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그래도 한현진은 그 일로 송민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송가람의 예전 이름은 서가람이었다. 서해금이 송병천과 결혼한 후 첫 몇 년 동안은 성을 바꾸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땐가 서해금이 아픈 탓에 송병천이 그녀 대신 송가람의 학부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송병천은 한 번도 송가람의 학부모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담임 선생님도 송병천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송가람의 담임 선생님은 먼저 상황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부녀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성에 담임선생님은 그제야 송가람은 재혼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은 한창 미울 나이였다. 활발하고 또 필터 없이 말을 던질 나이라 송가람의 아빠가 의붓아버지라는 사실은 곧 빠르게 퍼져나갔다. 송가람은 속상한 마음에 등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울며 송병천에게 왜 자신은 오빠, 아빠와는 성이 다른지 물었다. 자신이 아빠와 성이 달라서 친구들이 아빠 딸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말이다. 송병천은 안 그래도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서해금이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송가람은 이제 7, 8살 난 어린 아이였다. 다 큰 성인이 이토록 속상해 하는 어린 아이를 보면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송병천은 송가람이 자신의 성을 따르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한현진이 말을 마치자 차미주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오빠는 교육 잘 하신 것 같은데 송가람은 말투가 왜 그 모양인가 했어. 역시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거네. 7, 8살이면 웬만한 건 알 나이인데 왜 성이 다른지 정말 몰라? 당연히 네 새엄마가 가르친 거겠지. 성을 바꿔야만 송씨 가문의 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가짜도 진짜가 되는 거지.”차미주의 말이 정확했다. 송씨 가문과 연락이 잦지 않던 사람들 대부분은 송가람이 송병천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오해는 한현진이
‘쫓아버리겠다는 거잖아, 이건.’하지만 하필 한성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차미주가 털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현진이는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뭘 소화해? 뱃속의 두 아이가 먹기에도 부족할 정도였어. 맞지, 현진아?”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아냐. 나 많이 먹었어. 심지어 완전 배불러.”말하며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 “넌 배불러?”강한서가 말했다. “배불러서 토할 것 같아.”그렇게 작별 인사를 한 두 사람은 902호를 나섰다. 차에 올라타서야 한현진은 수다스럽게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우 씨 완전 가식적인 사람이네. 전에 내가 먼저 아이부터 가지면 장모님이 인정해 줄 거라고 했을 땐 날 친구를 배신한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하더니. 그땐 웬 성인군자인가 했어. 미주가 칠렐레팔렐레 해도 사람 하나는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미주를 꼬드긴 거야.”김경선이 내건 조건을 모르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말에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알게 된 후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강한서가 감탄하듯 말을 내뱉었다. “한성우 그 자식 어렸을 때 소원을 이룬 셈이네.”한현진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재벌을 만나서 남들보다 30년 덜 고생하는 거.”순간 참지 못한 한현진이 소리 내 폭소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차미주는 주방 청소를 하는 한성우를 보고는 도와주려 그에게 다가갔다. 차미주는 주방을 정리하며 물었다. “현진이 임심하고 나서 더 예뻐진 것 같지 않아?”“그래?”잠시 생각하던 한성우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보다 야박하게 구는 것 같지는 않아.”차미주가 눈을 씰룩이며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누가 야박하다는 거야!”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에 내가 너 좋다고 따라다녔을 때 형수님이 나한테 야박하게 안 굴었어?”“쌤통이야. 그러게 누가 너더러 날 속이래? 그리고 네가 언제 나한테 제대로 잘 보이
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개자식, 또 날 놀리는 거야?’방에서 나온 차미주가 한성우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집에는 한성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재로 걸어가 손을 뻗어 문을 열자 타다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니 서재 바닥에는 도미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며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리자 뒤에 놓은 도미노가 하나둘 쓰러졌다. 마지막 도미노까지 쓰러지자 바닥에는 커다랗게 차미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차미주는 줄곧 자신이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미노로 그려진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생기가 흘러넘쳐 말 할 것 없이 예쁜 모습이었다. ‘개자식 눈에 난 이런 모습이었던 거야?’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차미주가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가져오려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서재의 등이 꺼졌다. 그녀의 사진을 그리고 있던 도미노가 밝은 야광을 빛냈고 두 단어가 차미주의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Marry me.놀란 차미주의 심장이 쿵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당장이라도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녀의 코끝이 찡 울렸고 눈가도 뜨겁게 열이 올랐다. 뒤로 물러서던 차미주는 갑자기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 사람은 차미주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그가 차미주의 귓가에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둑아, 나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이 사진은 내가 이틀 동안 겨우 맞춘 거야. 더 로맨틱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 짜증나는 인간들 때문 내 계획을 전부 망쳤어.”긴장으로 몸이 바짝 굳은 차미주가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계획?”한성우가 씩 웃었다. “프러포즈 계획.”말하며 서재의 등을 켠 한성우는 차미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너랑 연애하는 건 나에겐 굉장히 기쁜 일이었어. 하지만 난 현 상황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한성우는 테이블 위에 놓은 박스를 열어 차미주 앞으로 가져갔다. “너 주려고 52개 샀어. 하루에 하나씩 바꿔 착용해도 한 달 동안은 겹치지 않아.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금은방에서 다시 제작하면 그만이야. 수공비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차미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뭐 해파라도 돼? 온 몸에 손밖에 없어서 52개를 착용하게?”‘로맨틱은 개뿔! 대체 뇌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내가 어쩌다 저런 놈을 좋아해서는.’한성우가 차미주를 끌어안으며 바짝 달라붙었다. “전혀 감동적이지 않아? 네가 반지 52개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다들부러워 죽으려고 할걸?”차미주가 발버둥 치며 말했다. “나 때문에 웃겨 죽으려고 하는 거겠지! 프러포즈하면서 반지를 몇 십 개씩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미친 거야? 그럼 결혼식은 어느 반지로 하는데? 1분에 한 번 바꿔 착용할까?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한성우가 잔꾀를 부리며 말했다. “결혼할 때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착용하는 거야. 그러면 목걸이 값도 아낄 수 있어.”차미주는 어이 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입을 벌려 한성우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한성우가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차미주의 엉덩이를 받들어 자신의 허리에 앉히듯 안아 올렸다. 그는 차미주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꼬리뼈는 다 나았어?”차미주가 물고 있던 한성우의 어깨는 놓아주며 이를 악물었다. “화나서 안 나을 것도 다 나았겠어.”말하는 순간 한성우 목에 있는 빨간 자국이 차미주의 눈에 띄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목에 그거 뭐야?”차미주가 손을 뻗어 자국을 비비자 그녀의 손가락이 빨갛게 물들고 목에 있던 흔적이 옅어졌다. “너 뭐 바른 거야?”한성우가 말했다. “네 립스틱으로 키스마크 그려봤어. 비슷하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 “너 미친 거 아냐? 그걸 왜 그려? 그걸 보면서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거야?”한성우가 쯧, 혀를 찼다. “내가 이걸 안 그렸으면 그 두 밉상이
한성우의 말에 차미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옷을 벗으며 부끄러움이 몰려오자 차미주는 불을 끄라고 했다. 긴장한 것은 차미주뿐만이 아니었다. 한성우도 마찬가지였다. 차미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긴장했고 한성우는 혹여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긴장하고 있었다. 차미주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졌다. 분위기를 잡으려 애쓰는 한성우에게 차미주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전에 너 생일 때, 우리 둘이 호텔에 있었던 날 말이야. 너 그날 일 하나도 기억 안 나?”간지러운 손길로 차미주의 몸을 만지던 한성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 안 나.”차미주는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때, 그때 피가 엄청 많이 났었잖아.”한성우는 말 없이 행동을 이어갔다. 그의 손이 은밀한 곳에 닿자 터져 나올 뻔 한 소리를 입술을 깨물며 삼킨 차미주가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피드에서 봤는데, 너무 세게만 안 하면 처음이라고 꼭 피가 나는 건 아니래. 넌 대체 얼마나 심하게 했기에 내가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린 거야.”한성우는 움찔 손을 떨었다. 하마터면 집중이 완전히 깨질 뻔했다. 고개를 든 그는 어둠 속에서 차미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기야, 할 말이 없을 땐 그저 입 닫고 가만히 있어줄래?”차미주가 불쌍한 말투로 말했다. “입 닫고 네 숨소리를 들으면 더 긴장된단 말이야.”한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계속 말해.”입을 달싹인 차미주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언제 들어와?”“...”한성우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의 입술에 입 맞추어 세상도 놀랠 말을 삼키도록 했다. 십분 후. 욕설이 섞인 여자의 비명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왔다. “제기랄! 안 아프다며!”그리고 곧 억누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 역시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맞았어. 자기, 힘 좀 빼봐.”“힘을 빼긴 뭘 빼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 분 세심하신 분이라며? 세심한 사람이 뜨거운 물이 너한테 튀게 해?”원망 섞인 강한서의 말투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그리곤 곧 미소 지으며 그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기댔다. “그렇게 심각한 거 아냐. 왜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그래? 평소엔 직원이 실수해도 너그럽게 봐줬잖아.”“이게 안 심각해? 종아리가 다 데었어야 심각하다고 할 거야?”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젊은 사람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했잖아. 일처리도 깔끔하고 손도 빠르고.”“기사님은 그저 노안인 것뿐이야. 전에 면접 보러 온 다른 운전기사가 나에게 손을 대려고 하는 걸 기사님께서 앞장서서 막아주셨어. 난 기사님 반응속도가 꽤 빠르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운전 경력도 많으시잖아. 집에 와이프와 아이가 아픈 데도 버리지 않은 걸 보면 꽤 책임감 있는 사람 같아. 기회라는 건 늘 젊은 사람에게만 줄 순 없잖아. 너희 회사도 지금 연령 제한 높였잖아.”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핑계 찾지 마. 그건 그냥 동정심이 넘쳐나는 거고 빚지기도 싫어서 그러는 거야.”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 식구 중 장애인이 두 명이야. 다들 힘들게 살잖아. 내가 기사님에 대해 특별한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해보라고 하는 거지. 게다가 입사한지도 며칠 되지 않았고 말도 적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을 컵이 깨져 좀 데었다고 자를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이 알면 내가 너무 인정머리 없다고 할 거야.”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주변에 네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네가 네 생각을 고집하듯이 나에게도 내 마음이 놓일 수 있는 보장이 필요해. 운전기사를 안 바꿔도 돼. 하지만 너에게 개인 비서 한 명 붙여주려고 해.”한현진이 경악했다. “개인 비서? 아주머니도 따로 개인 비서는 없으신데 고작 부 대표인 내가 개인 비서까지 데리고 다니는 건 너무 오버 아냐?”강한서가 말했
한현진이 어두워진 얼굴로 강한서를 몇 번이나 노려보았다. ‘어쩐지 쉽게 잘생긴 남자 비서를 붙여준다, 했어. 날 놀리려는 못된 심보를 품고 있었던 거야.’원율은 비록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말은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그는 연예계의 일과 연예인 개인 비서의 업무, 그리고 한현진의 필모에 대해 척척 대답했다. 강한서가 미리 가르친 것이 분명했다. 꽤 약삭빠른 청년이었다. 송병천과 서해금이 도착하는 날엔 한현진과 송민준이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공항엔 사람이 많아 한현진은 차 옆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송변천과 서해금이 나오는 방향을 지켜보았다. 곧 선글라스를 낀 송병천이 커다란 캐리어 두개를 끌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송병천의 뒤를 따르는 서해금은 미니 캐리어에 비싼 가방을 들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차려 입은 모습이 옛사진 속 한아름의 곁에 서있던 수수한 옷차림에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현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빠, 여기요!”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 송병천은 인파 속에서도 정확이 딸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성큼성큼 한현진에게로 걸어갔다. 앞으로 다가간 한현진이 송병천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 오셨어요? 여행은 즐거우셨어요?”송병천이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즐거웠어. 아빠는 모든 걸 거의 다 체험했어. 나중에 네가 가면 내가 가이드해 줄 수 도 있어.”한현진이 손을 뻗어 송병천의 캐리어를 가져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전 아빠와 아주머니께서 지루하셨을까 봐 걱정이었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며칠 더 추가한 건데.”그 말에 서해금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추가는 무슨. 애초부터 9박 10일의 패키지를 예약하고는 그들에게 5박 6일이라고 속인 거잖아. 비행기가 착륙하고 체크인까지 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서해금은 불쾌한 기분을 꾹 참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병천은 한현진이 아닌 송민준에게
사실 한현진은 서해금이 홍혜림과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젯밤 잠 들기 직전에 양시은이 전화를 걸어와 그 소식을 전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큰 고객을 잃었으니 서해금은 당연히 이대로 가만히 앉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홍혜림의 지인이기도 한 채지윤에게 부탁해 홍혜림과 약속시간을 잡았다. 채지윤은 홍혜림의 절친한 친구였고 그녀의 큰딸은 양시은 명의의 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뤘었다. 마당발에 사업 수완이 좋은 양시은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혼식장으로 꾸며주어 채지윤은 친구들 사이에서 한껏 콧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 뒤로 손자의 돌잔치, 회사 워크숍, 집안 어르신 생신 연회 등 중요한 모임은 줄줄이 양시은에게 부탁했고 그렇게 채지윤과 양시은은 점차 가까워졌다. 서해금은 채지윤을 통해 홍혜림에게 연락했다. 만약 직접 채지윤에게 연락한다면 그녀는 아마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채지윤은 지인을 통해 자신의 막내 아들과 송가람의 소개팅을 주선한 적이 있었지만 서해금에게 거절 당했다. 물론 서해금이 직접적으로 거절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요즘 세월엔 아이들 뜻이 중요하니 함부로 결정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만약 서해금의 말이 진심이라면 채지윤도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도 지나지 않아 서해금은 송가람과 강씨 가문 장손의 맞선을 주선했다. 채지윤은 마음 속 불만을 꾹 참았다. 그녀는 줄곧 서해금이 심씨 가문을 송씨 가문에는 가당치도 않은 집안이라며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채지윤의 아들은 배알도 없이 아무리 많은 여자를 소개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송가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했다. 두 사람은 해외 유학시절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채지윤의 아들이 오랫동안 송가람을 따라다녔지만 결국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 못했다. 송가람은 그와 연애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좋은 우정을 이어갔다. 식사 모임, 심지어 파티에 참석할 때도 늘 심원을 초대했다. 송가람이 귀국한 뒤에야 심원과의 사이가 점차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