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영강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그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네가 백제파 사람을 고용해 남씨 가문에 쳐들어가 남우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게 사실이냐?”치지연은 아버지가 그 일을 물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제가 그랬으면 또 어때서요. 남우만 죽으면 저희는—”“멍청한 년!”치영강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치지연 앞에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들고 힘껏 그녀의 뺨을 때렸다.또 한 번 맞게 된 치지연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그녀는 시뻘게진 눈으로 웃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씨 가문이 무서우세요? 아버지가 이렇게 나약하기 때문에 저희가 지난 몇 년간 남씨 가문에게 기죽어 눈치만 보면서 사는 거예요. 아버지는 비겁한 겁쟁이에요!”“그 입 닥치지 못해!”치영강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튀어나왔다.“무슨 담으로 남씨 가문 구역에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이야. 네가 정말로 그들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해?”치지연이 그를 돌아보았다.“못할 게 뭐가 있어요. 저번에는 그저 그놈 운이 대단히 좋았던 것뿐이에요. 저는 다음에도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어요!”치영강이 너무 화가 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너… 너 당장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치지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문 앞에 서 있던 하시호는 멀어져 가는 치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붙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그의 시선이 서재로 향했다. 축 처진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시호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그는 어떻게 해서든 아가씨를 위해 저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다짐했다.저 늙은이는 살아있어서는 안 되었다.며칠 뒤 남씨 가문.남강훈은 정원에서 그가 키우는 애완 도마뱀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때 부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그가 멈칫거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먹이를 놓고 고개를 돌렸다.“푸조 쪽 사람들이 며칠 전 치영강을 찾아갔었다
그녀가 손에 쥔 채찍을 휘두르며 물었다.“배우고 싶지 않아요?”강유이가 흠칫 놀라더니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지금 저더러 그걸 배우라고요?”“채찍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고대에는 채찍도 자주 쓰는 무기 중 하나였어요. 채찍 기술에는 총 열한 가지가 있는데, 부드럽게 치는 것과 강하게 치는 것, 하나로 치는 것과 두 개로 치는 것 등 다 쓰임이 달라요. 금속으로 된 단단한 채찍과 가죽으로 된 부드러운 채찍이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채찍이에요.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건 가죽 재질로 된 부드러운 채찍이에요. 초보자가 쓰기 딱 맞죠.”강유이는 그녀가 건네는 붉은색 짧은 채찍을 건네받았다. 확실히 가죽으로 만들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작고 간편하여 휴대하기 편했고 디자인도 예뻤다.남우가 실눈을 뜨며 미소 지었다.“마음에 들면 선물로 줄게요.”강유이가 멈칫거렸다.“그건 좀…”남우가 채찍을 억지로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저와 내외할 필요 있나요. 가져요. 제가 시월이한테 쓰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할게요. 유이 씨가 배울 마음만 있으면 한 달 내로 터득할 수 있을 거예요.”강유이는 채찍을 손에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오래전 지윤 이모가 그녀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줬을 때도 어물쩍거리며 제대로 배우지 않았었다.이 기회에 잘 배우면, 어쩌면 나중에 지난번 같은 상황이 발생할 때 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무장에 도착한 반재언이 사각 링 위를 바라보았다. 남우가 직접 강유이에게 채찍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그녀는 시월에게 팔 보호대를 착용하고 강유이 맞은편에 서라고 말했다.“유이 씨가 휘두르는 채찍이 붙잡히지 말고, 시월이의 팔을 터치할 수 있어야만 초급 단계를 건널 수 있어요.”강유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정말 그거면 돼요?”듣기에는 별다른 난이도가 없어 보였다.남우가 씩 웃었다.“해보면 알게 될 거예요.”그녀가 옆으로 물러나더니 여유로운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팝콘을 들고 구경하
반재언이 피식 웃었다.“도련님께서 제 동생 걱정을 지극히도 하시네요.”그녀가 눈꼬리가 휘게 미소 지었다.“저는 유이 씨가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거든요.”그러더니 열정 가득한 강유이를 돌아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이렇게 사랑스럽고 단순하고 끈기까지 가진 아가씨가 제 와이프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반재언이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벌써 가우 씨를 잊으셨나요?”남우가 태연하게 되물었다.“그러는 반재언 도련님은 왜 그렇게 가우에 대해 연연하시는 거죠?”그가 느긋하게 답했다.“자꾸만 생각났거든요.”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날 밤 날이 어두워 가우 씨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어요.”남우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팔짱을 꼈다.“설마 처음 보는 여자마다 익숙하게 느끼는 건 아니죠?”반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한참 동안 서로 마주 보았다. 그때 강유이가 넘어지며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강유이 쪽을 바라보았다. 시월이 먼저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유이 아가씨, 괜찮으세요?”강유이가 고개를 저었다. 손목에 힘이 빠진 것처럼 뻣뻣해 나며 통증까지 느껴졌다.반재언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물었다.“이제 막 배웠을 뿐이야. 조급해하지 말고 체력을 아껴둬.”남우도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오빠 말이 맞아요. 저는 오늘 하루 내로 초급 테스트를 통과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한 달은 충분히 기니까, 오늘은 일단 돌아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요. 우리 내일 계속해요.”강유이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링 아래로 내려갔다.반재언은 멀어져 가는 유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이토록 조급해하는 걸 보니 아마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여태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강유이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녀의 얼굴빛이 어두웠다. 시월과 겨뤄도 이렇게나 큰 실력 차이가 느껴지는데 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역시 그녀가 조금 더 힘을 내야 했
갑작스러운 소식에 남우와 반재언마저 당황했다.남강훈이 책상 앞으로 걸어와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내가 걱정하던 일이 발생한 것 같구나.”남우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설마 치지연이…”“확신할 수는 없어.”남강훈이 이어서 말했다.“만약 치지연이 진짜 모진 마음을 먹고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후, 권력을 손에 넣으려 했다면 진작 움직였어야 했어. 난 그 애가 옆에 두고 있다던 그 사람이 의심스럽구나.”그녀의 곁에 있던 남자가 백제파 킬러를 고용해 남씨 가문 구역에서 남우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래서 그가 치영강을 죽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치영강은 블랙샷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죽으면 블랙샷의 계승권은 당연히 치지연한테 넘어가게 된다.만약 그 남자가 치지연이 치영강의 뒤를 이어받길 희망한다면?반재언이 남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저 역시 하시호라는 남자가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남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그가 의심스럽습니다.”남우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아마 하시호 짓이 맞을 거예요. 제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는데 하시호가 치지연한테 충성하는 원인 중 가장 큰 이유가 사랑이라고 하더라고요. 치영강은 자기 부하가 자기 딸과 눈이 맞는 걸 가장 싫어했잖아요. 이제 치영강은 죽고, 치지연이 블랙샷을 계승 받았으니 더 이상 하시호한테 걸림돌이 될 게 없겠네요.”남강훈이 콧방귀를 뀌었다.“그 떠돌이 소문 참 용하구나. 평소에 꽤나 관심이 있었나 보지?”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원래 가십거리가 재밌는 법이거든요.”남강훈이 손을 저었다.“됐다. 두 사람은 나와 함께 블랙샷에 다녀와야겠어. 어쨌든 나도 치영강의 장례식에 참여할 자격이 있으니까.”남우가 반재언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이쪽 도련님은 왜 데려가는데요. 치지연이 이 도련님을 얼마나 욕심내고 있는 줄 아세요? 이건 뭐 자발적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거잖아요.”반재언은 그녀를 바라
하시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바로 언제 그랬나 싶게 표정을 숨겼다.치지연의 얼굴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제 아버지가 어쩌다 돌아가셨는지, 남씨 가문에서 정말 모르신단 말씀이세요?”남강훈이 피식 웃었다.“그게 우리 남씨 가문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그녀가 싸늘하게 답했다.“만약 당신들 남씨 가문이 DM에 손을 쓰지 않았다면, 저희 아버지가 하지도 않은 일로 억울하게 내몰리지 않으셨겠죠. 그 일로 살해당할 일도 없었을 거고요!”“음?”남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지연이 네가 지금 지난번 DM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참 이상하구나. DM 일이 왜 너희 블랙샷과 관련되었단 말이냐?”하시호가 선수를 치며 말했다.“당신들이 DM의 술을 압수하고 우리 이름을 대며 BJ 술과 바꿔치기하지 않았다면 보스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남강훈이 소리 내어 웃었다.“지금 자네는 치영강이 죽은 게 푸조와 관련 있다고 말하는 건가?”하시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아니면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남강훈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순간 하시호마저 간담이 서늘해지며 함부로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남강훈이 말을 이었다.“DM이 내 구역에서 장사를 하며 감히 질 낮은 술을 팔려고 해서 그 술을 우리가 압수했네. 그건 당연한 처사 아닌가. 그리고 자네들은 이번 일이 우리 남 씨 가문에서 했다는 증거라도 있나?”하시호가 이를 악물었다. 남강훈은 원래 언변에 강했다. 거기다 확실히 그는 남씨 가문이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자신들이 불리했다.치지연이 중재에 나섰다.“하시호가 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지 못해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도 너무 그를 몰아붙이지 마시길 바랍니다.”“허, 너희가 킬러를 고용해 내 아들 남우를 해치려 했을 때에는 뭐 내 입장을 고려했었느냐?”남강훈의 반박에 치지연의 표정이 굳어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남우는 그제야 아버지가 굳이 자신들까지
반재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만 했다. 그는 돌아서는 순간 하시호의 표정을 주시했다. 그리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남강훈의 뒤를 따랐다. 남우도 그들의 뒤를 따르며 나갔다.치지연은 문밖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눈가에 증오심이 들끓었다.남씨 가문만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그토록 처참한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제대로 된 시신조차 건지지 못했다!남씨 가문이 먼저 블랙샷에 해를 끼쳤다. 그녀는 결코 이대로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차로 돌아온 후 남우가 창밖을 내다보았다.“아버지, 치영강이 안 죽은 건 아닐까요? 시체도 찾지 못했는데 바로 장례식부터 치르다뇨. 뼈 한 조각 찾지 못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으세요?”반재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치영강의 시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서둘러 장례부터 치른 겁니다. 남 회장님께서 하셨던 말대로 누군가가 치지연이 하루빨리 블랙샷을 이어받길 손꼽아 기다리나 보네요.”“저들의 태도가 명확해졌네요. 남씨 가문 구역에서 벗어나면 곧장 푸조한테 가겠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반격해오길 기다리기보다 저희가 먼저 공격하는 건 어떤지요?”조수석에 앉아있던 남강훈이 소리 내어 웃었다.“맞아요. 역시 반재언 씨가 제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네요.”남우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툴툴거렸다.“어째 두 사람이 더 부자지간 갔네요.”‘부자’라는 단어에 남강훈이 멈칫거리더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나야말로 아들 하나 더 생기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야.”남우는 아예 입을 닫기로 결심했다.같은 시각, 한태군은 남석한테서 증발된 돈의 행방에 대해 보고받았다. 남석이 말했다.“예상하셨던 대로 그 돈은 치영강이 개인적으로 가로챈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자금을 해외 계좌로 빼돌리고 있었습니다.”한태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 계좌 주인은 찾았나요?”남석이 휴대폰을 그에게 건넸다.“이 사람입니다.”휴대폰을 건네받은 한태군이 화면에 시선을
”제 생각에는 블랙샷 내부에 데이비 렌지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데이비 렌지는 사람 마음을 꼬드기는 걸 가장 잘하고, 또한 자기 사람한테는 아낌없이 내주는 면이 있습니다. 만약 그가 어떤 약속을 했고, 마침 그 약속이 상대방의 마음에 꼭 들었다면 자연히 데이비 렌지를 위해 일을 처리했을 수도 있죠.”남강훈은 한태군의 말이 완전히 허황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태군 씨는 손에 결정적인 단서를 쥐게 되었는데, 앞으로 어쩔 생각이십니까?”한태군의 표정이 평온했다.“데이비 렌지가 이런 일을 벌였으니 당연히 그 뒤의 대책까지 세워뒀을 겁니다. 만약 지금 당장 푸조한테 이 사실을 알리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은 후 그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게 철저히 망가뜨릴 겁니다.”남강훈이 미소 지었다.“저는 태훈 씨가 조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데이비 렌지를 찾아갈까 봐 걱정했는데, 꽤나 신중한 성격이셨군요.”그가 답했다.“신중한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치영강의 상태는 어떻습니까?”남강훈이 물었다.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명이 길어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회장님께서 저한테 하시호를 주시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치영강은 진작 산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겠죠.”“태군 씨가 정말로 그를 구해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사실 정말로 그자가 죽은 줄 알았거든요.”금방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정말로 치영강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례식장에 도착해 관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의혹을 풀 수 있었다.적어도 이제는 확실해졌다. 치영강은 하시호한테 변을 당한 것이다.한편, 서남 지역의 한 레스토랑.룸 밖에 검은색 옷을 입은 장정들이 수두룩하게 서 있었다.푸조는 시가를 입에 물고 하얀색 연기를 뿜어냈다. 테이블 위에 은색 박스 여러 개가 놓여있었는데 그 안에는 가지런한 수표로 꽉 차 있었다.소파 맞은편에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치지연이 서있었다
그 남자는 그와 똑같이 잔인했지만, 야망은 없었다.하시호가 말했다. “블랙샷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예요.”데이비렌지는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그녀를 위해 일할 바엔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게 낫죠. 권력을 갖고 싶지 않아요?”그는 흠칫 놀랐다.데이비 렌지는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남자는 권력만 있으면 어떤 여자든 품을 수 있어요. 그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말이죠.”하시호는 고개를 떨궜다.데이비 렌지가 그에게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섬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있는 난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요. 난 당신을 형제로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권력을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게요.”하시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말은 오랫동안 하시호의 귓가를 맴돌았다.남자에게는 돈보다는 권력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블랙샷의 부하에 불과한 하시호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부하로서 그는 너무 많은 제약을 받았다.치지연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고 그녀의 호감도 얻을 수 없었다.그는 출중한 외모도 아니었기에 그저 묵묵히 베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하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그녀가 주인이라면 그는 주인을 따르는 개에 불과했다.그랬기에 데이비 렌지의 제안에 그는 흔들렸다.하지만 그의 제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하시호는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치지연이 블랙샷을 거느리고 푸조에게 달려갔다는 소문이 남씨 가문에 전해졌다.남강훈은 느긋하게 정원에서 티 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모두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편안한 옷차림의 남우는 기르고 있는 도마뱀을 쓰다듬고 있었다. “시체도 찾지 못했는데 후다닥 장례를 치렀고 지금은 푸조에게로 망명 갔네요. 그야말로 아버지의 착한 딸이네요.”남강훈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해, 치영강이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