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함은 정말 컸지만 진정우가 알게 된 것도 괜찮았다.진정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자리를 떠났다. 이소희는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나는 사실 그와 더 이상 발전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화를 내든 오해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우리는 단지 우연히 만난 사이였고 나는 다시 사랑을 할 생각이 없었다. 상처를 한 번 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아침을 먹은 후 나는 이소희를 일터로 데려다주고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어제 이력서를 제출했는데 오늘 아침 면접 초대가 왔다. 이렇게 빠른 반응이 오히려 더 놀라웠지만 어쨌든 일은 빨리 시작하는 게 좋으니 다행이었다.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강진혁의 차를 봤다. 그는 차를 멈추고 내리더니 뒷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차에서 내렸다.그들이 나를 찾으러 온 거였다.“안녕하세요, 아줌마.”나는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지원아...”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때 강진혁이 종이 티슈를 건네며 말했다.“엄마, 이렇게 우시면 지원이가 더 놀라잖아요. 얘기할 거면 울지 말고 하세요.”그러자 아줌마는 티슈를 받고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지원아,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나는 강진혁을 쳐다봤다.“네가 전화도 안 받았고 문자도 안 받으니까 엄마가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아침 일찍 나를 깨워서 오자고 했어. 유형이가 한 일은 이미 엄마가 다 알고 계셔.”나는 아줌마가 이 일로 나를 찾아올 거라는 걸 직감했다.“아줌마, 근처 카페나 식당에서 이야기 좀 하죠. 아줌마도 아침 못 드셨을 거예요.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해요.”그러자 아줌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밥맛이 없어.”“그럼 이야기만 해요.”내 설득에 아줌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강진혁을 보며 말했다.“그럼 오빠는 소희 씨랑 현장에 가 있어요. 저는 아줌마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계속 내가 할 말을 이어갔다.“아줌마, 저는 이미 퇴사했어요. 그리고 다른 곳에도 지원해서 오늘 면접을 봤어요.”“뭐? 그렇게 빨리?”아줌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사실, 유형이와 혼인 신고를 하려던 그날부터 저는 퇴사를 고려하고 있었어요.”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며 전혀 죄책감 없이 말했다.“유형이와 같은 회사에서 계속 일하는 건 서로 불편할 것 같았어요. 그가 제 퇴사를 원하지 않아도 저는 놀이공원 프로젝트가 끝난 후 회사를 떠날 생각이었어요.”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자 강진혁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잖아. 너희가 불편하다면 다른 부서로 가거나 지사에서 일하면 될 거 아니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니?”“제가 다른 곳으로 가면 고생하거나 힘들까 봐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하지만 이제는 정말 떠나고 싶어요. 다른 일고 해보고 싶고요.”내가 솔직히 대답하자 아줌마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어떻게 이렇게까지... 네가 내 아들과 결혼 안 한다고 해도 괜찮은데 회사를 떠나는 건 너무 하잖아? 지원아, 정말 우리를 완전히 떠날 거니?”그녀의 슬픈 표정에 나는 마음이 약간 무거워졌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인데 가슴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자주 찾아뵐 거예요.”그러자 아줌마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혹시 남자 친구가 생겨서 그래? 너와 유형의 과거 때문에 불편해할까 봐 이러는 거야?”그 말을 듣자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나와 강유형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아니에요. 남자 친구가 없어요. 혹시 제가 연애를 한다고 해도 강유형은 제 일에 관여할 자격이 없어요.”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그렇다면, 제발 회사에 남아줘.”그녀는 애원하며 말했다.“적어도 아줌마가 너를 보고 싶을 때 전화를 걸면 언제든지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어.”그 말에 나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흔히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이 말을 하자 아줌마는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원아, 아줌마한테 너는 내 친딸 같아.”만약 진심으로 나를 딸처럼 생각한다면 강진혁과 나를 엮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강진혁이 먼저 제안한 일일 수도 있다. 그가 나에게 마음을 전한 후 그런 뜻을 내비쳤을 수도 있었다.“그럼 진혁 오빠와 유형이가 시간이 맞으면 아줌마와 삼촌께 인사드리면서 정식으로 수양딸로 받아주세요.”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분명 그녀는 아직 내가 딸이 되는 것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지난 10년 동안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의심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가 싫었다.“그래, 알겠어.”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답했다.나는 아줌마를 집까지 모셔다드린 뒤 강유형과 마주쳤다. 그때 강유형은 야구 모자를 쓰고 야구복을 입고 있었다. 평소의 차가운 대표 이미지와는 달리 이제는 젊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 시절의 강유형이 떠올랐다.고등학교 시절, 강유형은 자주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 불안해서 가슴이 떨릴 정도로 걱정이 많았다. 그 시절의 강유형은 정말 멋있고 반항심으로 가득했던 비행소년이었다.어느 날 강유형이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한 바퀴 돌았을 때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의 몸에 꼭 붙어서 손을 놓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처음 강유형과 스킨십을 했던 날이었다. 그때 강유형은 나를 보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무서운 척 하면서 나를 만지려는 거야?”그 이후로 강유형은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고 그의 옷도 점점 더 비즈니스 스타일로 바뀌었었다. 이제는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대표의 모습이다.그런데 지금 그가 예전처럼 모자를 쓰고 야구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더 이상 예전의 강유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옷을 바꿔
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나한테 배상이라도 하라고? 아니면 고의 상해로 고소하겠다는 거야?”“나를 뭘로 보는 거지?”강유형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다시 차가운 대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사과하려고 온 거야. 어제는 내가 충동적이고 경솔했어. 네가 나를 때린 건 잘한 일이야.”그의 이 말은 정말 의외였다. 모자 아래로 살짝 보이는 붕대를 보며 나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네가 잘못을 알면 됐어.”강유형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너 요즘 변했더라.”내가 어떻게 변했다는 거지?하지만 나는 묻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네가 잘못한 건 사실이잖아.”“그래, 어제는 내 잘못이었어. 조나연이랑 너무 가까이 지낸 것도, 네 감정을 무시한 것도 내 잘못이야. 네가 쓰게 할 집에 그녀를 들인 건 더 말도 안 됐고, 게다가 내 카드를 그녀에게 준 것도...”강유형은 한참 동안 자책했다. 그는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있었다.“사과할게.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됐어. 이제는 다 의미 없어.”나는 돌아서려 했지만 그는 나를 막아섰다.“내 말 아직 안 끝났어.”나는 그의 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계속 말해봐.”“사과도 했고, 잘못도 인정했어. 그리고 나연이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도 말했잖아. 네가 말한 그 키스는 장난으로 일어난 사고였어. 만약 네가 그게 그렇게 걸린다면 너도 다른 남자랑 한 번 키스해. 그러면 우리, 없던 일로 하자.”그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걸 본 강유형은 잠깐 몸을 피하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때려도 좋아. 근데 어제 다친 곳은 피해서 때려줘. 다른 데로.”푸흡!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강유형이 이렇게 웃긴 사람이었나? 아니면 이런 식으로 용서를 구하려는 걸까?“지원아.”그는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아니면 내가 다시 너를 쫓아도 될까?”“보아하니 내가 때린 게 꽤 아팠나 보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나는
오전 11시에 면접 볼 회사에 도착했는데 약간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CBD 중심지역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교외에 있었다. 이 회사는 조명 개발을 하는 회사로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놀이공원 조명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했으나 최종 선정되진 않았던 회사였다. 심지어 놀이공원의 조명이 고장 났을 때 이 회사를 찾아가서 조정을 요청할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두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기에 이 회사가 눈에 띄었다. 마침 이 회사에서 새로운 채용 공고를 냈고 모집 직책도 딱 맞아떨어지는 마케팅 홍보 담당이었다. 이 회사에 가장 먼저 지원서를 냈고 당연히 이곳에서 가장 먼저 합격 통보를 받았다. 회사는 임대 사무실에 입주해 있었고 KS 그룹의 자사 소유의 제국 빌딩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가 작진 않았고 건물의 세 층을 임대하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 층으로 올라가 HR 사무실을 찾았다. 내가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면접 보러 오신 윤 아가씨 맞으시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쪽에 앉으세요!” 상대방은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인상이 수수하고 딱히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웃는 얼굴이 꽤나 친근했다. 이 친근함 덕에 인상이 깊어졌다. 세상에서 미소가 가장 큰 친절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늘 윤 아가씨 한 분만 면접을 보기로 했습니다.” 상대방의 말에 의문이 풀렸다. 내가 오자마자 나를 알아봤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살짝 놀라더니 웃으며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저는 허진호입니다. 윤 아가씨의 이력서를 봤는데 아주 훌륭하고 저희가 찾고 있는 직책에도 아주 적합하시더군요. 윤 아가씨의 요구사항을 듣고 싶습니다.” 허진호는 매우 전문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와 악수할 때 보니 그의 가슴에 HR 매니저 겸 회사
“윤 부장님, 저희와 함께하게 된 걸 환영합니다.” 이번에는 허진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곧바로 안내를 받아 입사 절차를 밟았다. 채 반 시간도 되지 않아 무사히 입사가 완료되었다. 그제야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강유형 쪽에서 아직 승인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안 되면 강유형 아버지를 찾아가면 된다. 그는 틀림없이 허락해 주실 테니 말이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여러 번 울렸지만 허진호와 얘기 중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안리영이었다. “어디야? 나 오늘 쉬는 날인데 만날래?” 그녀가 휴일이라니, 드문 일이다! 요즘 출산 성수기라 그녀는 계속해서 일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왜? 드디어 출산 비수기에 들어간 거야?” 내가 농담을 던졌다. “응. 애 낳을 사람들은 다 몰려서 한꺼번에 낳다가 이제 낳을 사람도 없지 뭐야.” 안리영이 투덜거렸다. 이미 여러 번 해온 투정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아주 영리해서 과학적인 출산 계획을 세우고 태어날 시기, 생년월일까지 따지며 신경을 쓴다. 그런 시기에 태어나야 애들이 크게 성공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전부 용이 되고 봉황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나중에는 평범한 아이가 더 귀해질지도 모른다. “집에 있어? 내가 네 집으로 갈게.” 그녀가 어렵게 얻은 휴일이라 편하게 쉬게 해주고 싶었다. “응. 와!” “그럼 낮에 한잔할까?” 내가 웃으며 물었다. “좋지. 내가 음식 준비할게. 너는 술을 가져와.” 안리영이 흔쾌히 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다른 낯선 번호로부터의 부재중 전화들을 확인해 봤다. 아마 다른 채용 회사에서 걸어온 전화일 것이다. 굳이 다시 걸지 않았다. 진짜 나를 채용하고 싶다면 다시 전화할 것이다. 나는 술을 샀을 뿐만 아니라 과일과 전기포트까지 샀다. 안리영과 차를 끓여 마시기 위해서였다. 안리영은 문을 열어주고 내가 들고 간 물건들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전기포트를 보더
누가 나를 놀리는 건가 의심하던 나는 연이어 반지 주문과 결혼식장 관련 전화까지 받았다. 이쯤 되니 단순한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달았고 전화를 걸어온 이들에게 물어본 끝에야 모든 것이 강유형의 짓임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게 그의 짓이었다. 그가 단순히 장난삼아 나를 괴롭히려고 이런 짓을 한 것은 아닐 터였다.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자 나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유형, 도대체 무슨 짓이야? 우리 이미 헤어졌잖아. 그런데 왜 웨딩드레스며 반지 주문을 하는 거야? 누구 기분 상하게 하려고?” “날 그렇게 유치하고 한심하게 보지 마. 네가 내가 널 소홀히 여긴다고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거 같은데 우리가 결혼하면 믿겠어? 내가 널 아내로 맞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겠냐고?” 그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실망했다. “강유형, 넌 사랑이 웨딩드레스와 반지로 된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나는 화가 나서 그에게 따졌다. 강유형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몇 초 후에야 대답했다. “조나연 때문 아니야?” “맞아!” 나는 인정했다. “그럼 그 사람, 제일 큰 장애물인 그 사람을 어떻게 할 건데?” 순간 강유형은 말문이 막힌 듯 조용해졌다가 잠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조나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거야. 그리고 회사에서도 물러나게 할 거야. 그 정도면 됐어?” 그가 얼마나 내키지 않게 말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그리고 나중에 조나연을 몰래 숨겨 놓기라도 하려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감추어두려는 거야?” 나는 비꼬듯 물었다. 순간 강유형이 버럭 화를 냈다. “윤지원, 그만 좀 해! 어떻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지? 조나연은 지금 혼자서 아이까지 임신한 불쌍한 처지야. 너는 왜 동정심이란 게 조금이라도 없어?”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소리치는 수준이었다. 나는 귀가 멀까 봐 핸드폰을 조금 멀리 뗐다. 하지만 그랬어도 그의 말은 똑똑히 들렸다. “윤지원, 너도 여자인데 만약 네가 같
안리영은 차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강유형 저 인간 진짜 가면이 벗겨지고 나니까 이렇게 비참할 줄이야.” 나는 차를 두 모금 마셨다. “알고 보니 강유형은 그냥 나를 불쌍히 여긴 거였어.” 비록 강유형과 헤어졌지만 그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말이 그 모든 아름다운 외피를 완전히 찢어버렸다. 속에 감춰진 위선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안리영은 내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지금이라도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게 된 게 다행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리영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강유형에게 한 방 먹일 생각은 없어?” “뭐라고?” 내 감정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강유형의 말이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다시 드러내 내 인생에서 가장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가 맞는 말을 하나 하긴 했다. 예전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차갑게 누워 계시던 영안실에서 나 홀로 남았을 때 세상에 혼자라는 절망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때 나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도 없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면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있을 테니까. 그때 강유형의 부모님이 내 앞에 나타나 나를 안아주며 앞으로 함께 살자고 자신들이 부모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비로소 두려움을 덜 수 있었다. 그때 그들은 내게 진짜 구세주 같았고 나는 무엇도 가리지 않고 그들을 붙잡았다. 마치 전 세계가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준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는지 강유형이 처음 내게 웃어주었던 미소를 사랑의 신호로 오해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어쩌면 비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미소를 한 줄기 생명의 빛처럼 여겼다. “당장 남자 만나서 연애를 시작하든 결혼을 해. 그러면 강유형도 네가 정말 진심이란 걸 깨달을 거야. 네가 강유형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네가 결코 그 사람에게만 의존하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