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야. 질린다고 해도 그건 내가 너한테 질리는 게 아니라 네가 나한테 질리는 거겠지.”성도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설아를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키스했다.사실 불안한 건 차설아만이 아니었다. 성도윤 역시 그녀보다 훨씬 더 불안했다.차설아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 그녀를 탐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한동안 다정하게 서로를 안아주었다.그러다 차설아가 살짝 머뭇거리며 말했다.“저기... 할 얘기가 있는데.”“뭔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굴고?”성도윤은 직감적으로 이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아니었으면 아까 배경윤도 그렇게 수상쩍은 태도를 보이진 않았겠지.’“서랍 열어봐요. 안에 있는 걸 보면 알게 될 거예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첫 임신도 아닌데 오히려 처음보다 더 긴장되고 떨리는 기분이었다.이번 아이는 온전한 사랑 속에서 태어난 생명이었다.그래서인지 그녀도, 그리고 성정엽도 이 아이의 존재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뭔데? 나 갑자기 긴장돼!”성도윤이 설레는 마음으로 서랍을 열었고 그 안에 놓인 두 줄이 선명한 테스트기를 보자마자 순간 얼어붙었다.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여보, 코로나 걸린 거야?”“뭐요?”“진작에 말했어야지! 지금 상태는 어때? 증상은?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성도윤이 심각한 얼굴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오늘따라 그녀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혹시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차설아는 순간 설렜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대신 성도윤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눈 똑바로 뜨고 다시 한번 봐봐요! 대체 뭔 테스트기인지!”말을 끝내자마자 홱 돌아누워 버렸다.‘그래, 이런 남자 앞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냥 빨리
“그럴 리가 없잖아!”성도윤이 차설아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다급하게 속삭였다.“쉿,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 아기가 듣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 같은 아빠 싫다고 하면 너무 억울하잖아.”“아직 눈으로도 안 보이는 작은 세포일 뿐인데 어떻게 그런 걸 들을 수 있겠어요.”차설아는 황당한 듯 웃으며 성도윤의 손을 치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한결 가벼워졌다.사실, 그녀가 아까 그런 질문을 한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현재 상황은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고 성도윤은 성대 그룹을 안정시키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거기다 두 아이까지 옆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니, 아무리 유모나 배경윤이 옆에서 도와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했다.이런 와중에 또 한 명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더 정신없이 바빠질지는 뻔했다.“나 진지해요. 만약 지금 우리가 아이를 키우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지금 정리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차설아가 성도윤의 품에 기대어 조용히 말했다.“아이를 가질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거고 나는 우리가 너무 정신없고 바쁘게 살길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한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이미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챙기느라 성도윤은 신경 쓸 일이 많았을 것이다.그런데 이제 임신까지 하게 되면 그가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감싸안으며 말했다.“왜 그렇게 생각해? 왜 이 아이가 우리 삶을 더 바쁘고 힘들게 만들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그는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나는 오히려 이 아이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얻었어. 사실 요즘 너무 지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는데 이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안 순간, 갑자기 살아갈 힘이 생기더라고. 내가 다시 싸울 이유가 생긴 것 같아.”“쳇, 무슨 싸울 이유에요. 그냥 부담되는 거잖아요...”차설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그가 늘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문제가 있으면 솔직하게 대화하는 게 엉뚱한 추측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현명했다.“별일 아니야.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쉬어.”성도윤은 속에 있는 불쾌한 감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꺼냈다가 서로 더 불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분명 뭔가 있어요. 빨리 말하죠.”차설아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끝까지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내가 말했잖아요. 우리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이렇게 밤을 보내는 건 원하지 않아요.”“그게...”성도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 ‘응어리’를 솔직히 털어놓지 않으면 차설아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그 자신도 결국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빨리 말해요. 그래야 같이 편히 잘 수 있죠!”차설아가 재촉했다.“알았어, 알았어. 말할게.”성도윤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또 할아버지가 성진이랑 단둘이 얘기했어. 그래서 내가 걔한테 도대체 무슨 얘기 했냐고 물었거든. 우리가 무슨 얘길 했을 것 같아?”“그룹의 경영권?”차설아가 단번에 알아챘다.“성진 씨가 줄곧 당신과 대립하는 이유가 그거잖아요? 하루하루 그렇게 싸워대는 것도 지겹지 않나 몰라요.”그녀는 최근 외출은 하지 않았지만 뉴스를 계속 들으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성진은 최근 회사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고 그 성과도 꽤 괜찮았다.그 덕에 성도윤의 그룹 내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겨우 시력을 되찾자마자 이렇게 거세게 나오는 걸 보면 아마도 실명 상태였을 때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온 힘을 다해 도윤씨와 맞서려고 하나보네...’이렇게 생각하니 차설아는 갑자기 성도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자신의 눈을 성진한테 준 건 곧 잠자던 맹수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이제 성도윤은 물론 성대 그룹 전체가 큰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아니.”성도윤이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에서야 알았어. 그가 노리고 있던 건 회사가 아니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그 사람... 완전히 미쳤어요.”왜인지 모르게 차설아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그 두근거림은 성진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오히려, 그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예상보다 훨씬 깊고 무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애초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오직 그녀가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도윤에게 골수와 각막을 이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차설아는 자신의 눈을 주고 가까스로 성진에게 진 빚을 갚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그가 성대 그룹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듣자 묘한 압박감이 몰려왔다.“말해줘. 두 사람 해외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그 반년 동안, 매일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혹시...”“없어요!”차설아는 성도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는 단호하게 그의 의심을 끊어버렸다.그리고 성도윤의 허리를 꼭 껴안았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더욱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사랑을 절대 의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내 마음속엔 당신 외의 남자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한 적 없어요. 만약 내 마음이 흔들렸다면, 애초에 도윤 씨랑 다시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예요.”“알아.”성도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너의 사랑이 단단하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어. 걔가 당신을 향한 사랑이 나 못지않다는걸. 그래서 좀 당황스러워. 겁이 나기도 하고.”만약 성진이 단순히 승부욕에 의해 자신을 이기려 했다면 성도윤은 오히려 마음 편히 그에게 져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성진도 그와 똑같이 차설아를 위해 성대 그룹을 포기할 수 있었다.그에게도 승패보다 더 중요한 건 차설아였다.성도윤이 두려운 것은, 언젠가 차설아가 자신이 아닌 성진의 사랑도 깊고 뜨겁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혹시라도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성도윤이 다급하게 말했다.“나랑 서은아는 남녀 간의 감정이 전혀 없어. 그냥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은 그 여자가 우리에게 했던 짓을 다 알게 된 이상 이제 우리 사이엔 친구로 돌아갈 가능성조차 없어.”“어라? 근데 당신 말투에서 왜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걸까요?”차설아가 일부러 말을 흐리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솔직히 말해봐요. 내가 해안시를 떠나 있던 동안, 도윤 씨랑 서은아 씨 같이 동거도 했었잖아요. 그래서 두 사람 어디까지 갔어요? 혹시 같이 잤어요? 솔직히 지금도 가끔 생각나서 아쉬운 거죠.”“맹세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어!”성도윤은 억울함에 몸부림치며 급히 맹세하는 자세를 취했다.“나랑 서은아가 했던 가장 친밀한 행동이란 게... 그냥 키스뿐이야. 그 외에는 단 한 번도 그런 관계를 가진 적 없어.”“한 번도요?”차설아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그때 둘이 꽤 다정해 보였는데, 결혼까지 할 계획이었다면 같이 자는 건 당연한 순서 아닌가?”그녀는 쿨하게 성도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그때 당신 기억을 잃은 거라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난 화 안 내요. 그냥 궁금할 뿐이니 솔직하게 말해 봐요.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만약 잔 거라면... 나랑은 뭐가 다르던가요?”“아니야! 맙소사, 정말 아니라고!”성도윤은 갑자기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쓴 듯 다급졌고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그는 절박한 얼굴로 변명했다.“제발 좀 믿어 줘, 진짜야! 난 서은아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 아예 내 뼛속 깊이 그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수준이라고! 잘 생각해 봐. 어떤 남자가 자기 ‘절친’한테 흥미를 느끼겠어? 설마 내가 진짜로 서은아랑 잤다면, 당신한테 숨길 것 같아? 하지만 난 안 그랬어. 그러니까 억울하게 누명 씌우지 말라고!”“웃기시네. 세상에 그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까지 가진 여자를 그냥 ‘절친’으로 볼 수 있는
어젯밤, 진심을 터놓고 대화한 후 성도윤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응어리도 깨끗이 풀리고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다음 날 아침, 그는 바로 지역에서 가장 좋은 사립 산부인과 병원에 예약을 잡고 차설아가 종합적인 산전 검진을 받게 하기로 했다.하지만 차설아는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영 기운이 없어 보였고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듯했다.“왜 그래?”성도윤이 그녀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감지하고 다정하게 물었다.“내가 이제 겨우 임신 초기인데 이렇게 빨리 병원에 가서 검사받는 게 너무 이른 거 아닐까 해서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르다고?”성도윤이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보통 임신을 확인하면 바로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일반적이지 않아? 사실 난 어젯밤에도 바로 전문가 진료를 예약해야 했다고 생각했어.”“아무래도 너무 성급한 것 같아요... 그냥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때요?”차설아는 손을 내밀어 햇빛이 손바닥에 닿는 걸 느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오늘 날씨도 좋은데 우리 그냥 병원 가지 말고 정원에 가서 햇볕 좀 쬘까요?”성도윤이 창밖을 보았다. 정말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지만 차설아가 검진을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도 느껴졌다.그는 차설아의 손을 살며시 잡고 부드럽게 물었다.“솔직히 말해 줘. 뭐 걱정되는 거 있어? 아니면, 혹시 말하기 어려운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하아... 역시 눈치챘네요.”차설아가 멋쩍게 웃으며 성도윤 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리고 살짝 풀이 죽은 듯 말했다.“내가 지금 이런 상태로 밖에 나가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말하면 도윤 씨한테 창피 줄까 봐 걱정돼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적인 감정이 서려 있었다.그동안 차설아는 여러 번 상처를 입었다.슈퍼에서 아이에게 모욕당하고 악성 팬들에게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그 일들로 인해 그녀의 자존심과 자신감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그러니까, 지금 차설아가 검진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게 너무
성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문득 차설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머릿속이 환하게 트이는 느낌이었다.그는 차설아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나는 언제나 당신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야.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모든 걸 내려놓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되고 다시 일어서고 싶다면 그렇게 해. 사람들을 만나기 싫으면 안 만나면 되고 평생 집에 있고 싶다면 나도 평생 같이 있어 줄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돼. 별일 아니야.”“고마워요, 도윤 씨.”차설아는 성도윤의 품에 기대어 눈시울이 붉어졌다.지금껏 행복한 순간도 많았고, 성취감에 벅찬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야 그녀는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그 행복은 높은 지위도, 많은 재산도 아니었다. 그저 안정적이고, 따뜻하고 든든한 사람과 같이 사는 게, 그게 진짜 행복이었다.“하지만 나가는 게 싫어도 검사는 꼭 받아야 해. 당신뿐만 아니라 뱃속에 있는 우리 아이도 소홀히 할 수 없지.”성도윤은 그렇게 말하며 이미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차설아의 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신경 쓰지 마.”그날, 차설아는 뒷마당에 있는 흔들의자에 누워 여유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그러던 중, 최첨단 장비를 갖춘 전문 산부인과 의료진이 저택으로 직접 찾아왔다.성도윤은 큰돈을 들여 저택의 한 방을 개조해 병원급 수준의 산부인과 검사실을 만들었다.그곳의 의료 장비는 전문 병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게다가, 검사를 맡은 주치의는 그야말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돈과 인맥을 아무리 동원해도 쉽게 모실 수 없는 권력층조차 함부로 데려올 수 없는 명의였다.성도윤이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는 한낮이었다. 햇볕은 따스하게 내리쬐었고 몸을 감싸는 포근함 속에서 차설아는 거의 잠이 들 뻔했다.“여보, 의사 선생님이 오셨어. 우리 검사받으러 갈까?”성도윤이 차설아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