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그날 문지상이 간민혜의 죽음을 두고 강한서에게 했던 말이었다.“주씨 집안 사람들이 한 짓이죠, 그렇죠?”그리고 주강운을 언급하며,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죽은 사람이 그 녀석이 아니죠?”문지상은 주강운, 나아가 주씨 집안 전체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강운은 문지상을 전혀 몰랐다.그렇다면 문지상의 분노는 간민혜와 관련된 어떤 사건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강한서는 그동안 이 일의 전말을 수없이 되짚어봤지만, 이 부분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았다.그래서 사건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겼다. 그날의 교통사고로 인해 차량에 있던 모든 녹음 파일이 전부 소실되었다. 차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간민혜가 위독했던 순간, 그녀는 강한서에게 문지상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 주강운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어떤 상황이었길래 사랑했던 연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상대에게 한마디조차 남기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강한서는 한현진과 이별의 위기를 겪었을 때, 오직 그녀가 살아남기를,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온 마음을 다했다. 그 많은 사랑을 표현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질 만큼.하지만 간민혜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여전히 말할 힘이 있었음에도 주강운에 대해선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어렴풋이 간민혜가 주강운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녀는 삶의 끝자락에서도 그에게 단 한 마디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강한서가 말했다.“둘이 헤어졌을 때는 감정이 가장 좋았을 때였어. 헤어지기 한 달 전만 해도 강운이는 나한테 약혼반지가 너무 비싸면 간민혜가 안 받을까 봐 두렵다고 말했고, 간민혜는 나한테 강운이 건강 상태를 계속 물어보며 걱정했지. 그런데 주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에, 무시당하고 모욕당한 후로는 완전히 떠났어.”한현진은 찡그리며 말했다.“그 때문이라고? 그런데 당신이 전
강한서가 주강운을 잘 아는 만큼, 그는 단기간에 성급하게 어떤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은서는 간민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주강운은 최소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신중히 행동하며,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할 것이 분명했다.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은서를 데려와 펜션에서 지내게 하는 게 어때? 할머니께서 연세도 많으시고, 은서를 돌볼 체력이 없으시잖아. 그리고... 강운 씨 입장에서 보면 은서는 간민혜가 준 치욕의 상징일 텐데, 만약 병이 도져서 은서에게 화풀이라도 한다면 어쩌지?”강한서는 처음엔 주강운이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를 잘 안다고 믿었으니까.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다 삼켜졌다.만약 정말로 그를 이해했다면, 전에 있었던 납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겠지.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대로 해.”사실 강한서가 한성우를 통해 주강운에게 은서의 출생 비밀을 넌지시 알린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주씨 집안을 이용해 문지상의 진짜 사망 원인을 찾아내려는 계획이었다.강한서는 여전히 문지상이 그런 사람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 어깨장을 그렇게까지 소중히 간직하지 않았을 것이다.다음 날, 한현진은 직접 강씨 집안의 본가로 가서 은서를 데려왔다.그런데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신미정이 구류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녀는 잔뜩 선물을 들고 정인월을 찾아왔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이었다.한현진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진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진 기사, 제발 시어머니께 잘 말씀 좀 해줘.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딱 한 번만 만나게 해주면 안 돼?”진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어르신께서 몸이 불편하시다며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더는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신미정은 계속 사정하며 설득했지만, 진 기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신미정의 눈빛이 달라졌다.결국 억눌렀던 본심이 드러났다.“내가 강씨 집안을
한현진은 시선을 거두고 진씨에게 말했다.“아저씨, 은서를 데리러 왔어요.”진씨가 대답했다.“은서는 피아노 연습 중입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르려던 순간, 신미정이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한현진, 네가 나를 강씨 집안에서 쫓아내고 우리 모자를 갈라놓았으니 아주 만족스럽겠지?”한현진은 걸음을 멈추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조금 더 오래 갇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신미정의 눈에 증오가 스쳤지만, 이내 억눌렀다.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얘기 좀 하자.”한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저희 사이에 대체 무슨 얘기를 할 게 있다고 생각하시죠?”한현진은 신미정이 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해치려 했던 여자에게 절대 두 번째 기회를 줄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신미정이 왜 갑자기 시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기 시작했을까?비록 신미정이 강씨 집안에서 쫓겨났고, 강한서가 그녀와의 인연을 끊으며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공했지만, 강민서는 그녀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았다.강민서는 여전히 신미정에게 애정이 남아 있었다. 비록 과거에 함정에 빠뜨린 적이 있더라도, 신미정이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신미정이 풀려난 날, 강민서는 그녀를 찾아갔고 약간의 돈도 건넸다.강한서가 이 사실을 한현진에게 말하며 은근히 물었다.“내가 민서를 막아야 할까?”한현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자기 속셈을 모를 줄 아나!’강한서는 신미정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막아섰다가 나중에 신미정이 돈 때문에 사고라도 치면 강민서가 자신을 원망하고 사이가 멀어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또 막지 않으면 한현진이 오해할까 두려워 문제를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었다.한현진은 애초에 강민서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강민서는 반항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억누르
한현진은 신미정을 한 번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한서 씨는 매달 당신 계좌로 생활비를 송금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동안 당신이 회사 계좌에서 빼돌린 돈의 증거도 가지고 있죠. 당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신미정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그런 추문이 퍼지면, 한성의 주가와 한서 선거 표에 아무 영향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한현진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세상에 이런 뻔뻔하고 비열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의 인생을 망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서해금과 백혜주는 그렇게 악독해도 자식들만큼은 끝까지 보호했다. 그런데 신미정은 대체 뭔가?한현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요?”신미정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너랑 상관없어. 돈만 보내면 돼. 기한은 3일이야. 안 주면 바로 한서를 고소할 거야!”한현진은 차분하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부모와 자식이라는 증거가 없었으면, 진심으로 한서 씨가 당신 친아들이라는 걸 의심했을 거예요. 당신은 한서 씨를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낳았어요? 낳았으면 왜 돌보지 않았고요? 한서 씨가 이렇게 어렵게 이룬 걸 왜 또 망치려는 거죠?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예요?”신미정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우리 모자는 원래 잘 지내고 있었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네가 재앙이야! 한서가 날 이렇게 대하니 내가 무정한 건 당연하지!”“과시하려고 아들이 물에 빠지도록 내버려둔 게 당신 말로는 잘 지낸 거라고요?”한현진의 말은 신미정의 아픈 곳을 건드린 듯했다. 신미정은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뭘 알아? 내가 한서를 엄격하게 키우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될 수 있었겠어?”그 뻔뻔한 논리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신미정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 다시 냉랭한 태도로 물었다.“말 돌리지 말고, 그 돈 줄 거야, 안 줄 거야?”한현진은
“안 돼!”신미정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2주는 너무 길어! 일주일 안에 끝내!”한현진은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열흘은 줘요. 일주일로는 정말 돈을 마련할 수 없어요.”신미정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한서가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한현진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설마 나더러 한서 씨에게 돈을 달라고 하라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큰 금액을 요구하면, 당신은 한서 씨가 돈의 용도를 추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당신이 내게 돈을 요구하라고 시켰다는 걸 직접 말하길 바라요?”신미정은 강한서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애초에 그녀가 찾아온 상대는 한현진이었다.하지만 강한서가 한현진을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죽은 남편의 유산을 건드릴 생각을 한 것이었는데, 운 좋게 한현진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한현진의 말에 신미정은 잠시 차분함을 되찾았다. 잠깐 고민한 뒤, 신미정은 입을 열었다.“좋아, 열흘은 줄게. 하지만 열흘 뒤에도 내가 원하는 금액을 못 받으면, 너 기다려!”신미정이 자리를 떠난 뒤, 한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차 안에 녹화된 영상 복사해 주세요.”원율은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는 곧 녹화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오늘 일은 한서 씨에게 말하지 마요. 그게 어려우면 지금 이 자리에서 떠나요. 제가 두 달 치 월급을 더 챙겨드릴 테니 다른 직장을 찾아요.”원율은 다급히 말했다.“사모님, 대표님이 저를 고용하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모님의 사람입니다. 사모님의 안전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개인적인 일은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한현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이제 본가로 가요.”원율은 대답하며 녹화 파일이 담긴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는 차를 돌려 강씨 집안의 본가로 향했
그녀는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떠올리며, 멍하니 있던 그 뚱뚱한 물고기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발로 작은 돌멩이를 툭 차 연못에 던졌다.‘퐁당!’ 소리와 함께 뚱뚱한 물고기가 깜짝 놀라 몸을 홱 뒤집었고, 그 꼬리짓에 옆에 있던 작은 잉어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정인월은 눈썹을 씰룩이며 바라봤다.“아이고, 저 건들건들한 짓거리... 왜 우리 큰손주랑 똑같냐?”한현진은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슬그머니 발을 뒤로 뺐다. 그리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그때 은서가 깡충깡충 달려와 한현진의 다리를 꼭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이모, 왜 이제 왔어요! 은서 이모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한현진은 은서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이모가 너 주려고 작은 선물 좀 사느라 늦었어.”“선물이요?”은서의 눈이 반짝이며 한현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어디 있어요? 빨리 가요!”한현진은 은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먼저 이 오빠랑 차에 타 있어. 이모는 할머니랑 잠깐 얘기 좀 하고 갈게.”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원율의 손을 잡고 차로 갔다. 아이가 자리를 떠나자, 정인월은 물었다.“그래서, 무슨 얘기를 나눴니?”한현진은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정인월에게 말했고, 정인월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하려고?”한현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한서 씨를 망치게 두진 않을 거예요. 200억은 신미정의 협박값이 아니에요. 그 돈으로 신미정과 한서 씨의 혈연관계를 끝낼 생각이에요.”그녀는 이어 덧붙였다.“물론, 그 돈이 순순히 그 사람 손에 들어가게 두진 않을 거예요.”할머니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래. 집안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구나.”그 말을 하고는 갑자기 기침을 터트렸다. 한현진은 급히 다가가 정인월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차를 따라 정인월의 잔에 차를 채워드렸다.“할머니, 건강 잘 챙기셔야 해요.”정인월은 차를
신씨 가문은 진작 신미정이 결혼 후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씨 가문의 아들딸이 가진 것이라곤 그저 외모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아무리 힘을 합쳐도 그럴듯한 아이디어 하나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만약 강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신씨 가문은 진작 재벌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강한서가 신미정이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명분으로 동생에게 끌어준 자금줄을 전부 끊은 후 전부터 안 좋던 회사 정황은 나날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신표의 아내가 돈을 빼돌려 도망갔다고? 한현진은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설사 도망갔다고 해도 신표에게 돈이 있을 땐 가만히 있다가 하필 돈 떨어진 이 타이밍에?게다가 강한서의 외숙모는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신표는 도박 중독이었다. 신씨 가문 절반 이상의 재산은 전부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어도 신씨 가문과 어울리는 집안에서는 도박꾼에서 딸을 시집보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신표의 아내인 이윤하는 신씨 가문에서 지방에 있던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정 형편도, 외모도 평범했고 억척스러운 여자였다. 신표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결혼했고 그가 결혼할 때 강한서는 이미 곧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강한서는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강한서의 외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외할머니도 몸이 편치 않으셨다. 결혼식을 준비는 전부 신미정이 짊어지게 되었다. 신미정은 이윤하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윤하를 거칠고 교양 없는 여자라 생각했고 못생기고 평범한 집안 때문에 신씨 가문에 그 어떤 도움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이 이윤하를 며느리로 콕 점 찍어둔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결혼을 막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신미정은 결혼식에서 이윤하의 기를 눌러 줄 계획을 세웠다. 예물 교환 순서에 사용될 화
신미정은 신표가 자신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해 몰래 그에게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도박을 끊는 건 금연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랜 시간 손을 대지 않을 땐 괜찮았지만 일단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멈추기가 힘들었다. 신표는 또다시 도박장의 단골이 되었고 연년생 아이를 낳은 이윤하는 신표와 회사를 관리할 정력이 없었다. 어렵게 일으킨 회사는 또다시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 당시 마침 강한서는 한성을 혼자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자 신미정은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신표에게 투자자를 끌어다주었다. 이윤하는 모든 정력을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퍼부었고 회사 일에는 점점 손을 놓게 되었다. 그녀는 신표가 도박을 하든 말든 가만히 놔두었다. 어차피 신씨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었다.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돈은 전부 신미정이 몰래 그에게 준 것이었다. 얼마 전 주강운이 말한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의 원인은 아마 신표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그쪽으로 몰래 돈을 빼돌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중에 한현진이 강한서와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강한서는 재산은 어차피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고 내연녀와 새 살림을 꾸릴 용기 따위도 없고 돈이 생기면 바로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신표를 어떤 눈 먼 여자가 따라다니겠냐고 했다. 젊은 시절의 신표는 연예인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외모를 가진 남자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곧 50대가 되는 아저씨였다. 그러니 뭘 보고 그런 남자의 내연녀가 되려고 할까? 중년을 향하는 나이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면 도박꾼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어서?이 일은 생각할수록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말했다. “오빠, 이윤하 행적을 알아봐줘요. 채무 상황도요.”다음 날 송민준이 소식을 전해왔다. 이윤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빈해시로 향했다. 그녀의 계좌엔 16억이 들어온 기록이 있었고 그 돈을 보낸 사람은 신표였다. 그리고 신표의 계좌에는 신미정이 한현진에게서 받은 20억이 들어온 기록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