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회장은 피고인석에 서서 판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며 자신의 과실로 리사가 사망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류 회장이 직접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병원의 경호원을 매수하였기에 그는 배후의 살인 교사인 셈이었다.그러기 때문에 죗값을 치른다고 해도 H 국에서는 3년 정도의 형을 받을 것이고 엘리트 변호사들까지 합세하면 이 자리에서 바로 풀려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류강준과 류정석은 매우 자신이 있었지만 곁에 앉아있던 류성훈은 조금 전부터 싸늘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시계를 쳐다보며 뭔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판사가 판결을 내리려던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항의를 했다.“저희는 반대입니다!”사람들이 시선을 돌려보니 한 부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휠체어에 탄 부인의 뒤에는 남편이 서있었다.“저희는 판결에 반대입니다. 저희는 류 회장의 모든 악행을 까발릴 예정입니다.”이때, 류정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찰들을 보며 언성을 높였다.“이렇게 아무 사람이나 재판에 들여도 되는 거예요? 이곳이 시장도 아니고, 당장 저 사람들을 쫓아내요!”경찰들이 서둘러 부부를 내보내려던 순간, 휠체어에 앉아있던 부인이 오열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류 회장은 짐승보다 못한 놈입니다. 저희 딸 은정이는 아직 어린아이인데 류 회장의 압박에 임신을 해버렸어요. 그런데 류 회장은 은정이를 협박하면서 은정이가 임신한 걸 말하면 우리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은정이… 우리 은정이는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경악에 찬 표정이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류강준은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며 구해달라는 듯했다.류정석은 류강준을 힐끔 노려보았지만 결국 아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기에 굳은 표정을 한 채, 부부를 보며 호통을 쳤다.“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 마세요! 제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증거도 없으면서 제 아들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지 마세요!”“우린 누명을 씌운 적이 없습니다. 은정이가 남긴 유서
“강준이는 네 형이야!”류정석이 목에 핏줄을 세우며 호통을 쳤고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던 류성훈은 자료를 이 변호사에게 전하며 시선은 여전히 류정석에게 꽂혀 있었다.“형만 아버지 아들이고 전 아닌가요?”류정석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짓자 류성훈이 말을 이어갔다.“지금까지 저만 형을 위해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을 뿐, 형이 단 한 번도 저를 위해 일을 한 적이 있나요? 아버지가 류 씨 이익을 고려한다는 건 잘 알지만 저도 똑같이 류 씨 가문의 이익을 고려하고 있어요. 전 형보다 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아버지 눈에는 형만 보이고 제 노력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예요? 형이 저지른 짓은 아버지도 다 알잖아요. 제가 대신 수습한 더러운 일이 아직도 부족해요? 오늘 형 자리에 내가 서있었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선택했을까요?”류성훈은 이를 악물며 류강준을 가리킨 채 류정석에게 소리를 질렀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류정석이 손을 뻗어 류성훈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순식간에 류성훈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고 경찰 두 명이 다급하게 달려가 류정석과 류성훈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류정석이 흥분한 채, 그들을 밀쳐냈다.“성훈아, 너 지금 네 형의 자리를 탐내는 거야?”“그 자리는 원래부터 제 자리예요. 전 탐낼 필요도 없어요. 형보다 제가 회장 자리에 훨씬 어울려요. 형이 저지른 짓을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것도 형을 그 자리에 계속 앉히게 하려는 거잖아요. 하지만 아쉽게도 형은 저질스럽고 악하게 태어난 사람이라 아버지의 기대에 절대 미치지 못하죠.”류정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었다.자리에서 걸어 나온 류성훈은 옷차림을 정리하며 허리를 쫙 펴고 서서 피해자 가족들에게 말을 건넸다.“여러분들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약속했기에 저와 제 변호사 팀은 판결을 뒤집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계속 상소할 겁니다.”피해자 가족들은 그의 말에 희망을 느낀 듯 감개무량했다.두 시간 동안의 재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법원을 나서며 재판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고 기자들
한태군은 가짜 납치 동영상을 류성훈에게 보냈을 뿐만 아니라 류정석에게도 보냈던 것이다.류성훈은 한태군을 마지막으로 접한 사람이기에 만약 한태군이 정말 납치가 되었다면 류성훈이 가장 의심을 받는 상대가 될 것이지만 류정석은 달랐다. 한태군의 협박은 류정석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으며 큰 아들의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던 그는 류성훈이 “협박”을 받고 있어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이 동영상은 류성훈이 권력을 빼앗기로 결심한 폭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류정석이 “협박”받은 류성훈에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더라면 류성훈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한태군의 계획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한편, Y 국의 카이즈 빌라 호텔.류하리가 비서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삼촌이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어!”비서는 점점 흥분하는 류하리를 보며 그녀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아가씨, 이건 사실입니다. 회장님은 감옥에 갈 가능성이 큽니다. 최소 15년에서 20년 형은 받을 것 같습니다. 그 증거들은 전부 부회장님이 제출한 것입니다. 현재 유성 그룹 이사회에서도 발표가 끝난 상태입니다. 어르신의 지분까지 빼앗기게 생겼습니다.”류하리가 뒷걸음질 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럴 리가 없어… 삼촌이 그랬을 리가 없어…”‘삼촌은 지금까지 아버지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 중요한 타이밍에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류 씨 가문에서 할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사람이 나의 아버지인데. 나의 아버지는 장남이고 난 아버지의 딸인데. 삼촌이 권력을 빼앗아 회장 자리에 앉았다는 건, 앞으로 류 씨 가문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거잖아…’사실 류하리는 삼촌이 회장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며 할아버지가 지키고 있었기에 그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삼촌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깊었지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밀어주고 있었기에 류 씨 가문에서 삼촌
매기가 그녀의 손을 쳐내더니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이게 다 류하리 씨 덕분이죠.”류하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불그스름하던 얼굴에 어느새 핏기가 싹 가시더니 점점 흙빛으로 변했다.매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류하리 씨는 너무 맹목적으로 자만했어요. 한태군은 단지 류하리 씨에게 다른 세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손쉽게 류씨 가문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그는 류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리진 않을 거예요. 단지 당신 가문의 주인이 바뀌는 것뿐이죠. 류 회장이 체포되었으니 이제 유성 그룹의 주인은 전폭적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부회장님이 되겠죠. 류하리 씨와 류강준 씨는 부회장님한테 류씨 가문의 실권을 양도해야겠네요. 퍽 속이 쓰리겠어요.”류하리가 머리를 감싸 쥐고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소리쳤다.“안 믿어! 이건 거짓말이야!”매기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믿든 안 믿든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이게 현실이니까. 류하리 씨, 부디 H 국까지 편안한 비행 되시길 바랄게요.”류하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영혼이 가출한 텅 빈 껍데기 같았다.이틀 후, 학교.지난주에 있었던 연극 영화과 시험 성적이 게시판에 붙었다.강유이와 진예은이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게시판에는 그녀의 이름이 걸려있었다.진예은이 고개를 돌렸다.“빅토리아대학교 연극 영화과 일등이라니. 대단해, 유이야!”강유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졸업 논문까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돼.”“너 졸업해?”진예은이 놀라 물었다.강유이가 헛기침을 했다.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진예은한테 조기 졸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이제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었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냥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고 싶어.”진예은이 깊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아, 한태군과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려고 그러는구나.”강유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가 팔꿈치로 진예은
그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지난 시간 동안 낮이고 밤이고 끊임없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던 그녀의 체취가 훅 하고 밀려들어왔다.강유이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해당 나무 아래, 두 사람은 그동안의 그리움을 보충하려는 듯이 서로를 탐했다.얼마 후,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강유이가 시선을 내리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훅 밀려드는 서러움에 눈물이 차올라 앞을 가렸다.“우리 못 본 지 반달이나 됐어.”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응. 반달이나 되었어.”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할 말 없어?”한태군이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뭔가를 억누르는 듯이 말했다.“있어.”그가 그녀와의 거리를 조금 더 좁히며 다가갔다.“너와 떨어져 있는 그 시간 동안 네가 너무나 보고 싶었어. 심지어 꿈에서도 온통 너뿐이었어.”강유이는 현재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을지 짐작되었다. 그녀는 너무나 적나라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입만 살아서는.”그래도 궁금하긴 했다.“꿈에서 뭐 했는데?”그가 피식 웃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꿈에 유이 네가 나와서. 내가 잡아먹었어.”강유이가 씩씩거리며 그를 마구 때렸다.“이, 이 변태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유이 너를 그리며 꿈을 꿨는데. 그게 왜 변태야? 응?”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한입 베어 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한태군은 정말로 실천했다. 그가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따끔거리는 고통이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입술이 저릿해나는 이질감이 느껴졌다.그녀가 작게 항의했다.“한태군, 물지 마!”그의 눈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진예은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예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다만 예전보다 훨씬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집사가 그녀의 도착을 고하자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가 서둘러
진예은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났다. 방금 전까지 약해졌던 마음이 어머니의 말에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그녀의 아버지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서둘러 다가가 진씨 부인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오히려 진씨 부인이 그를 밀어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예은아, 나한테 이제 너밖에 없어. 날 버리면 안 된다. 난 네 엄마야!”“짝!”뺨을 내려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진예은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진씨 부인의 몸이 절반 정도 돌아가더니 바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곧바로 그녀의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진씨 부인이 손으로 뺨을 감싸 쥔 채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진예은의 아버지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당신 나랑 약속했잖아. 앞으로 예은이와 잘 지내겠다고 분명히 약속했어. 날 속인 거야?”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이를 악물고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아내는 것 같았다.“아들 하나 망친 걸로 모자라, 이제 하나 남은 딸까지 붙잡아 두려고?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권력이 뭔데. 폐하가 왜 끝까지 당신과 진찬을 인정하지 않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어떤 부모가 자식을 권력 쟁탈의 도구로 앞세워. 우리 아들이 죽은 건 다 당신이 그렇게 내 몬 거야!”“내가 아니야… 아니야…”진씨 부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불안한 시선으로 허공만 주시했다.진찬이 죽었다는 사실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방금 그의 말은 정확히 그녀의 아픈 곳을 찔렀다.사실 가장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력한 겁쟁이었기에 진찬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고 있는 걸 보면서도 말리지 못했다.진예은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아버지, 어머니의 정신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으니 빨리 치료를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녀의 말에 그는 허공만 멍하니 바라본 채 한참 동안 말
거실에는 강유이와 한태군만 남게 되었다. 강유이가 머리를 쑥 내밀고 위층을 힐끔거렸다.“아저씨 진짜로 화나신 건 아니겠지?”한태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걱정 마. 어머니가 해결하실 거야.”그가 그녀한테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강유이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방으로 갈까?”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방에 가서 뭐 하려고…”한태군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가볍게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나 유이 너랑 같이 있고 싶어.”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녀가 겨우 마른침을 삼켰다.“지금 같이 있잖아.”“달라.”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훑었다.“나 너랑 키스하고 싶어. 유이 네가 다른 사람한테 보이는 걸 개의치 않는다면…”강유이가 서둘러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귀까지 빨개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알았어!”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태군이 그녀를 벽으로 밀치며 턱을 잡아 올린 후 입술을 부딪혔다.얼마나 흘렀을까. 강유이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그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태군 오빠… 나 숨을 못 쉬겠어…”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숨결이 닿은 부위에 열기가 피어올랐다.강유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로 서지 못했다. 곧바로 그녀의 다리가 허공에 붕 뜨더니,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한태군…!”그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해 질 무렵, 석양이 통유리로 된 창문을 꿰뚫고 들어와 방안을 밝혔다. 어렴풋하게 들어온 빛이 마치 필터를 씌운 것처럼 그의 얼굴 윤곽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강유이는 옆으로 돌아누워 깊은 잠에 빠진 한태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고 그의 눈가를 쓰다듬었다.한태군은
다음날, 학교에 도착한 강유이는 하루 종일 퀭한 상태였다.어젯밤 그녀는 한태군의 방에서 오후 내내 푹 잤다.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예 잠이 오지 않아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다크서클이 진하다 못해 판다가 와서 친구하자고 할 정도였다.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깜짝 놀란 그녀가 뒤돌아보고 멈칫거렸다.“둘째 오빠?”반재신이 팔짱을 끼고 다크서클 때문에 퀭한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어젯밤에 도둑질이라 한 거야?”“아니거든.”강유이가 얼굴을 휙 돌렸다. 그녀가 서둘러 거짓말을 해대며 변명했다.“커피를 많이 마셨더니 잠이 안 와서 그래.”“진예은은?”강유이가 멈칫거리다가 수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빠가 예은이를 왜 찾아?”반재신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더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답했다.“별일은 아니야.”그러다 어딘가 찝찝했는지 보충하며 말을 이었다.“잠깐 찾을 일이 있어.”“무슨 일?”“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강유이가 볼에 바람을 넣고 뚱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뭔가 떠올랐는지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오빠, 사실 예은이 안 싫어하지?”반재신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나한테 딱 걸렸어. 예전에는 그렇게 나한테 예은이를 멀리하라 더니, 이젠 오빠가 직접 찾아다니네? 두 사람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워진 거야?”반재신이 진예은을 찾으로 다니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반재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힘을 실어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 놓았다.“이게 간덩이가 부었네. 지금 날 떠보는 거야?”강유이의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그녀가 그의 손을 밀어내며 머리를 정리했다.“누가 떠봤다고 그래. 사실이 그렇잖아. 오빠, 예은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반재신이 얼굴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신경 꺼.”“예은이는 내 친구야. 내가 어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