” 강유형이 나를 연못 옆으로 끌고 갔다. 연못 안에는 다양한 색깔의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 그리고 얼룩무늬까지. 다들 통통하고 윤기가 자르르했다.“한번 해봐.” 강유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손을 물에 살짝 담갔다가, 물고기들이 놀라 흩어지는 걸 보고 웃으며 물었다.“어떻게 하라는 거야?”“‘밥 먹자’라고 크게 외쳐봐.” 강유형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태도로 말했다.“근데 손에 먹이도 없는데 불러서 뭐 해? 먹이도 못 주면 물고기들 낚이는 거 아니야?”“그럼 내가 먹이를 가져올게.” 강유형은 옆에 있는 먹이 상자로 걸어갔다.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흥미가 생겨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밥 먹자!”하지만 물고기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물고기들이 못 들은 거 아니야?” 강유형이 웃으며 먹이를 들고 돌아왔고 나는 살짝 짜증 난 얼굴로 다시 외쳤다.“밥 먹자! 밥 먹자!”하지만 여전히 물고기들은 반응이 없었다.“완전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나는 투덜거리며 말했다.“아니라니까. 우리 제대로 못 불러서 그런 걸 거야. 나중에 형한테 물어보자.” 강유형이 웃으며 먹이를 내밀었다.“먹이 좀 뿌려봐. 그럼 올 거야.”나는 먹이를 조금씩 던지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물고기들은 우르르 몰려들었다. 서로 먹으려고 경쟁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신기했다. 심지어 내가 손
나는 진정우를 고국으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던 집으로 데려왔다.해가 지는 어느 저녁, 우리는 그가 노후를 함께 보내고 싶다던 그 땅에 그를 묻었다. 그렇게 하고도 쉽게 떠날 수 없어 나는 그의 곁에 꼬박 35일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다녀왔다.어릴 적 어머니가 이야기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혼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했던 사람 곁에서 머문다고. 흔히 말하는 35날이라는 기간 동안 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완전히 떠난 후에야 나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동안 나는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진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꽃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고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는 온통 진정우뿐이었다. 그를 그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강진혁의 방에 빼곡히 걸려 있던 내 초상화들이었다.아침과 저녁이면 그의 곁에서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나눴다.“진정우, 오늘 밤 꿈에라도 와서, 그때 못다 한 말을 마저 해줄래?”“진정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를 안아보고 싶은데 이제는 만질 수도 없잖아. 그런 공허한 아픔이 날 미치게 할 것 같아.”“진정우, 오늘 길에서 다친 작은 새를 주웠어. 어미는 보이지 않더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처럼 느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35번째 날, 나는 새로 딴 꽃을 들고 그의 곁을 찾았다.“진정우, 오늘이 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야? 내일부터는 정말로 네가 없는 걸까?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마주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해. 그리고...”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널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찾아야겠어.”그 순간, 바람
나는 무겁게 발을 떼며 앞으로 걸어갔다. 신지태가 나를 부축하며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 사람의 품에는 검은색 상자가 안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신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더 단단히 부축했지만 그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무뎌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안쪽,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용설아를 한눈에 그녀를 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등 뒤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슬픔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신지태도 함께 멈춰 섰고 우리 둘 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용설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녀의 두 손 위에는 검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시야가 흐려지며 쓰러질 뻔했다.용설아는 내 앞까지 걸어와 조용히 말했다.“이건 진정우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에요. 그가 원했던 대로, 지원 씨가 직접 그를 데려가 주세요. 두 분이 가장 좋아했던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어요.”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와 함께 걸었던 들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말.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나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그를 그곳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부탁 말이다.‘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야?’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자를 노려보았다.“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작은 상자 하나에 다 담길 리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기다려주지 않았어, 진정우?”“정우는 지원 씨가 그 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길 바랐거든요.”용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정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강유형과 신지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둘 다 몰라?”나는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게...”그 순간, 신지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래?”“지원아, 이제 받아들여야 해. 진정우는... 더 이상 없어.”강유형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알아.”그러면서도 어설프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래서, 그를 보러 가려고 해. 조용히 곁에 있고 싶어서.”그 순간, 신지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아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너무 아파.”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지원아... 진정우는...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어.”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고 눈앞이 흔들렸지만 나는 애써 강하게 말했다.“아니, 난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가게 해 줘.”“지원아!”신지태가 단호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애타게 말했다.“제발, 가게 해 줘.”그 순간, 강유형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볼 수 없어. 그는 이미... 화장됐어.”그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고 나는 서서히 강유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강유형.”신지태 오빠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지원아... 진정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그 말, 거짓말이지...? 진정우... 진짜 아니지?”신지태 오빠의 눈이 더 붉어졌다.“지원아, 울고 싶으면 울어.”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몸이 떨렸고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용설아가 울컥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진정우!”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정우를 바라보았다.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감겼고, 긴 속눈썹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침대 밖으로 내려와 있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진정우...”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믿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진정우, 진정우... 아직 말 다 못했잖아. 계속해. 좀 더 말해줘...”그러나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그의 얼굴을 애타게 쓰다듬고 코끝을 맞대고, 눈가를 스치고, 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끝내 그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맞췄지만 아무리 닿아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보며 “지원아, 장난치지 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정우야... 제발 날 버리지 마. 난 이제 너밖에 없어...”나는 끝내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이 절망은 부모님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깊고 아팠다. 어릴 적에는 '죽음'이라는 게 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지만 지금은 너무도 분명했다.이제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걸.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흔들며 울었지만, 그저 눈물만 그의 차가운 얼굴 위로 떨어질 뿐이었다.그렇게 내 정신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차가운 병실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그리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어젯밤의 어둠과 그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던 진정우의 얼굴.모든 순간들이 스치면서 몸이 경련하듯 떨려왔고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너무 아팠다.“지원아, 괜찮아? 어디 아파?”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유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신지태의 목소리도
“수술 실패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용설아 씨가 의사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안으로 들어가 보세요.”그 말만 남긴 채 그는 가려 했지만 용설아 씨는 여전히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대신 설명했다. “환자의 후두부 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봉합을 시도했지만 뇌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어요. 출혈 부위도 여러 군데라...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 순간, 용설아 씨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애써 몸을 가누며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면서 다가와 내 팔을 붙잡고 천천히 일으켰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병실 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너무 밝아서 오히려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침대 위에는 수술복을 덮고 누워 있는 진정우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머리는 하얀 붕대에 감겨 있었다.나는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그때, 용설아가 조용히 말했다.“지원 씨,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세요. 안 그러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용설아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그녀가 나를 데리고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나는 마침내 진정우의 얼굴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평소에 그가 잠들었을 때처럼, 조용하고 평온해 보지만 지금의 이 고요함은 나를 두렵게 했다.“정우야...”용설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그의 손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용설아 씨가 다시 말했다.“정우야, 정신 차려. 지원 씨가 왔어.”그 순간, 그
“정우는...”나는 입을 열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용설아는 이미 내가 묻고 싶은 것을 아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원 씨는 그가 군인이었다는 것만 알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모르셨죠?”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극비 특수 요원이었어요. 3년 동안 국제 작전에 투입되어 전 세계를 장악하려던 거대 조직을 무너뜨렸죠.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브라운이나 헤르나는 그 조직의 잔당에 불과해요.”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정우는 임무를 마친 후 전역하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신지태 씨 사건을 통해 그 조직의 잔당이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게다가, 그 조직의 남은 자들이 복수를 다짐했다고 해요. 그는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직접 정우를 건드리기 어려우니, 결국 그의 주변 사람들을 노릴 거라고 확신했어요.”용설아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그가 지원 씨와 헤어진 이유예요. 그리고 그의 진짜 정체와 배경이죠.”나는 입을 열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서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혹시... 설아 씨는 그와 함께 싸운 적이 있나요?”내가 어렵게 물었지만 정작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진정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용설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그와 함께 싸운 적 없어요. 우리의 관계도 모두 거짓이었어요. 그가 그렇게 한 것도, 결국 지원 씨를 지키기 위해서였죠.”그녀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자신이 조사당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원 씨와 헤어졌어도 여전히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저와 약혼을 발표하고 사람들이 저와 함께 있다고 믿게 만들었어요.
“진정우! 진정우!”나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이 빠져, 쓰러진 진정우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진정우, 대답해! 제발 대답 좀 해봐!”용설아가 그를 안고 필사적으로 흔들며 애타게 외쳤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함께 잠을 잘 때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깨고 늘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가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브라운! 당장 구급차를 불러! 빨리!”용설아가 소리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그제야 얼어붙었던 내 머릿속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끔찍한 생각이 스쳐 가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간신히 힘을 짜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손을 짚으며 앞으로 기어가듯 움직이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원아, 강유형!”바로 신지태였다.곧이어 여러 사람이 몰려들었고 신지태가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는 내 시야를 가로막았고 그사이 진정우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풀려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겨우 입을 열어“진정우”라고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브라운은 체포되었고 강유형 역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쓰러진 진정우의 모습만이 반복해서 떠올랐다.병원 응급실 앞에서 나는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수술실의 붉은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지친 의사가 나오는 걸 보고 다급히 붙잡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 하나였다.“현재 응급처치 중입니다.”“이제 그만 묻고 그냥 기다리세요.”옆에서 용설아가 나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지만 진정우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후두부 뼈가 부서졌어요.”용설아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뭐라고요?”“정
스누커 공의 무게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뼈까지 부러뜨리진 않더라도, 제대로 맞으면 살이 움푹 팰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한 팔이 나를 감싸안았다.쿵! 쾅! 팡! 팡! 팡!사방에서 공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 공 사이에서 회전하며 휘청거렸다.그러나 나를 안고 있던 진정우는 놀랄 정도로 빠른 반응 속도로 움직이며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그의 한쪽 팔이 단단히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이끌려 쉼 없이 몸을 틀어가며 쏟아지는 공을 피해 다녔다.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눈앞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공들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어떤 것은 그의 손이나 팔로 튕겨 나갔고 어떤 것은 우리가 회전하면서 가까스로 비켜 지나갔다. 이게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이하면서도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브라운, 이제 그만해! 당장 멈추라고!”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쏟아지는 공이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공은 여전히 끝없이 날아왔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정우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숨이 가빠지고 그가 나를 안고 움직이는 속도도 처음보다 확연히 느려졌다.“퍽!”바로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며 흔들리는 걸 보았다. 진정우가 공에 맞은 것이다.“진정우!”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가 나를 안고 있는 이상, 나는 오히려 그가 회피하는 걸 방해하고 있었고 그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그에게 도움이 될 순 없어도, 적어도 짐이 되지는 않아야 했다.“조금 있으면 널 밖으로 밀어낼 거야.”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거의 속삭이듯 가까운 거리에서 들린 그의 목소리는, 우리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익숙한 온기였다.그러나 감상에 젖을 틈도
진정우가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채, 각자 앞에 스누커 공이 한 바구니씩 놓여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브라운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오늘 진정우를 인간 샌드백으로 만들 작정이었다.“브라운, 네가 진짜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1대1로 붙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남자냐?”용설아가 참지 못하고 그를 도발했다.“브라운, 이렇게까지 하면 쪽팔린 줄 알아야지. 소문이라도 나면 네 체면이 남아나겠어?”방금 상처를 치료받은 강유형도 가세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순간일수록 진정우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브라운은 더 악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비록 그와 깊은 교류는 없었지만 나는 이 남자가 철저한 미친놈라는 걸 이미 깨달았다.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그는 더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내가 남들한테 조롱당한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이제 와서 그런 게 두려울 것 같아?”역시, 브라운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이건 공정하지 않아.”용설아가 끝까지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공정하지 않다고? 그럼 너도 같이해.”브라운이 손짓하자, 용설아는 순식간에 끌려 올라갔다. 그러자 진정우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괜히 그를 자극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자극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널 도와주겠어?”용설아는 그와 나란히 서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 머릿속에는 네 글자가 떠올랐다.‘천생연분.’그녀는 브라운의 속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려고 일부러 자극한 것뿐이었다.“브라운, 이건 너랑 나 사이의 문제야.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진정우가 단호하게 말하면서 용설아가 다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맞아, 원래는 걔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어쩌겠어? 네 여자가 널 지키고 싶어 하는걸.”브라운은 비꼬듯 웃으며 혀를 찼다.“너희 둘 참 애틋하네, 그렇지? 우리 미녀 스누커 선수도 그렇게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