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신했다고?”성도윤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마침 다시 따져 물으려던 참이었다.“원아!”이때 선우시원이 다가오며 원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가요!”원이는 선우시원을 보자마자 바로 웃음꽃을 피우며 달려갔다. 성도윤은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엄마가 말했었잖아. 나쁜 사람이랑 말도 섞지 말고 멀리 도망치라고.”선우시원은 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도발하듯 성도윤을 보았다.그는 차설아에게 전해 들었었다. 성도윤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두 아이의 기억도 있다고. 그래서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설아는 전에 그에게 부탁했었다. 원이와 달이의 아빠인 척해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부자처럼 보이게 행동했다.성도윤은 역시나 오해하고 있었고 눈빛이 점차 차가워졌다.“차설아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도 멀리 도망쳤을 거예요. 꼬마보다 오히려 제가 더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요.”말을 마친 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정원을 떠났다.원래 그도 이렇게 딱딱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원이가 차설아와 선우시원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면서 이상하게도 짜증이 치밀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그런 성도윤의 뒷모습을 보던 원이는 고개를 저었다.“역시 엄마가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건 옳은 선택이었네요. 분노조절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머리까지 다쳤잖아요. 너무 멍청해요. 절대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거예요.”“풉, 푸하하!”선우시원은 인생 절반쯤 살아본 어른처럼 말하는 원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원아, 넌 그런 말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니? 넌 웬만한 여자들보다 남자 고르는 안목이 좋은... 아니지, 네 엄마보다 남자 보는 눈이 좋네.”“당연하죠!”원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제 마음에 든 남자는 경수 아빠 한 명뿐이에요. 아저씨도 흠... 조금 부족하네요.”“뭐?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선우시원은 자신도 원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원이는 곧 자신의 함정에 걸려들 것 같은 선우시원의 모습에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해주지 않았다.“우리 엄마를 그렇게 사랑한다면서요. 그럼 우리 엄마에 대해서도 잘 알 텐데 한번 맞춰보시는 건 어때요?”“맞춰보라고?”선우시원은 턱을 매만졌다. 그는 아주 협조적으로 골똘히 생각했다.“네 엄마가 지금 제일 부족한 건 분명 나처럼 훌륭한 남자의 진심일 거야. 다행히 지금 내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네 엄마가 느끼는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겠군.”“우엑!”원이는 그의 느끼함에 결국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하는 모습을 보이며 반박했다.“아저씨가 이렇게 느끼한 사람일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네요. 어쩐지 우리 엄마가 아저씨를 왜 안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 말만 진심이라고 하지 이건 그냥 헛소리하는 거잖아요. 행동으로 보여줘야 진심을 느낄 수 있는 거죠.”“하하, 어린 녀석이 헛소리라는 단어도 알아?”“당연하죠. 헛소리는 실속이 없는 말이잖아요. 설마 그것도 모르는 거예요?”원이가 정곡을 찔렀다.“아저씨, 그래서 진심을 보여줄 건가요, 안 보여줄 건가요?”“하하하, 됐어. 그만 말을 빙빙 돌리고 얼른 말해.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선우시원은 원이의 말과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이 그를 쥐락펴락하면서 또 말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음... 우리 엄마에게 부족한 건 사랑이 아니에요. 돈이죠.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잖아요. 아저씨네 집에 돈이 많잖아요. 그걸 우리 엄마한테 조금 나눠주시면 안 돼요? 2000억은 좀 적은 것 같고, 2조는 좀 많은 것 같네요.”원이는 더는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커서 분명 사업 잘하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다만 원이의 생각은 간단했다.차설아에게 아주 많은 돈이 생긴다면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과 달이의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너, 여기서 나
“뭐? 커다란 지갑?”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들어오세요. 지갑 아저씨.”원이는 등 뒤에 있던 선우시원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더니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엄마, 전 이미 시원 아저씨랑 상의했어요. 아저씨는 앞으로 헛소리만 하지 않고 엄마한테 돈을 주겠대요. 몇천억씩 말이에요. 엄마는 그냥 원하는 만큼 말씀하시면 돼요. 앞으로 힘들게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뭐?”차설아는 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이가 한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선우시원이 차설아의 곁으로 다가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원이 말이 맞아. 그동안 난 너한테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그러니 나한테 기회를 줘. 내가 진심을 보여줄 기회. 이따가 계좌 알려주면 돈 보내줄게. 어차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돈 말고 없는 것 같으니까.”차설아의 안색이 굳어지고 손을 들어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두 사람 장난 그만해.”“장난 아니야. 난 정말로 당신한테 돈을 주고 싶어서 그래.”선우시원은 지금 이 순간 몸을 해부해서라도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 자리에서 당장 그녀의 계좌로 입금해주고 싶었다.차설아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어린아이가 한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지 마. 게다가 난 돈 필요하다고 한 적 없다고. 설령 정말로 필요하다고 해도 네 돈을 거저 받을 생각은 없어.”“내가 주겠다고. 너한테 돈을 주는 거로 난 기쁨을 느끼거든. 거저 받으라는 거 아니야. 난 너한테 기쁨을 돈으로 주고 사는 거라고. 거저 주는 거 아니야.”선우시원은 완벽한 논리로 차설아가 할 말을 잃게 했다.그녀는 다소 어이없기도 했다.“정말 미치겠네. 시원아,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지? 안 그러면 왜 갑자기 돈을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겠어?”선우시원이 말을 하기도 전에 다급해진 원이가 선우시원의 편을 들어주었다.“엄마, 시원 아저씨의 머리는 정상이에요. 머리가 비정상인 건 나쁜 아빠라고요. 저랑 달이 잊은 것도 모자라 엄마까지 잊었잖
선우시원은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며 조심하라고 했다.최근 선우 가문과 차씨 가문이 협력 관계를 달성했던지라 꽤나 많은 세력들이 뒤에서 몰래 그들을 공격하려는 게 보였다.경제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투자자가 갑자기 투자를 철회한다거나 제조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상회에서 찾아와 온갖 트집을 잡았다. 또 가끔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와 피해를 주곤 했다.선우시원이든 차설아든 그동안 많은 알지 못하는 세력에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이틀 전에도 차성철는 자신의 차 아래서 폭탄 유도 장치를 발견했고 시동을 걸 때 누군가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차성철은 행여나 차설아가 걱정하게 될까 봐 이 사실을 숨겼다.하지만 선우시원은 차설아가 이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난 이 갑작스러운 추락 사고가 누군가 뒤에서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해. 분명 우연이 아닐 거야!”선우시원은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알아. 그래서 조심하려고.”차설아는 선우시원의 입에서 들은 소식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나랑 오빠가 고작 며칠 안일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고 누군가 벌써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네.”“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미리 퇴원하는 건 어때? 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틈새로 숨어 손을 쓰기 쉬울 거야. 집이라면 여기보단 안전할 것 같은데.”선우시원이 차설아에게 제안했다.며칠 전 차성철도 그녀에게 예정보다 앞당겨 퇴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었다. 여러 방면을 고려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기에 퇴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퇴원하는 것이 그녀의 안전에도 좋을 것 같았다.“일단 생각은 해볼게!”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녀의 허리는 꽤나 회복되었다. 다만 미련이 남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해이해졌다고 생각했다.“내일. 내일 내가 퇴원할게.”차설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고 결정을 내렸다.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
다음날.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설아는 8시 30분부터 구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찍 도착한 건 물론 화장까지 정성껏 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풀어헤쳤던 머리카락마저 높게 묶어 백조처럼 길고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냈다.멀리서 보면 여신이 따로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시크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하지만 그날 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열이 살짝 난 탓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9시 정각이 되자, 은색 부가티 베이런이 지상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설아를 발견하자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꽤 적극적이네?”성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스쳐 지나가 기다란 다리로 접수창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별난 놈이야.’차설아는 듬직하면서도 어딘가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생각했다.‘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네! 자기도 급하게 가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이혼 신고는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었다. 사인하고 날인하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새로 도입된 법에 따르면 이혼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숙려기간이 있는데, 등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혼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서 아무나 접수증을 들고 와서 취소해도 돼요.”구청 직원은 말을 마치고 이혼 접수증 2부를 각각 나눠줬다.매일 매일 이혼을 접수하면서 울고불고 심지어 현장에서 싸우기는 별의별 상황을 다 접했지만, 이렇게 무덤덤하게 처리하는 부부는 처음 본다.게다가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단 말인가?차설아는 접수증을 건네받아 빼곡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있으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왜 없대? 만약 혼인 신고할 때 숙려기간이 있다면...”성도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리 당당하단 말이지?차설아는 모든 게 어이가 없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속세를 벗어난 선비처럼 남녀관계에 관심이 없고, 여자를 돌같이 볼 줄 알았는데 결국 소리소문없이 시한폭탄을 터뜨렸다.애인을 집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지다니?순간 정신이 번쩍 든 차설아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슬픔마저 말끔히 사라졌다.“그러니까 지금 불륜이란 말이지?”성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채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차설아 씨, 이게 다 제 탓이에요.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 해요!”이 여자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제대로 보여주네?“그래?”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뺨을 때릴 기세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임채원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 성도윤의 등 뒤로 쏙 숨었다.“자기한테 화풀이하라더니 왜 숨는데?”차설아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작작 좀 해, 난 나름 소양 있는 사람이라 내연녀와 개싸움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둘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데 방해하기는커녕 그 소원을 이뤄줘야 하지 않겠어?”“뭐... 뭐라고?”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임채원은 어리둥절했다. 몰래 준비한 ‘감성팔이’ 작전도 무용지물이 된 듯싶었다.보아하니 성도윤과 차설아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계약 부부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아니면 내연녀를 마주친 상황에서 대체 어떤 와이프가 이처럼 무심하고 관대할 수 있겠는가?이내 차설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다만 불륜인 만큼 이혼 합의서에 적힌 재산분할에 관한 내용을 다시 협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임채원은 차설아가 재산을 언급하자 조급한 나머지 가식을 떨기는커녕 한층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도윤이가 당신한테 800억에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까지 넘겨주지 않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줬다고 보는데? 게다가 그동안 도윤네 집에서 그쪽 집안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못 써.”차설아
선우시원은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며 조심하라고 했다.최근 선우 가문과 차씨 가문이 협력 관계를 달성했던지라 꽤나 많은 세력들이 뒤에서 몰래 그들을 공격하려는 게 보였다.경제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투자자가 갑자기 투자를 철회한다거나 제조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상회에서 찾아와 온갖 트집을 잡았다. 또 가끔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와 피해를 주곤 했다.선우시원이든 차설아든 그동안 많은 알지 못하는 세력에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이틀 전에도 차성철는 자신의 차 아래서 폭탄 유도 장치를 발견했고 시동을 걸 때 누군가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차성철은 행여나 차설아가 걱정하게 될까 봐 이 사실을 숨겼다.하지만 선우시원은 차설아가 이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난 이 갑작스러운 추락 사고가 누군가 뒤에서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해. 분명 우연이 아닐 거야!”선우시원은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알아. 그래서 조심하려고.”차설아는 선우시원의 입에서 들은 소식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나랑 오빠가 고작 며칠 안일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고 누군가 벌써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네.”“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미리 퇴원하는 건 어때? 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틈새로 숨어 손을 쓰기 쉬울 거야. 집이라면 여기보단 안전할 것 같은데.”선우시원이 차설아에게 제안했다.며칠 전 차성철도 그녀에게 예정보다 앞당겨 퇴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었다. 여러 방면을 고려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기에 퇴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퇴원하는 것이 그녀의 안전에도 좋을 것 같았다.“일단 생각은 해볼게!”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녀의 허리는 꽤나 회복되었다. 다만 미련이 남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해이해졌다고 생각했다.“내일. 내일 내가 퇴원할게.”차설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고 결정을 내렸다.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뭐? 커다란 지갑?”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들어오세요. 지갑 아저씨.”원이는 등 뒤에 있던 선우시원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더니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엄마, 전 이미 시원 아저씨랑 상의했어요. 아저씨는 앞으로 헛소리만 하지 않고 엄마한테 돈을 주겠대요. 몇천억씩 말이에요. 엄마는 그냥 원하는 만큼 말씀하시면 돼요. 앞으로 힘들게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뭐?”차설아는 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이가 한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선우시원이 차설아의 곁으로 다가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원이 말이 맞아. 그동안 난 너한테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그러니 나한테 기회를 줘. 내가 진심을 보여줄 기회. 이따가 계좌 알려주면 돈 보내줄게. 어차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돈 말고 없는 것 같으니까.”차설아의 안색이 굳어지고 손을 들어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두 사람 장난 그만해.”“장난 아니야. 난 정말로 당신한테 돈을 주고 싶어서 그래.”선우시원은 지금 이 순간 몸을 해부해서라도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 자리에서 당장 그녀의 계좌로 입금해주고 싶었다.차설아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어린아이가 한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지 마. 게다가 난 돈 필요하다고 한 적 없다고. 설령 정말로 필요하다고 해도 네 돈을 거저 받을 생각은 없어.”“내가 주겠다고. 너한테 돈을 주는 거로 난 기쁨을 느끼거든. 거저 받으라는 거 아니야. 난 너한테 기쁨을 돈으로 주고 사는 거라고. 거저 주는 거 아니야.”선우시원은 완벽한 논리로 차설아가 할 말을 잃게 했다.그녀는 다소 어이없기도 했다.“정말 미치겠네. 시원아,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지? 안 그러면 왜 갑자기 돈을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겠어?”선우시원이 말을 하기도 전에 다급해진 원이가 선우시원의 편을 들어주었다.“엄마, 시원 아저씨의 머리는 정상이에요. 머리가 비정상인 건 나쁜 아빠라고요. 저랑 달이 잊은 것도 모자라 엄마까지 잊었잖
원이는 곧 자신의 함정에 걸려들 것 같은 선우시원의 모습에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해주지 않았다.“우리 엄마를 그렇게 사랑한다면서요. 그럼 우리 엄마에 대해서도 잘 알 텐데 한번 맞춰보시는 건 어때요?”“맞춰보라고?”선우시원은 턱을 매만졌다. 그는 아주 협조적으로 골똘히 생각했다.“네 엄마가 지금 제일 부족한 건 분명 나처럼 훌륭한 남자의 진심일 거야. 다행히 지금 내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네 엄마가 느끼는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겠군.”“우엑!”원이는 그의 느끼함에 결국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하는 모습을 보이며 반박했다.“아저씨가 이렇게 느끼한 사람일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네요. 어쩐지 우리 엄마가 아저씨를 왜 안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 말만 진심이라고 하지 이건 그냥 헛소리하는 거잖아요. 행동으로 보여줘야 진심을 느낄 수 있는 거죠.”“하하, 어린 녀석이 헛소리라는 단어도 알아?”“당연하죠. 헛소리는 실속이 없는 말이잖아요. 설마 그것도 모르는 거예요?”원이가 정곡을 찔렀다.“아저씨, 그래서 진심을 보여줄 건가요, 안 보여줄 건가요?”“하하하, 됐어. 그만 말을 빙빙 돌리고 얼른 말해.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선우시원은 원이의 말과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이 그를 쥐락펴락하면서 또 말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음... 우리 엄마에게 부족한 건 사랑이 아니에요. 돈이죠.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잖아요. 아저씨네 집에 돈이 많잖아요. 그걸 우리 엄마한테 조금 나눠주시면 안 돼요? 2000억은 좀 적은 것 같고, 2조는 좀 많은 것 같네요.”원이는 더는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커서 분명 사업 잘하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다만 원이의 생각은 간단했다.차설아에게 아주 많은 돈이 생긴다면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과 달이의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더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너, 여기서 나
“내가 배신했다고?”성도윤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마침 다시 따져 물으려던 참이었다.“원아!”이때 선우시원이 다가오며 원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가요!”원이는 선우시원을 보자마자 바로 웃음꽃을 피우며 달려갔다. 성도윤은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엄마가 말했었잖아. 나쁜 사람이랑 말도 섞지 말고 멀리 도망치라고.”선우시원은 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도발하듯 성도윤을 보았다.그는 차설아에게 전해 들었었다. 성도윤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두 아이의 기억도 있다고. 그래서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설아는 전에 그에게 부탁했었다. 원이와 달이의 아빠인 척해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부자처럼 보이게 행동했다.성도윤은 역시나 오해하고 있었고 눈빛이 점차 차가워졌다.“차설아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도 멀리 도망쳤을 거예요. 꼬마보다 오히려 제가 더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요.”말을 마친 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정원을 떠났다.원래 그도 이렇게 딱딱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원이가 차설아와 선우시원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면서 이상하게도 짜증이 치밀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그런 성도윤의 뒷모습을 보던 원이는 고개를 저었다.“역시 엄마가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건 옳은 선택이었네요. 분노조절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머리까지 다쳤잖아요. 너무 멍청해요. 절대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거예요.”“풉, 푸하하!”선우시원은 인생 절반쯤 살아본 어른처럼 말하는 원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원아, 넌 그런 말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니? 넌 웬만한 여자들보다 남자 고르는 안목이 좋은... 아니지, 네 엄마보다 남자 보는 눈이 좋네.”“당연하죠!”원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제 마음에 든 남자는 경수 아빠 한 명뿐이에요. 아저씨도 흠... 조금 부족하네요.”“뭐?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선우시원은 자신도 원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원이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이 아닌 속으로 ‘나쁜 아빠'라고 욕하고 있던 성도윤이었다.‘음, 지금 보니까 전처럼 나빠... 보이는 건 아닌 것 같기도?'“왜 대답이 없어?”성도윤은 원이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그리고 제 딴에는 예민한 통찰력으로 분석하며 말했다.“아, 알겠다. 말을 못 하는구나?”원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무시해버렸다.‘보아하니 이 아빠는 머리가 확실히 이상한 것 같네. 수술이 필요한 상태야. 누가 봐도 난 지금 다섯 살 어린이인데 어떻게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지?!'“말을 못 하는 거면 더 혼자 돌아다녀서는 안 되지. 부모님이 걱정하시잖아...”성도윤은 원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조금 강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거기 위험하니까 이리와.”원이는 성도윤을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땅에 떨어진 꽃을 주웠다.“아휴, 불쌍하네. 말을 할 줄 못할 뿐 아니라 자폐증 증상까지 있나 보네... 안타깝네. 귀엽게 생겼는데.”성도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동정 어린 시선으로 원이를 보았다.그는 평소에 찬 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으나 가끔 마음 약해질 때도 있었다. 특히 어린 아이나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을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다가가게 되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성도윤은 갑자기 자신의 신세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차설아는 이미 자식이 둘이나 있었는데 곧 서른을 바라보는 자신에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혹시 내가 무서운 거니?”성도윤은 원래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 정원에 남아 있는 것이 걱정되어 인내심 있게 계속 원이와 소통을 시도했다.“아저씨랑 같이 가자. 아저씨가 네 부모님 찾아줄게.”원이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한 송이씩 주운 후 다시 하나의 꽃다발로 묶었다. 아이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힘들었는지 호흡도 조금 거칠어졌다.성도윤이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는 모습에 원이는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정말로 기억을 잃으신
원이는 매번 차설아를 보러 올 때 항상 이 커다란 정원을 지나치게 된다.아이는 커다란 정원에 핀 예쁜 꽃들을 보며 전부터 생각했었다. 하나를 꺾어 차설아에게 선물하리라고.차설아가 예쁜 꽃이나 풍경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원이는 매번 예쁜 것을 볼 때마다 차설아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니던가.꽃을 받은 차설아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정원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었고 종류도 다양했다.커다란 장미는 붉게 피어있었고 진한 향기를 내는 커다란 작약꽃도 있어 보기만 해도 아름다움에 넋 놓게 되었다.원이는 여러 품종의 꽃을 하나씩 꺾어 예쁜 꽃다발을 만들었다. 종류가 다양했던지라 아이가 만든 꽃다발은 알록달록했고 전부 차설아에게 줄 것이었다.아직 작았던 아이는 정원에 핀 꽃들에 몸이 쏙 가려지게 되었고 멀리서 보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꽃다발을 만들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다가온 사람이 싸우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고 누군가 통화하며 싸우는 것 같았다.“난 몰라요. 어쨌든 이 수술 절대 못 하게 막아야 해요.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으니까 어떻게든 박성훈이 병원으로 오는 걸 막아요!”“사람 하나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비행기 사고나 교통사고로 위장하면 되잖아요!”“그 사람이 바다낚시를 좋아한다면서요. 그럼 바다에 빠지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어쨌든 자꾸 쓸데없는 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말아요. 난 과정 따윈 필요 없고 결과만 바라는 거니까.”우연히 듣고 있던 원이는 꽃다발 만들던 작은 손이 멈추었다.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했기 때문이다.꼭 뭔가 나쁜 짓을 꾸미는 것 같았다.정원에 와서 통화를 한 사람은 서은아였다. 그녀는 정원에 있는 원이를 발견하지 못한 채 계속 전화기 너머의 상대와 말다툼을 벌였다.“성도윤이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요. 그런 사람이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어요... 어쨌든 성도
간호사는 차설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없었어요.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착각이었으면 좋겠네요.”그날 저녁, 민이 이모가 원이와 달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요?”원이는 마음이 아주 따듯한 남자아이였다.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차설아의 손을 잡더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귀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응, 엄마 많이 괜찮아졌어. 며칠만 더 있으면 엄마는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차설아도 원이의 볼을 만졌다.보드랍고 통통한 아이의 볼살을 만지니 아프던 것도 전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약보다 더 효과가 강력했다.달이는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분홍색 멜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차설아에게 토마토를 건넸다.“엄마, 이건 달이가 어린이집에서 심은 토마토에요. 하나만 익어서 엄마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거 먹고 얼른 나아야 해요.”“하나만 익었는데 엄마 주려고 가져온 거야? 우리 달이는 안 먹었어?”차설아는 달이가 들고 있는 토마토를 보았다. 달이는 토마토를 세상에서 아주 귀한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 들고 있었다. 너무도 행복했다.“달이는 안 먹어도 돼요. 맛있는 건 엄마한테 드릴 거예요. 이 토마토는 달이가 매일 물도 주고 쑥쑥 자라는 거 지켜본 거예요. 마법 토마토니까 분명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 거예요!”달이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달이가 이 토마토를 얼마나 정성을 들여 키웠는지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 아이는 분명 이 토마토에 마법처럼 신기한 힘이 깃들어 어떤 병이던 다 낫게 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차설아는 당연히 그런 아이의 마음을 짓밟을 생각이 없었기에 토마토를 받아들고 입안에 쏙 넣었다.“음, 이 토마토 아주 달구나. 엄마가 먹어본 토마토 중에 세상에서 제일 달아. 게다가 먹고 나니까 몸도 가뿐해지고 아픈 곳이 없는 것 같네... 세상에, 설마 우리 달리 마법사였어? 그래서 마법 토마토를 심을 수
“맞아. 곧 서른이라니. 나랑 설아는 영원한 낭랑 18세라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소녀야. 이제 알겠어?”배경윤도 전투태세를 보였다. 차설아와 함께 나이 공격하는 차성철을 공격할 생각이었다.차성철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바로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그래, 그래. 내가 잘 못 했네. 너희들은 아직도 어린 소녀였지. 그래, 영원히 낭랑 18세야. 적어도 내 눈엔 너희 둘은 18세... 아니지, 18세도 생각해보니 너무 많네. 세 살이랑 다섯 살이 어울리네.”배경윤은 눈을 깜빡이며 헤실 웃었다.“누가 세 살이고, 누가 다섯 살인데?”차설아와 차성철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차성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걸 물어봐야 아나? 뻔히 보이잖아.”“하, 말하고 나니 나도 좀 걱정되네. 촬영하면서 누가 널 괴롭히면 어떡해?”“날 괴롭힌다고?”배경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내가 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지.”“그럼 됐어. 어쨌든 내가 전에 가르쳐준 호신술 잊지 않았지? 틈만 나면 연습해둬. 적어도 네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차설아는 그럼에도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모습은 꼭 아이를 학교에 처음 혼자 보내고 불안해하는 엄마의 모습 같았다.“걱정하지 마. 난 그냥 촬영하러 가는 것뿐이야.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닌데 괜찮을 거야.”배경윤과 차설아는 대화를 조금 더 나누었다. 결국 배경윤은 아쉬움이 가득 남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병실에 남은 건 차설아와 차성철이었다.차성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말했다.“동생아,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오늘 이렇게 온 건 나도 너한테 작별인사하려고 온 거야.”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오빠는 어디 가는데?”“지난번에 말했다시피 장재혁이 행방불명된 상태라서 내가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거든.”차성철은 계속 장재혁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었다. 비록 장재혁이 이미 바다에 던져졌을 확률이 높았지만 죽었다고 해도 그는 시체
사도현의 갑작스러운 출연으로 배경윤은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출연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진찬영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도망치고 싶어요? 원한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그러고는 싶은데 여기서 제가 도망치면 감독님이 절 가만두지 않으실 것 같네요. 게다가...”배경윤은 소녀처럼 수줍어하면서 말을 이었다.“전 찬영 오빠랑 같이 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그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출연자들이 많았고 식탁에 젓가락 한 쌍 더 올려놓는 것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하하하, 찬영 오빠가 이렇게 쿨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고 즐거운 분위기가 옆에 있던 출연자에게도 전해졌다.사도현은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당연히 두 사람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심드렁했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조금 어두운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큼큼, 두 사람. 벌써 서로 귓속말하는 사이가 된 거예요?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남은 건 촬영하면서 하는 건 어때요. 일단 계약서에 사인부터 하자고요.”장윤태는 이미 진찬영과 배경윤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부터 촬영하면서 두 사람을 엮어줄 생각이었다.그러나 그가 엮어주기도 전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다정했기에 장윤태는 너무도 기뻤다. 다만 아쉽게도... 갑자기 나타난 사도현 때문에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배경윤과 진찬영은 출연 동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촬영은 사흘 뒤부터 시작한다고 했다.촬영장으로 떠나기 전 배경윤은 차설아와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설아, 나 아마도 한동안은 너랑 만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그동안 꼭 밥 잘 챙겨 먹고 나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그녀는 차설아의 손을 꼭 잡았다.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고 여전히 손을 놓기 아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