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걸음을 멈췄다.“위험한 거야?”“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 줘.”한태군은 덧붙였다.“무사히 돌아가겠다고 약속할게.”통화를 마치고 강유이는 휴대폰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한태군의 목소리를 듣는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유이야!”진예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강유이가 몸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왜 이렇게 늦었어?”진예은이 가방을 정리하며 대답했다.“노트북을 까먹고 안챙겨서 다시 돌아갔었어.”그녀는 뭔가가 생각 난 듯 고개를 들고 강유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입을 열려던 그때 한태군의 부탁이 떠올라 강유이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핑곗거리를 생각해 냈다.“골탕먹은 류하리의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기분이 좋아.”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결백을 증명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오빠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 난 무사하다고 믿어.”강유이의 웃음이 한결 밝아졌다. “응. 나도 믿어.”“...”갑작스런 그녀의 태도에 당황스러웠지만 진예은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한태군이 실종된 지 오일 째 되었던 날, 류성훈은 의미심장한 메일을 하나 받았다. 버튼을 누른 그는 가슴이 떨렸다.동영상 속에는 머리에 검은 물체를 뒤집어쓰고 묶여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태군이 자신을 만났을 때 입었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그의 앞에는 방탄복을 차림에 원숭이탈을 쓰고 두 손에 총자루를 쥔 사람이 목에 음성변조 장치를 끼고 있었다.“부회장님, 동영상이 이미 당신의 손에 들어갔다고 믿습니다. 만약 이 한씨 가문의 도련님이 H 국에서 살해당하면 부회장님도, 류씨 가문도 처지가 곤란해지겠죠?”“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품고 있는 악감정은 류씨가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의 형, 류강준이니깐요. 그가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는 당신도 잘 알 테죠. 제 요구는 당신이 국민 앞에서 그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일 점심 전으
아수라장이 된 바닥에 망가진 휴대폰도 있었다.류성훈은 목에 묶여 있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서 호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창가에 서서 깊은 심호흡을 했다.“웃기고 있네.”아버지는 한결같이 그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류강준의 명예 타령이었다. 그의 비서는 바닥을 조심스럽게 청소하고 물건들의 본래 위치를 찾아줬다.류성훈은 몸을 돌려 비서에게 지시했다.“이변을 불러. 지금 당장!”남강구, 산 중턱에 집들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길이 조금 가파르다.옥상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제각기 다른 키를 자랑하는 집들이 있고 저 멀리 바라보면 시 중심의 고층빌딩들이 보였다.옥상에 놓인 테이블을 마주하고 한태군이 여유롭게 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그는 면마 소재로 된 하얀색의 깨끗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조금 낡아 보이는 이 셔츠는 많이 씻은 탓에 실밥이 군데군데 삐져나와 있었다.평범하고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그의 귀공자 아우라는 숨길 수 없었다.그와 비슷한 또래의 한 소년이 맥주캔을 들고 다가와 앉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갓 지은 밥과 손수 무친 반찬들을 들고 왔다.“게으름 피우지 말고 친구를 잘 챙겨.”그는 미소를 지으며 한태군에게도 한마디 했다.“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주혁에게 말해.”한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주혁의 아버지가 자리를 뜨고 주혁이 맥주를 땄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너랑 같이 류씨 가문을 협박하다니. 난 정말 미친 것 같아.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겠지?”한태군이 실소를 터뜨렸다.“너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안심해.”주혁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그럼... 형, 해킹을 배우고 싶어. 그날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학 졸업하고 영국으로 와서 날 찾아. 그러면 내가 가르쳐줄게.”주혁이 심통 난 입술을 삐죽였다.분명 비슷한 또래인데 한태군은 자신보다 성숙하고 듬직해 보였다. 혹시 그는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
그는 류강준의 그림자 뒤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살았다.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류강준이 감형을 받는다면 그림자 뒤의 삶을 계속해야 했다.사람마다 마음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 악마는 처한 상황과 이익의 영향을 받아 고개를 든다.가문을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했지만, 모든 권력은 류강준이 독식했으니, 류성훈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항상 제일 가까운 사람 때문에 일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어둠이 드리운 밤, 류성훈은 서재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그는 형과 어린 시절에 함께 찍은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어릴때부터 그가 먼저 형에게 양보했고 형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둘은 꼭 붙어 다녀서 우애가 남다르다고 했지만, 그는 그저 형의 그림자일 뿐이었다.한참 후, 결단을 내린 듯한 그는 두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그는 라이터를 켜고 사진을 태웠다.불은 순식간에 사진을 집어삼켰다. 그가 손을 놓으니 재떨이에 떨어졌다. 그렇게 사진 속 그들의 미소는 재가 되었다.*류강준은 어제 오후에 경찰들이 외교부로 인계해 오늘 귀국하여 판결받게 된다. 소식을 접한 H 국의 기자들이 공항에 모였고 그 장면은 마치 스타를 영접하는 것 같았다.한태군과 주혁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대고 공항입구의 인파를 지켜보고 있었다.경위가 현장의 질서를 정리해 하나의 통로를 확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류강준이 공항에서 경찰에게 압송되었다.기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류강준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영국에 구속되어 있던 시간 동안 류강준은 많이 초췌해졌고 핼쑥해졌다.그는 기자들의 모든 질문을 무시하고 경찰을 따라 차에 올랐다. 하지만 기자들의 카메라를 누르는 셔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같은 시각, 류성훈은 류강준의 동생 신분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그도 기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잡혀 있었다.기자들의 물음은 모두 류강준에 대한 것이었다. 류성훈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형의 일은 빠른 시일내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류하리는 술잔에 따른 술을 한꺼번에 들이켜더니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말했다.“그분은 이 일로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어. 어찌 됐든 컨트롤이 어려운 반 씨 가문보다는 나야말로 그분이 생각하는 손자며느리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지.”비서는 그저 류하리가 안타까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H 국에서 신분 지위가 높은 류하리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 속에서 컸기에 늘 자신감이 넘쳤으며 단 한 번도 거절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게 무엇이든 부잣집 도련님들은 앞다투어 그녀에게 갖다 바쳤던 것이다.하지만 영국에서는 한태군 도련님에게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수모까지 겪었으니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오기가 생겨서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비서는 류하리의 성격에 젊은 시절의 회장님이 떠올랐으며 역시 부녀 두 사람이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한편, 한 씨 가문 저택.정연이 한태군 실종에 식음을 전폐하여 많이 야위었다는 소식에 강유이와 진예은이 걱정된 마음에 그녀를 찾아왔다.하지만 두 사람은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정연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야위기는커녕, 되려 통통하게 살이 올랐기에 전혀 식음을 전폐한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진예은과 눈이 마주친 강유이는 정연을 조심스럽게 불렀다.“아주머니.”“응?”울음소리를 멈추고 고개를 든 정연의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었다. 그 모습에 강유이가 괜히 난감했지만 모른 척하며 말을 걸었다.“아주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태군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걔가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데?”정연이 강유이를 쳐다보며 웃을 듯 말 듯 묻자 강유이가 순간 흠칫했고 곁에서 피식 웃음을 터트린 진예은이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태군 오빠는 모든 면에서 대단한 사람이죠. 절대 누군가의 잔꾀에 당할 사람이 아니에요.”그제야 두 사람의 숨은 뜻을 알아차린 강유이는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
“이모, 도대체 왜…”“이모도 사심이 있어서 그래. 이모가 지금까지 너에게 뭘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하지만 너도 류하리 일을 알고 있지? 네 외할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많고 살짝 노망이 나서 아무 관계도 없는 외부인을 손녀로 삼으려고 하고 있어. 예은아, 네가 할아버지의 진정한 외손녀잖아. 이모는 외할아버지가 널 받아들일 거라고 믿어.”정연은 류하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등에 업고 멋대로 설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고 명예와 이익에 욕심이 없는 진예은이 국왕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어찌 됐든 진예은은 진정한 외손녀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와 성격이 전혀 달랐기에 옛정이 넘쳐나는 국왕은 진예은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한참 동안이나 고민하던 진예은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이틀 뒤 부잣집 규수들의 다과 모임에 초대를 받은 류하리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드레스까지 맞춤 제작했으며 이 기회에 영국 규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그녀는 전에 퍼졌던 기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으며 류하리의 등장에 부잣집 규수들은 어이가 없었다.“저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생각을 했지?”“누가 저 여자를 초대한 거야?”강유이 사건에 반전이 일어난 뒤로부터 류하리는 규수들 사이에서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졌으며 전에 다정하게 인사하던 규수들도 지금은 못 본 척 그녀를 무시했다.이런저런 유언비어에 류하리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긴 했지만 최대한 미소를 유지하며 그녀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려고 했다.그러던 순간, 한 사람의 등장에 현장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강유이는 치마에 다이아몬드까지 박혀 있었으며 투톤으로 물든 드레스는 더욱 고급스럽고 화려해 보였다.그녀는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린 채, 공주 왕관까지 쓰고 있었으며 밝고 해맑은 모습은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부잣집 규수들이 강유이에게 우르르 몰려들어 인사를 하자 구석에 홀로 남겨진 류하리가 입술을 꽉 깨문 채
일반 명품 브랜드와는 달리 이 드레스는 황실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맞춤 제작 드레스였다.“한 씨 가문 저택에서 뵌 적이 있는 거 같네요.”류하리가 진예은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고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진예은을 쳐다보며 그녀와 한태군 관계를 추측하기 시작했다.이때, 류하리가 강유이를 힐끔 쳐다보면서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강유이 씨, 이 친구가 한태군 씨와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데요.”진예은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유이가 되려 당당하게 인정했다.“맞아요. 이분은 태군 오빠와 꽤 깊은 관계죠.”류하리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자 강유이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진예은을 소개했다.“여러분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분은 진예은이라고 합니다. 한태군 씨의 사촌 여동생이고 폐하의 외손녀입니다.”강유이가 외손녀를 강조하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외손녀에 진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눈앞의 이 여자는 진찬의 여동생인 것이다!흠칫하던 류하리는 치맛자락을 꽉 잡더니 이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소실이 낳은 아이네요.”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소실의 아이가 진 사모님이라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고 진 사모님의 아들이 진찬이며 정 씨 가문의 사위였다. 정 씨 가문이 무너진 뒤, 진찬은 레이린 정을 납치한 탓에 경찰들에게 사살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하지만 진찬에게 여동생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류하리의 비꼬는 듯한 말에 강유이가 팔짱을 끼며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황실과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외부인보다는 훨씬 낫죠. 그래도 예은이는 황실의 피가 흐르는데 류하리 씨는 뭐죠?”“제가 외부인이긴 해도 류 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죠. 이 점만으로도 소실이 나은 아이보다 낫잖아요. 더군다나 폐하께서 저 여자 신분을 인정한다고 하셨나요?”황실에서 인정하지도 않은 소실의 아이로 그녀를 짓누르려고 하다니. 류하리는 강유이의 수법이 너무도 허술한 것만 같았다.바로 이때, 강유이가 박수를 치며 말을 건넸다.
정연이 윌리엄에게 진예은을 보여준 그날, 윌리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다른 딸에게 아들 한 명만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윌리엄이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건, 정연 모녀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모자의 야심이 두려웠던 이유도 있었다. 진예은이 진 씨 가문에서 힘들게 살았고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소홀했다는 말에 윌리엄은 자신도 모르게 로라가 떠올랐다.한편, 국왕의 사과에 흠칫하던 진예은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있었고 윌리엄이 시선을 류하리에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네가 참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눈이 삐었던 거네. 오늘부터 넌 더 이상 우리 영국의 귀빈이 아니야. 네가 지내던 H 국으로 돌아가.”국왕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류하리를 H 국으로 내쫓았고 이는 류하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수모였다.어깨를 덜덜 떨던 류하리는 주위에 있던 규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한편, 차에 탄 윌리엄이 외손녀와 친해지기도 할 겸 진예은을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했지만 진예은이 조심스럽게 거절했다.서운한 표정을 짓던 윌리엄은 진예은이 아직 자신과 친해질 준비가 안 됐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강요를 하지 않았다.강유이와 진예은 두 사람과 잠시 대화를 나누던 정연은 윌리엄과 함께 떠났고 강유이는 그제야 통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드디어 류하리 그 여자를 내쫓았네.”“그 여자는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했어. 그래서 진 거야.”진예은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류하리는 늘 자신이 중심에 놓인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맞고 틀린 건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말에 맞추지 않고 호응하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틀린 사람이라고 여겼다.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고 과하게 예쁨을 받은 명문 가문의 규수들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거나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이때 뭔가 생각난 진예은이 강유이를 쳐다보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반 씨 가문에서 어떻게 너
큰 오빠는 둘째 오빠와 다르게 진예은에게 아무런 편견도 없다는 것을 강유이도 잘 알고 있기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진예은은 곁에서 말없이 웃기만 했다. 진예은도 반재언에 그녀에게 아무런 편견이 없다는 걸 알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녀가 반 씨 가문의 첫째 도련님에게 일부러 접근하려는 거라고 오해라도 한다면 그건 매우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가는 길 내내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중간에 앉은 진예은 앞에 마침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곳이었고 얇은 드레스에 어깨까지 노출한 그녀는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진예은이 손을 뻗어 바람 구를 위로 올리려던 순간, 반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사님, 에어컨 온도 좀 높여주세요.”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의 온도를 높였고 진예은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반재언을 쳐다보았다.그는 지금까지 잡지에 집중한 채, 한 번도 고개를 든 적이 없었기에 진예은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차가 신턴 빌라에 도착하고 나서야 기사가 아차 싶어서 입을 열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진예은 씨 댁에 먼저 갔어야 했는데 깜빡 잊었습니다.”“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예은이도 남아서 밥 먹고 나중에 집에 바래다주면 되지. 큰 오빠, 어때?”강유이가 말을 하며 반재언의 의견을 묻자 반재언은 잡지책을 닫으며 대답했다.“그래도 되지.”기분이 좋은 강유이가 차에서 내리며 진예은에게 말을 걸었다.“예은아, 우리 큰 오빠 요리 실력이 엄청 좋아.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볼 수 있는 사람이 많지가 않아. 오늘 너 운이 좋은 거야.”진예은의 팔짱을 끼고 빌라로 들어선 강유이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는 반재신을 발견했다.“둘째 오빠?”흠칫하던 강유이가 반재신을 부르자 반재신이 고개를 들었고 강유이 곁에 서있는 진예은을 잠시 쳐다보고 있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강유이는 자신이 진예은을 데리고 와서 반재신이 기분이 안 좋아진 거라고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