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먼저 공부를 해서 내 인생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그다음에 덕질을 시작했어.” “넌 어때? 지금은 먹고사는 거 다 부모님께 의지하는 나이잖아. 부모님이 너의 덕질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해도, 언젠가 네가 우상이랑 같은 무대에 설 기회가 온다면, 넌 어떤 신분이고 싶어?” “현진이는 단순히 네 눈만 밝혀주는 게 아니라, 네 앞길도 비춰줘야 해. 넌 현진이 빛에 가려져 묻히고 싶어? 아니면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빛나고 싶어?” 진윤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집에는 뛰어난 형이 있어서, 자신은 그저 인생을 즐기는 한량으로 지내면 된다고 여겼다. 집안 형편이 좋으니, 덕질에 돈을 써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성적이 안 좋다고 부모님께 잔소리를 들어도, 결국 졸업 후에는 돈을 써서 해외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도금된 학벌로 가문의 회사를 물려받으라는 게 부모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돈으로 산 학위는, 결국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속은 여전히 놀고먹는 한량일 뿐이었다. 언젠가 우상 앞에 선다면, 진씨 집안 차남이라는 타이틀은 충분히 대단했지만, 그 타이틀 외에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한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 생각엔 팬이 대단해야 우상이 대단해 보이는 걸까? 아니면 우상이 대단해야 팬이 대단해 보이는 걸까?” 그 말은 마치 찬물을 끼얹는 듯한 깨달음을 주었다. 팬이 뛰어나면 사람들은 우상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뛰어난 사람끼리 서로 끌리기 마련이니까. 반대로 팬이 보잘것없다면, 아무리 우상이 대단해도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게 본다. 왜냐하면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별 볼 일 없으니까. 진윤은 점점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형님, 혹시 선생님이세요? 공부하라고 설득하는 기술이 우리 선생님들보다 훨씬 낫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 형님 같은 선생님을 만났다면, 제가 수능을 그렇게 쳤겠어요? 적
송가람은 무려 이틀이나 출근하지 않았다.그날 벌어진 일은, 그날 저녁 한현진이 민경하로부터 생생한 설명을 듣고 알게 되었다.강한서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가십거리를 얘기하면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에 흠집이 난다고 말이다.하지만 민경하는 말했다.“진짜 과했어요. 아마 본인도 얼굴 들고 다닐 자신이 없을걸요.”민경하의 눈썰미는 대단했다.그는 심원을 언급하며 그의 외모를 말했다.“심원 씨의 눈, 대표님과 정말 닮았어요.”대체문학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강한서와 어느 정도 닮은 강현우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이유가 분명해졌다.더 닮았고 더 통제하기 쉬운 대체 인물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심원과 송가람이 알고 지낸 기간을 보면, 강한서와 첫 결혼 때부터 이런 일을 벌이고 있었던 셈이다.자신의 연인이 이렇게 오랜 시간 누군가의 목표가 되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한현진은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밀려왔다.게다가 강한서가 부상으로 한 달간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을 때, 송가람이 그를 간호하며 얼마나 부적절한 시선을 보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현진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한밤중 강한서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둥글게 커진 한현진의 눈과 마주했다.강한서는 놀라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끌어안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밤에 안 자고 눈을 그렇게 크게 뜨고 뭘 생각하는 거야?”한현진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말했다.“송가람이 당신을 어떻게 했든, 나는 당신을 탓하지 않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밤새 잠 안 자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한현진은 진지하게 답했다.“갑자기 술 먹으면 힘들어진다는 게 당신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유현아가 한성우 생일 파티 때 거의 당신을 가질 뻔한 적도 있고, 이번엔 송가람이 생명의 은인 코스프레로 당신에게 뭔 짓을 했는지 모르잖아. 만약 술 먹고 힘에 부치지 않았다면, 벌써 끝장났을지도 몰라. 우리 재혼 같은 건 꿈도 못
겉모습은 점잖으나 속은 야비한...아니, 그건 잠깐 제쳐두고, 강한서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오늘 왜 밥 먹을 때 나한테 말 안 했어?”한현진은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당신한테 말 안 했던 것처럼, 당신도 나한테 말 안 했잖아?’게다가 싸움 끝에 ‘다시는 말도 섞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그녀였으니,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녹화 기능을 켰다.“잠깐만, 영상 좀 찍을게. 대표님이 말하길, 시착 영상 올리면 1년 더 보증 연장해 준다네. 1년 동안 무료 교체 가능이래.”수백만 원짜리 안경인데, 혹시라도 망가지면 아깝지 않겠는가.그렇게 말하며 녹화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강한서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한 발 한 발 책장 쪽으로 몰아세웠다.그는 핸드폰을 그녀 손에서 가볍게 가져가더니 책장 위에 올려놓았다.안경을 쓴 그의 눈빛은 안경 너머 반사된 빛 덕분에 한층 더 서늘해 보였다.한현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그 순간, 강한서가 한 손으로 그녀 뒤 책장을 받치고는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안경은 벗지 않은 상태였고, 차가운 안경테가 그녀의 뺨에 닿았다.그 차가움에 그녀의 심장이 엉뚱하게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단순한 키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강한서는 그 이상을 하고 싶어 보였다.그는 그녀를 책상 위로 완전히 밀어 올렸으나 그 이상은 없었다.술이 문제였다. 그의 몸은 반응을 멈췄고, 아무리 불을 지펴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술이 이미 강한서를 완전히 장악해 버린 상태였던 것이다.결국 강한서는 그녀를 살짝 안아주고는 그대로 옆에 있는 소파에 누워 잠들어 버렸다.그런데 책장 위에 있던 핸드폰이 이 모든 장면을 완벽히 녹화하고 있었다.그 당시 한현진은 왜인지 모르지만 그 영상을 지우지 않았고, 오히려 클라우드에 저장했다.그 후로는 영상은 물론 클라우드 비밀번호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렇게 몇 년이 흘러, 그녀가 깔린느에 입사한 후 자료를 저
한현진은 주강운에게서 전화가 온 것을 보고 잠시 놀랐다.지난번 좋지 않게 헤어진 이후로, 둘은 전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게다가 지금은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이 시간에 전화라니, 주강운답지 않은 일이었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그러자 강한서가 물었다.“안 받아?”한현진은 휴대폰을 강한서에게 던지며 말했다.“안 받아.”강한서는 그녀의 태도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렇게 늦게 전화하는 건 급한 일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받아보는 게 좋겠어.”한현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강한서는 질투로 비꼬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그는 주강운이 과거 납치 사건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인연을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예전에 그녀에게 주강운과 거리를 두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지금 그를 완전히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았다.그것이 바로, 한현진이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주강운에게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던 원인이었다.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며 말했다.“받아 봐.”그녀는 그를 한 번 바라보더니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는 조금 소란스러웠다.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주강운이 아니라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남자는 주강운이 딥블루 클럽에서 과음을 했으니 와서 데려가고, 계산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한현진이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상대는 바쁜 듯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주강운은 딥블루 클럽의 한 방에서 술에 취해 있었다.종업원 말로는 어떤 여자를 위해 술을 대신 마셨다고 했다. 그 여자가 한 손님의 옷을 더럽혔고, 손님이 일부러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려 하자, 주강운이 나서서 술을 대신 마셨다는 것이다.붉은 술, 흰 술 섞어가며 잔뜩 마신 그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한현진은 직접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강한서에게도 가지 말라고 했다. 대신 한성우에게 연락했다.하지만 한성우는 주강운을
한현진은 마음이 복잡하고 초조했다.한편으로는, 만약 정설희의 죽음이 정말로 장준과 관련이 있다면, 장씨 집안이 그 사진을 이용해 강한서를 곤경에 빠뜨릴까 봐 걱정되었다.그들은 이미 대비책을 마련했지만, 적과 같은 손해를 보는 상황은 결코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주강운이 정서희를 도와 진짜 범인을 찾아내길 바라고 있었다.그녀는 한때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소녀가 이렇게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강한서는 그녀의 고민을 알아채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걱정 마. 네 남편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야. 뭐든지 다 막을 수 있어.”한현진은 한숨을 쉬며 강한서를 껴안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예전에 강운 씨한테 숙주씨 집안 간민혜를 찾으려 했던 일을 알렸지. 그래서 둘이 사고를 당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서 계속 참고 있는 거 아니야?”강한서는 잠시 침묵한 뒤 조용히 답했다.“꼭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야. 현진아, 나랑 강운이는 단지 어릴 적 친구였던 것만이 아니야. 강운이는 날 대신해 얻어맞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어.”이 일은 한성우조차 알지 못했다.그는 단지 주강운이 19살 때 싸움에 휘말려 야구 방망이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 내출혈이 생겼고, 중환자실에 일주일이나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사실 이 사건은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강한서는 학창 시절 공부에만 몰두하며 연애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그의 뛰어난 외모는 많은 여학생의 관심을 끌었다.인근 예술 대학의 한 여학생이 교류회에서 강한서에게 첫눈에 반해, 여러 번 학교에 찾아왔다.학과 전체가 예술대학 학생이 강한서에게 반했다는 걸 알 정도였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동기들이 농담 삼아 그녀에 대해 얘기했을 때,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강한서는 단순히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지만, 지나치게 직설적인 말이
한현진은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그날 문지상이 간민혜의 죽음을 두고 강한서에게 했던 말이었다.“주씨 집안 사람들이 한 짓이죠, 그렇죠?”그리고 주강운을 언급하며,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죽은 사람이 그 녀석이 아니죠?”문지상은 주강운, 나아가 주씨 집안 전체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강운은 문지상을 전혀 몰랐다.그렇다면 문지상의 분노는 간민혜와 관련된 어떤 사건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강한서는 그동안 이 일의 전말을 수없이 되짚어봤지만, 이 부분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았다.그래서 사건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겼다. 그날의 교통사고로 인해 차량에 있던 모든 녹음 파일이 전부 소실되었다. 차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간민혜가 위독했던 순간, 그녀는 강한서에게 문지상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 주강운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어떤 상황이었길래 사랑했던 연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상대에게 한마디조차 남기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강한서는 한현진과 이별의 위기를 겪었을 때, 오직 그녀가 살아남기를,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온 마음을 다했다. 그 많은 사랑을 표현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질 만큼.하지만 간민혜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여전히 말할 힘이 있었음에도 주강운에 대해선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어렴풋이 간민혜가 주강운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녀는 삶의 끝자락에서도 그에게 단 한 마디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강한서가 말했다.“둘이 헤어졌을 때는 감정이 가장 좋았을 때였어. 헤어지기 한 달 전만 해도 강운이는 나한테 약혼반지가 너무 비싸면 간민혜가 안 받을까 봐 두렵다고 말했고, 간민혜는 나한테 강운이 건강 상태를 계속 물어보며 걱정했지. 그런데 주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에, 무시당하고 모욕당한 후로는 완전히 떠났어.”한현진은 찡그리며 말했다.“그 때문이라고? 그런데 당신이 전
강한서가 주강운을 잘 아는 만큼, 그는 단기간에 성급하게 어떤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은서는 간민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주강운은 최소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신중히 행동하며,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할 것이 분명했다.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은서를 데려와 펜션에서 지내게 하는 게 어때? 할머니께서 연세도 많으시고, 은서를 돌볼 체력이 없으시잖아. 그리고... 강운 씨 입장에서 보면 은서는 간민혜가 준 치욕의 상징일 텐데, 만약 병이 도져서 은서에게 화풀이라도 한다면 어쩌지?”강한서는 처음엔 주강운이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를 잘 안다고 믿었으니까.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다 삼켜졌다.만약 정말로 그를 이해했다면, 전에 있었던 납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겠지.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대로 해.”사실 강한서가 한성우를 통해 주강운에게 은서의 출생 비밀을 넌지시 알린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주씨 집안을 이용해 문지상의 진짜 사망 원인을 찾아내려는 계획이었다.강한서는 여전히 문지상이 그런 사람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 어깨장을 그렇게까지 소중히 간직하지 않았을 것이다.다음 날, 한현진은 직접 강씨 집안의 본가로 가서 은서를 데려왔다.그런데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신미정이 구류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녀는 잔뜩 선물을 들고 정인월을 찾아왔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이었다.한현진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진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진 기사, 제발 시어머니께 잘 말씀 좀 해줘.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딱 한 번만 만나게 해주면 안 돼?”진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어르신께서 몸이 불편하시다며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더는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신미정은 계속 사정하며 설득했지만, 진 기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신미정의 눈빛이 달라졌다.결국 억눌렀던 본심이 드러났다.“내가 강씨 집안을
한현진은 시선을 거두고 진씨에게 말했다.“아저씨, 은서를 데리러 왔어요.”진씨가 대답했다.“은서는 피아노 연습 중입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르려던 순간, 신미정이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한현진, 네가 나를 강씨 집안에서 쫓아내고 우리 모자를 갈라놓았으니 아주 만족스럽겠지?”한현진은 걸음을 멈추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조금 더 오래 갇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신미정의 눈에 증오가 스쳤지만, 이내 억눌렀다.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얘기 좀 하자.”한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저희 사이에 대체 무슨 얘기를 할 게 있다고 생각하시죠?”한현진은 신미정이 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해치려 했던 여자에게 절대 두 번째 기회를 줄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신미정이 왜 갑자기 시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기 시작했을까?비록 신미정이 강씨 집안에서 쫓겨났고, 강한서가 그녀와의 인연을 끊으며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공했지만, 강민서는 그녀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았다.강민서는 여전히 신미정에게 애정이 남아 있었다. 비록 과거에 함정에 빠뜨린 적이 있더라도, 신미정이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신미정이 풀려난 날, 강민서는 그녀를 찾아갔고 약간의 돈도 건넸다.강한서가 이 사실을 한현진에게 말하며 은근히 물었다.“내가 민서를 막아야 할까?”한현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자기 속셈을 모를 줄 아나!’강한서는 신미정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막아섰다가 나중에 신미정이 돈 때문에 사고라도 치면 강민서가 자신을 원망하고 사이가 멀어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또 막지 않으면 한현진이 오해할까 두려워 문제를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었다.한현진은 애초에 강민서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강민서는 반항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억누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
소식을 전해들은 진윤은 어이없는 상황에 곧바로 조교에게 전화했다. “조교님, 안녕하세요. 제가 재수강하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혹시 뭔가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서요. 재시험도 통과했는데 왜 재수강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조교가 말했다. “잠깐만요, 확인해 볼게요.”“네.”비록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진윤은 학교에서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 같던 1분이 흐르고 진윤의 귓가로 조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봤는데 재수강 명단에 진윤 씨 이름이 있네요. 실수는 아닌 것 같아요.”진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분명 재시험도 통과했는데 왜 이름이 재수강 명단에 있는 거예요?”인터넷에 떠도는 여론을 떠올린 진윤이 입술을 짓이겼다. “혹시 학교에서도 제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해서 성적을 무효화 시킨 건가요?”“그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학원 연락을 받은 거라.”진윤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시험장엔 CCTV도 설치되어 있었어요.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아닌지, CCTV를 확인하면 알 수 있잖아요. CCTV를 확인해 볼 수는 없어요?”조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윤 씨, 이번 일은 진윤 씨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녜요.”“그럼 얼마나 복잡한 일인데요?”눈을 질끈 감은 진윤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학교의 명성을 위해 부정행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성적을 취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시겠다는 건가요?”조교 역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만에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 교수님께 연락 드려 봐요. 이번 일은 학교에서 교수님께 맡기셨거든요.”진윤이 알고 있는 것은 오 교수 비서의 전화번호가 전부였다. 어쩔 수 없이 오 교수의 비서에게 전화하자 그는 빈해시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출장 중이라며 전화를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니 한주로 돌아가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재수강 명단은 이번 주가 지나면 더 이상 수정이 불가능했다. 진윤에겐 시간이 없었다.
병실에서 나오는 강한서를 홍혜림은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진심을 담아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홍혜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휴대폰은 돌려주세요. 학교에서 도는 소문은 진윤이 직접 처리하는 게 나을 거예요. 만약 부모님이 대신 나서서 해결해 주시면 나중에 학교로 돌아가 동기들과 지내기도 더 불편해질 거예요.”입술을 짓이기며 잠시 침묵하던 홍혜림이 말했다. “강 대표님께서 윤이 재시험을 위해 학원 선생님도 찾아주셨다면서요?”강한서가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진윤이 학원을 알아보고 싶다고 저에게 물었고 마침 친구의 학생이 윤이 선배였거든요. 공부도 잘하는 친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다고 해서 소개시켜줬어요.”“며칠 가르친 게 전부였지만 윤이가 워낙 기초가 탄탄한 편이라 빨리 배웠어요.”진윤 스스로 노력한 거라며 겸손하게 대답하는 강한서에 홍혜림은 물어보려던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쉰 홍혜림이 입을 열었다. “강 대표님 정도는 되는 분이 아이도 한참 어린 윤이와 친구를 하고 싶은 건 아니실 테고... 바라시는 게 뭐예요?”강한서가 홍혜림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희는 게임 친구예요.”홍혜림: ?“같은 배우의 팬이기도 하고요.”홍혜림: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전에 깔린느에 운천을 시향하러 가신 날도 제가 진윤에게 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홍혜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진윤이 제 아내를 도와줬으니 이번 일은 제가 진윤에게 보답한 거라고 해두죠.”...교통사고 세 번째 날 각 공중파에서는 사고의 원인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뉴스에서는 과속과 상대방의 역주행이 사고의 주요원인이었고 레이싱 경기는 불법 폭주로 간주되어 구체적인 형량은 후속 보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불법 폭주 혐의자 명단에 진 모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한 네티즌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3명이 죽은 사고를
진윤이 진술을 마치자 경찰이 물었다. “그날 경기 참가자의 명단에 장준이라는 사람은 없었어요.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녜요?”멈칫한 진윤이 대답했다. “저와는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다들 그 사람을 장준이라고 불렀어요.”진수한과 홍혜림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경찰은 더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은 채 쾌차를 빈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이 병실을 나선 후 진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활발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병실 아래서 누군가 확성기로 진윤의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홍혜림이 얼른 창문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진윤이 그런 홍혜림을 불러세웠다. “엄마, 괜찮아요. 듣게 해줘요. 듣고 싶어요.”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선 홍혜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밖에서는 사람을 개미 목숨처럼 여기는 진윤은 사회의 악이라며 그를 욕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윤에게 죽음으로 죗값을 치루라며 울부짖었다. 진윤은 자신의 취미라며 즐겼던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전을 무시한 취미는 그저 모두의 목숨을 내건 채 한 순간의 쾌감을 쫓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사고 전엔 하나 같이 본인의 운전 실력을 뽐내던 인간들이 사건이 터지자 바로 모든 책임을 코마에 빠진 사람에게 밀어버렸다. 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사고는 본인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착각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이 잠깐 병실을 나서자 진윤이 몰래 강한서에게 말했다. “형님, 휴대폰 좀 빌려줘요. 엄마가 제 휴대폰을 가져가셔서 그래요.”강한서가 말했다. “팔도 들지 못하면서 휴대폰은 무슨. 그냥 가만히 있어.”진윤이 대답했다. “인터넷에서 절 뭐라고 욕하는지 봐야겠어요.”강한서: ...진윤이 씩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얼굴의 상처 때문에 그 미소는 그를 더 불쌍해 보이게 했다. “아침에 약을 바꿔주던 간호사가 몰래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지금 악플 장난 아니죠. 엄마는 제가 악플을 볼까봐
병원으로 찾아온 피해자 가족에 휴대폰을 떨어뜨려 망가졌다는 말에 한현진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넌 괜찮아? 다쳤어?”“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분명 피해자 가족 앞에서 이간질을 한 사람이 있어.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병원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울 정신이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아직 공식적으로 사고 원인을 밝힌 적도 없는데 소란을 피운다고 뭘 얻을 수 있는데?”“기껏해야 여론이나 더 뜨거워지겠지. 지금 이 여론몰이를 설계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네.”강한서가 멈칫하며 물었다. “너 성우에게 연락했어?”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인지하고 당황한 한현진이 말했다. “너는 연락이 안 되는데 기사까지 보고 나니까 너무 걱정이 돼서 성우 씨에게 전화한 거야.”변명하던 한현진이 물었다. “진윤 씨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상태가 안 좋아?”“고비는 넘겼지만 과다출혈에 부상도 심한 상태라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나쁜 자식. 분명 더는 그런 경기엔 참가하지 않기로 약속까지 해놓고 대체 왜 결국 약속을 어기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운전자가 진윤이 아니야. 진윤이 몸에 생긴 상처를 봐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운적석에서 나온 부상이 아니래. 하지만 사고가 났을 땐 진윤이도 차에 있었어. 아마 팀원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윤이를 운적석으로 옮긴 것 같아.”“아무래도 술까지 마셨으니까 음주운전이 여론몰이 이용하기 좋았겠지. 그래도 증거를 지울 수는 없을 거야. 경찰 측에서 조사를 진행하면 바로 사건의 진위를 밝힐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일이 생각보다 커져서 여론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아직 학생이라 차짓하면 윤이에겐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거야.”재벌 2세의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무고한 시민 사망, 이라는 기사는 사회에 불만을 품었던 네티즌이 마침 원하던 타이틀이었다. 그러니 경찰 측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꺼내놓지 않는 한 정정 기사나 반박 기사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
진윤이 입원한 병원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과 그들이 데려온 피해자의 가족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진수 그룹 오너가의 모든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간 그 짧은 사이, 사람들은 그녀가 있는 비상계단으로 몰려들었다. 강한서가 홍혜림을 감싸고 비상계단을 벗어나며 흥분한 피해자 가족에 의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은 그대로 박살이 났다. 경찰이 도착하고 나서야 현장은 잠시 평화를 되찾았다. 저녁사이 홍혜림은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진수한은 까칠해진 얼굴로 최대한 홍혜림을 위로하고 있었다. 경찰 측에서는 아직도 홍혜림에게 어젯밤 진윤의 알리바이를 묻고 있었다. “여러 번 얘기했잖아요. 술 안 마셨다니까요. 머리 깎으러 가서 친구가 경기 구경하러 오라고 해서 간다고 했어요. 먼저 경기 약속을 어긴 거라 안 갈 수가 없어서 인사할 겸 다녀오겠다고 했었어요.”“사고를 낸 차가 저희 아들 차는 맞아요. 하지만 운전자가 저희 아들일 리는 없어요.”경찰이 물었다. “어떻게 진윤 씨가 운전한 게 아니라고 확신하시죠? 무슨 근거로요?”“저와 다시는 그런 경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게 어제 저녁이에요. 변하고 싶어 했어요. 복수 전공도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고요.”“그 말을 믿으세요?”아들이 생사를 헤매고 있으니 안 그래도 우울한 감정에 쌓여있던 홍혜림은 경찰에게 붙잡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당장이라도 멘탈이 붕괴될 것만 같았다. 그런 시점에 그 말을 믿냐는 경찰의 말에 홍혜림은 드디어 폭발했다. “아니면요? 제가 제 아들을 안 믿으면 설마 인터넷에 떠도는 그런 얘기들을 믿을까 봐요? 증거가 필요하면 당신들이 가서 찾아요. 길가에 설치된 CCTV는 인테리어예요? 왜 계속 병원만 지키고 있는 거예요?”“지금 코마에 빠져 깨어나지도 못하는데 도망이라도 갈까봐 그래요? 윤이는 범인이 아니라고요.”그러자 경찰도 언성을 높였다. “홍혜림 씨, 저희도 지금 조사 중에 있어요. 심문도 저희 업무 중 하나예요.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