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그래도 한현진은 그 일로 송민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송가람의 예전 이름은 서가람이었다. 서해금이 송병천과 결혼한 후 첫 몇 년 동안은 성을 바꾸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땐가 서해금이 아픈 탓에 송병천이 그녀 대신 송가람의 학부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송병천은 한 번도 송가람의 학부모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담임 선생님도 송병천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송가람의 담임 선생님은 먼저 상황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부녀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성에 담임선생님은 그제야 송가람은 재혼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은 한창 미울 나이였다. 활발하고 또 필터 없이 말을 던질 나이라 송가람의 아빠가 의붓아버지라는 사실은 곧 빠르게 퍼져나갔다. 송가람은 속상한 마음에 등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울며 송병천에게 왜 자신은 오빠, 아빠와는 성이 다른지 물었다. 자신이 아빠와 성이 달라서 친구들이 아빠 딸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말이다. 송병천은 안 그래도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서해금이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송가람은 이제 7, 8살 난 어린 아이였다. 다 큰 성인이 이토록 속상해 하는 어린 아이를 보면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송병천은 송가람이 자신의 성을 따르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한현진이 말을 마치자 차미주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오빠는 교육 잘 하신 것 같은데 송가람은 말투가 왜 그 모양인가 했어. 역시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거네. 7, 8살이면 웬만한 건 알 나이인데 왜 성이 다른지 정말 몰라? 당연히 네 새엄마가 가르친 거겠지. 성을 바꿔야만 송씨 가문의 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가짜도 진짜가 되는 거지.”차미주의 말이 정확했다. 송씨 가문과 연락이 잦지 않던 사람들 대부분은 송가람이 송병천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오해는 한현진이
‘쫓아버리겠다는 거잖아, 이건.’하지만 하필 한성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차미주가 털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현진이는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뭘 소화해? 뱃속의 두 아이가 먹기에도 부족할 정도였어. 맞지, 현진아?”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아냐. 나 많이 먹었어. 심지어 완전 배불러.”말하며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 “넌 배불러?”강한서가 말했다. “배불러서 토할 것 같아.”그렇게 작별 인사를 한 두 사람은 902호를 나섰다. 차에 올라타서야 한현진은 수다스럽게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우 씨 완전 가식적인 사람이네. 전에 내가 먼저 아이부터 가지면 장모님이 인정해 줄 거라고 했을 땐 날 친구를 배신한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하더니. 그땐 웬 성인군자인가 했어. 미주가 칠렐레팔렐레 해도 사람 하나는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미주를 꼬드긴 거야.”김경선이 내건 조건을 모르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말에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알게 된 후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강한서가 감탄하듯 말을 내뱉었다. “한성우 그 자식 어렸을 때 소원을 이룬 셈이네.”한현진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재벌을 만나서 남들보다 30년 덜 고생하는 거.”순간 참지 못한 한현진이 소리 내 폭소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차미주는 주방 청소를 하는 한성우를 보고는 도와주려 그에게 다가갔다. 차미주는 주방을 정리하며 물었다. “현진이 임심하고 나서 더 예뻐진 것 같지 않아?”“그래?”잠시 생각하던 한성우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보다 야박하게 구는 것 같지는 않아.”차미주가 눈을 씰룩이며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누가 야박하다는 거야!”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에 내가 너 좋다고 따라다녔을 때 형수님이 나한테 야박하게 안 굴었어?”“쌤통이야. 그러게 누가 너더러 날 속이래? 그리고 네가 언제 나한테 제대로 잘 보이
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개자식, 또 날 놀리는 거야?’방에서 나온 차미주가 한성우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집에는 한성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재로 걸어가 손을 뻗어 문을 열자 타다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니 서재 바닥에는 도미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며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리자 뒤에 놓은 도미노가 하나둘 쓰러졌다. 마지막 도미노까지 쓰러지자 바닥에는 커다랗게 차미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차미주는 줄곧 자신이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미노로 그려진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생기가 흘러넘쳐 말 할 것 없이 예쁜 모습이었다. ‘개자식 눈에 난 이런 모습이었던 거야?’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차미주가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가져오려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서재의 등이 꺼졌다. 그녀의 사진을 그리고 있던 도미노가 밝은 야광을 빛냈고 두 단어가 차미주의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Marry me.놀란 차미주의 심장이 쿵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당장이라도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녀의 코끝이 찡 울렸고 눈가도 뜨겁게 열이 올랐다. 뒤로 물러서던 차미주는 갑자기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 사람은 차미주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그가 차미주의 귓가에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둑아, 나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이 사진은 내가 이틀 동안 겨우 맞춘 거야. 더 로맨틱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 짜증나는 인간들 때문 내 계획을 전부 망쳤어.”긴장으로 몸이 바짝 굳은 차미주가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계획?”한성우가 씩 웃었다. “프러포즈 계획.”말하며 서재의 등을 켠 한성우는 차미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너랑 연애하는 건 나에겐 굉장히 기쁜 일이었어. 하지만 난 현 상황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한성우는 테이블 위에 놓은 박스를 열어 차미주 앞으로 가져갔다. “너 주려고 52개 샀어. 하루에 하나씩 바꿔 착용해도 한 달 동안은 겹치지 않아.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금은방에서 다시 제작하면 그만이야. 수공비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차미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뭐 해파라도 돼? 온 몸에 손밖에 없어서 52개를 착용하게?”‘로맨틱은 개뿔! 대체 뇌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내가 어쩌다 저런 놈을 좋아해서는.’한성우가 차미주를 끌어안으며 바짝 달라붙었다. “전혀 감동적이지 않아? 네가 반지 52개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다들부러워 죽으려고 할걸?”차미주가 발버둥 치며 말했다. “나 때문에 웃겨 죽으려고 하는 거겠지! 프러포즈하면서 반지를 몇 십 개씩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미친 거야? 그럼 결혼식은 어느 반지로 하는데? 1분에 한 번 바꿔 착용할까?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한성우가 잔꾀를 부리며 말했다. “결혼할 때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착용하는 거야. 그러면 목걸이 값도 아낄 수 있어.”차미주는 어이 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입을 벌려 한성우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한성우가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차미주의 엉덩이를 받들어 자신의 허리에 앉히듯 안아 올렸다. 그는 차미주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꼬리뼈는 다 나았어?”차미주가 물고 있던 한성우의 어깨는 놓아주며 이를 악물었다. “화나서 안 나을 것도 다 나았겠어.”말하는 순간 한성우 목에 있는 빨간 자국이 차미주의 눈에 띄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목에 그거 뭐야?”차미주가 손을 뻗어 자국을 비비자 그녀의 손가락이 빨갛게 물들고 목에 있던 흔적이 옅어졌다. “너 뭐 바른 거야?”한성우가 말했다. “네 립스틱으로 키스마크 그려봤어. 비슷하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 “너 미친 거 아냐? 그걸 왜 그려? 그걸 보면서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거야?”한성우가 쯧, 혀를 찼다. “내가 이걸 안 그렸으면 그 두 밉상이
한성우의 말에 차미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옷을 벗으며 부끄러움이 몰려오자 차미주는 불을 끄라고 했다. 긴장한 것은 차미주뿐만이 아니었다. 한성우도 마찬가지였다. 차미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긴장했고 한성우는 혹여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긴장하고 있었다. 차미주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졌다. 분위기를 잡으려 애쓰는 한성우에게 차미주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전에 너 생일 때, 우리 둘이 호텔에 있었던 날 말이야. 너 그날 일 하나도 기억 안 나?”간지러운 손길로 차미주의 몸을 만지던 한성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 안 나.”차미주는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때, 그때 피가 엄청 많이 났었잖아.”한성우는 말 없이 행동을 이어갔다. 그의 손이 은밀한 곳에 닿자 터져 나올 뻔 한 소리를 입술을 깨물며 삼킨 차미주가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피드에서 봤는데, 너무 세게만 안 하면 처음이라고 꼭 피가 나는 건 아니래. 넌 대체 얼마나 심하게 했기에 내가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린 거야.”한성우는 움찔 손을 떨었다. 하마터면 집중이 완전히 깨질 뻔했다. 고개를 든 그는 어둠 속에서 차미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기야, 할 말이 없을 땐 그저 입 닫고 가만히 있어줄래?”차미주가 불쌍한 말투로 말했다. “입 닫고 네 숨소리를 들으면 더 긴장된단 말이야.”한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계속 말해.”입을 달싹인 차미주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언제 들어와?”“...”한성우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의 입술에 입 맞추어 세상도 놀랠 말을 삼키도록 했다. 십분 후. 욕설이 섞인 여자의 비명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왔다. “제기랄! 안 아프다며!”그리고 곧 억누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 역시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맞았어. 자기, 힘 좀 빼봐.”“힘을 빼긴 뭘 빼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 분 세심하신 분이라며? 세심한 사람이 뜨거운 물이 너한테 튀게 해?”원망 섞인 강한서의 말투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그리곤 곧 미소 지으며 그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기댔다. “그렇게 심각한 거 아냐. 왜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그래? 평소엔 직원이 실수해도 너그럽게 봐줬잖아.”“이게 안 심각해? 종아리가 다 데었어야 심각하다고 할 거야?”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젊은 사람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했잖아. 일처리도 깔끔하고 손도 빠르고.”“기사님은 그저 노안인 것뿐이야. 전에 면접 보러 온 다른 운전기사가 나에게 손을 대려고 하는 걸 기사님께서 앞장서서 막아주셨어. 난 기사님 반응속도가 꽤 빠르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운전 경력도 많으시잖아. 집에 와이프와 아이가 아픈 데도 버리지 않은 걸 보면 꽤 책임감 있는 사람 같아. 기회라는 건 늘 젊은 사람에게만 줄 순 없잖아. 너희 회사도 지금 연령 제한 높였잖아.”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핑계 찾지 마. 그건 그냥 동정심이 넘쳐나는 거고 빚지기도 싫어서 그러는 거야.”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 식구 중 장애인이 두 명이야. 다들 힘들게 살잖아. 내가 기사님에 대해 특별한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해보라고 하는 거지. 게다가 입사한지도 며칠 되지 않았고 말도 적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을 컵이 깨져 좀 데었다고 자를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이 알면 내가 너무 인정머리 없다고 할 거야.”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주변에 네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네가 네 생각을 고집하듯이 나에게도 내 마음이 놓일 수 있는 보장이 필요해. 운전기사를 안 바꿔도 돼. 하지만 너에게 개인 비서 한 명 붙여주려고 해.”한현진이 경악했다. “개인 비서? 아주머니도 따로 개인 비서는 없으신데 고작 부 대표인 내가 개인 비서까지 데리고 다니는 건 너무 오버 아냐?”강한서가 말했
한현진이 어두워진 얼굴로 강한서를 몇 번이나 노려보았다. ‘어쩐지 쉽게 잘생긴 남자 비서를 붙여준다, 했어. 날 놀리려는 못된 심보를 품고 있었던 거야.’원율은 비록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말은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그는 연예계의 일과 연예인 개인 비서의 업무, 그리고 한현진의 필모에 대해 척척 대답했다. 강한서가 미리 가르친 것이 분명했다. 꽤 약삭빠른 청년이었다. 송병천과 서해금이 도착하는 날엔 한현진과 송민준이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공항엔 사람이 많아 한현진은 차 옆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송변천과 서해금이 나오는 방향을 지켜보았다. 곧 선글라스를 낀 송병천이 커다란 캐리어 두개를 끌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송병천의 뒤를 따르는 서해금은 미니 캐리어에 비싼 가방을 들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차려 입은 모습이 옛사진 속 한아름의 곁에 서있던 수수한 옷차림에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현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빠, 여기요!”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 송병천은 인파 속에서도 정확이 딸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성큼성큼 한현진에게로 걸어갔다. 앞으로 다가간 한현진이 송병천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 오셨어요? 여행은 즐거우셨어요?”송병천이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즐거웠어. 아빠는 모든 걸 거의 다 체험했어. 나중에 네가 가면 내가 가이드해 줄 수 도 있어.”한현진이 손을 뻗어 송병천의 캐리어를 가져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전 아빠와 아주머니께서 지루하셨을까 봐 걱정이었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며칠 더 추가한 건데.”그 말에 서해금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추가는 무슨. 애초부터 9박 10일의 패키지를 예약하고는 그들에게 5박 6일이라고 속인 거잖아. 비행기가 착륙하고 체크인까지 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서해금은 불쾌한 기분을 꾹 참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병천은 한현진이 아닌 송민준에게
사실 한현진은 서해금이 홍혜림과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젯밤 잠 들기 직전에 양시은이 전화를 걸어와 그 소식을 전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큰 고객을 잃었으니 서해금은 당연히 이대로 가만히 앉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홍혜림의 지인이기도 한 채지윤에게 부탁해 홍혜림과 약속시간을 잡았다. 채지윤은 홍혜림의 절친한 친구였고 그녀의 큰딸은 양시은 명의의 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뤘었다. 마당발에 사업 수완이 좋은 양시은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혼식장으로 꾸며주어 채지윤은 친구들 사이에서 한껏 콧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 뒤로 손자의 돌잔치, 회사 워크숍, 집안 어르신 생신 연회 등 중요한 모임은 줄줄이 양시은에게 부탁했고 그렇게 채지윤과 양시은은 점차 가까워졌다. 서해금은 채지윤을 통해 홍혜림에게 연락했다. 만약 직접 채지윤에게 연락한다면 그녀는 아마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채지윤은 지인을 통해 자신의 막내 아들과 송가람의 소개팅을 주선한 적이 있었지만 서해금에게 거절 당했다. 물론 서해금이 직접적으로 거절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요즘 세월엔 아이들 뜻이 중요하니 함부로 결정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만약 서해금의 말이 진심이라면 채지윤도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도 지나지 않아 서해금은 송가람과 강씨 가문 장손의 맞선을 주선했다. 채지윤은 마음 속 불만을 꾹 참았다. 그녀는 줄곧 서해금이 심씨 가문을 송씨 가문에는 가당치도 않은 집안이라며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채지윤의 아들은 배알도 없이 아무리 많은 여자를 소개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송가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했다. 두 사람은 해외 유학시절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채지윤의 아들이 오랫동안 송가람을 따라다녔지만 결국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 못했다. 송가람은 그와 연애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좋은 우정을 이어갔다. 식사 모임, 심지어 파티에 참석할 때도 늘 심원을 초대했다. 송가람이 귀국한 뒤에야 심원과의 사이가 점차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
소식을 전해들은 진윤은 어이없는 상황에 곧바로 조교에게 전화했다. “조교님, 안녕하세요. 제가 재수강하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혹시 뭔가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서요. 재시험도 통과했는데 왜 재수강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조교가 말했다. “잠깐만요, 확인해 볼게요.”“네.”비록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진윤은 학교에서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 같던 1분이 흐르고 진윤의 귓가로 조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봤는데 재수강 명단에 진윤 씨 이름이 있네요. 실수는 아닌 것 같아요.”진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분명 재시험도 통과했는데 왜 이름이 재수강 명단에 있는 거예요?”인터넷에 떠도는 여론을 떠올린 진윤이 입술을 짓이겼다. “혹시 학교에서도 제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해서 성적을 무효화 시킨 건가요?”“그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학원 연락을 받은 거라.”진윤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시험장엔 CCTV도 설치되어 있었어요.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아닌지, CCTV를 확인하면 알 수 있잖아요. CCTV를 확인해 볼 수는 없어요?”조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윤 씨, 이번 일은 진윤 씨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녜요.”“그럼 얼마나 복잡한 일인데요?”눈을 질끈 감은 진윤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학교의 명성을 위해 부정행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성적을 취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시겠다는 건가요?”조교 역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만에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 교수님께 연락 드려 봐요. 이번 일은 학교에서 교수님께 맡기셨거든요.”진윤이 알고 있는 것은 오 교수 비서의 전화번호가 전부였다. 어쩔 수 없이 오 교수의 비서에게 전화하자 그는 빈해시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출장 중이라며 전화를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니 한주로 돌아가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재수강 명단은 이번 주가 지나면 더 이상 수정이 불가능했다. 진윤에겐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