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학교에 도착한 강유이는 하루 종일 퀭한 상태였다.어젯밤 그녀는 한태군의 방에서 오후 내내 푹 잤다.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예 잠이 오지 않아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다크서클이 진하다 못해 판다가 와서 친구하자고 할 정도였다.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깜짝 놀란 그녀가 뒤돌아보고 멈칫거렸다.“둘째 오빠?”반재신이 팔짱을 끼고 다크서클 때문에 퀭한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어젯밤에 도둑질이라 한 거야?”“아니거든.”강유이가 얼굴을 휙 돌렸다. 그녀가 서둘러 거짓말을 해대며 변명했다.“커피를 많이 마셨더니 잠이 안 와서 그래.”“진예은은?”강유이가 멈칫거리다가 수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빠가 예은이를 왜 찾아?”반재신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더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답했다.“별일은 아니야.”그러다 어딘가 찝찝했는지 보충하며 말을 이었다.“잠깐 찾을 일이 있어.”“무슨 일?”“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강유이가 볼에 바람을 넣고 뚱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뭔가 떠올랐는지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오빠, 사실 예은이 안 싫어하지?”반재신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나한테 딱 걸렸어. 예전에는 그렇게 나한테 예은이를 멀리하라 더니, 이젠 오빠가 직접 찾아다니네? 두 사람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워진 거야?”반재신이 진예은을 찾으로 다니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반재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힘을 실어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 놓았다.“이게 간덩이가 부었네. 지금 날 떠보는 거야?”강유이의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그녀가 그의 손을 밀어내며 머리를 정리했다.“누가 떠봤다고 그래. 사실이 그렇잖아. 오빠, 예은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반재신이 얼굴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신경 꺼.”“예은이는 내 친구야. 내가 어
병원, 진예은이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고 있었다. 강유이는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잠시 후 진예은이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강유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예은아, 괜찮아?”진예은이 겨우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고마워.”강유이가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내가 찾아가서 다행이지. 너 혼자 있다가 고열로 쓰러졌더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고.”진예은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네가 나 병원에 데려온 거야?”유이가 답했다.“내가 큰 오빠한테 연락해서 오빠가 차로 병원까지 데려다줬어.”진예은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밖에 반재언이 나타났다. 그가 문에 기대서서 노크했다.“좀 괜찮아?”살짝 멈칫거리던 진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들한테 신세 졌어.”강유이가 말했다.“우리 사이에 신세라니. 참, 너희 집에 계시던 도우미 아주머니는?”진예은이 고개를 수그렸다.“아주머니는 오늘 연서를 데리고 외출했어. 난 그냥 자고 깨나면 다 나을 줄 알았거든.”하루 종일 연서를 돌보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어젯밤부터 몸이 좋지 않았지만 굳이 아주머니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러면 안 되는데. 아니면 가사도우미 한 분 더 쓰는 게 어때? 한 분만 쓰면 오늘처럼 아주머니 없이 너 혼자 있다가, 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해.”진예은이 쓴웃음을 지었다.“됐어. 다음부턴 주의할게.”강유이가 반재언한테 다가갔다.“오빠 우리 집 가사도우미분들 중 한 분을 예은이네 집에 보내면 어때?”반재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건 유이 네가 알아서 해.”진예은이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거절했다.“진짜 괜찮아. 우리 집은 작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걱정하지 마. 다음에 또 이렇게 몸이 아프게 되면 그땐 무조건 아주머니한테 얘기할게.”강유이가 뭐라 말을 하려는데 반재언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됐어. 싫다고 하는 사람한테 강요할 수는 없어.”그러더니
클랙슨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하나 둘 그들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녀가 한 말까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운전석에 앉아있던 반재신은 달랐다.그녀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어버렸다.“진예은.”반재신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더니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너 지금 나한테 욕했어?”미처 도망치지 못한 그녀가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이거 놔!”반재신이 그녀의 턱을 잡고 고정시켰다.“다시 한번 욕해보지 그래?”그의 말투에서 위협이 느껴졌다.진예은이 저항을 포기하고 피식 비웃었다.“왜? 혹시 방금 내 행동 때문에 화가 났다고 또 날 때리려고?”반재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언제 너를 때렸다고…”순간,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확실히 지난번 그는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를 때리지는 않았다.“도련님한테 그런 일쯤은 큰일도 아니겠지.”진예은이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아픈 손목을 문질렀다.“별다른 용건 없으면 나 먼저 갈게. 도련님의 눈을 그만 괴롭히고 이만 꺼져주지.”그녀가 막 가려는데 반재신이 팔을 쭉 뻗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데려다줄게.”진예은이 그대로 멈춰 섰다. 그녀의 표정이 괴이하게 이그러지더니 고개를 돌려 반재신을 돌아보았다.“너… 뭐 잘못 먹었어?”그가 차 문을 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네가 이대로 가서 길바닥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 동생이 걱정할 거야. 그 꼴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니까, 타.”진예은이 몇 초간 침묵하다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그를 슬쩍 밀어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럼 신세 좀 질게.”그녀는 전혀 사양하지 않았다.가는 동안 진예은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그가 속력을 많이 줄였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의 그는 그날 밤처럼 그렇게 거칠게 운전하지 않았다. 만약 저 얼굴과 까칠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다른
“진연서!”진예은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기억이라는 게 생성되었을 때부터 아이의 곁에는 부모가 없었다.때문에 연서는 보는 사람마다 아빠라고 불렀다.결국 진예은이 돌아서서 반재신한테 해명했다.“연서가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고 아무 말이나 막 해. 미안한데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너그럽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그럼 조심히 돌아가.”그녀가 연서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연서가 손을 뻗어 반재신의 옷을 잡아당겼다. 아무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도우미 아주머니까지 깜짝 놀라 서둘러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연서야, 그러면 안 돼.”진예은 역시 연서의 돌발행동에 아이를 제지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반재신은 오히려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안아들었다.그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너…”반재신이 연서를 품에 안았다. 더욱 놀라운 건 아이를 안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처음 아이를 안아보는 게 아니었다. 연서는 그의 품에서 울기는커녕 까르르 웃으며 기뻐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장난까지 쳤다.반재신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처음 안아보는 것도 아니었다. 구천광의 딸도, 삼촌의 아들도 다 안아봤던 그였다.아이의 몸은 보들보들했고 향긋한 우유 향이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어렸을 때가 가장 귀여웠다.진예은은 신세계를 본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만하고 도도한 반재신이 적극적으로 낯선 아이를 품에 안다니.언제나 냉기가 뚝뚝 흐르던 그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드럽게 풀어져있었다.곁에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마저도 그 모습을 훈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연서가 도련님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네요.”진예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연서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아이는 강유이가 왔을 때에도 잔뜩 겁을 먹고 낯설어했었다. 그런데 하필 반재신이 왔을 때에는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하다니.설마 반재신이 남자라서
강유이가 입술을 꼭 깨물더니 곧바로 털어놓았다.“둘째 오빠 생각하고 있었어. 둘째 오빠 왠지 수상하단 말이야.”반재언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재신이 일은 네가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그때, 강유이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진예은한테서 온 문자였다. 고개를 숙이고 문자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어찌나 놀랐는지 젓가락을 다 떨어트렸다.반재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강유이는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둘째 오빠가 예은이 집에서 밥을 먹는대. 지금 이거 내가 아는 반재신 맞아?”둘째 오빠 몸속에 다른 영혼이 깃든 게 분명했다.강유이한테 문자를 보낸 후 진예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휴대전화를 넣고 반재신을 바라보았다.연서는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그가 떠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있었다. 반재신은 아이한테 밥을 먹이는 내내 전혀 귀찮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연서가 입 주위 가득 밥알을 묻히고 먹어도 반재신은 티슈로 아이의 입을 정성 들여 닦아줄 뿐이었다.그 모습이 너무나 기이한 한편, 어쩐지 따뜻해 보이기도 했다.“도련님 먼저 식사하세요. 연서는 제가 돌볼게요.”아주머니가 다가가 연서를 안아들고 위층으로 향했다.연서는 배가 불렀는지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고 아주머니의 어깨에 기대어 얌전히 있었다.이제 거실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진예은이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아이를 안아본 경험이 있는 거야?”반재신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답했다.“그게 뭐 어렵다고. 한 번 보면 바로 알지.”진예은이 할 말을 잃었다.지금 저 자식이 자신은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건가? 본인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해서 한번 보면 바로 안다 뭐 이런 건가?역시 그와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그녀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이제 밥도 얻어먹었잖아. 다 먹었으면 빨리 돌아가.”반재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지금 손님을 쫓아내는 거야?”“네가 손님
반재신이 컵에 담긴 커피를 힐끗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나 인스턴트 안 마셔.”“정말 미안하게 됐어. 우리 집엔 인스턴트밖에 없어서 말이야.”그녀가 이를 악물고 웃었다.그때 과일을 들고 다가오던 아주머니가 하필 방금 그녀의 말을 듣게 되었다. 아주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서랍에 제가 금방 사 온 원두 있어요.”진예은이 말을 잇지 못했다.반재신이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진예은 씨,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이게 뭡니까?”아주머니는 그가 화가 난 줄 알고 서둘러 해명했다.“도련님, 아가씨 탓이 아니에요. 제가 미처 아가씨한테 새 원두를 사 왔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제가 당장 한 잔 내려드릴게요.”아주머니를 돌아보는 반재신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웠다.“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주머니께서는 가서 볼 일 보세요.”가사도우미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그가 포크를 들고 과일을 콕 집어 맛본 후,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진예은을 힐끗 바라보았다.“아주머니를 봐서 더 이상 따지지 않을게.”“다행이야. 그럼 그거 먹고 꺼져.”진예은이 몸을 휙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던 반재신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과일 접시를 멀찍이 밀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정원 밖에서 점점 멀어지는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진예은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혀보았다. 정원에 주차해두었던 차가 드디어 사라진 걸 확인하고 커튼을 닫아버렸다.연서가 자기 키만큼 큰 곰인형을 안고 문 앞에 나타났다.“고모, 아빠는?”진예은이 아이한테 다가가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웅크려 앉았다. 그녀가 아이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연서야, 아까 그 사람은 네 아빠가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함부로 불러서는 안돼. 알았지?”연서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아직 부모에 대한 인식이 없는 아이는 온전한 가족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크게 되면
...한동안 세간을 뜨겁게 달구던 류씨 가문의 일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조용해졌다.한태군 납치 실종 사건도 그가 다시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명되었다. 언론에서는 그가 H 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었다.한태군이 윌리엄을 만나러 바이에브 궁전에 도착했다.서재로 들어서자 윌리엄이 붓을 들고 서예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동양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류씨 가문의 일은 네가 손을 쓴 것이냐?”류씨 가문의 갑작스러운 변고 소식을 들은 윌리엄은 한태군이 H 국에서 실종된 것이 그저 연극일 뿐이라는 것을 진작 예상했다.한태군이 책상 앞으로 걸어가 그를 대신해 먹을 갈았다.“손을 썼다기 보다 그저 류성훈 부회장님한테 기회를 제공해 드렸을 뿐입니다.”윌리엄이 고개를 들고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넌 계속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을 하는구나.”그가 웃으며 말했다.“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할아버지.”“난 사실 네가 홀로서기를 못할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내 걱정이 지나친 거였어.”윌리엄이 붓을 내려놓더니 자신이 쓴 글을 바라보았다.“확실히 이번 일로 난 널 괄목하게 되었다.”H 국에서 류씨 가문의 지위는 왕족의 후예와 비슷했다. 그런데 한태군이 불쑥 나타나 한차례 휘젓고 나니 순식간에 가문의 주인이 바뀌어 버렸다.이번 일에 반씨 가문이 나선다고 해도 위치가 H 국인만큼 어느 정도의 시간과 정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태군은 그 어떤 세력의 힘도 빌리지 않았고, 심지어 본인의 힘도 덜 쓰면서 류씨 가문의 판도를 뒤엎었다. 그는 가문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게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다시 말해 손에 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손쉽게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한태군이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손자병법 모공편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지만, 상대방을 모르고 자기를 알면 1승 1패가 됩니다. 또한 상대방도 모르고 자기도 모른다면 그 결과는 무조건 패하게 될 겁니다.”윌리엄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에게 반문했다.“
진찬이 사살당한 후, 레이린 정도 종적을 감췄다. 그들은 레이린 정이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한 계속하여 그녀의 행방을 찾을 것이다.전유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저 사람들은 어떻게 도련님께서 레이린 정 씨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걸까요?”한태군이 차분한 표정으로 천천히 앞을 바라보았다.“누가 알겠습니까. 아마 감시망을 빠져나간 물고기가 있나 봅니다.”커피숍 바깥에 줄지어 서 있던 초록색 단풍나무는 어느새 옅은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더니 창가 자리에 앉았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도대체 당신이 누군데 날 도와줄 수 있다는 거죠?”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류하리 씨는 그저 제가 당신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류하리가 냉소를 지었다.“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는데요.”“제가 한태군한테 원한이 있거든요.”류하리가 멈칫거리더니 테이블 아래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남자를 경계하며 말했다.“그쪽이 한태군한테 원한이 있는 건 그쪽 사정이죠. 난 그쪽이 누군지 모르고, 믿지도 않아요.”그녀가 발을 빼려 하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류하리 씨는 억울하지도 않나요? 사실 이번 류씨 가문의 일은 한태군 때문에 벌어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남자의 말은 류하리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확실히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류씨 가문의 변고는 그녀의 계획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녀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앞날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꼴이 되었다.이 모든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현실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때문에 마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서러움이 남아있었다.한참 동안 속으로 이것저것 재보던 그녀가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요?”남자가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정씨 가문의 일에 대해 알고 있나요?”류하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